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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080627a디모데전서2장8절a
녹취 : 서경수
광주 강의(08. 6. 27) 38-1
디모데전서 2장입니다. 사도바울이 갑자기 예수님, 중보자 이야기를 하다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4절) 지난 시간에 이 구절 설명해 드렸지요?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뭐냐? 구원 받아야 된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 하나님 압니다.’ 이러면 안 되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분이란 말은, 우리는 구원 받아야 되고 만약 구원 안 받으면 하나님한테 혼난다는 의미가 있지요. 하나님이 누구를 보냈다? 중보자를 보냈잖아요.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보냈다는 말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까? ‘너 구원 받아야 돼. 구원 안 받으면 넌 저주야!’ 이런 의미가 되는 거지요.
이 도표를 생각하면서 사도바울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말을 한 겁니다. ‘중보자가 떴다. 구원자가 떴다.’ 이 말은, 구원자를 구원자로 못 알아보면 그 사람은 구원 못 받는다는 뜻이고,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차라리 구원자가 안 오면, ‘하나님이 만든 인간은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책임져 주시겠지’ 하면서 그냥 살면 되는데, 갑자가 구원자가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존재를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이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누구를 보내셨는가?’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지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영광스러운 분이고 ---’ 이런 것은 별 문제가 안 돼요.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누가 왔다는 말은, 우리에게 ‘너희는 구원 되어야 돼.’ 라는 뜻으로 오셨고, 구원 안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구원자를 알고, 예수님을 알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열정이 없으면 신앙이 없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죠.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구원 받았는데 나는 변화를 못 느꼈다.’ 이러면 그 사람은 수상한 사람이란 말이죠.
물에 빠져서 물살에 휩쓸려 내려갈 때 ‘아, 인생 이렇게 끝나는구나. 이제 죽었다.’ 라고 했는데, 누군가가 갈고리로 건져 주었을 때 그것이 구원 혹은 구출 아닙니까. 죽음에 있었는데 누가 건져주니까 삶의 영역으로 이동했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라고 한다면 그것이 이상하잖아요.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을 건져 주었으면 적어도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라도 해야 되는데, 그런 것도 없이 ‘내가 무슨 일 있었나?’ 이렇게 되기는 정말 힘들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이야기는 아주 엉뚱해 보이는 말씀이 나옵니다. 뭐냐 하면, 8절에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라는 이야기부터 해서, 9절에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이런 아주 사소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가 쭉 나온단 말이지요.
이건 한마디로 해서 뭐냐 하면, “구원 받았습니까?” “예.” “그렇다면 변화가 일어나야겠지요?” 그런 뜻이란 말입니다.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이 말은, 땋은 머리는 미장원에서 풀라는 그런 변화가 아니고, 어쨌든 그 당시 문화의 입장에서는 뭔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화’라는 말을 좀 설명해 보겠습니다. ‘문화’라는 것이 굉장히 추상적인데, 실제 내용이 뭔가 하면 ‘의, 식, 주’가 문화입니다. 옷 입는 것, 먹는 것, 주거하는 것이 문화입니다. 의, 식, 주 빼놓고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문화를 만들자는 그런 것은 없어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 식, 주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문화라는 영역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은 문화생활이라고 하면 극장에 가고, 뮤지컬 관람하고 이런 것을 생각하는데, 그것은 문화가 아니에요. 문화라는 것은 의, 식, 주를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드러나는 삶의 양식입니다. 보통 각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다. 시대마다 문화가 다르다. 시간적으로 문화가 달라지고 공간적으로 문화가 달라져요. 산이 있다든지 강이 있어서 이쪽 마을과 저쪽 마을이 나눠져 있으면 사는 스타일이 달라요. 그러면 ‘서로 문화가 다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으로 돌아가서, 여기 본문에는 안 나옵니다만 고린도전서에 보면 나오는데, 여자가 머리를 기르든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머리에 뭔가를 덮어 쓰서 ‘천사가 정해준 그 질서에 나는 순종합니다.’ 라는 표시를 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성당에 들어갈 때는 머리에 흰 수건을 쓰지요.
‘왜 복음을 이야기하다가 문화를 이야기합니까?’ 라고 하는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구원자 이야기를 하면서 그 뒷부분에 문화가 바뀌는 이야기를 합니다. 본문을 찾아봅시다. 9절에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리고 11절에 보면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여자가 남자한테 복종하면 구원 받습니까? 아니죠. 그게 아니고, 아까 물에 떠내려가는 이야기했잖아요. 구원을 받았으면 뭔가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는데 그 변화는 자기가 자기에게 내려주는 변화는 절대로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어려워요.
변화된다고 하니까 스스로 자기가 바뀌기 위해서 파마한 머리를 풀어 생머리하고 돌아다니고 이런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변화가 일어난 그 변화의 모델, 변화의 그 기준마저도 구원자가 갖고 있던 그 속성이 그대로 흘러서 문화스타일 속에 그대로 흡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바뀐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여자는 머리에 뭔가 쓰고 다니고, 결혼할 때 패물하면 안 되고 이런 식으로 해야 성경대로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문화와 구원을 구분해서 문화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이게 스타일의 변화가 일어난단 말이지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변화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변화하면 구원 받은 것입니까?’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뭔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 어디까지?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다르지요. 그것은 각 개인마다 다 달라요. 어쨌든 달라진다는 겁니다. 안 달라지는 것이 더 어려워요. ‘나는 이제 예수 믿는다. 나는 구원 받았다.’ 라고 해놓고 전혀 안 달라진다는 것은 더 힘들어요.
친구와의 술 모임에 덜 가게 되고, 사치 부리는 것도 좀 덜하게 되고, 다른 모임보다 성경공부에 더 관심 갖게 되고, 교회 나오려고 애를 쓰고, 뭔가 달라지게 돼 있어요. 구원이 없을 때는 직장에 가서 상사에게 늘 아부하다가 구원 받고난 후에는 상사 말에 틀린 것은 틀렸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때 상사가 어떻게 느끼겠습니다.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지? 이놈이 뭘 믿고 이렇게 나오나?’ 이런 식으로 달라집니다.
세상 사람들 관점에서는 ‘이 녀석이 많이 컸네.’ 라고 하겠지만 큰 것이 아니고 기본을 알게 된 거죠. 인간의 기본. 그 사람들은 크는 것 밖에 모르지만, 크는 게 목적이지만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 근본을 아는 것, 모든 것이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 인간의 기본이 뭐며 사람이 어디서 나왔으며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기본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이것을 두 자로 ‘진리’라고 합니다.
진리가 중요합니까, 직장이 중요합니까? 직장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면 됩니다. 직장 그만둘 필요 없어요. 변하면 돼요. 변화라고 하니까 꼭 때려치우고 성경 읽는 것을 변화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삶의 스타일이 바뀌는 것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많이 컸네.’ 이렇게 나오지만 자기는 기본과 근본에 가깝게 변하는 것입니다.
여기 기본과 근본을 가지고 ‘지혜’라고 합니다. 이번 여름수련회에 할 것인데, 지혜를 모아놓은 것이 잠언입니다. 지혜는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이 지혜가 변화를 일으켜요. 수련회 때 할 것인데 지금 하면 안 되는데 --
세상 지혜는 자기가 알아서 자기가 실천으로 옮기려 해요. 그러니까 자기가 지혜를 마음대로 요리하는 것이 세상 지혜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지혜는 지혜가 나를 덮쳐요. 그래서 잠언은 지킬 것이 없어요. 지혜가 우리를 그대로 이끄십니다.
잠언을 알아야 어떤 식으로 우리를 이끄는가를 알게 돼요. ‘어떻게 이끄는지 알 필요 뭐 있나. 그냥 이끄시는 대로 가면 되지.’ 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내 욕망이 나를 이끄는지 지혜가 이끄는지 분별하는 것은 지혜가 있어야 판정할 수 있습니다. 자기 욕망대로 해 놓고는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했다고 우길 수가 있어요.
잠언을 보면서, 성경을 보면서 변화를 하는데, 변화는 성령이 없는 사람도 늘 변화합니다. 여러분, 죄가 어디서 나오지요? 욕심에서 나오지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해서 사망을 낳는데, 문제는 어디까지가 욕심이고 어디까지가 욕심이 아니고 하는 것을 어떻게 정합니까? 이것까지는 욕심 아니고 이것부터는 욕심이라는 것을 누가 정하며, 어떻게 정합니까? 정답은 ‘정하지 마세요.’
왜 그러냐 하면, 성경에 의하면 살려고 하는 자체가 죄에요. 우리는 죽어가고 있으면서, 방향이 죽음 쪽인데 그 방향을 반대로 살려고 한다는 자체가 욕심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서 어디까지가 욕심이냐고 따질 것도 없이 우리는 매일같이 살고자 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우리 몸에 200조의 세포가 살려고 난리를 치고 우리 DNA가 살려고 난리를 치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살고자 하는 것들의 뭉치가 우리 인간이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슬그머니 빠져나오세요. 내가 내 몸에게 ‘네 마음대로 해라.’ 하고 빠져나오면 돼요. 이론상으로는 쉽지요.
사람에게 200조의 세포가 있어요. 여러분이 손톱을 깎으면 손톱이 또 자라나지요. 손톱이 자라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손톱 세포가 살려고 설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깎아도 또 자라나요. 달리 말해서 손톱 세포에 의하면 그들은 발톱 세포와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살아야 됩니다.
너무 어렵게 들어왔는데, 이왕 어렵게 한 것 더 나가봅시다. 새가 공중을 납니다. 공중이 새를 날게 한 것입니까, 새가 공중을 나는 겁니까? 또 씨가 자란다. 자라나는 능력이 씨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시 바깥에 있습니까? 이것을 철학에서는 해결을 못 합니다. 장(field)과 개체가 교류를 한다고 해요. 이것이 생물학에서도 적용이 되고.
보통 연세 많은 할머니들이 남편을 보면서 ‘아이구 저 영감 빨리 안 죽나.’ 해요. 그러나 그 영감이 죽고 난 뒤에는 외로워서 못 살겠다고 해요. 결국 그분은 남편이 함께 있을 때, 자기는 남편 없으면 편히 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배우자가 죽고 난 뒤에는 외로워요. 왜? 잔소리를 해도, 그 잔소리 할 대상 때문에 내가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허전하지 않고 내가 잔소리할 위인이 있다는 것에 내가 위로가 되고.
말썽꾸러기가 말썽 안 부리면 참 심심할 거예요. 이것을 동양철학, 노자철학에서는 ‘비어있는 것이 그냥 비어있는 것이 아니고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비어있다.’고 해요. 동양에서의 무(無) 개념을 어떤 목사들은 창세기까지 끌고 옵니다. 창세기에서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꽉 찰 것이란 것을 내다보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까 무는 혼자의 개념이 아니고 유를 내다본 무고, 무는 유가 있으면 무고 유는 무 있으면 유다.
굉장히 심오해 보이지요? 이 문제의 해결책은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동양철학, 서양철학을 공부 많이 하면서도 정작 해답(진리)을 몰라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너와 나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있는 것은 누구를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해야 될 속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속성을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 했는데, 공의와 사랑입니다.
공의와 사랑을 위해서, 공의를 위해서는 지옥이 있고 사랑을 위해서는 천국이 있다. 지난 시간에도 했지요? 이 속성을 위하여 구세주가 떴어요. 이 구세주는 우리의 근본입니다. 구원자가 달랑 우리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근본이에요. 구원자 앞에서 우리는 “나는 어떻게 살지?” 이런 말 할 필요 없어요. 그런 소리 하기 전부터 이미 그분 덕분에 살아 왔었어요.
다만 우리는 내가 누구 덕분에 사는 지 근본을 몰랐었는데,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므로 말미암아 ‘아하, 피 흘리신 그분이 나를 만들었고 나는 그분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고, 내 안에 그분이 있게 되는 그런 사람이구나.’를 알게 됩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스타일입니다. 스타일이 구원해 주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스타일을 따져보고 생각해 보는 이유는 그 스타일이 뭔가 어떤 계기로 해서 변한다는 겁니다. 그 변할 때 어떻게 변하는가 하면 바로 근본으로 변해야 돼요.
여름 수련회에서 강의할 것이 지혜입니다. 근본이 지혜 쪽으로 움직일 때 그 변화, 이 변화가 그 사람은 이미 구원 받았다는 것을 단정할 수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잠언 1장 8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뒤에 구원 받은 기쁨으로 마음의 자유를 얻고 살면, 다른 사람들은 ‘야, 너 많이 컸다.’ 하고 빈정대지요. “전에는 나한테 꼼짝도 못하고 빌빌거리더니 이제 겁도 없이 막 나오네.” 하지요. 많이 큰 게 아니고 근본을 향하여 달려가는 중입니다.
동양화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보름달을 아주 크게 그려놓고 기러기 떼가 날아가지요. 마치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러기 떼가 달을 향해 날아가는 것 같지요. 여기서 기러기는 성도고 큰 달은 예수 그리스도에요. 달을 향해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화 스타일이 바뀔 수밖에 없지요. 뭐가 문화라고 했습니까? 의, 식, 주를 말합니다. 문화라고 하니까 뮤지컬 보고, 영화 보고, 스포츠 관람하고 그런 것을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의, 식, 주입니다. 의, 식, 주인데 오늘 본문에서 바로 의복에 대해서 거론하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
쉽게 말해서 눈에 보이는 것이 뭔가 달라진다는 것은 그 사람 통째로 근본을 향하여, 자기 구원자를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그런 존재구나 하는 것을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궁금한 것이, 어떻게 달라졌을 때 구원 받은 자의 달라짐이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이 해답은 제가 아까 말했어요. 뭐라고 했는고 하면, 뭘 향하여 가는 거예요. 지금 내가 어느 정도 달라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계속 달라지는데,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까지 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디를 향하여 간다는 겁니다.
6. 25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터졌을 때 피난을 가는데, 간난 애기 있는 사람들은 빨리 못 가더라. 그런데 애기 없는 가족들은 빨리 이동하더라. 여기서 누가 더 빨리 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느 쪽으로 가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지요.
‘예수 믿고 사람이 달라져야지.’ 라고 할 때, 목표가 술 끊고 담배 끊고 그것이 아니고, 간난 애기 있는 식구들은 한 아이는 업고 한 아니는 손을 잡고 가는데, 문제는 그 방향이 남쪽(부산 쪽)이지 북쪽(평양 쪽)은 아니란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제 말을 오해해서 예수 믿고 난 뒤에 개판으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제 말은 막 살아도 좋은데 ‘그 막 사는 방향이 어딥니까?’ 물어보면 자기 욕망대로 삽니다. 아까 했지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 그쪽으로 가면 안 되고 방향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쪽으로 달려가고 있느냔 말이지요. 빨리 가느냐? 늦게 가느냐? 그것은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술 못 끊었나?’ 이런 것이 문제가 아니고, 지금 방향이 어느 쪽이냔 말이지요.
제가 걱정하는 것은 빨리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너무 빨리 가서 예수님 계신 곳을 지나가 버린 사람들. 이런 사람들도 많아요. 예수님을 지나가 버리니까 자기는 졸지에 의인이 되 버렸어요.
여기서 다시 한 번 봅시다.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는 그 문제. 이것을 하려면 두 가지를 알아야 돼요. 달라지기 전과 달라진 후 그 양쪽이 차이가 나야 되지요. 성경에서는 이 둘을 다 이야기해 줍니다.
전(前)부터 이야기해 보면, 디모데전서 2장 8절을 봅시다.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했고, 그 다음에 “다툼”이죠. 그리고 여자들은 9절에 “땋은 머리” 요새 같으면 ‘파마’
제가 스타일이 달라진다고 했지요. 땋은 머리는 나쁜 것이고 생머리는 좋은 것이라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문화라 하는 것은 공간적, 시간적으로 달라지니까 그 당시로 보면 땋은 머리가 전이고, 그 다음에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 그 다음에 ‘남편을 가르치고, 남편을 주관하는 것’ 이게 달라지기 전이란 말입니다.
슬슬 걱정 됩니까? 달라지기 전이라고 하니까. 그 당시의 스타일입니다. 이 말에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그 당시의 스타일이에요. 그 당시 농경 시대의 스타일입니다. 의, 식, 주에요.
문화는 의, 식, 주입니다. 인간은 200조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포는 각자 살려고 해요. 그리니까 의, 식, 주라는 것은 밥 먹고 살자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어떤 질서가 필요한데 가족 간의 질서 사회에서의 질서가 있겠지요. 그 질서는 무엇을 위한 질서입니까? 살기 위한 질서입니다.
여자가 왜 남편에게 복종해야 됩니까? 그게 당시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도움이 돼요. 그것은 옮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선(善)이란 개념이 옳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동양철학에서 선이란 개념은 ‘잘 했다.’는 개념이에요. 소매치기 무리들이 소매치기에 성공하면 뭐라고 합니까? ‘잘 했다.’고 하지요. 그것을 선이라고 합니다. 그 소매치기를 잡을 때 경찰관 내에서 뭐라고 합니까? ‘잘 했다.’고 하지요. 그것을 선이라고 해요. 선이라는 것은 옳다는 개념이 아니고 진리 개념이 아니고 내 사는데 도움 되었다는 것을 선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이 이런 글을 남겼어요. 50대 여자 분인데, ‘나는 직접 서울광장 촛불 집회에 갔었다. 그런데 거기에 민노당 여자 국회의원이 경찰차에 갇혔는데 그 여자를 보니까 그 사람은 정신 파탄자 같더라. 온갖 욕설을 다 하고 경찰들을 때리고 발악을 하는데 이것은 인간으로 보기 힘들고 짐승을 가둬도 저렇게 짐승다울 수가 없었다.’ 라는 글을 썼어요.
민노당 국회의원이 왜 거기에 갑니까? 잘 해보려고 하잖아요. 초등학교 학생들이 숙제를 하면 선생님이 어떤 도장을 찍어줍니까? ‘참 잘 했어요.’
왜 사람은 옳다는 것은 선으로 삼을 수 없고 ‘잘 했어요.’를 선으로 여기는가 하면, 그 옳은 것이 만약 나를 해롭게 했을 경우에 과연 내가 그것을 ‘나에게는 해롭지만 참 잘 했습니다.’라고 할 자가 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있습니까? 인간 치고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어야 하나님도 좋은 하나님이에요. 나에게 유익을 줘야 좋은 하나님이란 그것 팔아서 크게 된 교회가 ‘순복음’ 교회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이랍니다. 이것이 우리 동양의 심성과 맞아 떨어진 거예요. 뭐가 순 복음이냐? 뭐가 순 진리고 진, 선, 미냐? 나한테 이익 되면 좋은 거예요. good이에요. 순복음 교회가 우리 한국교회에 진면목을 드러낸 겁니다.
유다서 15절 중간부터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여기 보세요.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인데, 이들을 저주하기 위해서 심판 날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왜 신에게 원망합니까? 왜 신에게 불만을 토합니까? 정욕이 그렇게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원망할 수밖에 없도록. 그러니 옳다는 것, 진리라는 것, 선이라는 것이 누구를 위한 선이냐 하면 자기 좋으라는 선이고 진리에요. 이것이 구원 받기 전의 스타일이잖아요.
그러면 여기 구원 받기 전의 스타일이 우리는 구원 받기 전입니다. 라고 말은 하지만 전, 후를 떼고 그냥 나둬 버리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하고 싶어 그렇게 했겠어요?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지.” 살다보니 그렇게 된 거예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책에 나오지요. 사람이 왜 사느냐? 누가 떠미니까 밀려가는 거예요. 인생이란 것은 떠미는 대로 밀려가면서 사는 거예요. ‘나는 고쳐야지. 인간 되어야지.’ 안 돼요. 새가 스스로 날아갑니까, 공중이 있어서 날아갑니까? 그 이야기에요.
토지 때문에 씨가 자랍니까, 씨 때문에 토지를 뚫고 곡식이 자랍니까? 그 잠복된 능력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기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엄마의 태아 때문에 자라느냐, 아니면 태아 자체의 능력 때문에 태아가 자라는가 하는 그 문제. 이게 중세 때 큰 논쟁거리였습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영혼이 태아 몇 개월째 들어가는가 하는 그 문제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현재 의학에서는 22주 지나면 23주가 되어서 태어 몸무게가 500g 이상 되어야 살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23주에 500g 아슬아슬하지요. 그 정도만 되면 인큐베이터에 넣어서 잘 키우면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과학적으로 그렇게 되니까 법률적으로 과학이 따라가니까 인간은 언제부터 인간인가? 23주부터 인간이다. 왜? 살 가능성이 있을 때라야 인간이라고 인정할 수 있으니까. 그러면 또 성경에 보면, 신명기 어디에 나오지요? 임신한 여자를 쳤을 때 살인죄냐 상해죄냐 하는 문제. 배를 차서 뱃속의 아기가 죽었을 때 그것이 상해죄에 해당되는가 아니면 살인죄인가? 성경은 상해죄라고 합니다. 아기 죽은 것은 안 쳐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 태아에 있을 때 둘 다 서로 알아보고 춤추고 난리가 났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찾아 왔을 때. 과연 그것이 사람이냐 아니냐는 굉장히 복잡한 문제가 됩니다.
딱 꼬집어서 이렇게 되어야 된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고,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변화되는 과정, 그것도 어떤 방향을 향해 변화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주관했다고 할 때 이런 것을 나쁘다고 따지고 화내지 말고, 여기서부터 뭔가 달라지는 것, 분노하는 것이 분노가 덜하고, 분노하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안다든지 뭔가 변화의 표징이 있어야 돼요. 이것이 바로 구원 받았다는 뜻이에요.
물속에 빠져 죽어야 될 인간을 물에서 건져놓으니까 뭔가 마음에 감동이 오던지 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뭔가 구원 받은 티가 나는 것 아닙니까. 그 티가 나는 것, 그것이 삶의 문화, 의식주 스타일로 나타나야 된다. 그런데 그 스타일의 세계에는 어찌했던 살아야 한다. 이것을 기초해서 거기에서 진리를 이야기하고, 선을 이야기하고 삶의 모든 것을 다 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구원 받기 전이었단 말이지요.
그러면 구원 받은 후는 ‘네가 살려고 안 해도 너는 이미 살았잖아.’ 누구 때문에? 예수님. 구원자 때문에. 그렇다면 이미 나는 살았다고 여길 때 너는 어떤 스타일을 보여줄 거냔 말이지요. 죽어도 살았다는 그 여유만만. 그 여유만만이 너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보란 말입니다. 아시겠죠?
구원 받기 전에 여자가 남자를 주관했다. 왜 주관하느냐? 잔소리 안 하면 설거지 하나도 깨끗하게 못 하더라. 이렇게 나옵니다. 제 아내가 말하기를. 제 아내의 말에 일리가 있지요. 설거지를 깨끗이 못하게 되면 그릇에 밥풀이 묻어 있을 것이고, 밥풀이 묻어 있으면 곰팡이가 생길 것이고, 곰팡이가 생기면 가족의 건강을 해치니까 잔소리를 해야 된다고요.
그러면 나는 또 핑계를 대지요. 설거지 할 동안에 설거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생각한다. 설거지하면서 설거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그릇 상태가 다 보이지만 나는 빨리 해치우고 은혜 받은 말씀 잊기 전에 빨리 메모를 해 놓아야 하니까 자연적으로 설거지는 소홀할 수밖에 없지요.
자, 그럴 때 구원 받았다고 했을 때, 그러면 아내가 남편 설거지에 잔소리 안 합니까? 계속 해요. 하더라도 전에는 설거지에 밥풀 묻는 것이 생사를 논하는 중차대한 문제였는데, 구원 받은 기쁨이 있고난 뒤에는 최고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고 그 다음문제에 해당되지요. 제일 중요한 것은 구원 받은 것이고 그 다음은 설거지 깨끗이 하는 것으로.
이것을 좀 더 확대해서 생각해 보면, ‘목사님, 남편이 바람을 피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성도님 구원 받았습니까?’ 라고 물어야 될 이유가, 구원 받기 전이라면 그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가 뭐냐 하면, 남편과 헤어질 것이냐 말 것이냐가 제일 중차대한 문제였는데, ‘당신 구원 받았습니까?’ 라고 묻는 것은, 당신의 이혼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없다? 있다는 점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뭐 이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지요.
이혼 하든 말든 간에 그렇게 당당하고 여유롭게. 할 때는 하고 안 할 때는 안 하더라도 뭔가 챙길 것은 다 챙겼다는, 구원 받았다는 그 여유만만한 배부름으로 모든 문제를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변화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전에는 남편들이 분노하고 다투고 했는데, 후에는 어떻게 한다?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고’ 분노가 기도로 바뀝니다. 옛날에는 기도해도 분노와 다툼으로 기도했는데 이제는 분노와 다툼이 아닌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게 되지요.
그러면 기도할 때 꼭 손을 들어야 됩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당시의 기도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논리적으로 나중에 알 것을 미리 알아야 한다고 닦달하지 마세요. [일지매]나 [주몽] 드라마 보면서 ‘저 쪼다 같은 인간들. 택배로 보내면 될 것을 나귀에 싣고 가나?’ 그 당시에는 택배가 없었잖아요. 택배가 없으니까 나귀에 싣고 가는 거예요.
삼국지를 보면서 ‘기관총을 쏘면 다 죽을 것인데 화살을 왜 쏘나?’ 글쎄 그 당시에는 자동 소총이 없었어요. 그 당시에는 화살에 불붙이는 것이 최고였어요.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한다.’고 하니까, 남자들은 반드시 손들고 기도해야 된다고 해요. 문화가 달라요. 여자들이 성당에 들어갈 때 머리에 수건을 쓰지요. 이게 그 당시 스타일인 것을 모르고 하는 짓입니다. 지금 머리에 왜 씁니까?
신부들은 제사장 복장을 한다고 흰 옷을 입고. 요새 제사장이 왜 필요합니까? 그리고 특별한 복장이 왜 필요합니까? 그러면 런닝 입어도 됩니까? 그것은 예의에 어긋나지요. 지금은 지금의 스타일로 하면 됩니다. 앞으로 100년 후에 런닝 입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가 오면 그 때는 런닝 입고 활동하면 되고.
스타일이란 말은 그대로 하자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 스타일 안에 들어 있죠. 그 스타일 안에 어디서 어디까지 가느냐 하는 그 변화의 조짐. 그 변화의 조짐이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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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080627b디모데전서2장15절b
광주 강의(08. 6. 27) 38-2
두 번째 시간은 좀 난해한대, 그 난해한 구절부터 먼저 읽어드리겠습니다. 2장 15절에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 구원 문제가 나오고, 앞에 ‘해산’이란 말이 나옵니다. ‘아기 낳는 것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다.’ 이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앞에 뭔가 알아야 이 문제가 풀립니다. 수녀들 있지요. 그리고 노처녀들. 또 결혼은 했는데 아기를 못 낳는 여자들. 이들의 경우에는 구원 못 받습니까?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 받는다고 했는데.
이런 어려운 구절이 있기 때문에 제가 앞에서 뜸을 드린 거예요. 차이점을 분명히 하시라고. 변화한다는 것. 그리니까 구원 받기 전에 아기 낳았을 때는 그냥 아기 낳는 것이 아기 낳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원 받고 난 뒤에는 아기 낳는 것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정보가 포함된 채 내가 아기를 낳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아니까 그 여인은 아기 낳으면서 구원 받았음을 확인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결혼 안 하고 아기 안 낳아도 그 내용을 성경을 통해서 안다면, 또는 다른 여자들이 아기 낳는 것을 통해서 구원의 의미를 되새긴다면 그 사람도 구원 받은 여자입니다. 자기는 아기를 못 낳아봤지만, 다른 여자들이 아기 낳는 것을 보면서, 구원 받기 전에는 단순히 ‘아기가 태어나는구나.’ 생각했었는데 구원 받고 난 후에는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보면서 ‘저런 식으로 구원이 형성되는 구나!’를 보게 되는 겁니다.
이런 말 한 마디에 사도바울의 신학 전체가 농축되어 있는 겁니다. 따라서 모르고 넘어갈 수는 없지요. 알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디모데전서 2장 11-14절을 보겠습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종용히’는 ‘조용히’와 같은 뜻입니다.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남자, 여자 중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어야 하는가?’ 하는 그 문제를 ‘남자가 쥐어야 한다. 아니다. 여자가 쥐어야 한다.’ 단지 남자, 여자 둘만 고려한다면 이는 구원 받기 전의 사고방식입니다. ‘누가 주도권을 쥐어야 할 것인가?’ 하는 그 문제를, 남자냐 여자냐가 아니라 이걸 구원자 아래,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기능을 파 해쳐보면 그 안에 남자, 여자가 서로 주도권을 쥐려는 이런 싸움을 종결시킵니다.
남자들아, 이 말씀을 이용해서 여자를 누르지 말라는 것이지요. 다만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이 남자라는 것을 인식하라는 말이지요. 왜 구세주가 남자입니까? 왜 여자는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이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옵니다.
11장 3절에 보면,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이것을 도표로 그려보겠습니다. 제가 물음을 던졌습니다. 왜 메시야가 여자가 아니고 남자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이제 풀어야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7절에 보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보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지요. 그러면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안 되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 받기 전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남자요, 여자이기 때문에 누가 주도권을 쥐는가를 자기들 끼리 알아서 해결하려고 해요. 그런데 여기에 구원자가 개입을 하면 남자, 여자 둘 다 어디를 쳐다보는가 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자를 쳐다봐요.
그러면 그 구원자 속에 뭐가 담겨 있는가 하면, 고린도전서 11장이 담겨 있고, 디모데전서 2장이 담겨 있어요. 구원의 질서, 구원의 방식, 구원의 원칙과 본질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탁 쪼개서 어떻게 구원 하는가를 보는 거예요.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은 관심이 없겠지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밑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밑에 남자 있고, 남자 밑에 여자가 있지요. 이 질서는 어떤 계통, 어떤 흐름을 보여주는 거예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어떤 흐름이냐는 것은, 남자가 여자와 비교해 볼 때(다른 사람과의 비교 말고. 하나님이나 예수님과의 비교 말고) 남자가 여자와 비교해 볼 때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지요?
그렇다면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지요. 사람은 남자, 여자 둘 다를 포함하지요. 하나님의 형상은 따로 있어요. 신약에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고,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 쪽에 계신 분(하나님, 예수님 다 포함되지요). 우리 사람 쪽은 아니지요. 사람 쪽은 아니고 사람 위쪽에, 하나님 쪽에 계신 분들은 전부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래쪽 인간을 만든 거예요.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가 뭔가?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여기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내막을 보여주기 위해서 남자가 태어나야 했고, 여자가 필요했단 말입니다.
구원 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것을 신경도 안 쓰다가 구원 받고 난 뒤에는 달라져요. 구원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누가 왔지요. 하나님 쪽에서 어떤 분이 오셨다는 것은 ‘너 구원 받아야 해! 구원 안 받으면 안 돼’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뭔지를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신을 아는데요.” 신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에 의해서 오신 분, 구원자를 알아야 돼요. 구원자를 알게 되면 우리는 어디에 빠져 들어가는가 하면 이 질서 속에 빠져 들어가요. 그 질서를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2절에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이 나오지요? 하나님의 질서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질서가 어떻게 형상 되느냐?
아까 제가 ‘메시야는 왜 남자여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설명하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 쪽은 하나님 형상이고 이쪽은 하나님 형상대로 만든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 피조물을 만든 이유는 하나님 형상의 본질을 담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담기게 하는데, 남자, 여자를 분리시켜 놓고 남자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간주하고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져야 될 마지막 결과물, 결실 이게 영광이에요. 하나님의 형상께서 무슨 일을 했는데 그 일이 ‘아이고 만족스럽다.’ 하고 손 털고 ‘야, 이것은 내 영광이야!’ 영광이 무슨 뜻입니까? ‘야, 그놈 참 잘 빠졌네.’ 자기의 모든 노동과 열정을 다 퍼부어서 생긴 그 무엇 아닙니까.
논리가 어렵기 때문에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좀 쉽게 따라올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신부로 만들었어요. 예수님은 신랑입니다. 남자, 여자 만들어 놓고 예수님이 자기가 만든 피조물 이미지를 사용해요. 자기 옷을 벗어버리고 자기가 만든 이미지의 옷을 입어요. 그러면 예수님은 무슨 이미지가 됩니까? 신랑 이미지. 그리고 구원 받은 우리는 무슨 이미지? 신부. 아내 이미지. 호세아에 나오지요. ‘나는 네 남편이 되고--’
남편이란 말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남자 옆에는 여자가 있지만, 그 남자가 남편이 되면 그 여자는 아내가 됩니다. 남자, 여자를 괜히 만든 것이 아니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서 부부가 되는 것이 공연한 것이 아니고 구원 받고 난 뒤에는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을 드러내기 위한 도화지로 사용하는 겁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 된다는 것은, 이것은 남자가 여자를 주관하라는 말이 아니고, 남자의 역할은 ‘내 위에 뭐 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자야!” “왜 남자야!” “내 위에 누가 있거든. 그런데 너 위에는 그분이 바로 이어지지는 안거든.” 이 말입니다.
예수님 밑에 남자, 남자 밑에 여자가 있는데, 여자 위에 남자가 있는 이유는 남자가 여자보다 더 높다는 것이 아니고, 남자가 뭔가 여자에게 보여 줄 것이 있어요. 너가 내 밑에 있는 것처럼 나도 누구 밑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서 남자는 남자의 구실을 다 하는 거예요. 비아그라 먹는다고 남자 구실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위에 누가 있다는 것이지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에요. 그리스도는 누가 보낸 자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누가입니까? 하나님. 하나님을 모르면 남자, 여자 저희 둘끼리 다툼이 일어나요. 그러나 구원을 받고 난 뒤에는 위에 있는 질서, 하나님이 예수님 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냈다는 그 질서가 그 질서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이 지상에 남자, 여자에 까지 확산돼요.
구원 받고 난 뒤에는, ‘아하 남자라는 것이 남자 나를 위한 남자가 아니고 누군가를 보여주는 남자구나.’ 또 여자는 ‘아하 여자는 그냥 여자가 아니라 누구를 보여줘야 될 임무를 띠고 이 땅에 여자로 태어났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남자, 여자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뭐냐 하면, 남자는 형상 노릇 하고 여자는 영광 노릇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결국 너희들을 영광스럽게 만든다는 이 구원의 스토리를 우리 둘이 만나서, 만날 때마다 확인하는 거예요.
왜 구원자가 남자여야 하는가 하면,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주를 다스려야 될 그 임무를 남자로 태어난 메시야가 이 남자를 대표해서 모든 것을 다 이루는 거예요.
이 점을 보충하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11장 8절을 봅시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이게 말이 됩니까?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래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답니다. 이게 언제 적 이야기입니까? 이것은 창세기 2장에서 단 한번 있은 이야기지요.
단 한번인데 그 한번을 지나간 한번으로 보지 않고 계속되는 한번으로 규정하겠다는 거예요. 여자가 남자를 만든 것이 아니고 남자가 여자를 만들었다는 그 원리를 창세기 2장 그 때 그 시절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인데, 그 말은 하나님의 뜻을 남자, 여자 속에 계속 남겨 두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난 너희들 포기 안 했다.’ 이 말이거든요. 너희들이 남자,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너희들에게 하나님의 속성이 들이닥친다는 말입니다.
9절에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것도 창세기 2장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지요?
10-11절에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절에 보면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이 말은 창세기 이후에 모든 인간이 예수 믿든 안 믿든 다 인정하지요. 남자 어디서 태어납니까? 엄마, 여자가 낳아야지요. 남자에게는 자궁이 없어요. 왜 남자는 아기를 못 낳는가? 자궁이 없기에. 없다는 것은 없어도 괜찮기 때문에. 한 번 낳은 것으로 계속 낳기 때문에. 무슨 말인가 하면, 처음에 남자가 여자를 낳았잖아요. 남자가 낳은 여자가 백날 남자 낳아봤자 그 여자는 누가 낳았습니까? 남자가 낳았으니까 남자가 계속해서 여자의 머리역할을 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 역할을 해야 되는 겁니다.
형상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형상이 만든 결과물, 영광이 나중에 있어요. 남자가 우선이라는 것은 힘이 세서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할 때 형상으로 창조했고 형상은 반드시 영광을 회수한다는 그 법칙을 남자, 여자한테 적용시키다 보니까 남자가 먼저고 여자가 나중이기 때문에 먼저난 자에게는 형상이라는 속성이 돌아가야 되고, 나중 된 여자한테는 영광이란 것이 맡겨져야 되고. 그래야 짝을 이루어서 형상이 영광 만든다, 형상이 알아서 영광되게 한다는 그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 작업을 누가 하느냐 하면 여자가 남자를 낳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다. 여자가 남자를 낳음으로 말미암아 남자로 하여금 여자를 자기 소유로 만들지 못하게 해요. 그러면 여자는 누구 소유입니까? 하나님 소유죠. 둘 다 피조물이다 이 말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때문에 네가 있는 것도 아니고 둘 다 하나님을 위해서 있다 이 말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낳음으로서, 이미 앞서서 남자가 여자를 낳았잖아요. 하나님 형상 아닙니까. 그 형상은 뭔가 앞으로 형상되시는 분으로 일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일을 하는 것이 영광을 위하여 할 때 보람이 있거든요. 영광을 위하여 할 때는 하나님께서 여자가 남자를 낳는데 거기에 뛰어들어요. 그러니까 메시야는 여자가 낳아요.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까 악마가 달려들잖아요. 창세기 3장 15절에 그 메시야가 남자의 후손입니까, 여자의 후손입니까? 여자의 후손입니다. 남자 없이 태어나요. 여자가 남자를 낳아요. 딸이 아니고 아들을 낳는다고. 이것은 창세기에 맞춰서 하기 때문에 메시야조차도 창세기의 원리 속에 들어와서 여자로부터 태어난단 말이지요.
메시야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니까 사람들이 마리아를 섬기는데 웃기는 이야기에요. 마리아를 섬기면 안 돼요. 주님을 섬겨야지요. 마리아가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마리아와 일반 여인은 똑같습니다. 특별난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마리아가 예수님 어머니라면 모든 여성은 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어야 해요. 한 사람을 너무 특혜주면 안 돼요. 같이 가야 돼요.
한 번 정리해 봅시다. 구원 받기 전에는 문화 스타일은 무엇을 위해 있다고 했습니까? 살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 시대의 질서를 따르는데, 질서를 따르다보면 노동은 남자가 합니다. 남자가 힘을 많이 쓰게 되어 있습니다. 자식을 낳으면 아버지 성을 따르고 이것이 부계 사회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누구를 낳고? 이삭을 낳고.
아브라함은 자궁이 없는데 어떻게 이삭을 낳아요?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낳았지. 아내가 낳아도 그것은 아브라함이 낳은 것으로 친다. 정철의 시조에도 있지요.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 저는 초등학교 때 너무너무 이상했어요. 어떻게 아버지가 날 낳았느냔 말이지요.
막상 내가 자식을 낳아 보니까 느끼는 건데, 어떤 혼혈 가수가 부른 노래인데 [부모]라는 노래가 있어요. ‘부모가 되면 알리라.’ 뭐 그런 가사가 있는데, 저는 부모가 되어서 알았어요. 뭐냐 하면, 부모가 키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 [부모] 유주용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에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 --------------------------------------------------------------------
아이는 자기가 알아서 커요. “‘가’하면 ‘예’ 하시기 바랍니다.” 동의하지요. 안 그렇습니까? 아이는 스스로 큽니다. 밥 줘서 키우는 것이 아니고 지가 밥 달라고 해요. 갓난아기 때는 울잖아요. 우니까 젖 주지요. 안 울고 있으면 젖 안 줘요. 그 아이에게 세포가 있는데 200조 세포가 살려고 난리를 치니까 살 수밖에 없지요.
성경에서는 누가 키웁니까?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눅12:24) 구원 받기 전에는 누가 해산해요? 지 자식 지가 해산 하는 거예요. 그러나 구원 받은 후, 고린도전서 11장을 아는 사람은 여자가 아들을 해산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식이 아니고 남자의 자식이 됩니다. 낳기는 자기가 낳아도 자기는 남자의 밑에 있기 때문에 남자의 자식을 낳는 거예요.
내가 낳으면서도 내 자식이 안 되는 그것을 통해서 ‘아하, 구원은 이런 식으로 되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아니까 ‘해산함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 이야기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의해서 맞아요.
이사야 54장 1절에 보면 ‘잉태치 못한 자여 기뻐하라.’ 고 하고, 그 다음에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고 했어요.
잉태치 못하고 생산치 못하는 그것이 노래할 거리가 됩니까? 여자가 시집가서 아기 못 낳으면 그것은 하나님께 저주 받은 흔적이었어요. 사무엘상 1장에 보면 한나가 아기를 못 낳았지요. 그러니까 그것은 누가 봐도 하나님께 저주받은 겁니다.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추장을 찾아가지요. 아브라함의 예쁜 누이동생을 아내 삼으려고 할 때, 하나님의 벌을 받아서 아비멜렉 모든 가문에 대가 다 끊겼어요.
옛날에 지도자의 집에 대가 끊기면 신이 내린 지도자가 아니라는 그런 풍습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못 낳는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이 기도를 해 주니까 태가 열려서 자식을 낳게 되었거든요.
그때부터 자식 낳는 것은 누구의 소관이다? 하나님의 소관이지 인간 소관은 아니에요. 인간 소관 맞는데 이게 구원의 입장에서, 구원 받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현실로 주어진단 말이지요. 아기 못 낳았다고 지옥 간다고 생각하지는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잉태치 못한 자가 왜 노래를 해야 되느냔 말이지요. 우리로 하여금 잉태치 못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구원, 우리가 복 받는 것에 대해서 우리 자신을 무능자로 밀어붙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계속 무능자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에요. 그래서 제가 수요일 설교하면서 이사야 54장은 반드시 53장을 거쳐야 됩니다. 53장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사야 53장에서 말하는 것은 우리를 어디로 몰아넣습니까? ‘구원자 떴다. 고맙네.’ 이것이 아니고, ‘구원자 떴다. 우리는 졸지에 죄인 되었다.’ 결국 빛이 떴다는 것은 우리는 어둠이라는 것이 밝혀져요. ‘구원자 떴다.’가 그분은 의인이고 우리는 죄인이 됩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어요.
죄인이 뭐냐 하면, 죄인은 기뻐할 필요도 없고, 노래할 필요도 없고, 잉태할 필요도 없고, 그냥 죄인으로 죽으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54장에서 ‘너희는 죄인인데 너를 위해서 내가 대신 희생을 함으로 말미암아 분명히 너는 잉태치 못한 자요 자식 없이 저주 받을 놈인데 노래하고 기뻐해라. 잉태치 못한 너희를 위해서 내가 잉태케 했다.’는 것입니다.
잉태케 하는데 이것이 53장에 보면 ‘고난’으로 된다. 십자가 고난으로 잉태한다. 그러니까 십자가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무능자라는 것을 알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제가 지난 주일 오전 설교 끝부분에 뭐라고 했는가 하면, ‘십자가는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우리가 처음부터 죄인인 채로 살기 위해서 십자가 졌다.’ 십자가의 의미가 뭐냐? 우리는 죄인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을,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야 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인으로 태어난 게 우리의 팔자인데 구태여 의인 되려고 하는 것이 우스운 거예요. 우리 팔자가 죄인인 팔자에요. 우리가 죄인 되어야 주님의 의가 빛나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죄 지을 필요 없어요. 죄 안 지어도 그냥 죄인이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것이 맞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조직신학이나 기존의 칼빈주의에서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씨앗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졌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 속에 어떤 일부가, 형상의 일부가 들어온다는 뜻이 아니고, 99% 죄 지었지만 1%는 형상이 들어온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는 통째로 죄인 되어야 될 이유가 하나님께서 통째로 하나님 형상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해서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형상대로 만들어진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그것이 로마서 8장 29절에 보면,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아요.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원형은 이미 정해졌어요. 우리는 그 맏아들 예수님을 본받게 되는데,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말이 뭐냐? 영광스럽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다. 남자가 애쓰고 수고한 모든 것이 여자에게 돌아간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수고한 모든 것이 누구한테 돌아온다? 신부인 우리에게 돌아온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고 했어요. 이것은 마치 주님이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처럼 하라는 말입니다. 아무도 안 바칩니다.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도 안 바칩니다. 우리는 잉태치 못한 자이기 때문에 말씀을 잉태할 능력이 없어요. 우리는 분명히 못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노래하고 즐거워하고 찬양해야 된다. 왜? 우리는 못하지만 주께서 우리를 가지고 그렇게 해 내신단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노래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여자가 남자의 영광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여자를 학대하는 것은 ‘나는 인간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온 정성과 노력을 바쳐서 만든 작품이 바로 여자인데 자기 작품을 자기가 때린다는 말은 나는 너와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갈라서야지요. 왜 갈라서야 하는가 하면, 형상이 아닌 것과 붙어있으면 영광이 안 돼요. 반드시 영광이란 것은 형상이 있어야 영광되거든요.
이제 디모데전서로 돌아옵시다. 이제 해석이 되겠지요. 2장 11절에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누구한테 순종하란 말입니까? 남자에게 순종하는데, 여기서 남자의 정의는 뭐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정의고, 순종할 때 뭘 기대한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얻어질 영광이기 때문에, 영광이라는 그 희망, 영광이 된다는 그 자부심으로 즐거이 순종하지요.
즐거이 순종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순종하고, 어떤 때는 순종 안 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일절(一切), 모든 면에 있어서 항상 순종할 태세가 되어 있지요. 이런 여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도록 하십니다. 뭘 통해서? 남자가 형상으로 변하는 그 순간 순종하게 하십니다.
남자는 안 변하는데 여자 혼자 변하는 경우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짝을 이루어야 하니까. 형상과 영광이 짝을 이뤄야 하니까. 형상이 형상 안 되는데 영광만 영광 되는 법은 없어요. 왜냐하면 형상이 형상 될 때 영광이 생산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남자가 술 처먹고 와서 “다시는 안 그럴 게. 미안해 여보. 북어국 끓여 줘.” 이렇게 나올 때 일절 순종하면서 북어국 끓여 줍니다. 왜? 회개했잖아요. 그 때 그렇게 북어국 끓여줄 때 자기 자랑하지 마시고 주께서 역사하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불신자와 산다는 것은 항상 이혼할 수 있는 대비태세다. 이렇게 봅니다. 그래서 불신자가 이혼하자고 하면 거절하지 말고 이혼해 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혼하지 않고 그냥 교회도 안 다니면서 붙어살거든 행여 나로 인하여 구원될 수 있을까 해서 갈라서지 말고 같이 살라고 고린도전서에 나옵니다.
그것을 보면 얼마나 배짱이신지 예수님이. 배짱이 셀 수밖에 없지요. 구원자가 와서 구원했는데 그보다 더 큰 배짱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구원 받기 전에는 원칙이 이미 구원 받았다가 아니고 어찌했든 살아남기 위해서 힘 있는 남자, 돈 되는 남자에게 무조건 붙어 있어야 밥이라도 얻어먹고 사니까 술 취해 개판을 치든 구박을 하든 붙어 사는 거예요. 왜? 여자 혼자 사는 것이 힘드니까. 그 당시에는 여자가 밥벌이를 한다는 것은 몸 파는 짓 외에는 할 것이 없었어요.
여자가 왜 이렇게 약한가 하면, 육체가 약해서 약한 것도 있지만 옛날 문화스타일이 여자에게 정보를 취득할 수 있는 능력, 학교를 안 보냈어요. 신명기에 보면 모든 말씀을 남자에게, 아들에게 가르쳐 줘요. 사람이 힘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무식하면 고개 숙이고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옛날 부부들 사는 것 보면 남편이 아내에게 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어요. ‘이 무식한 것!’ 뭘 가르쳐 줄 때 그냥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꼭 한 마디 하고 가르쳐 줘요.
요즘은 달라져서 아내가 퇴근하면 “이제 오십니까?” 하고 인사하고 그렇게 하지요. 왜냐하면 여자 없으면 못 살기 때문에. 월급도 여자가 더 많고, 집에서 살림을 살아도 남자보다 여자가 더 잘 하고. 아내가 하는 일을 사람 써서 해 보세요. 돈이 얼마나 드는지. 그래서 여자를 상전으로 모시지요.
시장에 가면 전부 여자가 장사를 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남자가 장사하면 손님이 안 와요. 인상도 험악해서 ‘살거요, 말거요?’ 하는 식으로 나오면 누가 그 가게에 가겠어요. 애살을 가지고 손님 붙드는 것도 여자가 붙들지 남자는 그렇게 안 해요. 개 코도 아무것도 없으면서 배짱을 부려서 손님 다 떠나가요. 남자는 조용히 뒷방에서 있는 듯 없는 듯이 있다가 혹시 불량배가 오면 막아주고 그 외에는 숨어 있어야 해요. 그래야 장사가 돼요. 새벽에 물건이나 해주고. 시장 바닥은 다 그렇습니다.
구원 받기 전에는 항상 살아야 되기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먹고 살면 그것이 진리고, 선도 나에게 이익이 되면 그것이 선이에요. 진리고 뭐고 없어요. 내가 잘되면 그것이 선이고 진리입니다.
그러나 구원 받고 난 뒤에는 하나님께서 이제 이미 구원 받았잖아. 누구 때문에? 남자 때문에. 무슨 남자? 남자의 머리되시는 남자 때문에. 누굽니까? 예수님. 예수님께 이미 구원 받았기에 우리는 몽땅 그 남자(메시아)의 신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일절 순종함으로, 이미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예수님께 순종하는 신부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 순종합시다.’ 라는 것을 어떤 역할을 통해서? 남자, 여자의 역할을 통해서 가정 내에서 그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께 순종합시다.’ 라고 하면서 남자, 여자가 같이 사는 거예요. 이것은 구원 받은 입장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걸 모르고 ‘남편 없는 사람 구원 못 받겠네. 애기 없는 사람 구원 못 받겠네.’ 그런 식으로 하지 말란 말입니다.
이것은 이미 구원 받은 자의 입장에서 구원의 원리가 담겨 있는 겁니다. 아기 낳는다고 다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메시아를 아는 사람은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는 이러한 원리로 너희가 구원 받았다는 것을 말씀대로 가르쳐 주는 이런 일들이 있다 이 말입니다.
계속해서 디모데전서 2장을 봅시다. 12-14절에 “여자는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옛날 선배들의 부부싸움 한 것을 가지고 도대체 몇 만 년을 우려먹습니까? 아니 우리가 싸웠습니까? 우리가 꾀임에 빠진 거예요? 옛날 우리 조상이 한 거잖아요.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부부싸움 한 것 때문에 우리가 왜 영향을 받아야 합니까?
이것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참 재미있고, 어렵지요?
원래 하나님의 뜻이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원래 누구한테 이야기 했느냐 하면 아담에게 먼저 이야기를 했답니다. 창세기 3장에는 안 나타나는데 디모데전서에 보니까 아담이 가르쳤데요. 그런데 하와가 혼자 있을 때 뱀의 유혹을 받아 가르침을 위반했다는 겁니다. 이 원리가 그대로 우리에게 이어져서 부부는 될 수 있는 대로 떨어져 살지 말고 합방해라. 떨어져 자면 사탄의 시험에 빠질 수 있다는 대목이 있어요. 고린도전서에 나오지요?
자, 그러면 신혼부부들은 같이 자요. 그런데 아기 낳고 난 뒤에 그 아기가 새벽 2시, 3시 되면 울어요. 남편은 잠을 자고 직장에 출근해야 일을 할 수 있는데, 그 때는 편의상 남편 잠을 재우기 위해서 다른 방에 자도록 하고 엄마는 아기와 같이 자요. 이게 하루 이틀 계속 되면 습관이 돼서 이제 따로 자는 것이 편해요. 남자만 편하게 아니에요. 여자도 편해요. 여기에서 더 편하면 곤란한 일이 생겨요. 더 편해지면 외롭잖아요. 그러면 남편은 이상한 생각을 해요. 마찬가지로 아내도 맞바람을 피우는 수가 있어요.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무식한 남자라도 그에게 배우라는 말이 아니고 가르침이 중요해요. 뭘 가르치느냐? 어떤 경우라도 가르침을 떠나서는 안 된다. 무슨 가르침? 복음의 가르침. 복음이 그 가정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사람 다 복음이 아닐 경우에는 복음도 아닌 것을 가지고 여자가 나설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이 뭐예요? 옛날 옛날이 어떤 여자가 남편의 가르침대로 안 하고 엉뚱하게 뱀의 말을 듣고 죄를 범했다는 그 가르침의 내용을 가르치면서, 같이 보면서 자기가 가르치겠다고 하는 것은 복음의 내용과 안 맞단 말이지요.
같이 복음을 알 경우에는 ‘우리 옛날처럼 당신도 제대로 한 번 가르쳐 봐’ 이렇게 될 수 있는데, 만약에 남자가 모르고 여자가 알면 어떻게 돼요? 여자가 가르쳐야지요. 중요한 것은 누가 가르치냐가 아니고 뭘 가르치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지금 그것을 이야기해요. ‘남자들아, 너희들은 가르치고 여자들은 듣기만 해라.’ 이것이 아니고, 그 뒤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남자가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라.’고 했지요.
여러분!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지요? 어떤 집에 군대 이야기를 여자가 더 많이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 여자는 하사관 출신이고 남자는 방위 출신이에요. TV에서 군대 이야기가 나오니까 여자가 군대 이야기 할 수 있단 말이지요. 왜? 여자지만 제대로 된 군 생활을 했고, 남자는 군 복무를 도시락 챙겨서 출퇴근했거든요. 그러니까 남자는 군대에 대해 잘 몰라요. 동사무소에서 방위로 근무했기 때문에 군 내무반 생활을 안 해 봐서 몰라요. 이런 경우에는 군에 대해서 누가 가르쳐야 돼요? 아는 사람이 가르쳐야지요.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이 경우는 일단 둘 다 안다고 치고, 둘 다 성도일 경우에는 남자한테 가르치는 권한을 양보하라는 말이지요. 왜? 둘 다 아니까. 결국 이것은 남자가 ‘엄매, 기 살아!’ 가 아니고, 복음의 내용대로 남자가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이 부담을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대목을 사실은 못 본 것으로 슬쩍 넘기고 싶은 사람은 여자 쪽이 아니고 남자 쪽입니다. “나는 디모데전서 모른다.” 이렇게. 왜? 가르친다는 말은 결국, 여자는 유혹에 빠졌잖아요. 그러면 가르치는 자는 유혹에 안 빠져야 한다는 부담을 갖게 된단 말이지요. 이 말은 곧 여자는 유혹에 빠지더라도 용서가 되고 남자는 유혹에 빠지면 안 된다는 말이고, 더 나아가서 남자는 여자로 하여금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남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렇게 하고야 마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그냥 생긴 것이 아니고 다 뜻이 있어서, 뜻이 따라와서,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덮쳐서 우리가 구원 된 줄 알았습니다. 생활에 변화가 있게 하시고, 그 변화를 주도하시는 분이 예수님인 것을 우리가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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