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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딤전 2:5, 흠모할 모양 없는 중보자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디모데전서

딤전 2:5, 흠모할 모양 없는 중보자

정인순 2010. 12. 29. 18:41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8광주/광주080523a디모데전서2장5절a.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8광주/광주080523b디모데전서2장5절b.mp3

 

 

 

광주080523a디모데전서2장5절a

광주 강의(08. 5. 23) 37-1 

강사: 이근호 

녹취 : 서경수  08-06-09

오늘은 디모데전서 2장부터 보겠습니다.
3-4절에 보면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구절이 있고, 여기 4절 한 문장만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고 되어 있어요.

여기에서 ‘모든’은 누구를 이야기하는 것이냐? 그 앞에 있는 구절을 보면 이 ‘모든’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사람이든지 차별 없이 하나님의 진리를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든 차별의 장벽은 하나님 앞에 안 통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구원 받기 힘들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진리를 알면 구원 받습니다. 가난은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고 좀 살기 불편한 것뿐입니다. 그게 약간 문제여서 그렇지 구원 받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진리를 알면 구원 받습니다. 그 진리가 뭔가 하는 것은 뒤(5절)에 나옵니다. 중보자지요. ‘나 예수 빼놓고는 진리 없다. 내 빼놓고는 생명을 이야기하지 마라. 내 빼놓고는 구원 받는 길은 없다.’ 그런 뜻에서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면 구원에 이릅니다. 그런데 그 진리가 뭐냐? 바로 중보자입니다. 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니” 이것이 진리예요.

이렇게 되니까 이 말이 사람들한테는 상당히 상처가 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곧 진리요” 이렇게 되니까 다른 사람은 진리가 아닌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독불장군이 되지요. ‘예수 당신만 진리이고 우리는 다 엉터리란 말인가?’ 하고 분노하면서 예수님을 죽이지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잡혀 죽은 이유가 뭐냐? 너무 잘난 척해서 죽었어요. 잘난 척해서. 가만히 있으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괜히 나서서 “내가 길이거든. 내가 진리거든. 내가 생명이거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다른 말로하면, ‘나를 모르고 천당 갈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건방진 발언입니까? 얼마나 도발적이고 과격하고 그야말로 자기밖에 모르는 아주 독선적인 발언이지요.

그래서 이사야 5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흠모할 만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요소가 전혀 없어요. ‘나는 저분 본받아야지.’ 이런 게 예수님한테는 없습니다. ‘나는 저분처럼 살아야지.’ 하는 것도 예수님한테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보고서는 ‘흥’ 하고 다 외면해 버리고, ‘잘났다. 너 혼자 똑똑하네. 잘 먹고 잘 살아라.’ 전부 다 외면해 버렸지요.

인품이 곱다든지 성격이 좋다든지 두루두루 잘 사귄다든지 이런 것이 있으면 좋을 텐데 예수님이 하는 말이나 행동 그 모든 것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게 전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내용을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은 뭐가 없다? 부러워할 만한 게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나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다.” 이렇게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니 이 말이 앞뒤가 안 맞지요. 모든 사람이 좋아할 것 같으면 예수님 말씀이 옳은데, 예수님을 아무도 안 좋아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안 좋아하는 그분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누구든지 예수를 좋아하면 구원 받는다.” 이렇게 나오니까, 결국 구원 받는 것은 사람의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지요.

사람은 끌리는 맛이 있어야 됩니다. 흠모할 것이 있고 뭔가 매력이 있어야 쉽게 다가가서 ‘믿겠습니다. 당신 말씀을 신뢰합니다.’ 이렇게 될 것인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싫어하는 그러한 양상으로 오셔서는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진리를 알면 구원 받는다.” 이런 이야기를 하시니 결국은 어떤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상당히 역설적이죠.

그렇다면 성경에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할 때 그 ‘모든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특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아까 잠시 뉴스를 보니까 광주의 어떤 과장님이 사람을 체용하면서 뇌물을 받고 특혜를 준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그 과장이 체용공고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사람은 이 체용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있다.’ 해놓고는 뒤에서는 돈 거래 했잖아요. 이게 모순되잖아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해놓고는, 뒤에서는 특혜를 입은 사람만 그 ‘모든’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이 ‘모든’이란 말을 이렇게 바꿔야 해요. “하나님은 아무나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목사 당신은 성경에서 ‘모든’이란 말을 했는데, ‘아무나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라고. 당신이 함부로 하나님 말씀을 겁 없이 그렇게 바꿀래? 당신이 그렇게 말씀을 바꿀 위치나 자격이 있나? 이렇게 따질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이 ‘모든’이란 단어가 어디에 쓰여졌는가를 돌아보게 되면 제 말이 맞아요. 한 번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17장 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여기에서 ‘모든’은 어떤 자입니까? 자기가 알아서 예수님 좋아서 나온 사람이 아니죠. 아버지가 뽑아서 아들에게 붙여준 그런 ‘모든’ 사람이죠. 그러니 제 말이 맞잖아요.

그 다음 요한복음 12장 32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여기서도 예수님이 원하는 ‘모든’ 사람은 어떤 장애나 방해에 관계없이 예수님이 이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이 너무 중요하기에 나중에 한 번 더 설명할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중보자가 되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들과 같은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중보자는 똑같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것이 중보자잖아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똑같은 남자로 봤어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중보자의 위치가 어디입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위치해야 중보자 아닙니까.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는 똑같은 사람인줄 알았어요.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고 난 뒤에는 예수님이 자기 자리에 갔지요. 예수님의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중보자의 자리지요. 중간에 있으면서 어떻게 한다?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이끄시는 일을 하실 때, ‘아, 예수님 중보자 맞구나! 나는 보통 남자인줄 알았는데 중보자 맞구나.’ 라고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라는 말은, 바로 예수님께서 선택해서 당겨주는 그런 사람이죠.

그 다음 누가복음 20장 38절 봅시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야말로 ‘모든’이 아니죠. 뭐 빼놓고? 죽은 자 빼놓고 예수님 때문에 산 그 모든 사람이 다 살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모든’은 그야말로 예수 믿는 저희들끼리의 ‘모든’입니다. 일단 예수 믿었습니까? 그러면 이 ‘모든’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예수 안 믿어요. 그러면 이 ‘모든’에서 제외된 사람입니다.

그 다음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기에서 ‘다 내게로 오라’고 했는데, 27절을 보세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라고 할 때, ‘아, 나는 예수님께 가야 돼.’ 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서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한테는 어떤 사람이라도 내가 나가라고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저희들끼리의 ‘모든’이죠.

그 다음 요한복음 1장 7절. 이런 구절은 잘 적어놓아야 됩니다. 관주에 이런 구절이 없어요.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빛에 속한 사람들 저희끼리의 ‘모든’이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어둠에 속한 사람은 빛을 미워해서 오지를 않거든요. 안 오려고 하는 사람은 가고, 예수 믿는 모든 사람한테는 예수님이 증거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치고 예수 모르는 사람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사도행전 2장 39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아버지께서 불러주는 ‘모든 사람’은 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구절이지요.

제가 결국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사람’이라는 말은, 인간의 어떤 신분의 장벽이라든지 인종의 차별 그런 것 개의치 않고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불러내면 모든 장벽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은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누구의 숙제입니까? 중보자의 과제입니다.

그 다음 로마서 11장 14절 봅시다.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다가 아니고 일부를 구원합니다. 분명히 나오지요.

로마서 15장 11절.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송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여기 ‘모든’이 두 번 나오지요. 여기 ‘모든’ 다음에 뭐가 붙었습니까? ‘백성’이 나오지요.

자, 이제부터 어떻게 중보자가 이런 일을 하는지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성경을 찾았는데, 성경 찾기는 딱딱해요. 재미가 없어. 역시 재미는 그림이 동원돼야 해요.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옛날 구약 때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은 누가 잉태합니까? 모든 인간은 아버지, 엄마가 잉태하지요. 그런데 구약 아브라함 때보면 희한한 일이 벌어지죠. 아버지, 엄마 없이 임신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름이 누구죠? 이삭. 이삭을 가지고 하나님은 약속의 자식이라고 부릅니다.

약속의 자식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지상에 남기기 위해서 생겨나야만 하는 인간이 약속의 자식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약속의 자식이란 것은 ‘나 구원 받았다.’ 이 자랑하라고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니고, 약속을 이 땅에 남겨두기 위해서 태어나야만 하는 사람이 바로 약속의 자식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위주가 아니고 약속이 위주가 되는 거예요. 디자이너가 옷을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모델을 선택하지요. 모델은 누구를 위해 있는 것입니까? 모델은 모델 자신이 돋보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옷을 디자인 한 디자이너의 옷을 빛내기 위해서 모델이 있는 것이지 모델을 자랑하기 위해서 워킹을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슨 옷을 입힌다? 성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히는 것은 예수님 옷 자랑하라고 입힌 것이지 너 잘난 것 자랑하라고 입힌 게 아니에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나옵니다.

우집사님이 옷을 만드신 것은 장롱에 넣어놓으려고 만든 것이 아니고 입고, 이것은 광주의 우집사님이 만든 옷이라고 돌아다니라고 만들었어요. 나는 요새 매일 입어요. 낮에. 그렇게 되면 나는 뭐가 되는가 하면, 바로 우집사님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이제 약속의 자식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사람들이 약속의 자식이라고 하니까 ‘나는 구원 받았다.’ 이것만 자랑해요. 너 구원 받은 그것은 약속의 자손이 아니고, 그것은 모든 인간들은 천당 가고 싶어서 환장했기에 다 그렇고, 약속의 자식이라는 것은 약속이 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생겨나야 하는 탤런트, 하나의 역할을 맡은 것이 약속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이 자식은 부모로 말미암아 태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제가 ‘약속’이라고 글씨를 썼는데, 이렇게 글자로 쓰면 안 되고 점선으로, 그림으로 어떤 인물을 그려내야 됩니다. 약속이라는 글자에 얽매이지 말고, 이 약속은 사실은 어떤 분의 사태, 어떤 분의 이미지 이것을 가지고 약속이라고 합니다.

이삭은 약속을 보여주는 자식인데 그 약속이 뭐냐? 글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장차 오실 어떤 이미지가 하실 일을 이삭이 앞당겨서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이삭이 태어나야 했습니다. 그 이미지는 우리가 알다시피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문이다.” 또 “나는 생명의 떡이다.” 이게 전부 같은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를 거치지 않고는 천당 갈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예수)가 유일한 천국의 문이란 말입니다. 천국이 없는 것이 아니고 있는데 천국이 있어도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는 것을 일러주기 위해서 내가 왔다는 겁니다.

같은 인간인데, 나이도 겨우 30을 조금 넘긴 사람이 이런 말 하니, 여러분생각에 참 건방지다는 생각 안 듭니까? 예수가. 정말 건방지지요. 그래서 당시 신학자들이 소위 뭐라고 한 줄 압니까? “너 얼마나 배웠어? 너 우리보다 똑똑해? 왜 그렇게 잘난 척 하는 거야.” 이렇게 나왔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뭐냐? ‘귀신 들린 자’입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미친 놈’입니다. 또 달리 표현하면 ‘똘아이’지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똘아이 집단’입니다. 이것을 말로만 한 것이 아니고 확실히 규정해서 이들을 잡아 죽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굽니까? 바로 사울이란 사람입니다. 사울이 ‘이 똘아이들!’ 하면서 잡아 죽였는데, 나중에 자기가 똘아이 중의 똘아이가 되고 말았어요. 누구를 만났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왜 핍박하느냐?”라고 다그칠 때, 자신의 한 짓이 미안스럽다거나 죄송하다는 정도의 생각을 뛰어넘어서 ‘나는 살았다. 나는 드디어 진리를 알았고 생명을 알았고 길을 알아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완전히 사람이 달라졌어요.

그래서 인류 역사를 보면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그냥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는 그런 역사. 로마, 그리스 이런 역사가 있는 반면에 또 하나의 역사가 뭐냐?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이 오신다고 소리치는 그런 역사가 있어요. 정말 이것은 희한한 현상입니다. ‘예수님이 곧 오신다. 재림하신다.’ 이것을 주장하는 노선이 따로 있어요. 그것은 바로 사도바울의 노선이고 화평교회의 노선이죠.

자,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이삭이 뭐라고 했습니까? 약속의 자식이죠. 약속의 자식은 뭐라고요?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만 태어나야 하는 거예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그러면 그 약속은 누구라고 했습니까? 장차 오실 어떤 메시아의 이미지. 이것이 바로 약속이죠. 약속의 자식이 현재 몇 명입니까? 이삭 한 명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뭐냐? 이 한 명을 하나의 국가 수준으로 확장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국가 수준으로 확장이 되었지요.

이삭의 아들이 누구죠? 야곱. 야곱의 아들이 몇 명입니까? 12명. 그 12명의 집단이 바로 약속의 자식 개열에 약속의 나라가 되는데, 그게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없는데서 생겨난 자식이 이삭이었듯이, 없는데서 생겨난 나라가 이스라엘이고, 죽은데서 살아난 자가 이삭이듯이, 죽은데서 살아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죽음으로 가잖아요. 어디로? 이스라엘이 죽는 장소가 어디죠? 홍해.

홍해에서 죽잖아요. 이스라엘에 뒤따라 온 애굽 군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몰살했잖아요. 사람이 물고기도 아닌데 바다에 왜 기어들어갑니까? 이것은 죽으러 가는 거지요. 그 많은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 바다 곁으로 그들을 집결시키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겁니까? 그것은 너희들만큼은 죽어도 죽음이 더 이상 너희를 죽이지 못하는 그런 특수한 나라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해 홍해를 통과하게 한 것입니다. 그 통과했다는 증거를 신약에서는 ‘세례’라고 합니다. 죽음이 더 이상 너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너는 죽음조차 이기는 자이다.

그래서 교회를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곳을 교회라고 합니다. 다른 말고 하면, 죽음의 세력이 더 이상 겁주지 못하는 유일한 곳. 그것이 교회지요. 제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면서 죽음조차 이겼잖아요.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들끼리의 ‘모든’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는 어떤 지위 고하나 빈부귀천과 관계없이 모두 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모이게 되지요.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모든’이란 말은 다 같이 약속 때문에 ‘모든’입니다. 여러분들 전부 [비타 500] 한 병씩 드셨습니까? 마셨다고 치고, 그러면 우리들은 전부 공통점이 있습니다. 비타 500을 마셨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그러면 우리는 비타 500의 자식이에요. 우리는 약속의 자식입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우리는 ‘모든’에 포함되는데, 이 ‘모든’은 무슨 ‘모든’이냐 하면,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 여기저기서 모여진, 하나님께서 불러낸 같은 통속들이죠.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이름의 폐쇄성이 확장되는 것이 드디어 신약의 ‘모든’에 해당 된다는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거예요. 신약 성경을 아까 찾아보니까 ‘모든’이라고 해놓고는 하나님께서 불러준 사람들끼리의 ‘모든’이에요. 그러면 도대체 이 원칙이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제가 설명하는 겁니다.

이 원칙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바로 구약에서 홍해를 건넜는데 뒤따라 온 애굽의 군사는 다 죽고 홍해를 통과한 이스라엘, 죽음에서 살았던 그들끼리, 그들 내부의 ‘모든’이 되는 겁니다. 그들은 바로 약속을 보여주기 위한 나라로써 그들이 확장되면서 오늘날 신약시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뭐가 포함되는가 하면, 우리가 이유가 있단 말이지요. 화평교회가 모인게 이유가 있고, 우리가 이 땅에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 가도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이상은 내가 태어나야할 목적이 이미 생겨버린 거예요.

성도가 이 땅에서 사는 이유는 뭔가? 내가 죽어도 안 죽고 없는데서 생겨난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공로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살아 있습니다. 우리 학생은 공부 열심히 해요? 학생들이 공부를 할 때는 목표가 있을 거예요. 나는 장래에 뭐가 되겠다. 그래서 그 목표를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그 때 제가 묻지요. 만약 그 목적이 안 되면 어떻게 하는데? 안되면 죽지요. 아닙니다. 죽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목적을 위해서 산다면 우리가 누구의 볼모가 되느냐 하면, 나의 종이 돼요. 내가 나의 종이 된다고. 사람들이 뭔가 되고 싶다고 하는 것이 남들이 보면 거창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명박씨 목표가 뭡니까? 대통령 되기 아닙니까. 가만 보면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이 이명박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욕망의 노예가 돼요. 이들은 자기밖에 몰라요. 그래서 이00 라는 사람은 자살을 했어요. 왜 자살합니까? 간단하지요. 세상이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살 이유가 없다고 해서 죽은 겁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니 내가 살 이유를 상실했다.’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전부 다 동의하지요. 왜? 태생이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부름 받은 사람 같으면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런 형태는 없어지고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함이라.’ 이 목적을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사세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력으로 안 돼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내가 원해서 태어난 몸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기 약속 때문에 태어난 몸이기 때문에 부득불 우리는 어떻게 하든 천당 갈 수밖에 없는 팔자라는 겁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일을 내가 하면 안돼요. 그 일을 내가 하면 중보자는 있으나 마나입니다. 내가 못하는 일을 중보자가 알아서 다 해 줍니다.

‘하이 -카!’ 교통사고 나면 ‘하이 -카’가 다 알아서 해 줍니다. 우리는 염려 붙들어 매고 보험금만 내면 됩니다. 하늘나라 보험회사에서 오셔서, 중보자가 오셔서 내가 왜 내 마음대로 안 되는가를 알려주고 선한 생명의 길로 가게 하지요. 부름 받은 사람에게는 수시로 하나님의 뜻이 있어 태어났다는 사실, 우리 속에 계시는 분은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을 수시로 알려주는 그 어려운 작업까지 알아서 그분이 다 해 주십니다.

흔히 예수님 일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본받아야 된다고 하면서 그분처럼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알아서 다 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라’는 말씀이 많아요. 이것을 어떻게 한꺼번에 다 지키는가. 그 비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나 예수님 보고 싶어.” 이러면 뭘 하라는 말씀이 다 끝났어요.

사랑하면 됩니다. 예수님 사랑하면 그리워지고, 그리워지면 보고 싶어지지요. 초대교회 교인들이 만나면 ‘주님 보고 싶다.’는 것이 대화 내용이었습니다. 자기 죄를 용서하는 묘약을 먹으니까 이것이 좋아서 세상에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보다는 이 약 자랑하기 위해서 서로 모였단 말이지요. 이게 초대 교회였어요.

예수님 자랑하기 바빴어요. 그리고 그분이 보고 싶어서 ‘속히 오신단다.’ 하면서 서로 위로하고. 핍박 가운데서 서로 권면하면서 “힘내라 힘! 힘내라 힘!” 이렇게 했어요. 이게 초대 교회였습니다.

성경 한 구절 한 구절 다 지키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보고 싶다.’ 이러면 다 지킨 게 돼요. ‘나는 간음 안 했다. 나는 살인 안 했다.’ 이렇게 하나하나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정말 보고 싶다.’ 이러면 이것이 바로 화평과 온유와 자비와 양선 --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집사님이 식당 하시다가 가끔은 ‘아이고, 이것 때려치우고 빨리 주님나라 가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면 그것이 성경 말씀을 혼자 다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 나 못났다. 그렇지만 주님 보고 싶은 걸 어떡해?’

고린도전서에 나오지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지어다. 주께서 곧 임하신다.” 뭐든지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싶은 현상이 일어나야 그게 사랑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혼하고 난 뒤에 남편들이 곧잘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지요. 사랑한다고. 하루 종일 전혀 보고 싶지 않으면서도 립 서비스를 합니다. ‘보고 싶었다. 사랑한다.’

그런데 여자는 안 그래요. 결혼하면 남편이 좋아서 전문직 직장도 그만두고 집안일 하면서 남편 직장에 전화해서 ‘보고 싶다.’고 하고 그래요. 그러다가 3년 지나면 정신 차리고 다시 직장 나가야 우울증 치료 됩니다.

‘사랑’이란 말은 너무 흔해서 이제 식상해요. 고칩시다. ‘보고 싶다.’로. 주님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데 무슨 죄를 짓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이거 지키려고 해 보세요. 절대 못 지킵니다. ‘나는 돈 사랑 안 할 거야. 절대 돈 사랑 안 해.’ 할 때마다 돈이 더 그리워 져요. 그런데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키는가? 돈 신경 쓰지 말고 주님 그리워하면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말씀 지키는 것이 됩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을 다 이루느니라.”

‘베드로야! 너는 날 사랑하느냐?’ 이 한 마디로 끝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사랑해 본 적 있습니까?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경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지요. 인간은 날 때부터 자기밖에 모른다고. 꿈, 희망 전부 자기 좋으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사랑한다.’고 할 때는, 어떤 여자가 남자를 좋아해서 결혼하면 자기가 다니던 직장도 그만둡니다. 왜?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직장 없어도 괜찮아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잘 섬기기 위해서 직장이 걸림돌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단 말이지요.

사랑은 국경이 없다고 하지요. 모든 장벽을 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은 처음에는 이렇게 사랑한다고 빠지지만 얼마 못가서 그것도 시들해지고 또 새로운 사랑을 찾아서 헤매게 됩니다. 남편 사랑해서 직장 그만둔 여자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직장을 구하는 이유가 신선한 것이 사라지니까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찾게 되는 겁니다.

사랑은 자아라는 경계선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모든 것을 이루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정리해 보면, 신약 성경에서 ‘모든’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 100%는 아니고, 그러면 이 ‘모든’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로 구약에 있는 약속의 국가 자기들끼리의 ‘모든’이 확장이 되어서 신약 성경에서의 ‘모든’이 됩니다.

그러면 그 증거가 뭐냐? 구약의 이스라엘에게서 주어졌던 그 약속의 실체가 바로 신약의 중보자 되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끄시면 그 사람만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모든’에 해당되는 겁니다.

여기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중보자가 구원한 집단이 계속 안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배려하신다는 이야기죠.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 중에서 관심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사람 위주로 세상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권력이 강하고 해도 그들도 예수님에게 복종하게 되면 예수 믿는 집단이 한 시대에서 마음껏 복음과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경건 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러한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올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높은 사람이니까 가라! 부자니까 가라!’ 이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구현함에 있어서 어떤 차이나 차별을 둬서는 안 된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이야기한 거죠.

자, 지금까지는 여러분들이 아는 쉬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부터 진짜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에 보면,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은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다. 장성한 사람들만 알아듣는다는 이야기가 히브리서 7장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7장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신앙에 장성한 사람, 어린아이 같은 사람은 이해 못하는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린아이 같은 사람은 모르고, 장성한 사람만 안다고 하니까 더욱 더 우리의 호기심이 자극 되지요? 도대체 어느 정도의 수준이 신앙의 장성한 사람인지 한 번 테스터 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 이야기가 히브리서 7장 이야기인데, 중보자를 설명하려면 히브리서 7장을 반드시 통과해야 됩니다. 10절 보면 이렇게 되어 있지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이 어려운 이야기를 제가 이제 쉽게 풀어갑니다.

‘허리’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어떤 구조 속에서 한 부속품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은 태어나면 자기가 돛대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위주거든요. 그런데 사람이 땅에 있을 때는 자기가 굉장히 강해 보이는데, 땅에서 점점 멀어져 하늘로 올라가서 세상을 보면 자기가 이 세상에서 돛대도 아니고 대단한 인물도 아니고 결국 고만고만한 인간이며, 더 높이 올라가면 결국은 내가 사소한 일에 신경을 썼고 별 것 아닌 것에 골몰했다는 것을 알아요.

아래로 내려가면 거저 눈앞에 보이는 것밖에 모르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싸우지만 산 위에 올라가서 보면 ‘아이고, 그만한 일로 내가 싸웠구나. 아무것도 아닌 시시한 일에 내가 신경을 써서 정신까지 돌겠다. 왜 그런 대수롭지 않을 일로 그렇게 고민을 했던고?’

여러분, 이런 경험 얼마나 많습니까. 단추가 떨어진다든지 머리까락이 흰머리가 나는 이런 것 가지고 염려하고 근심하고. 산 위에 올라가면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누구를 지적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산 위에 올라가면 머리카락 흰 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합니까. 아주 높이 올라가면 사람이 죽고 사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 높이 올라가면 신앙의 장성한 사람이 되겠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7장 이야기는 뭐냐? 어느 정도가 되느냐 하면, ‘아이고, 내가 살고 죽는 것도 별로 중요한 문제 아니네.’ 이정도 되는 사람 같으면 이해되는 말씀이란 것입니다. 뭐가? ‘허리’ 이야기가.

‘허리’라는 말은, 내가 몸통이 아니고 나는 몸통 속에 들어있는 한 부분이란 말이지요. 내가 우주의 전부가 아니고 나는 우주에서 하나의 티끌에 있으면서 우주가 흘러가는 대로 같이 나도 그냥 흘러가고 움직여 나가는 그런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 ‘허리’라는 것입니다. 쉽지요?

‘저 예수 믿으면 구원 받을 수 있어요?’ 이게 뭡니까? 이건 아직도 신앙의 초보지요. ‘나 죽으면 천당 갈 수 있습니까?’ 이것은 자꾸 자기를 겨냥하잖아요. 그런데 신앙의 높은 경지에 들어가면 전체 이스라엘, 전체 구원 받은 집단이 흘러가는데 흘러가는 그 주도를 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고, 내 구원을 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고 주도하는 분은 따로 계시고 나는 그 주도하시는 분에 이끌려 가는 하나의 ‘허리’에 해당된다는 말이지요.

그분이 당기면 당기는 대로 가는데, 도착해 보니 어디입니까? 천국입니다. ‘내가 이것을 지켜야 됩니까? 내가 술을 끊어야 합니까? 뭘 하지 말라야 합니까? 이러면 구원 받습니까?’ 자꾸 내가 뭘 하면, 뭘 안 하면, 매일 같이 생각하는 게 이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면 빛과 소금이 되겠습니까?’ 만날 생각이 이런 것인데, 이것은 자기가 자기 구원의 주인공 노릇 하는 거예요. 자기 구원을 자기가 쥐려고 하는 거예요.

내 구원을 내가 쥐는 것은 신앙의 초보입니다. 장성한 사람은 그냥 유람선에 올라탔다고 생각합니다. 유람선이 가는 방향대로 경치를 관람하면서 몸통이 움직이는 대로 허리는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허리를 누가 쥐고 있는가?

하늘과 땅까지 다 연결된 몸통을 가지고 중보자라고 합니다. 이 중보자에 대해서는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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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080523b디모데전서2장5절b

광주 강의(08. 5. 23) 37-2

중보자 이야기했는데,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니까 한 번 복습해 봅시다.
약속이란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가 부름 받았습니다. 그 약속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어떤 인격자, 형체를 가진 어떤 분이란 말이지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부름 받았습니다.

뭐가 대단하냐? 죽은데서 살리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그 능력이 바로 우리 중보자가 하시는 일인데, 우리는 그 혜택을 입게 되었습니다. 수혜자라고 하지요.

자, 그러면 어떤 혜택이 있는가?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허리가 되는 혜택을 입어요. ‘너는 몸통이 아니야. 네가 머리 될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알아서 다 해 주십니다. 왜 그것을 못 믿습니까?

사람이 자기가 죽었는데 자기가 멱살 쥐고 구원 못합니다. 아무리 힘을 잘 쓰는 사람도 죽으면 전혀 힘을 못 쓰지요. 자신이 알아서 공동묘지에 가서 눕는 것이 아닙니다. 죽었으면 이제는 불에 태우든지 땅에 묻든지 그것은 다른 사람이 해 주는 것이지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주체가 되지 말고 우리는 하나의 허리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뚱뚱한 아줌마 보면 허리가 없잖아요. 뚱뚱한 몸체 속에 허리로 들어가 있어서 몸통이 움직이면 허리는 그냥 따라서 움직이는 것. 그 정도 선에서 머물러 있을 때 이게 신앙이 좋은 겁니다. 이것이 정말 높은 신앙의 경지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나 예수 믿는다.’고 합니다. ‘내 인생 나는 몰라. 그분이 알아서 하실 거야.’ 이게 믿음 좋은 거예요. 내가 내 구원의 주인공이 아니란 말이지요. ‘이것 지킬까요, 저것 지킬까요?’ 이게 아니고, 성경대로 알아서 지키게 해 주실 거예요. ‘너는 허리다.’ 라는 것을 알아서 지키게 해 주는 거예요.

그러면 허리가 있으면, 허리를 보면 안 되고 몸통을 봐야겠지요. 히브리서 7장에 허리 위 몸통에는 멜기세덱이 있습니다. 이 멜기세덱이 얼마나 어려운지 젖을 먹는 사람은 모른다고 했어요. 멜기세덱이 위에 있고, 멜기세덱이 몸통이고 그 밑에 허리가 있는데, 이 멜기세덱의 반열은 지상에 내려오지 않는 반열이에요. 

히브리서 7장 2-3절에 멜기세덱의 특징이 나와 있어요. 의의 왕, 평강의 왕이며,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고,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

이 멜기세덱은 사람들이 그렇게 얻고자 하는 의, 평강, 영생 이 모든 것을 다 쥐고 있고, 이 땅에 내려오지를 않아요. 그런데 이 땅에 내려오신 분이 있어요. 이분이 바로 중보자에요. 저는 이것을 혓바닥으로 봅니다. 혓바닥의 뿌리는 하늘에 있고 그 끝은 지상에 내려오고.

뿌리가 멜기세덱에 있어요. 그래서 멜기세덱이 갖고 있는 의가 우리의 의가 되고, 멜기세덱이 갖고 있던 평강의 우리의 평강이 되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죽음도 없는 영원한 생명이 허리에 속한 우리한테 그냥 그대로 주어진다 이 말입니다. 이 멜기세덱의 반열, 이 하늘의 신분이 그대로 유지되는 분이 바로 중보자이신 예수님이라고 히브리서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너와 무슨 관계가 있어?’ 하고 따지면, ‘우리는 예수님의 반열에 허리에 속한다.’ 이러면 정답입니다. 예수님이 혓바닥처럼 축 쳐졌는데 쳐진 이 부분이 바로 허리부분. 여기서 레위지파가 나오지요. 멜기세덱 밑에 아브라함, 아브라함 허리 속에 레위 지파가 있었다.

구약에 12지파가 있는데, 아브라함 아들이 이삭, 이삭의 아들이 야곱, 야곱의 아들이 레위. 그런데 레위 지파가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이미 아브라함 속에 뭐가 들어 있다? 레위가 허리에 박혀 있다고 해서 허리란 말이지요.

아브라함은 누구한테 혜택을 받았다? 멜기세덱에게 혜택을 받아서 십일조를 드렸는데 이 십일조는 그 허리 속에 있는 레위 지파가 아브라함이 드릴 때 같이 드린 셈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입장이 바로 중보자의 입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기능을 다 갖고 있으니까 예수님 허리에 우리가 포함 되어서 예수님이 멜기세덱으로써 받으시는 분도 되고, 아브라함처럼 드리시는 분도 되고 이 안에 다 포함이 되어 있는 겁니다.

정리해 보면, 하나님은 받으시는 분이에요. 그 기능입니다. 우리도 혜택을 받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나 우리는 동일하게 일방적으로 받는 것뿐이에요. 그러나 중보자는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에게 주고 양쪽 다 일을 하는 것이 중보자에요.

오늘 본문을 봅시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이 기능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3장 20절에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중보는 한편만 위하는 것이 아니라 양편 다 위하지요. 그 양편을 위하는 분이 여러분이 아니고 오직 한 분이신데, 그 한 분이 양쪽 일을 하시는 한 분이란 것입니다. 양쪽 다를 살피시는 분이 예수님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다른 석가모니나 이런 사람은 안 되지요. 왜냐하면, ‘인간이 신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방향이 하나지만, 중보자 되시는 분은 방향이 한쪽이 아니고 양쪽으로 나눠져서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다 하시기에 중보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보자는 여러 명이 되면 안 돼요. 하나님이 한 분이기 때문에 중보자도 한 분이고, 그 중보자는 어느 한편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양편 일을 다 해야 될 중보자인데, 그분은 예수님입니다.

성경에서 사도들이 예수님을 소개하고 설명할 때, 이런 아주 어려운 용어들을 많이 사용해요. 왜냐하면 자꾸 예수님을 보통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거죠. 양쪽 다를 위하는 분이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더 골치 아프게 말하는데, ‘예수님은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이것은 더 해결이 안 되고 엉뚱한 쪽으로 가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이다.’ 그런 뜻이 아니고, ‘예수님은 양쪽 다를 위하시는 분이다.’ 이렇게 해야지요.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몰라요. 기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마치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예수님이 다 보여준다 이 말입니다.

멜기세덱은 하늘에 계신 분이지만 중보자처럼 일하고, 아브라함도 바치는 쪽의 이야기를 하지만 이미 허리에 레위가 들어있다는 점에서 예수님과 유사한 점이 있고, 그런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중보자가 해야 될 관계를 다 보여준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은 그야말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죠. 이것은 역사를 초월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디에 속하고? 아브라함은 역사에 속하고, 역사를 초월한 멜기세덱과 역사를 초월하지 못한 아브라함이 만나면서 성사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사를 초월하는 분과 역사 안에 있는 분 양쪽 다를 겸비한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이지요. 신분은 하나님이면서도 몸은 역사에 속해서 역사 속에 나타나신 그런 분으로, 우리와 동일하게 이 땅에 사셨던 그런 분입니다. 중보자가 되려면 양쪽 다를 겸비해 줘야 중보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더 어려운 것을 해 보겠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쉽고 어렵고를 떠나 중보자를 알려면 이것을 해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19절에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이 말도 참 어렵습니다. 율법이 무엇인가? 죄를 지어서 추가된 것이다. 이 뜻이거든요.

그 다음에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야, 참 어렵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천사로 말미암아, 누구의 손을 빌어서 줬습니까?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중보자가 뭐냐에 대해서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보자는 하나님도 위하고 인간도 위하는 것이 중보자다. 그러면서 중보자는 두 사람이냐? 아니다. 그럼 세 사람이냐? 아니. 오직 한 분이다. 왜 한 분이냐? 그 통로가 하나님이 한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오는 길도 오직 한 길만 정해졌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해서 중보자는 하나가 됩니다.

하나이면서도 몇 가지 기능을 한다? 두 가지 기능을 하니까 이게 어렵단 말입니다. 그 두 가지 기능이 뭐냐? 갈라디아서 3장에 보니까 하나는 율법을 베푸심. 두 번째는 약속을 성취. 이 두 가지 일을 하는 겁니다.

천사를 통해서 중보의 힘을 빌어서 율법이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거예요. 그럼 율법을 왜 줬느냐? 율법을 누가 줬지요? 중보자가 줬지요. 그 중보자는 무슨 일 한다? 하나님 일도 하지만 사람을 위한 일도 하지요. 양쪽 일을 합니다.

‘인간을 위한다. = 율법 주었다.’ 이게 연결됩니까, 안 됩니까? ‘나는 오 목사님을 위한다. 몽둥이 들고 설친다.’ 이해됩니까, 안 됩니까? 오 목사님 입장에서 얼른 이해가 안 되지요. 나를 위할 것 같으면 맛있는 과자나 사오든지 과일을 사오든지 내가 좋아하고 흠모할 만한 것을 줘야 할 텐데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 ‘인간아!
사  람: 예.
하나님: 내가 너에게 좋은 것 줄까?
사  람: 예. 주세요.
하나님: 여기 몽둥이다.

이거 이해됩니까?

사람들이 예수를 못 믿는 이유는, 사람들이 진짜 예수 말고 가짜 예수를 찾는 이유가 진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매를 들고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안 믿는 거예요. ‘너 맞아야 돼.’ 이거거든요.

사람들이 절에 다니다가 교회로 왔단 말이지요. 절에서 하던 행세 교회에서 그대로 하거든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저 신령님께 비나이다. 우리아이 고3인데 어찌했든 이번이 꼭 좋은 대학에 붙게 해 주세요.’ 이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기도 아닙니까. 이게 우리가 좋아하는 메시아고 부처고 예수 아니냔 말이지요.

그런데 열심히 빌고 있는데 뒤에서 뭔가로 뒤통수를 때립니다.

‘왜 때려요? 당신 누군데?’
‘나는 네 중보자다.’
‘뭐 이런 중보자가 다 있어!’
‘원래 중보자는 그래.’

중보자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을 해도, 설명하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기존의 알고 있는 중보자하고 너무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피해 버립니다. 교회 헌신예배 초청받고 설교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나중에 항의가 들어와요. 주로 항의하는 사람은 당회장 목사, 장로들로부터 항의가 들어와요. 그런 설교해서 교회 성장을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 앞에서 교회 성장시키겠다는 그 자체가 몽둥이 맞을 짓인데, 그들은 하나님께 잘 한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자기 죄를 몰라요.

지난 시간에 한 것 다시 해 보겠습니다.
죄가 아닌 게 뭐냐 하면, ‘나는 허리에 불과하고 몸통은 주께서 알아서 하신다.’ 이게 죄 아닌 거예요. 그러면 뭐가 죄냐 하면, ‘내 구원, 내 천당 가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한다.’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나는 허리에 속한다는 것을 안 믿고, 내가 내 주인이고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는 거예요.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독불장군이지요. 자기밖에 몰라요.

신이나 예수는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거예요. 내가 기도하면 기도하는 대로 응답해 주고 하여튼 자기 똘마니가 되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죄에요. 정말 제가 사람들 보면 답답한 게, 목사들 하는 말이 “복음대로 하는데 교회가 왜 성장을 안 합니까?” 그 사람은 마땅히 교회가 성장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교회에 교인이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교회에 교인 없다고 그리스도 몸이 없는 겁니까? ‘마땅히’ 또는 ‘당연히’ 이게 말이 안 돼요. 우 집사님이 수술하시고 몸이 아프고 그런데 그 때 주의할 것이 뭐냐 하면, 나는 마땅히 안 아파야 되고 당연히 건강해야 된다는 그 논리가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없잖아요.

‘우리교회 교인이 몇 백 명 있어야 된다.’ 그렇게 되고 싶지요. 되고 싶은 것은 사실인데, ‘마땅히 교인이 있어야 한다.’ 이거는 말이 안 돼요. 이상하게 마땅히 있을 분은 나도 아니고 오 목사님도 아니고 마땅히 있을 분은 중보자만 있으면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멜기세덱만 있으면 아무 이상 없어요. 왜? 그분이 의고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는 필요 없고 의만 있으면 되거든요.

마땅히 있을 분은 멜기세덱이고 우리는 멜기세덱이 나은 작품 아닙니까. 멜기세덱의 긴 그림자거든요. 멜기세덱이 펄럭일 때마다 우리는 같이 펄럭이면 그만입니다. 허리가 된 주제에 지가 몸통인줄 알고 --

사도바울은 굶고 매 맞고 옥에 갇히고 했어요. 사도에게서 ‘마땅히’는 오직 하나 뿐이었습니다. 주의 일은 반드시 ‘예’하고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만 마땅하고 나는 전혀 안 마땅하다는 거예요. 내 기대와 소망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겁니다. 심지어 내 목숨까지 나에게 마땅한 게 아니에요. ‘나는 내년까지는 꼭 살아야 돼. 내 자식 결혼할 때까지는 살아야 해.’ 이런 논리는 성경에 없습니다.

이제 장로님이 되셨는데, 최종훈 장로님이 집사님 시절에 경유 값이 싸기 때문에 자기는 경유차를 산다고 아주 탁월한 선택인 양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요즘 경유 값이 휘발유 값을 초월했습니다. 탁월한 선택이 어디 있습니까. 탁월한 선택 없어요.

중국에서 아이 하나만 낳으라고 했는데 이번에 지진이 나서 하나뿐인 아들 많이 죽었습니다. 이제 자식도 없어요. 중학교 건물이 무너져 800명이 깔렸는데 그 부모들 대부분 이제 자식이 없습니다. 왜? 나라에서 하나만 낳으라고 해서 따랐는데 그 자식 죽었으니 자식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허리인 주제에, 부속품인 주제에 우리는 ‘마땅히, 당연히’ 그런 소리 하면 안 됩니다. ‘주여, 그냥 주시는 대로 먹고 살다가 갑니다.’ 이러면 돼요. 참새를 누가 키웁니까? 참새는 우울증이 없어요. 참새는 그냥 기르시는 것뿐이고, 들풀이 자기 장래 걱정하는 것 봤습니까? 내일 꺾여서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오늘은 아무 걱정 안하고 그냥 삽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 나라 의를 바라보면서 들풀처럼 참새처럼 살아야 돼요.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닙니다. 주의 것입니다. 내 것으로 시작해서 주님의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자, 이제 조금 더 나가봅시다. 점점 어려워지는데, 우리한테 허락도 안 받고, 우리와 의논도 안하고 중보자 되시는 분이 몽둥이를 들고 왔어요. 뭐냐 하면, ‘넌 이렇게 나쁜 놈이니까 죽어야 돼.’ 하고 율법을 누가 가져 왔습니까?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풀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이 다 너희를 위한 것이다.’ 율법을 준 것은 너희를 위한 조치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0절에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몽둥이로 때리는 것, 이것이 저주거든요. 법대로 못 살면 저주 받습니다. 우리는 법대로 못 사니까 저주 받아야 되지요. 자, ‘저주를 내리시는 법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약속을 위배하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모순되는 것이라는 거지요. 정답이 뭡니까?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모순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얻어맞으면 맞을수록 그것은 곧 구원 되는 사람이란 말이지요. 모순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왜 그러냐 하면, 지금 우리는 몸통 중에 허리에 속한데 우리는 자꾸 우리 자신을 몸통으로 봐서 ‘이 몸통 천국 넣어 주세요.’ 만날 이렇게 나와요.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말씀 주시면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십계명도 다 지키겠습니다. 십계명 안 지키는 사람은 지옥 보내고, 지킨 나는 천당 보내고 그렇게 합시다.” 자꾸 자기 자신을 자기가 책임 질 수 있는 몸통 전체로 보는 거예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중보자를 보면서 ‘저 사람이 미쳤나? 왜 저러지. 자기가 왜 설쳐.’ 이렇게 나와요. “주여, 어떻게 하면 천당 갑니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이러고 있어요. 그래서 중보자가 그 사람을 인간 만들기 위해서 몽둥이로 때리는 거예요.

중보자가 알아서 한다는 것을 그렇게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그 소리가 귀에 안 들어오고, 중보자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사랑해요. 이번에 [피]라는 제목의 책을 써는데 이 대목이 아주 많이 들어갑니다. 이런 구절이 나와요. “내가 나한테 충성하지 않으면 누구한테 충성한단 말인가?” 그렇게 해놓고 뒤에,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이 소리가 귀에 들어옵니까, 안 들어옵니까? 안 들어오지요. 왜? ‘나는 나한테 충성하기 바쁜데 뭘 나 외에 다른 사람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미쳤나?’

그러니까 사람은 성경을 100번 1000번을 봐도 자기밖에 몰라요. 나에게 충성하고 나에게 봉사하고 어떤 일을 해도 나 좋으라고 하는 짓이지 내 곁에 있는 남 좋으라고 하는 짓이 아닙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도 상대방이 내 마음에 들 경우에 한해서만 그렇습니다. 밖에서 문제 일으키는 남편을 어느 아내가 좋아하겠어요? 잔소리 하다 하다 그래도 안 되면 갈라서고 하는 거지요.

다 내 뜻대로 될 때만, 그런 조건 하에 사랑하는 것이지, 무조건 날 버리고 남을 좋아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도를 닦아도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내가 도를 닦아서 옆 사람 좋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 닦는 나 구원 받으려고 도 닦는 거예요.

그런 자들에게 몽둥이 들고 뒤통수를 때리는 분이 누굽니까? 중보자입니다.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고 영생밖에 모르는 사람을 몰라보고 곧 죽어 흙이 될 놈이 뭘 안다고 까불어!’ 하고 때리는 거예요. 그런데 율법을 가지고 때리는 이것이 결국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중보자가 크게 보여야 할 텐데 자꾸 내가 크게 보입니다. 나 자신이 너무 크게 보이는 거예요. 중보자는 사라지고 누가 보입니까? 내가 나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어요. “아, 그때 행동 잘했으면 돈 더 많이 벌었을 건데.” 만날 생각하는 것이, 국가 발전도 선진 조국도 아닙니다. 자기 성공뿐입니다. 지금 유류 값 올라가는데 국가 경제 걱정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기름 값 올라가면 ‘내 주식 값이 어떻게 될까?’ 그 생각하지.

사람이 자기 생각한다는 것이 어떤 경우에 확실한가 하면, 가난해 지면 자기 생각에 더욱 더 집착합니다. 가난의 특징이 뭐냐 하면 치사함, 조잡함, 속됨, 그리고 굽실거림. 이것이 가난의 특징입니다. 사람이 돈이 있으면 여유만만, 품위, 고상함. 이런 몫이 다 부자한테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 고상함, 여유만만, 품위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은 아직 돈이 있다는 뜻입니다. 돈이 인격을 결정합니다. 아무리 인격을 지키려 해도 사람이 가난해지면 치사하게 됩니다. 인간성이 더러워서 치사해지는 것이 아니고, 돈이 궁하면 사람을 그렇게 만듭니다.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 잠언을 할 텐데 잠언의 핵심이 그것입니다. ‘네가 가난할 정도로 겸손할 수 있느냐?’ ‘네가 가난마저도 기뻐할 수 있을 만큼 겸손할 수 있느냐?’ 왜냐하면, 지혜자는 이 땅에 가난하게 왔습니다. 어느 누구보다 가난하게 오셨어요. 머리 둘 곳도 없었잖아요. 

가난하면서도 안 치사할 수 있느냔 말이지요. 세상에 이런 인간은 없어요. 이유가 뭐냐? 사람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 이유는 나만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에 우주 전체를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내 입장에서 내가 우주의 전부인줄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가난해 지면 하나님의 의와 사랑 이런 것은 2차적인 문제에요. 이것은 시급하지 않는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여유만만하고 품위 있으려면 내가 돈을 벌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그게 이 세상에서 승자가 되는 겁니다. 사람의 명분은 게임입니다. 남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인생의 목적이 뭐냐고. 그들의 대답을 축약하면 ‘세상이라는 이 밀림에서 내가 패자가 아닌 승자가 된다면 내가 무슨 짓이든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남을 이겼다는 즐거움,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더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여기에서 나와요. 게임에서 최후의 1인자가 되기 위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왜 사람은 중보자가 가까이 있어도 중보자를 안 믿는가? 내가 내 사랑이라는 경계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내 예쁘다. 내 남편 훌륭하다.’ 이것이 뭐냐 하면, 게임에서 승자가 되는 하나의 용어들입니다. ‘너 아파트 몇 평이니?’ 이게 전부다 게임에서 승자가 되는 거예요. 최후의 승자가 된 사람을 우리는 대통령이라고 부릅니다. 대통령은 우리를 몽땅 승리자로 만들라고 대통령을 세운 거예요. 그런데 대통령 되고 난 뒤에 나를 패자로 만든다면 그 대통령을 용서하지 않겠지요.

화물연대가 장사가 안 된다면 파업을 하면서 대통령에게 대들겠지요. 왜? 당신은 우리를 승자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강남에서 정몽준이 큰 표 차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유가 뭡니까? 강남 전체를 뉴 타운으로 만든다고 했지요.

전 국민이 오직 승자가 되기 위한 일념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몽둥이 들고 뒤통수를 때립니다. 왜? 승자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 자기를 사랑하는 틀에서 못 벗어나고 그 틀을 확장시킵니다. 여기에 멜기세덱이 갖고 있던 그 영원한 의와 진리와 영생이 이런 못난 인간에게 드디어 쳐들어오지요. 그래서 “너는 나의 몸통 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허리다. 염려하지 마라. 나는 네가 너밖에 모르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까 너를 극히 사랑해서 내 몽둥이 들고 갈게.” 그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몽둥이입니다.

율법의 대표적인 것이 뭡니까? 십계명 아닙니까. 그리고 이것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이거 엄청난 전류가 흐르는 전기 몽둥이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 그런 설교 했어요. 세상 사람들의 가훈에 보면 ‘멀쩡하게 살자!’는 것이 있습니다. 얼마나 세상이 미친 세상이기에 그런 교훈이 먹혀들까요. 술 처먹고 와서 행패부리고, 그 때 진짜 실감나는 가훈이 뭐겠어요? “여보, 올해만큼은 제발 멀쩡하게 삽시다.” 매일 컴퓨터 게임에 미쳐서 밤에 잠도 안자고 하는 아이에게 “애야, 제발 좀 멀쩡하게 살아라.” 이 ‘멀쩡하게 살자’는 말이 굉장히 부러워하고 흠모할 만한 가훈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뭡니까? 멀쩡하게 살면 됩니까. ‘마음을 낮춰라.’ ‘멀쩡하게 살자’는 말은 상당히 좋잖아요. 그런데 ‘마음을 낮춰라’는 것은 승자 되지 말고 패자가 되어도 승자가 될 수 있는 그런 방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걸 어떻게 배웁니까? 남이 볼 때 패자인데, 흠모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보시기에 승자가 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승자가 되면 안 되고 나를 포함시킨 어떤 분이 최후의 승자가 되면 나는 그분께 포함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등달아 승리자가 되지요. 이 일을 바로 중보자가 한단 말입니다.

중보자를 설명할 때 제일 좋은 예화가 뭔가 하면, 무쇠 솥뚜껑으로 작은 접시를 덮는 겁니다. 큰 솥뚜껑으로 접시를 덮을 때 접시에 담긴 참외, 토마토가 보이겠습니까, 안 보이겠습니까? 안보이죠. 이것을 성경에서는 사랑으로 덮은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다른 말로 하면 무쇠 솥뚜껑으로 우리의 허다한 죄를 덮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오기 전에 뭐가 있어야 돼요? ‘우리는 왜 멸망 받아야 하며, 우리는 왜 우리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가? 우리는 왜 우리 힘으로 구원 받지 못하는가?’ 이것을 충분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충분히 알려주는 기능을 뭐가 합니까? 율법이 하고, 그 율법을 사랑하시는 중보자께서 주신 거예요. 율법을 주신 후에 약속을 주심으로 이 두 가지 일을 다 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도 살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도 성취될 수 있도록 하시는 그분이 바로 중보자 예수님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문제점이 뭐냐 하면, 그러면 ‘너는 죄인이야. 내가 용서해 줄게.’ 이러면 십자가가 필요 없잖아요. 말만 하면 되잖아요. “오용익 목사님 이리오세요. 죄인 맞지요? 용서해 줄게요.” 이렇게 하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 없잖아요.

그런데, 제가 오 목사님 모독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 목사님 이리 오세요. 당신은 죄인입니다.” “미쳤나, 내가 죄인이게.” 사람은 자기에게 죄인이라는 소리를 제일 싫어합니다. 천하의 하나님이고 예수님이라도 나에게 죄인이라고 하면 자기 가치가 설 곳이 없잖아요. 그러면 결국 내가 죄를 더 짓기 위해서 사는 것밖에 안 되는데 이 모독, 이 모멸감을 내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화평교회 오신 분들 중에도 이런 것에 시달린 분이 계실 거예요. “내가 왜 죄인인가?” 하고. 성실하게 살았고, 착하게 살았는데. 한 가지 예를 들면, 어릴 때부터 자녀를 키운다고 그렇게 애쓰고 새벽밥 지으면서 대학 보내고, 시어머니도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존경했는데, 마지막 돌아가실 때쯤 되어서 복음을 전하니까 화를 벌꺽 냅니다. “내가 왜 죄인인데?” 하고.

결국은 그 좋던 관계가 복음 때문에 원수지간이 돼 버려요. 그런데 ‘어머니는 왜 이런 귀한 복음을 싫어할까?’ 그렇게 하지 마세요. 그 어머니 못지않게 우리도 당연히 예수를 싫어해야만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너는 죄인이고, 소경이며 내 피가 아니면 용서 받을 길이 없다.”는 그 말씀이 싫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게 고마워진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은 속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겁니다. 그런 점이 어려워요.

자기는 성질이 좋고 인품이 좋아서 자기를 향해서 예수님이 죄인이라고 해도 그냥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만 안 그렇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 생각해 보세요.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성격이 더 나쁜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착한 일 더 많이 해요.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동냥도 많이 하고 이웃을 돕는 일도 많이 해요. 심지어 불교 신자이면서 재산을 천주교 고아 돌보는 일에 헌납한 사람이 우리 친척가운데도 있어요.

심지어 안 믿는 사람 가운데도 헌혈하고 심장 때주고 그런 사람 많아요. 자기 절제하고 자기 관리 하고. 다 좋은데 “당신은 죄인이며 예수님 십자가 피 아니면 용서 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 소리만 하면 독이 올라요. 갑자기 좋은 관계가 원수지간이 돼요.

“뭐 예수 피로 용서 받는다고. 그러면 부처는 아무것도 아니고 예수만 중보자가. 너희 예수쟁이들은 너무 독선적이다. 산을 오르는 길은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닌데 꼭 예수만 고집 하냐?” 이렇게 나옵니다. 이것은 기독교를 논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 ‘나는 내 사랑에서 나를 포기 못하겠고, 나는 허리 되기 싫고 내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몸통이고 싶다.’ 그 이야기입니다.

“손대지 마. 나는 끝까지 나 사랑할거야. 내가 날 안 지키면 누가 지켜. 내 자존심은 내가 지킨단 말이야.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저리 가. 내 인생 내가 지킨다.” 이렇게 되니까 “그러면 당신 죽으면 어디 가는데?” “그건 난 몰라. 그건 내 소관이 아니야.”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는 허리에 속합니다. 내가 몸통이 아닙니다. 사랑해서 율법을 줬어요. 그리고 우리가 지은 죄의 저주는 이미 다 처리반이 있어서 다 가져가시는 분이 있어요. 누가 가져갑니까? 예수님께서 다 가져가셔요. 죄 지으면 가지가고, 또 죄 지으면 가지가고. 그렇게 해서 우리를 의인 되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는데, 사람들은 이상해요. 예수님의 피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고 내 손가락에 피는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현실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피를 흘린 이유가 뭐냐 하면, 네가 네 손가락에 피 흘린 것 이상으로 내 피도 현실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피 흘리셨습니다. “용서해 줄게.” “예 고맙습니다.” 이게 아니고, “피를 봐라.” 이 말은, “너도 한번 피 흘려 봐라. 아프지?” “예 아픕니다.” “나는 너보다 더 많이 아팠다.”

그러니까 내가 죽는 내 목숨보다도 주의 목숨이 더 귀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피로써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피를 누가 흘렸습니까? 누가 찔러 피 흘린 겁니까? 내 고집 때문에, 내가 내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에게 피 흘리게 했어요.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보고 내가 바로 죄인이고 하나님의 원수인 것을 피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찔렀습니다. 나는 나만 챙기고 사수한다고 내 근처에 오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나는 나밖에 모르고 날 사랑하는 것밖에 모르고 주님 사랑하는 것은 모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피란 말입니다. 피를 가지고 다가올 때는 “너 같은 고집쟁이를 위해서 내가 죽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교체를 하자는 거예요. “내가 주인 될게. 넌 내 똘만이 돼라. 지금까지는 네가 주인공이지만 이제 내가 주인공 될게. 너 장래 너 미래 내가 보장해 줄게.”

그래서 우리는 이제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입니다. ‘피로 값 주고 샀으니 이제 너희 것이 아니고 내 것이니라.’ (고전 6:19-20) 이 역할을 하시는 분이 바로 중보자입니다.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는 허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몸통 따라가면 허리도 따라갑니다. 그리고 내가 뭘 했다, 내가 잘못을 했다. 실수를 했구나, 이런데 너무 연연해하지 마시고, ‘보고 싶다.’ 나는 원래 이런 놈이니까, 나를 사랑하는 분이 계시니까 그분이 보고 싶다. 어서 오시옵소서. 사랑이 모든 법을 이겨요.

“갈라디아서 이것 지켰나? 로마서 이 말씀 지켰나?” 이렇게 자꾸 따지면, “주여 저 못난 것 아시지요? 그러나 주님 보고 싶습니다. 기다려집니다.” 이렇게 사랑하면 돼요. 내 힘으로 안 되는 그 천국을 중보자가 다 이루셨어요. 그래서 그분이 보고 싶어요.

이것을 디모데전서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모든 사람이 이 진리를 알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 ‘모든’은 인간의 신분이나 직업이나 남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은 한 분이고 이런 일을 하실 분은 네가 아니고 멜기세덱의 반열을 좇는 중보자가 따로 이 땅에 오셨다는 그 사실을 우리가 십자가 피를 보고 이미 현실로 이루어진 일이구나 하는 것을 느긋하게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한테 안 지려고, 그저 이기는 것을 생의 유일한 쾌감으로 여기며 내 사랑에 몰두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고 내 사랑에 가려진 것이 주님의 사랑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주님을 사랑하는데 내가 가리지 않도록 내가 방해꾼이 되지 않도록 주여 철저하게 저희들을 관리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