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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17, 18강 / 갈라디아서 4장 27절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갈라디아서

17, 18강 / 갈라디아서 4장 27절

정인순 2010. 10. 12. 11:00

http://media.woorich.net/~woorich1/study/seoul/seoul070413a.mp3
http://media.woorich.net/~woorich1/study/seoul/seoul070413b.mp3

 

 

녹취: 오용익

갈라디아서 제 17강

(이 근호목사, 2007년 4월 13일(1), 서울의존교회)

지난 시간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라고 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 혼자 있다고 해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 졌지요?

그리스도의 형상과 사람이 어떻게 결합이 되는가?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말은 굉장히 쉬워요.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형상과 결합되어 있는가?’라고 물으면 상당히 난감하죠. ‘사람이 어떤 식으로 그리스도의 형상과 결합되었느냐’ 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 그것이 떨어져 나갔느냐’ 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어요.

원래 사람이라는 것은 이 땅에 없었습니다. 사람 자리에 그냥 흙덩어리만 있었어요. 그런데 이게 사람이 됩니다. ‘흙덩어리가 어떻게 사람 되는가?’ “수리수리마수리, 얏!” 한다고 사람이 될까요? 사람이라는 것은 그냥 흙일뿐인데 이 흙덩어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을 때만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방금 제가 한 말을 여러분이 인정하신다면 “그러면, 목사님!하나님의 형상이 없으면 흙으로 다시 돌아가겠네요”라는 질문이 당연히 나와야지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을 때는 사람이었는데 만약에 그 사람이 행여 혹시나 흙이 된다고 한다면 그 사람 속에서 뭐가 빠져 나간 것이 되지요? 하나님의 형상이 빠져 나간 거지요. 그러니까 “너는 아담이니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지요.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을 때만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없을 때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흙이 될 뿐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는 ‘코 있다. 눈이 있다’는 이것을 가지고 사람으로 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코가 있고 입이 있더라도 점차 연세가 많아져서 늙어서 흙이 된다면 그것을 사람으로 보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만 사람으로 보는가?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새롭게 피어 날 때만 그것을 사람으로 간주해요.

저보고 이런 식으로 욕하면 안돼요. “목사님은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도 안 해줍니까? 걸어 다니면 사람이지 왜 그걸 사람도 아니라고 합니까? 그러면 짐승입니까? 인간의 존엄성을 그런 식으로 모독하는 발언을 해도 되는 겁니까?” 이렇게 속이 좀 울컥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성경을 무시하지 않고 펼쳤다면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가 관건이지 ‘제가 남들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중요치 않은 이야기입니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으면 사람취급을 안합니다. 아예 사람이라는 가치를 매기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드신다고 하니까 반대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아요. ‘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깡그리 무시하는가? 지옥가면 얼마나 고생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자기가 만든 사람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흐뭇해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변태 같은 하나님이라는 소리인가? 그러면 하나님이 성격이 이상한 분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피조물이 지옥에서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하고 구더기도 타지 않는 불에 영원히 고생하는 것을 천국에서 보면서 흐뭇해 할수 있을까?’

자꾸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볼 때 조건을 걸어 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그냥 흙이라고 합니다. 흙덩어리가 걸어 다니는 거예요. 그러면 이 시대에 진정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 더 확실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이죠. 하나님의 형상이 더 구체화 되어서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이죠.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을 경우에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창조성이 담겨 있는 자기 피조물로, 자기사람으로 간주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무엇인가? 이것을 알아야 되겠지요? 하나님(신)의 존재를 안다고 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안다고 할 수는 없어요. ‘신은 존재한다.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고 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떨어져 나간 경우가 있었어요. 그것은 죄를 짓고 난 뒤에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떨어져 나갔을 때에 ‘어떤 일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떨어져 나가서 사람이 흙이 되고 말았는가?’

사람이 흙이 된다는 것 연세가 많으면 다 흙으로 묻히게 되니까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되지요? 여기 비타 500이 있는데 이것이 인어공주가 된다고 한다면 믿겠습니까? 안 믿지요. 비타 500이 살아 있는 생물체가 된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고 안 믿어지는 이야기지요. 마찬가지로 생물체가 딱딱한 물체화가 된다는 이것도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자주 겪다 보니까 신기하지 않은지 모르겠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먼지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억수로 신기한 일입니다. 참 기이한 일이에요. 그 기이한 일에 하나님께서 어떤 요술, 마술을 걸었어요. 그 마술이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너는 죽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알고 행할 수 있고 사람은 행할 수 없는 요술입니다.

마술사가 무엇인가를 숨겨놓았다가 ‘얏!’ 하면 나타나듯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것은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 자체가 능력이 되는 겁니다. 이로써 사람이라는 것은 내 맘대로는 안 되는 그런 신세에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선악과 따먹어도 오래 살고 싶은 것이 우리의 원함이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요구를 전혀 외면하시고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고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되에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에 거기서 두 번째 조건이 나옵니다. “선악과 따먹은 이상 생명나무는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조건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였다면 두 번째 조건은 “선악과를 따먹어도 생명나무를 따먹으면 살 수 있잖아”라는 것을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치 않았어요. 결국 사람은 흙인데 사람에게 두 가지 마술이 담겨 있죠. 아담이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이 흙에 보태어져서 인간이 된 겁니다.

흙에 두 가지가 들어가야 돼요. 흙+(①선악과의 비밀 ② 생명나무의 비밀) = 인간. 이 인간만 인정하고 다른 인간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모든 인간은 다 죽습니까, 안 죽습니까? 다 죽어요. 죽으면 흙이 되겠지요. 제가 지난주 오후 설교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장례식장에 가면 근조화환이 죽 늘어서 있고, 부조금 주 고 들어갔어요.

그런데 조금만 지나면 우리가 그 장례식장의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고 이 근호’ 라고 되어 있고 여러분은 혹시 부조금 들고 오실는지 그것은 모르겠어요. 은행에 가면 순번대기표를 뽑잖아요. 먼저 가신 분이 72번이라면 나는 105번쯤 되는 거예요. 번호표가 75번이라서 먼저 돌아가신 것이고 105번차례가 되면 장례식장에 들어가는 거죠.

우리는 전부다 대기표를 쥐고 있는 거예요. 전부다 사탕 꿰듯이 굴비 엮듯이 해서 줄줄이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누군가 먼저 죽었다고 해서 “아이고, 안 되었다. 우리보다 일찍 돌아가시다니. 우리는 이렇게 팔팔하고 건강한데 이렇게 일찍 가시다니.” 이렇게 하고 있을 때 “그 다음, 72번! 들어오세요”하면 ‘가만 있자. 72번이면 내 번호네.’ 그러면 들어 가야 돼요.

어떤 경우에는 연세 많은 분이 96번인데 젊은 분이 52번 되는 수도 있어요. 대기 순서가 빨라서 젊었어도 먼저 들어가야 합니다. 방금 산부인과에서 애가 ‘응애!’하고 태어나면 그 순간 죽음의 대기표를 이미 쥐고 있어요. 이것을 전체로 보여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경을 보지 않으면 이 세상은 황사 덮인 세상입니다. 지난번에 우리나라에 황사가 덮쳤는데 대구가 전국에서 제일 심했어요.

30미터 앞이 잘 안보일정도로 정말 심한 황사였어요. 30미터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어요. 몇 발자국 더 가면 기껏 35미터 앞까지 보입니다. 좀 더 가면 그때는 40미터 앞까지 보이죠. 그런데 앞으로는 더 보여도 뒤로는 더 안보이게 되죠. 그러니까 항상 30미터밖에는 볼 수 없어요. 사람 사는 것이 황사 속에서 사는 겁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의 장래와 번호표가 몇 번인지도 모르고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직장 나가면서 밥 먹고 살고 또 퇴근해서 잠자고 그 다음날 하루치를 앞으로 다가가면 또 안개처럼 막혀 있고, 또 하루 그냥 살고 또 가보면 맨 안개속입니다. 이 전체를 몰라요. 성경은 전체를 이야기합니다.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이 없으면 사람취급을 못 받고 지옥 간다”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한꺼번에 다 알아야 돼요. 사람이라는 것은 인생을 오래 산다고 해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흙에다가 선악과의 비밀과 생명나무의 비밀이 담긴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면 사람이 아닙니다. 이 비밀이 없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마지막 때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어야 되거든요. 처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인데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면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 무슨 수고를 한다고 했습니까?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자식을 낳는 수고를 한다는 말이죠.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이 땅에는 없어요. 없기 때문에 새롭게 만들어야 하기에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뭡니까?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비밀을 한꺼번에 간직하고 있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에는 두 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선악과의 비밀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생명나무의 비밀이 있는 겁니다.

그 비밀이 그리스도에서 두 언약이라는 두 갈래의 가지를 치는 식으로서 나오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뿌리라면 그 뿌리에서 두 개의 나무줄기가 나와요. 하나는 약속에 속한 언약이 있고 또 하나는 육체를 따라난 율법에 속한 언약, 이렇게 두 가지의 언약이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일궈낸 약속과 율법에서, 약속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알고 율법에 속한 사람은 율법에 막혀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바라보지를 못해요.

법에 막혀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지를 못해요. 법밖에 몰라요. “법을 주세요. 지킬테니까요. 법을 주세요. 지킬 거예요.” 법밖에 몰라요. 여러분! 개나리 꽃봉오리가 법 없이 피는 겁니까, 법이 있어야 피는 겁니까? 대한민국에서 ‘개나리 꽃봉오리가 피어나게 하자’고 법을 만들어서 피는 거예요? 아니면 대한민국법과 관계없이 개나리는 그냥 피는 겁니까?

그냥 피는 겁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어떤 법이 필요 없이 그냥 피어나는 겁니다. 이게 생명이에요. 그런데 ‘화단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벽돌을 사용하고 화단과 보행자 인도와의 사이에 거리를 얼마쯤 두자’고 하는 이것은 법입니까, 법이 아닙니까? 이것은 법이지요. 아름다운 개나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화단을 조성하는 것은 법으로 되지만 국가의 헌법이나 행정법이나 형사소송법 같은 법 가지고 개나리가 피는 것이 아닙니다.

“너, 개나리 안 펴? 안 펴?” 그런다고 개나리가 핍니까? 그렇게 해서 피어나면 그것은 조폭이지 개나리가 아니죠. 개나리가 법 없이 피는 것은, 어디까지가 법이며 법을 넘어서서 무엇이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생명이란 율법외의 다른 통로를 통해서, 법과 관계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법을 주신 겁니다.

성경전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 전체는 법입니까, 생명입니까? 이것이 생명입니다. 생명인데 법아래 있는 사람들은 성경전체를 법으로 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지키겠다는 겁니다. 이미 꽃봉오리는 피었는데 뭘 지킵니까?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는데 우리가 또 뭘 이룹니까? 갈라디아서는 말합니다. ‘율법이 있을 때 어떤 인간도 율법을 통과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방법은 없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인간도 율법을 통과해서 약속 쪽으로 넘어오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사람이란 ‘흙 + 하나님의 형상 =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사람이란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어야 된다고 했지요?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비밀이 함께 들어 있는 겁니다. 선악과의 비밀만도 아니고 생명나무의 비밀만도 아닙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으리라’ 했잖아요. 우리 생각은 뭡니까? ‘우리가 아무리 선악과를 따먹고 죽어도 생명나무가 있는데 그걸 따먹으면 살지’라고 하잖아요. 그것이 허락이 안 됩니다. 선악과 따먹고 죽었잖아요. 사람들 생각에는 ‘생명나무가 있는데 뭘 걱정할까? 이름도 생명인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 생명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저리가! 어디서 감히 선악과를 따먹은 주제에 생명나무를 따먹으려고 하는가? 저리가라.”
“왜 안됩니까? 생명좀 따먹겠다는데.”
“너는 흙이거든. 저리가!”

추방해 버립니다. 생명나무를 따먹으려면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미 흙으로 돌아간 이상은 생명을 따먹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로서 인간되기는 틀린 거예요. 그런데 선악과와 생명나무 전체를 이루어야 되는데 그것을 아담은 못하고 두 번째 아담이 실천에 옮깁니다. 선악과의 비밀과 생명나무의 비밀 전체를 다 이루어 내십니다. 그 성취를 한 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어떻게 성취를 했는가? 호두를 깨듯이 그리스도 안을 딱 깨어 보니까 거기서 두 개의 노선, 두 개의 줄기가 빠져 나옵니다. 그 두 줄기가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4장 21절부터 28절까지 나오는 내용입니다. 두 줄기를 가지고 24절에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두 언약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여러분 배에서 다리가 몇 개 나오죠? 두 개 나오죠.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통에서 언약이 두 개 나와요.

한쪽은 종의 언약이 나오고 한쪽은 아들 되는 언약이 나옵니다. 이게 두 언약입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때 무엇을 염두에 두고 무엇을 원했을까요? 영적인 사람이 보고 싶은 거예요. 방금 제가 한 소리들은 학교에서 들으면 이상한 소리라고 할 거예요. 사도바울은 보통 사람에게 납득이 되는 소리를 한 게 아니에요.

사도바울은 ‘영적인 사람이 누구냐? 그 영적인 사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거예요. 육적으로 해석하고 문자로 해석하는 사람들 말고, 영적으로 성경을 보고 영적으로 들을 수 있는 그 사람이 보고 싶은 거예요.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것을 듣고 돈을 몇 푼 더 벌겠어요, 월수입이 늘어나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영적인 사람이 분명히 있는데 “그게 당신이냐”는 말입니다. ‘영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돌아다니면서 대통령 하려고 설득하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설득하고 싶지도 않아요. 제가 안산공부 마치고 여기 오는 도중에 돈 100원을 주웠어요. 그 돈 100원을 왜 주웠습니까? 그게 모래가 아니고 돈 인줄 알기에 줍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4장에서 전도를 가지고 뭐라고 했는가 하면, 줍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은 내가 혼자 다 할 테니까 너희(열두제자)는 내 뒤 따라 오면서 줍기만 해라.” 단 무엇과 무엇은 구분되어야 하는가? ‘돈과 다른 것이 구분되듯이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구분해서 영적인 사람은 돈 100원짜리 줍듯이 그냥 주워 담으면 그게 추수’라고 했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줍는 것도 못합니까? 그 일이 되려면 항상 영적인 안목을 가져야 되지요. 영적인 안목을 가지려면 뭘 알아야 합니까? 육적인 안목이 무엇인지를 철두철미하게 알아야 되지요. 갑자기 제가 그 이야기를 끄집어 낸 이유가 있어요. “예수그리스도에게서 두 다리가 나오듯이 두 언약이 나옵니다” 하는 이야기를 그냥 해버리면 “기독교 교리 가운데 이런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실제상황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고 그냥 기독교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라는 투로 나갈까봐서 염려가 되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방금 제가 돈 100원 줍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돈과 다른 쓰레기와의 차이점을 아셔야 된다는 말이죠. 양쪽 다를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양쪽 다를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양쪽 다 아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인간은 죄짓고 난 뒤에 죄가 지배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세상신이 지배한다고 합니다. 아주 두꺼운 층처럼 악마층(세상신)이 있습니다. 이 악마층 밑에 인간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희미하게 그냥 살아갑니다. 아침에는 일어나서 돈 벌러 나가고 밤에 들어오면 지쳐서 쓰러져 자고 그 다음날 일어나서 또 반복하면서 늙어가고 죽어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세상신의 지배아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야기 했는가 하면, “율법에 갇혀 있다”고 했습니다. 율법을 줌으로써 어떤 인간도 율법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자기 쪽으로 돌아와요. 사람들(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신을 규명하고, 메시아를 이야기하고, 언약을 말하고, 천국, 구원, 믿음, 소망, 사랑을 다 거론해도 전부다 어디서 만들어진 것들입니까? 이것은 다 세상 신, 악마가 만들어 내지요. 이것이 종교입니다.

종교가 다 뭐 됩니까? 율법화 되지요. 그래야 사람이 납득을 하니까요. ‘아하! 시키는 대로 하면 되겠구나.’ 이렇게 쉽게 이해가 되잖아요. 그래서 그들은 신, 메시아, 천국등등의 이야기를 하면 마치 영적인 세계인 것처럼 곡해를 하지요. 그러면서 율법을 통해서 영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지요. 사실은 같은 한통속입니다.

그렇다면 육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가 어떻게 구분됩니까? 아까 개나리의 꽃봉오리는 무엇이 없는 채 핀다고 했습니까? 법 없이 피지요. 생명은 법이 없습니다. 개나리한테 협박을 한다고 해서 개나리가 활짝 피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냥 자기가 알아서 피는 거예요. 참새 손에다가 수갑을 채우는 것이 말이 됩니까? 강아지가 길에 오줌눈다고 수갑을 채우면 강아지가 개과천선 하겠어요?

생명이라는 것은 법이 없는 거예요. 여기 우리가 있는 층이 이렇게 두꺼운 층인데 외부에서 뭔가 뚫고 들어와야 합니다. 외부에서 성령으로 뚫고 들어온 사람만 영적 세계도 알고 그 영적세계가 나의 육적인 종교세계도 붕괴시켰다는 것을 알면서 그 두꺼운 층을 다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진짜 성령 받은 사람만이 율법외의 다른 계통의 의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영적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받은 사람은 무엇을 압니까? 영의 세계만 아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인간에게 종교란 이름으로 어떻게 장난질을 쳤는가, 악마가 종교라는 이름을 앞장세워서 어떻게 장난질을 쳤는가?’를 다 알겠지요. 이 두꺼운 층이 뚫린 사람은 다 알겠지요. 지층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시추봉으로 뚫어 보면 그 동그란 시추봉 안에 지층이 그대로 박혀 나와요. 그걸 보면서 지하층에 원유가 매장되어 있는지를 아는 거지요.

그처럼 이렇게 뚫어오면 그 뚫어온 모든 과정들이 표식으로 남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진짜 성령세례를 받아서 메시아를 만난 사람만이 메시아가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람만이 ‘율법을 왜 주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알아요. ‘아, 율법이란 왜 우리가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가 없는가? 왜 우리가 성경말씀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왜 안 되는가?’를 아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오늘도 지키고 내일도 지키고, 이것 지키면 저것 빠지고 저것 지키면 이것 빠지고’, 혼자 바쁜 거예요. 집에서 강아지 열 마리 키우는데 그중에 도망친 한 마리 잡아오면 그 사이에 두 마리 도망쳐 있어요. 혼자서 자기 선행 관리한다고 분주한 거예요. 맨 날, “반성합니다. 회개합니다.” 회개란 그런 법적인 의미가 아니에요.

“생명을 법으로 인정한 것에 대해서 회개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생명을 나의 생명가지고 대체 하려고 했던 죄를 회개하는 겁니다. 영적층이 있다면 율법층이 있지요. 하나님께서 430년 후에 모세에게 율법을 준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 신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그 정황을 다른 말로 이야기 한 거예요.

모든 사람은 마귀에게만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 아래 지배를 받고, 다른말로 하면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통에서 두 다리가 나왔잖아요. 한 다리는 약속이고 한 다리는 뭡니까? 율법이죠.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서 지배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게 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만으로 구원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들은 지옥에 가 줘야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가룟유다는 지옥에 가야만 합니다.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롬 11:36)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존엄성은 없잖아요?”
“인간 자체가 없다니까요?”
“그럼 우리는 뭡니까?”
“흙이죠. 뭐.”

인간이 무엇인가? ‘흙 + 하나님의 형상 = 인간’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고, “이왕 인간이 된 것, 그냥 인간으로 좀 봐주소”라고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자꾸 자기가 인간이래요. 지금 죽어가고 있는 주제이면서도 자꾸 자기를 인간이라고 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대한 대기표를 받아서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누구나 이 표를 받고 있어서 순서 되면 가야 되는 거예요. 아담에 속했기에 누구나 다 죽음대기표를 받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사람이다”는 소리를 하려면 대기표를 찢어 버리고 그런 소리를 해야 합니다. 자기 대기표가 있고 자기를 어디론가 끌고 가는 것이 있다면 독자적으로 “나는 누구다”라고 못하고 “나는 누구에게 속했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속했습니까? 아담 안에 속했고 아담에게는 뭐가 덮여져 있습니까? 죄가 덮여져 있습니다. 그 죄가 우리에게 왕 노릇 해서 우리에게 사망이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라 하는 것은 영적인 것만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동안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했던 나의 행세, 종교적인 여러 가지 죄악을 다 보여줄 때 그게 바로 영적인 사람인겁니다. “목사님! 그런 사람 누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사도바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두 언약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영적인 인간과 육적인 인간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영적인 층을 1층, 율법층을 2층, 자기가 속한 세상층을 3층이라고 해 봅시다. 이미 그 사람은 부활의 영을 통해서, 두꺼운 육의 층을 통과한 영을 받았기 때문에 1층, 2층, 3층 전부 다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3층에 매이지도 않고 2층에 매이지도 않고 오로지 1층, 주님에게만 매여 사는 사람인데 그런 사도바울을 가지고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7-11)

왜? 이미 영적인 힘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의 그릇인데 이 빈 그릇에 보배가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 보배가 뭡니까? 세상신을 돌파했던 그 복음이 이 빈 그릇에 보배로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그릇에 보배가 있는데 보배가 중요합니까, 그릇이 중요합니까? 그릇은 보배를 위해서 있는 거지요. 그 보배가 없으면 하나님이 사람 취급 안합니다. 그래서 심판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나를 봅니다.

“내가 누구입니다.”
“너 말고 네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던지는 것은 돈 100원줍기 위한 것과 같아요. 육적인 사람을 영적인 사람으로 바꾸기 위함이 아닙니다. 육적인 세상에서 “야! 여기 돈 100원 떨어져 있다”고 아주 신기해 하면서 영적인 사람을 줍기 위함입니다. 우리 주님도 그것을 아시고 사도 바울로 하여금 팔레스타인지방의 이스라엘에서 잘 있는 사람을 갑자기 로마로 데려 갑니다.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행 19:21)는 겁니다. 그리고 에베소에도 갑니다. “이 성에는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10) 고린도지방에 가면 “영생주기로 작정한 자가 있느니라.”(13:48) 이것은 “돈 100원짜리가 이 도시에도 있느니라”와 같은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을 개조하기 위해서 있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미리 깔아 놓은 사람, 영적인 사람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사도행전 마지막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행 28:23-28)

당연히 그래야지요. 왜? 자갈하고 돈하고 같습니까? 자갈은 자갈의 길을 가야 되고 돈 100원은 천국으로 가야됩니다. 알곡은 천국 곳간에 들어가야 되고, 가라지는 무서운 맹렬한 진노의 불에 살라져야 됩니다. 그 가운데 있는 우리 인간으로서는 그 하나님의 뜻을 저지할 수 있는 어떠한 권리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람 같으면 줍기만 하면 그만이지 우리가 따로 사람을 개조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1층과 2층에 얽매여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영적인 사람도 아닌데 자기 친구로 삼아서 조작을 해 보려고 해요. 결국 그 말은 뭐가 됩니까? 문방구에 가면 애들 노는 장난감 돈이 있어요. 종이에 돈처럼 그려놓고 10만원이라고 적혀 있어요. 그게 10만원 짜리 돈입니까? 진짜 10만원짜리를 건져야 되는데, 하늘나라에서는 받아 주지도 않는데, 자기가 종이에다 10만원이라고 써놓고 하나님보고 봐달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안되지요.

사람을 자기 유리한쪽으로 교인 만들고 친구 만드는 식으로 하지 말고, ‘영적인 사람이 어디 있는가’라고 찾아다니면서 성도가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혹시 압니까? 100원짜리 하나 건질지. 그러면 “반갑다. 친구야!” 하면서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야! 주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그런 사람이 두 세 사람만 모여도 그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목사하고 사모하고 모이면 교회’라고 하는데, 글쎄요? 목사 사모가 교인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요.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지는데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까? 왜냐하면 사모는 생활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너무 복음만 챙기다가 온집안 식구가 다 자살할 지경이 되기에 나라도 정신차리자. 나라도 3층이 아닌 1층과 2층만 찾자’고 나올수가 있어요.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오존층처럼 가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종교적으로 애써도 그 층을 뚫을 수가 없어요.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그렇게 뚫으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너희들은 사탄의 자식이다”는 욕밖에 듣지 못했습니다. ‘뱀의 새끼’라고 했으니 얼마나 인간의 존엄성, 인간자체에 대한 모독입니까?

왜?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기에 다 아니까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뭐든지 법으로서 확정짓고 법으로서 규정하려면 그 법을 깨버리세요. 제가 약간 어려운 이야기를 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설교할 때 그런 예를 들었어요. 소위 복음을 알고 십자가를 안다는 사람이 이 큰 부대에 자기가 들어 있고 그 안에 복음 집어넣고, 언약 집어넣고, 십자가를 집어넣고, 갈라디아서, 로마서 다 집어넣고 있다는 말이죠.

왜? 이런 것을 가지고 자기가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독한 자기 집착입니다. 십자가는 황산입니다. 황산이나 염산은 피부에 닿으면 피부가 녹아 버립니다. 아주 독합니다. 십자가는 그와 같습니다. 같이 들어가면 타죽어요. 우리 보고 죽으라고 있는 것이 십자가인데, 그 안에서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야 되는데 자신이 기어이 살기 위해서 계속 집어넣기를 시도하는 거예요.

결국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자기는 그대로 살아 있어요. 결국 이것은 한글자로 무엇이 되겠어요? 법이 되겠지요. 나를 살리기 위한 법적 조치가 되지요. ‘나는 십자가를 안다. 무엇을 안다. 무엇을 안다. 이것들을 챙겼으니 구원되었겠지.’ 이것은 자기를 위한 법적 조치가 되지요. 그래서 제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한거예요.

이것은 꼭 거북이 같다고요. “거북아! 거북아! 네 얼굴을 내밀어라.” 그러면 점점 더 고개가 들어가요. 두꺼운 껍질 안으로 더 들어가요. 쑤시면 더욱 더 안으로 숨어 들어가요. 지독한 자기방어입니다. 차라리 “나, 여기 있습니다”하고 나와야 돼요. “당신 옆에 붙어 있는 그 파스는 왠 파스입니까?” “황산이 묻어서 홀랑 타버려서 붙인 파스입니다.” “이쪽은?” “이쪽도 파스 하나 더 붙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거예요. 십자가 안에 들어오면 온 몸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나와야 돼요. 파스 냄새가 천지를 진동해야 됩니다. 파스가 뭔가? 예수님의 피입니다. 온천지에 파스를 붙이고 나와야 그 사람이 파스를 증거 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나는 죄인이고 파스 덕에 시원하다”고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고 거기에 십자가의 피를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율법으로 죄인 되게 하시고 거기다가 ‘예수님의 피의 효과가 얼마나 놀라운가를, 생명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으로 우리의 법적조치를 뚫었는가’를 증거 하게 합니다. 처음부터 인간이라는 것, 즉 흙에다가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더해서 인간되게 한 것은 인간이 살아 있기에 인간이 아니고 인간이 뭔가 증거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 된 겁니다.

뭘 증거 합니까? 그걸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증거 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이렇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선악과는 따먹지 말아야 되고, 따먹었으면 생명나무도 아울러 따먹을 수는 없는 겁니다. 그 두 가지를 통해서 무엇을 증거 하려고 합니까? 확실한 것은 신약에서 드러났지요. 뭘 증거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함이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는 말이죠. 분명히 자기가 있음에도 자기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겁니다. 달그락 달그락하는 질그릇에 그리스도의 형상인 보배가 담긴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유일한 인간종(種)으로 봅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아주 당연하게 지옥에 보내십니다.

인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죠. 그냥 흙이죠. 그리스도의 형상 중에서 심판하는 형상이 있거든요. 예수님은 심판하는 분인 것은 알려주기 위해서 그 사람들은 따로 지옥에 가서 심판의 본때를 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안 믿는 사람들이 받는 심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천국에 가는 사람은 ‘이것이 십자가의 효력이다’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천국에 가는 겁니다.

따라서 독자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좋으라고 만들어 버리면 그때부터 하나님과 사람은 따로 따로 놀기 때문에 이 땅에 신이 둘이 되는 것인데 그럴 수가 없잖아요. 신이 하나라면 나머지는 그 신에게 다 복속이 되어야 합니다. 그 한쪽신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저쪽은 피조물이고 이쪽은 창조주인 동시에 심판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그리스도라는 몸통에서 어떻게 두 언약이 나오는가를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서 두 개의 언약이 나옵니다. 한쪽은 약속의 언약이 나오고 한쪽은 육체로 나자, 혹은 율법에 속한 자가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4장 21절에 보세요.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되어 있어요.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해놓고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이렇게 이어진다는 말이죠.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요? 여러분! 아브라함때 율법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아브라함때는 율법이 없었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율법에 보니까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율법에 적혀 있지요.

율법 속에 아브라함 이야기가 들어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사도바울이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나 오늘날의모든 사람에게 어떤 난해한 해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나온 율법을 가지고 소급(미리 전에 있었던 일까지 다 잡아 당겨서 바라본다는 뜻으로)해서 전에 있었던 것까지도 다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율법에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아브라함보다 430년 후에 있으면서도, 나중 나온 것이 앞에 있는 아브라함까지 다 해석할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율법 뒤에 나온 예수 그리스도는 앞에 있는 율법도 해석하고 그보다 430년 앞에 있는 아브라함도 다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는 것이고 거기에 유대인들이 반대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브라함 - 율법 - 메시야’ 이런 순서로 봤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이 율법을 당기고, 아브라함을 당겨와서, 이 전체를 해석할 수 있고 그 해석만이 제대로 된 해석이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약속이 나오고 종의 아들이 나옵니다. “그러면 누가 종이고 누가 약속의 아들입니까?”라고 했을 때에, “이삭은 약속이고 종의 아들은 하갈의 자식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은 미흡합니다.

이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꽉 잡을 때 비로소 종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마엘만 종이 아니고 예수님만 약속이니까 예수님이 기준이 되어서, 율법을 의지하고 율법을 믿는 사람은 다 이스마엘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다 종의 자식이 되고 율법 아래 있는 저주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예수님 때문에 인류 자체가 두 갈래로 쫙 갈라지는 거예요.

한쪽은 약속에 속한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인데 이걸 가지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성령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사람이 한쪽에 있고 또 한쪽에는 율법이라는, 악령의 층을 뚫지 못해서 그리스도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그냥 율법에 속해서 ‘율법 지키자’는 것만 하는 사람은 하갈에 속한 자라는 겁니다.

하갈에 속한 원인이 무엇인가? 그들은 육체에 속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육체에 안 속했는가? 육체에 속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디에 속했는가? 그들은 이땅에 육체가 없다는 겁니다. 율법에 속한자가 육체에 속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율법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약속에 속한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이 약속에 속한 사람인데 그 어머니가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육체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지요. 결국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육체로서 율법을 행한다는 것과 상관없이 왜 성령이 따로 이방인들에게 와야 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제 18강 (이 근호목사, 2007년 4월 13일(2), 서울의존교회)
녹취 : 오용익


사도바울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 권위를 인정해 주세요. 그가 빈말을 한다든지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거든요. 사도바울이 전한 이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우리는 저주를 받습니다. 구원과 저주가 결정적인 문제로 되어 있는데 사도바울이 어떤 취지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를 우리가 모르면 안 됩니다.

바쁘다든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이런 것은 몰라도 된다’고 하면서 넘어가려 한다면 곤란합니다. 사도바울은 영적인 사람인데 영에 속한 사람은 영과 육 양쪽을 다 아는데 그 차이점을 다 압니다. 그 차이점이란 ‘개인적으로 나쁜 짓을 하면 육이고 착한 일을 하면 영이’라는 식으로 차이점을 두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개인의 역량, 노력, 시도는 전혀 상관 없습니다.

‘이미 이 세상은 영에 속한 인간과 육에 속한 인간이 갈라져 버렸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는 것은, “열심히 해보세요. 노력합시다. 같이 기도해 봅시다”는 식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정해준 그 경계가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 본인도 어쩔 수 없어요.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을 핍박하게 되어 있고 영에 속한 사람은 그냥 당하게 되어 있지요. ‘굴육’입니다. 그냥 당하는 거예요.

쉽게 하면 예수님가신 길이 , A - B - C - D 이런 식으로 십자가를 지고 갔다면, 성령께서는 우리하고는 의논하지 않고(성령은 우리의 개인 사정이나 안타까움같은 것을 보시는 분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가신 코스가 어떤 코스인지를 그대로 자기백성에게 적용시켜서 인도합니다.

예를 들어 A코스에 가면, “얘들아! 여기가 예수님의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이야기한 곳이야.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냐’라고 이야기를 했던 곳이야. 알겠지? 너희도 쓸데없는 것 가지고 예수님한테 시비를 걸지 마.” 하고 넘어 가는 거예요.

그리고 B 코스에 가면 “여기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예수님! 우리가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이렇게 까불다가 도리어 핀잔을 들은 곳이다”라는 식으로 인도합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가신 그 코스대로만 가요. 우리가 원하는 코스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그 코스 그대로 성지순례 하듯이 그대로 가버려요.


결국은 어디까지 갑니까?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간다는 말이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죄가 발각되겠습니까? 예를 들면 또 예수님께서 어느 도시에 가서 열심히 귀신을 쫒아내고 권능을 많이 행하고 병도 고치고 했건만 사람들은 들은 척도 안 해요. “호! 솜씨 괜찮구만. 내 병이나 고쳐보지.” 이런 식으로 하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봐라! 아무리 많이 권능을 행해도 깨닫지 못하면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한 곳이 된다. 하나님아버지여! 이것을 똑똑하고 배운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 같은 자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된 것입니다.” 이런 것 까지도 우리에게 알려줄 때 ‘아하!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또다시 깨닫게 되는 거예요.

성령께는 이미 확정된 코스가 있습니다. 쓸데없이 나의 코스를 만들어서 “처음에는 내가 사업을 해서 50억 벌고 그 다음에 100억, 다음에 1000억, 그 다음에 재벌이 되는 코스로 성령께서 인도하소서”라고 하는데 성령께서는 거기에 가담하고 편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비전을 가지고 꿈을 꿉니다. 그것을 육체라고 합니다.

사람은 일단 하나님이 주신 신체가 있으면 그것을 기초로 해서 자꾸 꿈을 꿉니다. 만약에 열일곱된 소녀라면 ‘우선 성적을 10등에서 2등으로 끌어 올리고, 다음에는 서울법대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는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그 뒤에 큰 회사의 2세를 남편으로 만나서 그 뒤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되리라’ 하는 코스의 생각을 할 수는 있잖아요.

‘키는 178센티미터가 되고 싶다든지 남편의 인물은 잘생겨야 된다는 것, 그 남편이 얼굴만 잘생긴 것이 아니라 너무 자비가 많아서 자기 손에 물도 안 묻히고 산다’는 것도 생각해 볼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가지고 응답해 달라고 금요철야기도회를 한다는 말이죠. 자기 육체의 한계를 못 벗어나는 이것이 육체의 한계입니다. 그 사람들이 말하는 영이라는 것은 자기 육체를 잘되게 하기 위한 영이기에 실상은 영이 아니고 육체에 속하는 겁니다.

영이라는 것은 자기 육체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자기 육체외부에서 난데없이 날아온 거예요. 은혜로 주신 것이 되는데 생각지도 않게 난데없이 날아온 것이 영이 되는 거예요. 난데없이 날아와서 나의 육체의 생각을 꺽어 버리고 굴욕적으로 만들고 나의 육체에서 나오는 소박한 꿈조차 박살내 버립니다. 그럴 때 그 힘이 바로 영의 힘인 것입니다.

예상치도 않았는데 남편감이 등장할 수가 있습니다. 전혀 자신의 타입도 아닌데 남편감이 등장하는 식으로 영의 힘이 작용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얼마나 실망하는지 모릅니다. 애 낳고 살면서 차츰 적응하니까 그 실망이 엷어지면서 실망으로 잘 안보이게 됩니다만 처음에는 실망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돈이 되나? 인물이 되나? 뭐가 되는게 하나라도 있나?’ 전혀 자기타입이 아니라서 실망덩어리인데 어쩌다 보니까 사건이 임해서 결혼을 하게 된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일하시는데 어떻게 일하시는가? 나의 소박한 꿈을 깨는 쪽으로 영적으로 일하십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트릭을 씁니다. ‘내가 원치 않는 것을 주께서 해 주신다면 미리 미리 내가 원치 않는 것만을 골라서 기도하면 그런것들만 제외되어서 영적으로 나에게 올것이 아닌가’라는 식으로 머리를 굴립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내가 병낫기를 원하지만 내가 영적인 것을 더 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게 된다면 병낫지 않아도 좋습니다’라고 미리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예상합니다. 주께서 내 쪽에서 예상한대로 기도를 반대로 하시기에 당연히 병이 나을 것을 계산하는 겁니다. 그런 계산은 누구나 다 합니다. 그것조차도 육에서 건져낸 가짜 영이 되는 겁니다. 진짜 영은 무엇이 빠져 있는가? ‘나에게 무엇을 해 달라. 내가 뭐 되게 해 달라’는 것이 없어지고 ‘주께서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셨군요. 주께서 친히 인도하시는군요. 주께서 나보다 더 힘이 세시군요. 주께서 나보다 더 열심이 많으시군요’라는 것이 느껴질 때 그것이 영적입니다.

‘내 기도대로 되었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내 기도 말고 주께서 기도하셔서 이런 결과를 저에게 은혜로 주셨군요’ 라고 느껴질 때, 그것이 영적인 겁니다. 철저하게 ‘나’라는 육체를 부정해 버리죠. ‘나’라는 육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아담속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모든 아담적인 요소들도 다 부정해 버리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각들, 즉 사랑, 우정, 가족, 교회, 천국 등의 모든 것이 기존의 내 육체를 근거로 해서 나 잘되기 위해서 던져진 사랑, 우정, 가족, 교회, 천국입니다. 반드시 날 집어 넣어 줄 때 좋은 천국이 됩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세계에 오게 되면 ‘나’중심의 틀이 깨져 버리고 예수님을 위한 천국, 예수님을 위한 교회, 예수님을 위해서 맺어진 가족, 예수님을 위하여 주신 사랑이 됩니다. 전부다 내쪽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쪽으로 가는 틀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나의 영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됩니다.

“집이 네 채가 있고 땅은 15만평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해서 벌었는가?”
“주께서 주시데.”
“그냥 주실 리가 있겠어? 기도를 했든지, 뭐가 있으니까 주셨겠지.”
“아니야. 그냥 주셨어.”
“그러면 왜 나에게는 그냥 안주시는데?”
“그야, 주님 맘이지. 안주는 것을 왜 나보고 그래?”

어떤 집사님은 기도를 많이 합니다.

“집사님은 기도를 참 열심히 하네요?”
“기도할 힘을 주시니까 하는 거죠. 제 힘으로 못합니다.”
“기도할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도 기도를 많이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하니까 기도할 힘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그냥 기도할 힘을 주시니까 기도를 많이 하게 되던데요.”

어떤 집사님이 헌금을 많이 합니다.

“집사님! 어떻게 그리도 헌금을 많이 하십니까?”
“주께서 헌금을 하라고 해서 했습니다.”
“와! 믿음이 참 좋습니다.”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셔서 그렇게 한 겁니다.”
“얼마나 겸손도 한지.”
“어허! 겸손한 것이 아니라니까?” 화를 막 내죠.
“겸손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헌금하도로 했다니까?”
“와! 저 겸손 봐!”
“에잇! 겸손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단 말입니다. 주께서 하셨다니까? 내가 육적으로 하면 한푼도 하기가 싫어요. 그런데 주께서 하시니까 주님 영광 위해서 주께 도로 드린 거예요.”

바라기는 그런 교인들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주께서 하실 문제라서 우리가 어쩔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이라면 지금은 주의 형상을 입어야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꾸 주께서 하신 것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훈련하고 수련을 쌓고 단련을 했기 때문에 반복해서 같은 행위를 하다 보니 어떤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그렇게 나왔다’는 가능성을 자꾸 심어주려고 해요.

그것은 법이 되어 버립니다. 기도는 하루에 몇 시간? 성경은 하루에 몇 장? 몇 분? 몇 시간? 어느 정도? 어느 만큼의 양? 이것은 법적으로 규정이 되어 버리죠. 그 법을 지키는 것을 성경에서 육체라고 합니다. 육체란 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주께서 법을 주셨다. 그러면 누가 지키는가? 내 육체가 지킨다’라는 그런 고리, 그런 관계가 필요가 없습니다.

왜? 법은 못 지키게 되어 있어요. 법을 지키려 하는 자체를 통해서 법에 종노릇 하는 인간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 자손 안에 법 말고, 곧 법을 지켜야 될 당사자인 육체 없이 하늘나라 백성이 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약속에서 낳아진 자녀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약속과 육체로 대비시킵니다.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는니라.”(갈 4:23)

이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한쪽은 약속에 속한 사람이 있고 한쪽은 육체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뭘로 구분하는가? 어머니로 구분합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이삭의 어머니가 누구입니까? 분명히 사라입니다. 그런데 이삭의 어머니가 사라가 아니라고 합니다. 사라는 그냥 비유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실체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실체는 어디에 있는가? 하늘에 있습니다. 사라는 비유인데 사라가 등장한 이유는 ‘하갈은 아니다’라는 이유 때문에 등장한 거예요. 이삭의 어머니도 아니면서 왜 사라는 등장해야 하는가? ‘적어도 하갈은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등장했다는 겁니다. 하갈은 철저하게 인간의 육체를 다 보여줍니다. 인간의 육체의 어머니가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전부가 다 하갈에 속하는 겁니다. ‘여자가 애기를 낳았다’ 하면 전부가 다 하갈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아기를 낳을수가 없습니다.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여자는 다 어디에 속합니까? 사라에 속합니다. 흔히들 말하는 불임여성들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아기를 낳을 수 없었는데 아기를 가진 사람이 사라에 속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아기를 가질 수 없었는데 아기를 낳았다.’ 이게 말이 돼요? 하나님의 율법 성경은, 이렇게 ‘말이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소위 ‘말이 되는 전체’를 다 저주해 버립니다.

소위 말이 된다는 그 자체를 전부다 영적이 아니고 세상 적이라고 다 매도해 버립니다. 인간의 존엄성? 인격? 품위? 체면? 그런 것은 사라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목사님!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믿으라고 하는 겁니까?”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사도바울이 사람을 개과천선한다든지 변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길에 떨어진 100원짜리 동전을 주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영적인가? ‘제발 영적인 사람이 되어 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영인가?’라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잘해 봅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이야기를 제가 했습니다. “열심히 합시다. 잘해봅시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누가 꽃봉오리인가? 애초부터 법 없이 생명을 얻은 사람이 누구냐?” 그 말입니다. “누가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 그 보배를 가진 자인가? 두꺼운 삽겹층을 뚫고 영적인 은총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가?”

이 땅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어떤 인간도 그 육체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것은 육체에 속합니다. 육체에 속한 사람은 이미 어머니가 이 땅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자력으로, 즉 육체의 능력으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통로는 이미 없습니다. 도리어 자기가 지키고자 하는 법에 종이 됩니다.

제가 지금까지 철학을 공부하고 이런 저런 학문을 연구해 보니까 이것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만든 법의 노예가 된다.’ 자기가 만든 양심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주인 노릇을 하려고 그렇게 애써도 자기가 만든 법에 의해서 스스로 노예로 전락하면서 살아갑니다. 극복도 못하면서 극복하면서 산다는 티만 내는 가증스런 위선자들의 집합체가 인간입니다.

성경말씀 어느 것도 못 지킵니다. 10% 지키고 90% 못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구절도 못 지킵니다. 대전에서 있었던 지난 십자가마을 수련회에서 로마서강의를 하는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이 지나간 시절의 유머라 별로 웃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소를 훔쳤는가?”
“저는 소를 훔친 것이 아니고 노끈(소에 매여 있는)만 훔쳤을 뿐입니다. 노끈만 훔쳤는데 큼직한 소가 붙어 왔습니다.”

이것이 지난 60년대의 개그인데 그때는 사람들이 많이 웃었습니다. 지금은 애들도 안 웃습니다. 율법 뒤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율법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안식일만 지키면 나머지 9개의 계명은 계속해서 차례차례 지킬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한 계명 하나 하나에 거대한 율법전체가 다 끌려온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몰라요.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황사현상인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스스로 법을 만들고 그 법 못 지켰다고 퇴근할 때 마다 이슬(술)로 삽니다. 아침 되면 미안한 마음, 참회하는 마음으로 양심을 풀고 또 다시 법을 지키는 법의 노예입니다. 자기가 만든 법에 스스로 수렁에 빠지는 거예요. 이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이 법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지고 ‘자유하는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참, 재미있지요. 자식이 없다는 자체를 무엇으로 봅니까? 자유라고 합니다.

“기록된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갈 4:22,23)

자유가 무엇인가? 자기 육체로부터 자유할 때 자유입니다. ‘내 육체가 어떻게 되든지 나는 상관없다.’ 이것을 자유라고 봅니다. ‘나는 내 육체하고는 상관 안 해. 나는 내 육체하고는 거래 안 해. 나는 내 양심한테는 묻지도 않아. 나는 나하고 안 놀아.’ 이것이 참 중요한 겁니다. ‘나는 나하고 안 놀아. 왜? 나하고 거래하는 분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게 하늘에 있는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

진정한 자유자, 사라 같은 분(사라는 비유니까)에게서 태어난 사람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고 그 사람만이 천국에 갑니다. 다른 사람은 지옥 갑니다. 이것을 양보할 수 없습니다. 때려죽인다고 해도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를 따라 난 사람이 있고 하나는 그 어머니가 하늘에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하늘에 있는 사람만이 천국가고 나머지는 다 지옥 갑니다.

“육체로 어떻게 종교적인 노력을 하자.” 그것은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이미 확정된 결과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그것을 우리에게 통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영적인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육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왜? 자기를 둘러싼 그 두껍게 둘러친 오존층 같은 그 세상신(악마)의 모든 술책을 완전히 뚫어서 영이 들어왔고 그 뚫린 과정과 절차를 다 알기 때문에 무엇이 육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영의 사람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사람의 육체에서는 무엇이 나온다? 법이 나온다. 법이 나오면 육체는 반드시 법의 노예가 된다. 계속해서 육체를 낳아봐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생물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은 죽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식이 있기 때문이다. 민들레는 죽지 않는다. 민들레는 퍼지기 때문이다. 고래는 죽지 않는다. 고래는 계속 번식하기 때문이다. 신은 영생불멸을 자손번식이라는 이름으로 주었다. 따라서 종교적인 영생이란 없다. 같은 종이 계속 번식하면 그것을 전체적으로 볼 때 개체는 죽더라도 전체는 살아 있으므로 그것이 영생이며 신의 뜻이다.”

이것이 맞는 이야기입니까? 그런 논리라면 짝짓기를 많이 하면 그것이 영생을 더욱 크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육체를 따라난 자식은 아무리 많은 자식이 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인간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과학자들은 존재로부터 시작합니다. “있잖아. 있는데서 또 있고 또 있으니까 그것은 있는 것 맞잖아.” 그런데 영적으로는 “있다고 하는 그것은 인정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있다”가 됩니다. “그리스도한테 심판받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진짜 예수님이 구원할 사람은 이 땅의 있는 데서는 없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능력에 의해서만 생긴 사람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봅니다. 왜? 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능력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있는데서 있는 것은 인간의 육체로 할 수 있지만 인간의 육체로 못하는 것은 누가 하는가? 그리스도가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는 것은 없는데서 생겨난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지 다른 사람은 안 된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어요. 아주 단호하게 도장을 박아 놨어요.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 1:9)

이것은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지난 수요일에 제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는 자기 육체를 통해서 선택을 강요받는다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이 중국집에 가보시면 거기서도 내부적인 갈등이 일어납니다. 심지어 부부간에 혹은 가족끼리 가면 중국집에 들어가기 전에도 싸우고 나와서도 싸웁니다.

“여보! 자장면을 시킬 것을 왜 짬뽕을 시켰을꼬.”
“짬뽕이 어때서?”

그런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는 선택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일 좋은 중국집이란 주방장이 주는 대로 먹는 집이 제일 좋은 곳입니다. 주는 대로 널름 받아먹으면 됩니다. 자기 육체의 선택권을 포기하고 주시는 대로 널름널름 받아먹으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유인이 되는 겁니다. 자유인이란 나의 육체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자유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이유가 내 육체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미 내 육체는 두가지점에서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 이미 선악과 따먹은 것을 취소할 수 없는 육체입니다. 또 하나, 내 힘으로는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그 육체를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았어요.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육체입니다. 하나님이 애초부터 인간의 육체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생명나무를 못 따먹도록 추방까지 시킨 상태에서 그 육체를 그대로 가지고 천당에 가겠다고 덤벼든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세상에 종교가 수십만가지가 있습니다.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내 육체로부터 시작된 종교가 다 거짓말입니다. “저리 꺼져!”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는데, “한번 봐 주세요”가 어떻게 됩니까? 말이 안 됩니다. 죽음 대기표 받고 번호 부르면 그냥 죽으세요.

이와 같은 이야기를 불신자가 들었다면 그가 어떤 소감을 말하겠습니까? 불신자는 아주 간편하고 기분 나쁘지도 않습니다. 괜히 이쪽에서 저쪽 기분 나쁠 것을 걱정했지 불신자는 기분이 나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 하나님이라는 것은 자기 육체를 위한 하나님입니다. 착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신입니다. 예수님이 와도, 성령이 와도, 성부가 와도, 천사가 와도 다 산타할아버지입니다. 이미 ‘내 육체를 위하고, 나를 위하는 신이다’고 우상을 확정지어놓았습니다.

이세상의 모든 법, 국가의 헌법을 포함한 모든 법은 반드시 그 앞에 무엇이 붙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만약에 우리나라의 세금법이 자기 맘에 안들면 다른나라로 이민가면 됩니다. 미국가든 호주가든 캐나다 가면 됩니다. 나를 위한 법이 아니면 그것은 법이라고 보지를 않습니다. 모든 법은 ‘나를 위하여’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공부해라! 공부하란 말이다!” 그 앞에 무엇이 붙어 있습니까? “우리 집안을 위하여.” 항상 그것이 붙어 있습니다.

“아침에 밥 먹고 가라!”
“왜요?”
“우리 집안(나)을 위하여.”

사도바울이 옛날에 그랬던 사람이었습니다. 법을 지켜도 ‘나를 위하여’ 지켰습니다. 그래서 “나보다 더 완벽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없다”(빌 3:6)고 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하면서도 항상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위해서, 자기 육체를 위해서’ 하는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고 난 뒤부터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고 난 뒤에, 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까지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것이 나를 위하여 내 육체를 위한 일이었다는 것이 한꺼번에 정리정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는 오직 그리스도를 좋게 하기 위한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사람을 좋게 하는 그리스도의 종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떤 인간과도 의사소통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길에서 돈 100원(바울같이 거듭난 영적인 사람) 줍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영적인 사람 쉽게 만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아예 기대를 하지 마세요. 기대가 없으면 주신 것도 은혜가 됩니다. ‘우리 교회 교인이 몇 명이 되어야 할 텐데.’ 이것은 중국집에 가서 괜히 짬뽕을 찾는 격입니다. 짬뽕이든 자장이든 주는대로 먹으면 됩니다. “형제여! 반갑다. 친구야.” 이러면 됩니다. ‘저 사람은 성도 되어야 하고, 저 사람은 절대로 성도 되면 안 되고’, 이런 식으로 자기 육체로 정돈에 나서면 안 됩니다.

이제부터 더 어려운 것이 나옵니다. 시내산과 예루살렘입니다.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5,26)

시내산과 예루살렘,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시내산안에 예루살렘이 포함되어 있고 이쪽 편에 그냥 예루살렘이 아니고 그 앞에 뭐가 붙어 있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붙은 것은 곧 무엇을 우리에게 요구합니까? “영적인 사람들아 너희들은 이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뭡니까? “아래에 있는 예루살렘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의 차이점을 알아야 된다”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그 차이점을 모르면 갈라디아서 4장을 그냥 건너뛰어야 할 판입니다. 이것을 건너뛰면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치게 되는 겁니다. 우선 시내산과 예루살렘, 이 두 가지가 나왔지요. 그에 앞서서 있는 두 가지가 있는데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와 선악과입니다. 서로 대립되는 둘로 내세운 것이 이런 것을 푸는 해석의 열쇠가 됩니다. 처음것만 열면 다음 것들은 자연히 풀리게 되는 그것을 열쇠라고 합니다.

그 열쇠의 첫 번째 포인트가 하갈과 사라입니다. 같은 여인인데 서로 대립되는 겁니다. 이 두 여자는 그냥 여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은 ‘자식 낳는 기능’입니다. ‘시내산예루살렘’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대조시킬 때 왜 위에 있는 시내산은 없을까요? 이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위에 있는 시내산’, ‘위에 있는 예루살렘’ 이렇게 대조되어야 할것인데, 밑에는 시내산이 있고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그런데 위에 있는 시내산은 없고 위에는 그냥 예루살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담긴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시내산부터 풀어야 합니다. 전 시간에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모세가 있고 율법이 있다면 나중에 오신 예수님이 율법을 해석하고 아브라함을 해석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율법속에는 아브라함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창세기나 신명기가 다 율법이 아닙니까? 그 창세기 이야기속에 아브라함이야기가 들어 있으니까 창세기가 율법이라는 말입니다.

시내산에서 무엇을 받았습니까?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시내산을 다른 말로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내산과 예루살렘의 차이가 뭡니까? 시내산은 율법이지만 예루살렘은 율법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일단계로 율법인것과 율법 아닌것의 비유가 이 지상에 있었다는 겁니다. ‘시내산은 율법을 대표하고, 예루살렘은 율법과 상관없이 존재하더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할수 있는데 율법과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이 예루살렘이 지상에서는 그냥 ‘율법과 관계없음’으로 되어 있는데, 이 율법 없는 것이 위로 갔습니다. “하늘에 예루살렘이 있다’는 말은, 땅에 있는 시내산과 땅에 있는 예루살렘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이고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모형은 실체가 드러나면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아파트를 시공하기 전에 건축설계의 모형을 그대로 지어놓은 축소모델이 있습니다.

그 모형이 좋다고 해서 그 안에 들어가서 살수는 없습니다. 걸리버 여행기에서처럼 소인국이라면 모를까 이 덩치로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습니다. 진짜 아파트를 놔두고 모형에 들어가서 살고 싶다고 한다면 매우 곤란한 일입니다.

“엄마! 나, 모형에 들어가서 살고 싶어”
“네가 개미냐? 거기 들어가서 살게. 그것은 진짜를 보여주기 위해서 잠시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진짜가 나타났으니까 앞에 것 둘은 사라져야 됩니다. 사라지는데 이 둘은 어떤 재료를 사용해서 비유를 나타냈습니까? 육체를 드러내서 사용한 비유 아닙니까? 진짜 하늘의 예루살렘이 오게 되면, 예루살렘이든 시내산이든 육체라는 이유 때문에 이 전체가 하늘의 예루살렘과 대비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성경해석을 영적으로 하자는 겁니다. 성경해석을 영적으로 해석한다고 기도하고 앉아 있자는 것이 아니고 언약적으로 하자는 겁니다.

언약적으로 하게 되면, 시내산이든 예루살렘이든 이 전체가 육체란 이유로 말미암아 하갈에 속하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사라에 속합니다. 시내산은 예루살렘과 비교해서 시내산은 율법이 있고 예루살렘은 율법이 없습니다. 율법이 없다는 쪽으로 비유하자는 것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무엇과는 상관이 일체 없다? 법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법과 상관이 없기 때문에 법을 지킬 당사자인 육체가 필요치 않습니다. 자, 여기 제 육체가 있습니다. 저를 어떻게 구원합니까? “‘나’라는 이 근호를 어떻게 구원합니까?”라는 말은 곧 이 육체가 구원받고자 해서 시도하는 것 밖에 더 됩니까? 그러한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육체가 무슨 구원을 받아?”
“제 육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육체는 육체라니까? 안된다니까! 구원은 육체 없이 되는 거야.”
“그런데 어떻게 하면 제가 구원받습니까?”
“똑같은 소리 또 할래?”

두 언약이라는 말은 ‘어떤 인간도 자기가 소속된 언약에서 못벗어난다’는 겁니다. 내가 언약을 이용해서 내가 구원받겠다는 방식은 언약에서 용납이 안 됩니다. 언약은 큰 강물과 같아서 휩쓸리는 겁니다. 큰 한강이 흘러가는데 그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하다가는 거기서 빠져 죽습니다. 그 물결이 위에서 밀어붙이면 그냥 딸려 들어가야 합니다. 언약이란 거대한 탁류와도 같습니다. 육체란 그 거대한 탁류 같은 언약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하나의 개체일 뿐입니다. 개체가 탁류를 이길수 없습니다.

두 언약의 강줄기는 그 원천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두 언약이 나왔기에 예수님이 작정한 언약을 어느 인간도 거역할 수는 없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천국이 주어지면 천국먹고, 지옥이 주어지면 지옥을 먹어라. 그냥 주는 대로 먹어라.” 물론 지옥 가는 사람이 그것을 기분나빠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에게 지옥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죽는 것 뿐이지 지옥같은 것은 신경도 안씁니다. 그러니까 기뻐할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뿐입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이 이 말을 왜 기분나빠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결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무시해 버립니다. 그 사람들이 지옥을 안 믿는 것이 아니고 믿더라도 내 입맛에 맞는 지옥을 자기가 만들어 냅니다. ‘나처럼 착한 인간은 천국, 나처럼 나쁜 인간은 지옥.’ 이런 식으로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지옥이 있기 때문에 거대한 탁류, 예수 그리스도가 만든 지옥은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있기는 있습니다. 어떤 예수? ‘날 위한 예수’입니다. 유대인들이 고대한 메시아는 자기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메시아였습니다. 다니엘에 보면 짐승이 나옵니다. 그 네 짐승에 대해서 해석이 역사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바벨론, 메대와파사, 헬라, 로마로 확정되었습니다. 짐승이 역사적으로 확정되었다는 말은 그 반대쪽에 있는 진짜 성도의 나라는 그 짐승으로부터 공격받는 쪽이고 그쪽이 확정된 성도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네 나라에 시달리는 나라가 누구입니까? 유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기네들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확정을 했습니다. 그들은 ‘인자, 메시아가 오면 마지막 네 번째 나라인 로마의 압제에서 자기들을 해방시켜 줄 것이고 그리되면 자신들이 제사장나라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해석에 대해서 어느 누가 봐도 반박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정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반박했습니까? 예수님이 반박했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해석한 것은 짐승쪽으로 해석한 결과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당신은 무슨 권리로 그런 권리를 하는가?”라고 물으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해석자”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뭐든지 예수라는 작자의 말을 안 들으면 무조건 이단이고, 예수의 말을 들으면 무조건 백성입니다. 누가 봐도 말도 안되는 독선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또 이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 소리를 들은 유대인들은 기가 찼습니다.

“이게 아직 안죽어 봐서 저런 소리를 한다. 한번 죽어봐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사흘만에 부활하리라.” 실제로 죽였더니만 이번에는 제자들이 나타나서 시체를 빼돌리고 나서 “예수가 사흘만에 부활했다”고 하더란 말입니다.

제자들도 유대인들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큰소리 치더니만 기어이 죽었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겁니다. 동행할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식사하면서 영안이 열리고 나서 보니 ‘부활하신 그 주님이 바로 그 주님’이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왜 인간의 모든 자기를 위한 성경해석이 이단일 수밖에 없는가’를 알았습니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예수님이 계셔서 세상의 모든 역사가 예수님 중심으로 움직이는데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범죄한 이후부터 전부다 예수님이 중심이 아니라 누구 중심입니까? 나 중심으로 전부다 바뀌어서 거기서 예수도 나오고, 성령도 나오고, 천국도 나오고, 메시아도 나옵니다. 전부다 뜯어보면 자기입니다. 자기집안, 자기교회, 자기 잘되는 것, 그게 바로 육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이렇게 어렵게 한 이유가 뭡니까? “진짜 영적인 사람이 누구냐? 그것만 나는 챙긴다.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 되려고 시도하는 그것을 나는 반갑지도 원치도 않는다. 진짜 영적인 사람이 누구냐?” 지금도 그 사람은 핍박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을 율법과 대비시켜 놓고 이 대비를 땅에서 하늘로 옮겨 간 것은, 인간의 육체로서 어떤 노력을 다해도 결국 하늘의 예루살렘에는 입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렇게 두 언약으로 설명한 겁니다. 어떤 인간도,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어떤 인간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에 머물고 육체의 한계를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 27절을 봅시다.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참, 대단히 어려운 말이 아닙니까? 잉태치 못한 자가 무슨 자식이 있습니까? 이것은 앞뒤가 안 맞습니다. 이것을 육적인 사람들보고 납득하라고 할 때 납득 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넘어가겠지요. 방금 읽은 대목의 정답은 간단합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못하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약속대로 반드시 사람이 못한다는 것만 골라서 다 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설명할 때 어떻게 설명하는가? “사람은 못하지롱?”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나타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약속의 계통입니다.

예수님아래서 육체에 속한 언약과 약속에 속한 언약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어떻게 구원하느냐? “사람은 못했지롱?” 하는 방법으로만 무조건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이 만일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수시로 무엇을 느끼느냐? ‘이것은 내가 생각해도 내가 구원된다는 것은 말도 안 돼. 내가 성경을 알기를 아나? 기도를 제대로 하기를 했나? 내가 구원된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공로로 된 일이야.’ 이것이 지식이 아니고 실제의 느낌으로 와 닿는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몰라! 하여튼 구원된 것은 사실이야. 그런데 이것은 내가 안했어. 주님께서 하셨어.”

“네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런 소리는 “그저 주께서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을 털어 놓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포도원비유에서 가장 늦게 와서 달랑 한 시간 일하고 한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은 사람에게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 묻습니다.

“너는 한시간만 일한 주제에 왜 더 많이 일한 우리하고 같은 품삯을 받았어?”
“나도 몰라. 다만 주인이 그렇게 주던데?”
“에이! 빽 썼지?”
“몰라! 주시니까 그냥 받았지 뭐.”
“너, 일한 것이, 한 시간 밖에 안 되잖아.”
“내가 받은 삯은 한 시간 일한 값이 아니고 그냥 받은 거야. 그냥 받은 것이지 한 시간 일했다고 해서 받은 것이 아니야.”

먼저 온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릅니다. 나중 온 사람들은 알죠. 이것이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거저 줬다는 것을 압니다. “일한 것도 없이 거저 의인되었다”(롬 4:6)는 사실, 아무 착한 일도 한 것도 없는데 그냥 의인되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가 다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받고 싶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서 아예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용서를 다 해버렸다’는 사실을 나중에 통보받는 겁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해소되는 겁니다. 해결과 해소의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면 문제는 문제대로 남고 해결은 해결대로 남습니다. 그런데 해소되어 버리면 문제자체가 날아가 버려서 문제가 아예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문제라고 여기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닌 것을 이야기해 줍니다. 평생 동안 살면서 울고불고 하는 것은 다 내 육체가 자아내는 것입니다.

세상사람은 전부 다 그리스도의 두 다리 가운데 한 다리입니다. 주님의 약속계통이냐? 아니면 육체계통이냐? 육체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그는 지옥 갈 인간이고, 나의 행함이 아니고 주의 약속에 의해서 구원되었다면 그 사람은 성령에 속한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이 부활하신 되에 그냥 쉬면서 노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영생주기로 작정한 사람,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다니면서 성령세례 주셔서 “너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다”는 것을 통보해주는 그 일을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되었다는 것을 평생토록 증거하고 자랑할수 있는 저희들 삼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