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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13, 14강 / 갈라디아서 4장 8절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갈라디아서

13, 14강 / 갈라디아서 4장 8절

정인순 2010. 10. 12. 10:53

http://media.woorich.net/~woorich1/study/seoul/seoul070209a.mp3
http://media.woorich.net/~woorich1/study/seoul/seoul070209b.mp3

 

녹취 : 오용익  
갈라디아서 제 13강

(이근호목사, 2007년 2월 9일(1), 서울의존교회)

갈라디아서 4장 8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8-11)

사도바울이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아들답다는 증거는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안 지키는 것으로 “야 정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다.”가 된다는 겁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사도바울이 사도로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다.” 혹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하는 기준으로 내세우는 것이, ‘날과 달과 절기(안식일, 유월절, 맥추절 등등)를 지키는가, 안 지키는가?’ 라는 것으로써 내세운다는 겁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안 지키는 것을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다. 반대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켜야만 된다고 생각하니 지금까지 내가 당신들에게 이야기 한 것을 허투루 들었습니까? 대체 무슨 소리를 듣고 어떤 맘을 먹었기에 소위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어떻게 감히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킬 생각들을 다 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말도 안 됩니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또 한 가지 이야기하는 것은, ‘복음을 모를 때는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에 대해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이제 성령이 왔고 복음을 알았고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기준을 알았으면, 이제는 자진해서 “사도님! 이제 그런 것은 안 지켜도 되네요” 라는 말이 서슴없이 나와 줘야 된다’는 거죠.

지금 이야기 한 것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도의 말을 듣고 정리해야 할 것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이, 단지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불신세계 전부를 대표하는 속성을 보여주는 종교가 되며 참된 신자의 세계는 일체 여기서부터 벗어났다’는 겁니다.

안식일을 비롯해서 ‘뭘 해야 되고 뭘 해야 되고’ 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불신세계의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신을 향하여 섬기겠다고 할 때에 반드시 나올 수밖에 없는 현상들이라는 말이죠. ‘신은 저기에 계시고 나는 여기에 있으니까 그 둘을 연결 지을 수 있는 관계라고 하는 것은 내 쪽에서 뭔가 지키고 행함으로 말미암아 저 위에 있는 신과 내가 연결 된다.’ 이렇게 여기는 것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현상이라는 겁니다.


특히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킬 때 핵심이 뭡니까? 그것을 지킬 때 빈손으로 나옵니까? 뭔가를 들고 나와요. 예물, 헌물을 들고 나옵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정성입니다. “받으소서.”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기 정성을 바치겠다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나는 복음을 모릅니다”하고 큰 소리로 외치는 것과 똑같은 소리라는 말이죠. 여기서 사도바울은 탄식을 합니다. “그동안 뭘 배웠느냐? 하나님을 알았느냐? 예수님을 알았느냐? 거짓말 하지 마라.”

“나는 하나님을 안다, 예수님을 안다.” 그렇게 백날 해도 “정성을 드리겠다”고 나온다면 전혀 복음을 못 알아듣는 사람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시편 50편 8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 이로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얘야! 네가 나에게 제물을 바쳤는지 안 바쳤는지 그런 것을 가지고 너를 책망하지 않겠다. 좋은 것을 바쳤는지 나쁜 것을 바쳤는지 그런 것 가지고도 책망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죠.

왜냐하면 “제물은 네가 나에게 가져다 바치기 이전부터 이미 그 짐승은 그 위치에 이미 존재해 있었다”는 겁니다. 이삿짐센터가 이삿짐을 옮긴다고 그 짐이 자기 것이 되는 겁니까? 주인의 것을 여기서 저쪽으로 이동시킨 것뿐이죠. 따라서 구약에서의 제물 바치는 마음가짐의 특징은, “주님의 것이 여기에 있었는데 이렇게 이동 했습니다”라는 그 의미밖에 없는 거예요.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 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 50:10-12)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왜 안 바치느냐?’라는 것을 가지고 저주하고 벌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어떤 특정 시간을 잘라서 “이 시간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출애굽기의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들은 무엇인가?(출 23:14-17) 그들이 모이는 장소가 인간의 정성과 노력을 대표해서 희생하는 그 장소에 그들이 모이게 됩니다. 이것은 드리는 쪽에서 뭔가를 드리는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축복하는 것이 아니고, ‘친히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린 것 말고 외부에서 따로 준비한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각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게 ‘대신 바침, 대신 드림, 대신 하나님께서 죽으심’입니다. 우리가 바쳐도 안 받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대신 드린 것만 받습니다. 그것을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에 올라와서 그 점을 확인하라는 겁니다. “받으소서” 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준비한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는 거죠.

날과 달과 절기와 해의 모든 행사를 한마디로 축약해서 말하면 그것을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데 자기가 아이디어를 낸 겁니까? 방주를 만들어서 구원한다는 그 기획이 노아의 머리에서 나왔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노아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방주를 만들어서 물에서 구원하겠다는 그 계획안은 순전히 하나님에게서 나온 계획안이죠.

노아가 따로 자기 머리에서 나온 계획을 가지고 “이 방주 가지고는 안 되고요. 구축함을 만들어야 됩니다”라고 했다면 그것을 언약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그 출처와 근원지가 일체 사람의 머리에서 안 나왔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할 때만 언약이라고 합니다. 또 한 가지는 그 언약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처음에 언약을 제시 할 때부터 그 안에 이미 담겨서 제공됩니다.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언약에 대한 내용조차도 사람에게서 나온 계획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계획안입니다. 두 번째는 그 언약을 성취하는 능력까지 병행해서 이미 언약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 증거가 뭡니까? 노아는 그냥 방주를 탔습니다. 심판이 왔을 때 노아는 그냥 방주 안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노아가 방주의 노를 저은 것이 아닙니다.

그 방주가 언제 육지에 도착하고, 언제 물이 빠진다는 모든 기획도 이미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 하나님의 계획속에 다 들어 있는 겁니다. 다시 갈라디아서로 돌아와 보면 여기서 사도바울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인간의 목적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목적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십니다.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서 구원받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 목적을 뭉개서 없애버리고 구원이란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구원받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무슨 방도가 없을까?’ 하고 있던 차에 ‘그래, 저게 괜찮겠다’ 싶어서 본인이 골라서 구원받는 것은 언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목적 입니다. 언약 속에는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낯선 목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든 그것은 우리의 자유지요. ‘하나님을 믿으면 이런 저런 좋은 일이 생긴다’고 상상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입니다. 막상 언약에 들어가서 그 언약이 실천되는 과정에서 교체작업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을 때 갖고 있던 그 마음가짐이 순전히 일방적인 나의 목적 이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목적에 의해서 그것이 깨지는 절차를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교회 어떤 집사님은 예수 믿고 나서 이런 좋은 일이 생기고 이런 좋은 것을 얻었다고 하던데 나도 은근히 그런 것을 한번 고대해 봐?’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는 그런 나의 목적이 하나님의 새로운 목적 앞에 무참하게 침몰 당한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침몰당할 때 무엇이 부서지고, 무엇인가가 우리 앞에 크게, 더 크게 부각되는 겁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은 뭉개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네가 못하는 것을 내가 다 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나날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불신세계가 날과 달과 해를 지킨다는데, 이것이 왜 불신세계를 대변하는 것이 되는가? 이것은 그 자체에서 문제점을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니잖아”라고 하는 그 반대쪽 세계인 복음의 세계에서 볼 때에 그것이 엉터리라는 겁니다. 복음의 세계가 뭐냐 하면, ‘인간이 못하는 것을 예수님이 다 하셔서 이루신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이 대신 했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란 ‘내가 할 수 없는데 누군가 내 대신 일을 다 처리했다’고 할 때이며 그것보다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짐이 가벼워지지 않습니까? 제가 안산강의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까? 미래의 일을 현재의 내가 나를 떠밀어서 미래까지 집어넣으려고 하니까 힘에 부치고 실수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낙담하는 겁니다.

미래에 계신 주님께서 그 미래에 완료된 힘을 가지고 우리를 잡아당기는 식으로 구원합니다. 미래에서 나를 구원하는 것도 모르고 현재의 내가 엉덩이 밀듯이 나를 밀어서 천국에 들어가려고 시도를 하니까 그게 얼마나 어설픕니까? 그렇게 해서 구원받겠다는 사람에게 물어 보고 싶어요.

“당신이 잘해서 당신을 구원 한다면서요?”
“그래요.”
“그러면 당신은 하루에 성경을 몇 장 읽습니까?”
“석장이요”
“다섯 장씩 읽으면 속도가 더 빨라질 텐데 석장만 읽습니까? 그러면 기도는 하루에 몇 시간씩 합니까?”
“두 시간씩 합니다.”
“세 시간씩 했다면 벌써 천국에 당도했지 않았을까요? 두 시간만 해서 됩니까? 좀 더 쓰시죠. 세 시간씩 하는 사람들 보면 미안스럽지 않습니까?”

좀 비꼬는 듯이 들릴지라도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요즘 ‘하이킥’이라는 드라마에서 잘 꼬는 인물이 나와서 “그 부지런한 선생님 나오셨냐?” 하고 비꼬던데 이런 경우에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자기를 대신할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이런 경우를 가지고 세상에서 뭐라고 하냐면 ‘대략난감’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나를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난감~하죠. 이런 사람들.

만약에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헌금 열심히 하고, 하루에 십일조에서 더해서 십의 이조를 하고, 전도를 많이 하는 것이라고 했으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사람이 불신세계의 사람이라는 욕을 얻어먹을 이유가 없어요. 약간 실력이 떨어진다든지, 조금 미흡하다는 욕을 얻어먹을지언정 불신세계라는 말을 듣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불성실하고, 구원된 신앙인은 아주 성실하기 때문에, ‘성실한 사람은 구원, 덜 성실한 사람은 덜 구원’이 되니까 덜 성실한 사람도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뭡니까? 예수님이 몽땅 자기가 대신 피를 흘리심으로 구원 받았다면 이 사람은 열심을 내면 낼수록 “나는 불신자입니다”라는 대략난감을 더욱 더 표내고 있는 겁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할 때 그 답변은 ‘당신은 아직 다 이루지 못했다. 지키려면 완벽하게 지켜야 한다. 다 못 지켰다. 그런 이유로 인해서 당신은 틀렸다”라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다 하신다는데 당신은 지금 뭐하고 있느냐” 말이죠.

“이미 천국에서는 주께서 대신해서 일을 다 치렀는데 당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습니까?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비판할 수밖에 없어요. 이것이 사도바울이 그 당시 불신세계를 향하여 퍼붓는 비판입니다.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일체 우리 자신에게 어떤 행위를 강요하거나 스스로 뭔가를 독려하는 것으로써 나를 천국으로 밀어 넣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단정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다는 그 소식이 들려오는 순간부터 우리는 손을 놔야 합니다. ‘내가 안 되는 짓을 하려고 애를 썼구나’ 하고 손을 놔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다’는 소식이 들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자기를 조금이라도 더 달라지게 변화시키겠다고 시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복음 밖에 있다는 뜻입니다. 전혀 복음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입니다. 불신세계에 그냥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면 왜 안 되는가? 왜 그것이 복음에 위배되는 것인가? 복음을 알고 하나님이 너무 감사해서, 이제는 구원받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성도로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감사의 현상으로서 특정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데 그게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지요.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지 말라”고 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어떤 목적을 안 버리고 있다는 겁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킬 때 그냥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은근히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예수 믿는 사람이고 그냥 감사한 마음으로 성탄절기를 지킵니다. 그게 왜 흠이 되고 비난 받을 일이 됩니까?”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이 뭘 놓치고 있습니까?

그런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을 하는 사람의 목적이 병행해서 수반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본인은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고 아주 고상한 목적이라고 장담을 해요. 그러나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목적은 이런 식의 영광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이 받은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사심 없이 하나님께 영광을 위해서 드린다’는 그것이 충분히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너의 기도가 영광이고, 너의 헌금이 영광이 되고 너의 찬송이 영광이 된다’는 것을 지지해주는 기준 삼을 만한 것들을 성경에서 수백 군데의 구절을 다 끌어내서 이것들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으면서 제시할 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참 어렵습니다. 쉬운 예를 들면 어떤 목사님이 복음을 알고 너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설교를 합니다.“여러분! 복음이 이것입니다.” 그때 옆에서,

“어이! 복음 아는 목사!”
“예!”
“이제는 목사를 하지 말지. 복음을 알았으니까.”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알았으니까 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요. 내가 달리 봉사할 것도 없고 말씀봉사 해야지요.”

이렇게 이야기 할 때 그러한 순수한 고백에 누구 토를 달고 누가 감히 시비를 걸겠습니까? “함께 더불어 영광 돌리세.” 이것은 전부 다 동의하고 논리상 맞는 이야기로 들리겠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을 요구 한 적이 없어요. 그렇게 복음 전하고 설교하는 목사가 영광 돌리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설교 하면서, ‘내가 설교 할 자격도 없는 쓸모없는 인간’임을 자각하는 겁니다.

방향이 정 반대죠. ‘나는 설교할 자격도 안 되는 인간이며 내가 설교를 잘했다는 이유 때문에 다음번에도 단에 세워진다는 것이 해당되지 않는다. 설교를 잘했다 혹은 못했다는 그것을 판단하는 것조차 그 자체로 나에게 죄가 된다. 설교를 어떻게 했든지 구원은 주님께서 하시지 내 설교와 전혀 무관한 사항이다. 왜? 나는 쓸모없기 때문에.’

세상의 논리는 ‘나는 쓸모없기에 주께서 안 쓰신다’는 논리인데, 하늘나라에서는 ‘나는 쓸모없기 때문에’라는 것을 깨닫게 하셔서 계속 쓰시는 거예요. 언제까지. 쓸모없는 것을 진정으로 고백할 때까지. 제가 말해 놓고도 너무 어렵게 이야기를 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말씀이 성도, 또는 말씀을 전하는 자, 설교자를 통과할 때 그냥 통과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위력이 이 성도와 설교자를 부수면서 통과한다는 말입니다.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말씀 전하는 자와 성도를 완전히 박살내면서 말씀은 말씀대로 전파되는 겁니다.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동원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그 말씀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나는 이미 복음 알았다. 그러니까 설교하는 것이 영광이다.’ 그런 영광은 성경에 없습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는 다 언약에 속합니다. 그것들은 다 모세언약에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모세언약의 달성자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언약의 첫 번째 원칙, 언약의 계획자, 언약은 누가 만들어 냈다고요? 하나님이죠. 두 번째 원칙, 언약의 완성자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죠. 그러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는 모세언약인데 그 언약을 누가 지킵니까? 언약은 레위인이나 제사장이나 이스라엘백성들이 지키는 겁니까? 결국 하나님이 지키지요.

하나님이 지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 당시 레위인이나 제사장보고 지키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지키라는 이유가 무엇이었겠어요? ‘우리 힘으로 못 지킨다’는 그 정도 겸손은 유대인들도 다 압니다. 왜 못 지키는 그것을 우리 보고 지키라고 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언약 지키는 주님과 우리 사이가 ‘못 지킨다, 지킨다’는 사이가 아니고 ‘우리는 죄인이고 그분은 의인’이라는 관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못 지키는 정도가 아니고 죄인이라는 겁니다.

‘한번 지켜보자. 꼭 지켜보자’ 하다가 ‘못 지키네. 그러니 죄인 맞네.’ 그런 식이 아닙니다. 못 지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죄인인줄 알고, 죄인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준거예요. 못 지킨다는 것과 죄인이라는 것과는 달라요. 못 지킨다는 것은 못 지킨다고 겸손해 하면 그만입니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네가 숙제를 할수 있나?
“선생님! 제가 숙제를 못 하겠습니다.”
“아이고! 겸손도 해라. 네가 숙제는 못했어도 인간은 되었구나. 왜냐고? 겸손하니까.”

이렇게 될 수가 있어요.

“수학숙제 해라.”
“제가 조폭인데요.”

이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저는 지금 선생님을 두들겨 패고 싶습니다”라고 적극적으로 죄를 드러내는 것 하고, “선생님의 명령하시는 그 사정을 제가 압니다만 제가 기초실력이 안되니 도저히 못 지킵니다”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 지키고 싶은데 정말 실력이 없어서 못 지킵니다”라는 답을 듣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것이 아닙니다.

“이 법 어느 놈이 줬나? 이 법을 누가 준거야?”
“하나님이”
“그 하나님은 가짜네. 인간을 이렇게 무시할 수 있어? 언약 없이 우리에게 양심이 있으니까 양심대로 행동해서 천국과 지옥을 우리가 결정하겠단 말이야.”

이렇게 나온단 말입니다. “탐내지 말라”는 율법이 주어지면, 어떤 경우에는 탐을 낸 것이 되고, 어떤 경우에는 탐을 낸 것이 되죠. “탐내지 말라”라는 율법이 주어졌을 때 탐심인 경우와 탐심이 아닌 경우의 결정을 누가 합니까? 다 본인들이 하잖아요. 본인들이 판단하고 결정해서 “주여! 저는 평생을 탐심을 내고 있군요.”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꿀밤을 줘 버리는 겁니다. 본인이 결정을 내려서 “저는 평생 탐심을 냈습니다”하는 그 법칙이 주님 보시기에는 말도 안 되는 엉터리 같은 자기 기준입니다. 우리는 “탐내지 말라”는 율법을 받게 되면 “저는 못 지켰습니다” 하는 겸손에 까지 머무는 것이 아니고, “정말, 하나님이면 다인가? 이렇게 횡포를 부릴거야?” 이렇게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주 고상하게 무엇으로 바꾸는가? “주여! ‘탐심하지 말라’를 지키려고 무던히 애를 썼는데 인간이 연약한 지라, 제가 천사도 아니고 신도 아니고 예수도 아닌데 어떻게 지키겠습니까? 못 지킵니다. 부족합니다.” 이정도 선에서 머물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에요. “이 법 어느 놈이 준거야? 나는 이 법을 외면하고 내가 따로 법을 만들거야.” 이 수준까지 내려가 줘야 솔직한 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신세계입니다.

선생님이 수학문제를 줄 때 “못 풀겠습니다. 답답합니다.” 이러면 착한 사람이죠. 그 정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아예 시험지를 엉망으로 찢어 버리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찢어 버린 거예요. “아! 문제 간단한 것을 가지고 괜히 고민했네. 성경 그깟 것을 안 본 것으로 하면 간단한 것을. 괜히 그것을 보고 ‘못 지켰네. 부족 하네’ 그렇게 할 것이 뭐가 있어? 처음부터 안본 것으로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문제지.”

적극적인 하나님에 대한 대적, 원수가 우리의 본성입니다. 어중간하게 걸치지 마세요. ‘부족하니 도와주세요’라는 겸손의 티를 내는데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더 내려 가야 됩니다.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듯이 더 지하로 내려가세요. 밑바닥을 치세요. 그것은 뭡니까?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내손으로 예수를 죽이고 싶었다.’ 그 선까지 우리가 손을 대야 되지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언약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지킵니다. 우리가 못 지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주신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죄를 규정하면 지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준 계획에 대해서 우리는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무시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한글타이핑을 빠른 속도로 하는 아이가 컴퓨터가 뭔지도 모르는 할머니한테 “할머니! 나처럼 타자 칠 수 있어?” 그러면 할머니가 “아이고! 안타깝구나. 내가 20년만 젊었어도 너같이 타이핑을 할 수 있는데” 하면서 안타까워서 웁니까? “얘야! 나는 그런 거 모른다.” 그러면 끝나는 문제 아닙니까? 인간들은 ‘예수님이라는 하나님은 도무지 내 취향에 안맞다’는 이것을 끝내 버려요. “예수님! 어떻게 하면 믿음을 지킬 수가 있습니까?” 그 사람은 신자입니다.

‘꼭 예수를 믿어야 되는가? 그냥 신을 믿으면 되지.’ 추상적인 하나님을 쥐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거부해 버려요. 그 당시 율법,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라고 준 것은, 인간들이 그것을 지킬 때 이미 목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 목적이 뭡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마저 지켜 냈다’는 그 자기 의로움이 누적이 되고 쌓여서 그것으로 하나님마저 내 앞에서는 입 다물게 할 수 있다고 보는 그것이 인간들 안에 숨겨진 채 내장되어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동기였습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그 동기를 폭로당하고, 오늘날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갖고 있는 상상의 세계, 우리 나름대로의 목적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 예수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하지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비타 500의 뚜껑을 못 열어서 쩔쩔 맬 때 “목사님! 제가 도와 드릴게요” 했다면, ‘아하! 저분이 힘이 세니까 이 뚜껑을 꼭 열어 주겠지’라는 기대와 목적을 가지게 되겠지요.

그런데 실컷 도와주겠다고 와서 그만 제풀에 죽어 버렸어요. ‘그러면 비타 500은?’ 하나님께서, “비타 500을 열려고 하는 그 목적이 뭔데?” 하십니다. 그 목적 자체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훼방하고 무시하는 자기만의 상상의 세계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대신 죽음의 세계이고, 그 세계는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로 인하여 우리의 무엇이 뭉개져야 합니까?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세계가 무너져야 하는 거예요.

구원받기 위해서는 내가 예수 믿어야 되겠다는 이러한 조합, 혹은 세트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생각한 그 목적과 전혀 엉뚱한 상상한 세계를 펼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 받겠다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 그 상상은 진짜 주께서 말씀을 줄 때 그것이 부서지는 겁니다. 어떻게? 내가 구원받고 싶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창세전부터 선택해서 구원되었다는 쪽으로 바뀌어야 되는 겁니다.

시작한 분도 하나님이고 중간도 하나님이고 마감도 하나님이 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시작한 분은 여기 와 있지만 그 다음에 마중 나가는 것은 내 몫이고 그 다음에 둘이 합작해서 함께 동행해서 나간다’는 이런 시나리오는 성경에 없습니다. 없는데도 그런 생각을 말씀을 보는 이유는 아직까지 우리의 개인적인 목적이 안 부서졌기 때문입니다. 뭔가는 노림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였던 바리새인들의 노림수였습니다. 그것은 ‘은혜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영광 돌린다’는 그 틀입니다. 그 틀이 ‘은혜로 구원받고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킴으로서 영광된다’는 틀인데, 그 구조를 가지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초등학문”이라고 합니다.

초등학문이라는 것은 구원의 보조적인 의미가 아니라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 3절에,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여기에서 초등학문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 종(a slave)이라는 개념입니다. 종이라는 개념은 결코 아들일수가 없다는 것을 확정짓는 노예문서 같은 겁니다. “너는 종이야”라는 말은 “너는 아들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아들이 될 수 없다는 확정입니다.

초등학문은, 다른 말로 하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킬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초등학문은, 종으로 하여금 영원히 아들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영역 안에 갇혀 있는 셈이 되는 거예요. 어떤 이는 “우리가 이 초등학문의 인도를 받아서 밖으로 나가면 될 것 아닌가요?” 라고 합니다. 종은 인도를 받아서 밖으로 나갈 수 없어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현재 이 초등학문에서 ‘이게 초등학문이구나. 이제 중학교학문을 배워야지’ 라고 생각하는 초등학생이 있다면 그 사람은 중학생이 되어도 초등학생입니다.

‘이정도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배워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배워도 초등학생입니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종이고 대학생이 되어도 종이고 맨 종입니다. 그러면 초등학생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가 이쪽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들의 영이 왔을 때만 아들 되는 거예요. 아들의 영이 왔을 때는 대신 죽으심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이런 인식의 구조, 틀 자체가 날아가 버립니다.

아무리 “내가 예수 믿고 십자가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우겨도 이런 구조를 유지하는 한 그 사람은 아들이 아니고 종입니다. 초등학문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거예요. 성령을 못 받아서 여기서 벗어나지를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대신 책임지시는 분이 있으니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할 말은 그것 밖에 없어요. 대신 다 처리하는 처리반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살아도 상관이 없다니요? 그러면 죄를 마구 지어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걱정을 하시면서 그런 걱정을 하면 곤란합니다. 왜? 걱정한다는 것은 이 초등학문을 안 벗어나려고 걱정하는 것 밖에는 안 되니까요.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벗어난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자는 겁니다. “과거에는 이랬더랬습니다”라는 쪽으로 이야기를 하자는 말이죠.

과거에 조심스럽게 살고, 하루에 성경 세장씩 읽고, 예배 꼬박 꼬박 참석하고요. 그렇게 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인줄 알았죠. 그런데 그렇게 지켜야 된다는 초등학문적인 인식의 틀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나름대로의 상상한 예수님을 거기에 그냥 끼워 맞추려고 애를 쓴 겁니다. 옛 부대에 새 술을 담으려고 시도를 하다가 부대가 찢어진 꼴이 된 겁니다. 새 부대도 주님이 주셔야 되고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새 술이 새 부대에 담겨서 와야 되는 겁니다. 오게 되면 뜯어보니 거기에 “대신 다 처리했다”가 들어 있습니다. ‘대신 죽었다’는 말은 ‘어떤 죄가 있든지 그 죄는 이미 대신 처리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고 되어 있지요. 그게 누구의 목적입니까? 우리목적 입니까, 하나님목적 입니까? 하나님 목적 아닙니까? 그 하나님목적이 왔을 때 우리가 따로 우리의 목적을 다 융성하도록 하기 위해서 할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를 않아요.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하는 분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계약을 해서 처리했는데 제 삼자가 건방지게 왜 낍니까? 끼어들겠다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초등학문적인 아이디어의 가치를 매겨달라는 식으로 우기는 것 밖에 안 되잖아요. 지금 두 분이 계약을 하는데 제 삼자가 끼어들지 못합니다. 두 분이 서로 의논해서 계약 다 끝나서 천국가고 지옥 가는 일이 다 결정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나름대로의 자기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게 초등학문인데 누구든지 초등학문이 있었습니다. 율법의 종이었습니다.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아마 영광이 될거야’라고 나름대로 정리된 것이 있었는데, 저쪽에서 예수님과 하나님이 다 의논해서 “네 죄는 다 처리했고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다”고 하면서 왔을 때는, 그 때까지 내가 만들고 유지했던 목적은 깨어 져야지요.

그래서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설교 본문에 설교하는 본인이 깨어져야 된다고요. “주여! 설교는 합니다만 이 설교 잘했다고 해서 주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스스로 느끼면서 설교를 해야 돼요. 왜냐하면 요한복음 6장 38절, 39절에 보면,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함이고 아버지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되어 있단 말이죠. 이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잖아요. 그런데 그 목적을 누가 방해합니까? 목회자들이 전심으로 방해를 해요. “‘주여! 제가 심방을 못 갔습니다. 아마 그 사람은 다음 주부터 교회 안 나올 거예요. 제가 주의 일을 방해 했습니다’라고 여기는 그 생각으로 나의 일을 방해하는 구나.”

내가 심방을 안 갔다고 해서 구원될 사람이 구원 안 되는 법이 없고(왜? 주님의 목적이기 때문에), 내가 심방 한번 더 간다고 해서 구원 안 될 사람이 더 된다는 그런 법은 없는 거예요. 괜히 목사 본인이 근심을 하는데 그 근심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목사 본인이 초등학문적인 사고방식(뭔가 지켜야 된다는 것)으로 내가 몇 번 심방해서 몇 명을 교인 만든다는 규칙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굴레를 뒤집어 씌워서, “주여! 제가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습니다” 하면서 혼자 까불고 닦달내고 엎어져서 울고 기도하고 철야하고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이 “아이고! 한심스럽다. 이 일이 니 할 일이가?(경상도 말로) 걱정을 해도 내가 하지 왜 네가 하느냐?” 이 말이죠. 대신 죽으심을 잊어버릴 경우에는 반드시 초등학문이 툭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주부가 아침에 설거지를 하면서 “주여! 건강 주셔서 지금 설거지를 잘 하고 있습니다. 이 설거지를 잘함으로 말미암아 저 큰 딸(설거지 한번도 안하고, 청소도 안하는)이 아름다운 이 부모의 모범적인 모습을 본받아서 나중에 내가 없더라도 설거지를 잘 하게 하옵소서. 제가 지금 잘하고 있지요?”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이 옛날에 익숙했던 초등학문을 그대로 발휘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초등학문을 안할 수는 없습니까?” 깨어져야 될 입장에 있기 때문에 안 할 수가 없어요. 이것이 또 어려운 것인데 이 어려운 문턱을 또 넘어야 됩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죽을 때 까지 초등학문대로 살아야 합니다. 왜? 그래야 깨지기 때문입니다. 초등학문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초등학문 짓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벗어났기 때문에 ‘이것은 초등학문 짓이다’ 하는 것을 성도만이 확인합니다.

그리고 성도가 아닌 사람은 실컷 초등학문 짓을 하면서도 그게 초등학문 인줄을 모르고 있어요. 성도와 성도 아닌 사람의 차이가 그 차이입니다. 성도는 자기가 하는 모든 짓이 사도바울이 그렇게 지적했던 초등학문의 수준이라는 것을 압니다. 왜?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초등학문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씁니다. 심지어 일부러 율법을 안 지키려고 애를 써요. 방탕한 생활을 해보려고까지 합니다. 그런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이야기는 “이렇게 하시면 초등학문에서 벗어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구원받은 분들 맞지요?” “예.” “그렇다면 초등학문이 뭔지 알려 드릴까요?” “예.” “이것이 초등학문입니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것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이런 것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조로 되거든 ‘아하! 이것이 초등학문이구나 우리가 옛날에 저기에 얽매여 있었지.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구원 되었다’고 그리스도만 증거 하는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크리스마스 안 지킵니다”라는 것이 초등학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크리스마스를 지킵니다”라는 것이 초등학문입니다. “저는 십일조를 안 합니다.” 그게 초등학문입니다. 왜? 십일조를 안 하는 것이 영광 되는 줄 알고 착각했다 이 말이죠. 자기의 목적이 십일조 안함으로써 영광돌리겠다는 목적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끝난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름대로 뭔가 하고 안함으로써 영광돌리겠다’는 것이 주님의 대신 죽으심을 모독하는 하나의 초등학문이 된다는 말이죠.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 같으면 자기의 하는 행동을 십자가로 판단해 볼 수 있어요.

십자가로 판단해 보면 초등학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생 살아가는 인생 전부가 초등학문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늘 얻어먹는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주여! 저 쓸데없는 인간 맞습니다. 설교 백날 하고 강의를 백날 해 봐야 쓸데없는 인간입니다. 지금이라도 ‘그만!’ 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참 잘 하셨습니다’ 하고 박수치겠습니다.” 이런 태도입니다. 복음을 알게 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 생각이 안 들고, “주여! 제가 설교를 열심히 해서 교인들이 은혜받고 감동을 했는지 설교 후 점심 먹을 때 ‘오늘 목사님 설교 좋았다’고 칭찬을 했는데 그 다음 주일 되니까 열 댓명이 쑥 빠졌습니다. 이래서 무슨 보람으로 주의 일을 하겠습니까?” 이렇게 나온다면 이 사람은 지금 무엇을 노렸습니까? 하나님만의 언약에 자기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고 착각을 한 거예요.

다가오는 2월 18일이 설날이죠? 설날이 오면 목사님들이 비상이 걸립니다. 주일 낮 예배를 몇 시에 할 것인가? 과연 오후 예배를 할 것인가? 어떤 교회는 교회 올 교인이 몇 안 되기에 아예 그날 예배를 폐지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반대의견도 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 식으로 설날은 예수님이 만든 것도 아니고 세상풍속인데 그 풍속에 의해서 교인들이 과연 좌지우지 되는지를 봐서 교인들의 믿음을 파악할 수 있는 멋들어진 기회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그날 예배에 참석여부를 가지고 정말 핍박이 와도 순교할 믿음의 사람인지, 믿음 있다고 표시만 내는 거짓말쟁이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예배를 밀어붙이는 교회(목사)도 있더라는 겁니다. 그것은 둘 다 아무 의미 없는 우리(교회)만의 목적입니다. 그 목적은 주님의 목적 앞에서 의미 없습니다. 의미 없다는 말은, 막상 그때가 되어 보면 안한다고 해도 올사람은 오게 되고, 안한다고 해도 오게 되면 예배드리기 마련입니다. 하자고 해놓고도 한명도 안 오면 자연 안하게 되겠지요. 주시는 대로 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자, 말자’가 별 의미가 없어요. 얼마나 쉽습니까?

사람들은 현재에서 미래로 밀어내는 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 계획에 자꾸 의미를 줘요. “주여! 이런 계획을 세웠습니다. 오늘부터 하루에 성경을 몇 장 읽겠습니다.” 그렇게 계획을 세웠지만 주님께서는 그 계획을 초등학문으로 취급해서 그런 것을 지키는 와중에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얼마나 좋은지를 우리 성도에게는 깨닫고 또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예수 피 믿었으면 걱정을 하등 하지 마시고 그냥, 그냥 사시면 됩니다. 그냥 사시면 말씀으로 매일 같이 깨어지게 되어 있어요. 깨지는 그 재미, 그 재미로 삽시다. 스스로 규칙 만들고 그것이 의미 없음이 드러나고, 또 규칙 만들고 의미 없음이 드러나고요. 그렇게 깨지는 재미가 아주 쏠쏠합니다. ‘내 대신 돌아가신 분이 계시는데 왜 내가 쓸데없이 계획 세워서 나댔는가?’ 그렇게 깨지는 재미.

‘애들은 이렇게 키우겠다’는 자기 계획과 규칙이 애들이 뜻대로 안자라고 말 안 듣고 공부 못함으로 말미암아 깨어지는 그 재미. ‘남편을 이렇게 다루겠다’는 그 계획이 전혀 안 먹히는 그 재미. 그게 얼마나 재미있다고요. 사람이 깨어지는 재미를 느낄 때, 비로소 그는 자존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갈라디아서 제 14강

(이근호목사, 2007년 2월 9일(2), 서울의존교회)

전 시간에 강의한 내용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초등학문에 관한 것입니다. 전 시간에는 간단하게 했는데 이번시간에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서 좀 더 더 깊이 있게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모든 이름으로 예수님에게 무릎을 꿇고 예수님이 일하신 예수님의 희생의 공로를 높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죠.

모든 이름, 지옥에 간 사람이나 천국 간 사람이나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들이(코끼리같은 동물들까지도) 예수님 일하신 공로를 찬양하고 굴복하고 그분의 이름을 드높일 때,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드높일 때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율법(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이 다 율법에 속하거든요)의 목적은 역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진 겁니다.

인간에게 왜 율법이 왔는가? 율법이 인간에게 오지 아니하면 인간은 예수님의 공로를 높일수가 없어요. 왜 그런가? 예수님의 공로는 죄인인 사람을 의인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들어가 버리면 어떤 죄인도 의인되는 겁니다. 이것을 드높이는 것이 온 피조물의 존재목적입니다. 죄인이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의인되었다. 온 피조물, 심지어 지옥간 자들도 여기에 대해서 찬양을 해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의 노력 없이는 지옥도 못 간다는 글을 썼습니다. 함부로 자기 혼자 지옥도 못가요. 하나님이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지옥도 가는 거예요. 죄인을 의인되게 해서 예수님의 공로를 높여서 의인되게 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죄인이라는 것이 성립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의인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삼종세트입니다. 죄인 되어야 돼요. 죄인의 괴수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지금 하는 말에 대해서 인간의 목적으로 한다면(인간의 목적 자체가 죄인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니까 자기는 그렇게 하는 것이 죄인인줄을 모르죠), ‘죄인되게 한 것을 의인되게 했다’고 하니까 자기가 스스로 죄인 되어 보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시도하게 됩니다. 점잖은 사람이 술을 마신다든지, 일부러 사창가에 간다든지, 십일조를 안내는 식으로 한다든지, 예배 참석 안하고 놀러 간다는 식으로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니까, “이 근호 목사님이 가르칠 때 죄인이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더욱 더 죄인 되어서 더욱 더 영광을 돌리려고 한다”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것이 로마서 3장에 나오고, 로마서 6장에 나옵니다. “사도바울아 네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더욱 더 죄를 지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네?” 이런 논조로 사도바울을 반대하는 쪽에서 공격을 해 댑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롬 3:7-8)

혹시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시거든 여러분이 스스로 복음을 잘 전했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복음을 잘 전한 경우에 반드시 복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러한 반응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반응이 안 나타나거든 뭔가 복음에 대해서 약간은 양보를 했다는 생각을 하시고요.

죄가 더한 곳에 무엇이 넘친다고 했습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롬 5:20)고 사도바울이 이야기를 하니까 “그러면 은혜가 더욱더 넘치도록 유발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 더 죄를 더 지으면 되겠네” 라는 반응을 그 당시 사도바울을 반대하는 쪽에서 제시 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복음을 잘 전했는지를 측정하는 방법(완벽한 측정법은 아닙니다만 간접적인 방법이고 대략 측정하는 방법입니다만)은 상대방이 그렇게 나올 때, “잘 전했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죄인은 누가 하는가? 우리가 합니다. 의인은 누가 하는가? 우리가 합니다. 예수님 공로는 예수님이 합니다. 우리는 불신자에게 약을 올리는 셈이 됩니다. “나, 죄인이다.” 그 다음에 이것을 타넘어서 “예수 안에서 나, 의인이다” 하면서 의인되려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나, 그거 안 해도 의인이다”라고 약을 올리시고,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그것보다 더 큰 죄인이다”라고 이야기 해 주시면 되는 겁니다.

이 두 몫 ‘죄인, 의인’은 우리가 해야 되고, 그럴 경우에만 예수님의 공로가 외부로 증거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놀랍게도 이 공식을 나에게 끄집어 내려와서 나를 구원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어요. 이것, 죄입니다. 방금 이 공식을 그대로 가져와서 나를 천국에 집어넣으려고 애 쓸 때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을 가리우는 겁니다.

‘죄인’이라고 할 때,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죄인이라는 뜻을 품고 있어요. 그래서 이 원리대로 이야기를 할 때 오해를 많이 받습니다. 이 대목을 이야기할 때 사람이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것, 헌금을 해도 죄고, 설교를 해도 죄고, 전도를 해도 죄라는 것을 많이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 대목을 근거로 제가 욕을 많이 얻어먹습니다. 물론 하도 듣다 보니 욕으로 들리지도 않고 감사함으로 듣습니다.

죄라는 것을 죄인은 몰라요. 이게 문제입니다. 죄를 모르기 때문에 ‘죄를 더 지으면 되겠네’ 라는 철없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가만있어도 죄인데 구태여 죄를 안 짓고 있어도 이미 죄인인데 왜 구태여 죄를 더 지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쓸데없는 짓들을 합니까?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이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성경을 우리 입장에서 보지 마시고 멸망당하는 입장에서 한번 보세요.

 

아람군대 수십만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었잖아요. 그 아람군대의 수십만 군대 중에서 처자식이 있는 사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지요. 아람군대의 아내들이 자식들을 낳았을 것입니다. 애기 낳는 것이 죄입니까, 죄가 아닙니까? 죄가 되는 겁니다. 왜 죄입니까? 죄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식을 낳도록 한 거예요. 세상 전체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내가 자식 낳은 것이 잘한 일이다’라고 나의 목적을 위해서 세상이 있고 굴러가고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좀 비정하게 들리십니까? 참 냉정하게 들리지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전 세계 모든 피조물의 존재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높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제가 처음에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상당히 동의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애를 낳는다는 것이 죄라고 하니까 영 동의를 할 수 없다는 눈치인 것 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유 없이 죄가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 하는 겁니다. 심지어 성도조차도 죄가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해서 태어나야 되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됩니까? 그 죄가 있어야만 그 죄를 통해서 예수님의 공로가 부각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죄인 되게 하신 우리를 주님의 공로만 들어와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기에 천국에 가서 면류관도 벗어 버리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찬양하기 위해서 우리는 피조물로 태어나서 죄인이라는 입장에서 의인되어서 천국에 들어가야 되는 아주 고착된 팔자를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참 냉정하고 냉혹합니다. 어떤 위대하고 큰 목적이 있으면 그 아래 있는 것들은 전부 다 무시당하는 거예요. 유명한 드라마 ‘주몽’에 보면, 소서노가 주몽하고 결혼할 때 예소야가 아이를 안고 울지요. 주몽하고 소서노하고 결혼식을 할 때, 예소야가 “주몽 이놈! 이 아이는 네 자식이다.”


이렇게 혈기 부리는 식으로 나가버리면 내부 분열이 일어나서 다물군이 고구려를 수립할 수 없습니다.

예소야는 자기 남편이 결혼해도 눈물을 훔치고 뒤돌아서면서 자신은 그 현장에서 서서히 물러가 없어져야 되는 겁니다. 왜? 큰 이념을 위해서 자기는 희생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든 피조물은 무릎을 꿇게 하고, 모든 피조물의 이름은 오직 예수 이름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할 이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은 뭡니까? “내 아들의 이름만 높인다면 그것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영광이다”라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 창세기부터 나오는 이 모든 프로젝트를 위해서 우리는 죄인인 채로 이 세상에 태어 나야만 하는 겁니다. 죄인인 채로 태어난다는 말은 저주받아 마땅한 채로 태어나야만 한다는 겁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 믿지 않고 지옥에 간다 할지라도 주님께 영광 돌려야만 되는 그런 피조물입니다.

여러분! 지옥 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줄 압니까? 아닙니다. 지옥을 확정하고 난 뒤에는, 자신을 지옥에 집어넣은 주님에 대해서 찬양하는 집단이 지옥 간 집단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나를 지옥에 보내다니. 분하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영원토록 중얼거리고 짜증내는 곳이 아니라, 확정된 상태에서는 결국 땅 아래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나, 하늘에 있는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주가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런 조치, 이런 배치를 취하신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무슨 나라입니까? 아들의 나라입니다. 골로새서에 나오죠.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된 나라입니다. 천국이 예수님의 나라라는 말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나름대로 생각한 그 천국, 그 것조차도 죄가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고 천국을 그냥 하늘나라로 생각해 버리면, 그 하늘나라에 누가 들어가게 됩니까? 내가 들어가죠. 그러면 그 천국은 누구 중심입니까? 나 좋으라고 있는 나라가 되어 버려요.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천국이 아닙니다. 이것은 극락사상이고 모든 종교에 있는 ‘영혼불멸설’입니다. 죽기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죽어서라도 내가 계속 존속해야만 한다는 그런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것 때문에 종교가 있는 거예요. 종교란 소멸이 아니라 영원토록 뭔가 존재한다는 것을 제공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있는 소멸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종교라는 것이 있는 겁니다.

일본은 종교가 15만가지나 됩니다. 골라잡으면 되는 것이 많습니다. 이것들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번 태어난 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영원히 소멸되지 아니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천국에 가도 자기세계입니다. 아들의 세계, 예수님의 세계가 아니라 자기세계입니다. 예수님의 세계가 되려면 ‘나’가 생각나지 않아야 됩니다. 그 대목이 고린도후서에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절부터 보면,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한사람을 안다고 했어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하죠.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아들에 이끌려 간지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 12:1,2)

결국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사도바울 자신입니다. 그런데 셋째하늘 안에 있을 때는 셋째하늘 안에 있는 내가 나라는 생각조차 허용된 적이 없다는 말이죠. 지금 14년 전의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사람을 내가 안다. 그 사람이 나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올라갔을 그 당시에서는 ‘내가 누구냐’에 대해서 더 이상 관심 둘 이유도 없고 관심 두는 것이 허용된 적이 없는 세계에 올라간 거예요.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라고 이어집니다. ‘모른다’고 해놓고 ‘안다’고 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나’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지금 ‘나, 나,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이 현재의 세계에서는 ‘나’라는 것을 버릴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림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초등학생들에게는 약간 어려울 수 있지만 나중에 엄마 아빠에게 다시 들어 보세요. 배가 고프다고 합시다. 혼자 있을 경우에 ‘아 배가 고프구나’할 때 여기에 뭐가 필요 없습니까? ‘나’가 빠져도 괜찮아요. 배고픈 사람은 혼자뿐이기에 ‘나’가 필요 없어요. 그런데 여러 사람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뭘 집어넣어야 합니까? ‘내가 배가 고프다’라고 집어넣어야 됩니다.

이것은 ‘내가’라는 쓸데없는 것을 집어넣는 거예요. 배고프다고 이야기 할 때, 이야기한 그 사람의 배가 고프다는 것이 되는데도, 굳이 ‘나’라는 것을 집어넣는 거예요. ‘나’라는 것을 쓰지 않더라도 내가 느끼는 것을 다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목마르다. 아프다.’ 다 ‘나’에요. 그런데 여기에 ‘나’라는 것을 반드시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너’가 아니고 ‘나’라는 것을 따로 구축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은 ‘나’라는 것을 따로 딱 잡지 아니하면, 의사소통도 안 되고, 사회관계도 안 되는 그런 세계입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나’라는 것을 집어넣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만 아시면 되었지 왜 우리가 남을 의식해야 됩니까? 여러분! 그런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왜 우리가 남을 설득해야 합니까? “선생님! 저는 시험 볼 때 컨닝 안하고 공정하게 시험 쳤습니다. 정직하게 해서 이 점수가 나왔습니다.” 이럴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것이 천국이에요.

왜 그렇습니까? 주께서 구원했지 내가 노력해서 구원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내가 노력했다면 “하나님! 저 사람이 왜 왔습니까? 들어오려면 ‘나’나 들어와야지 왜 쟤가 옵니까? 저는 지상에서 이런 일을 했고 저 사람은 이런 일을 안했으니까 천국은 ‘나’만 해당되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천국을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나를 내세우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아시는 분을 데려가면 그게 천국입니다.

따라서 천국의 주님에게 매여 있으면 더 이상 ‘나’라는 말이 필요치 않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나’라는 것을 구태여 안 나타내도 되는 그런 생활을 해야 돼요. 사람이 내가 발생되면 그 다음부터 힘이 듭니다. ‘나’를 세우려면 ‘나’를 지켜야 되고 간수해야 되고 잘 살아야 되고 남에게 주눅 들지 않아야 되고요. ‘나’라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내가 골칫거리 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나’를 괴롭히는 것이 ‘나’입니다.
‘나’를 생각하니까 거기서 ‘나’의 근심이 따라 나오고 ‘나’의 비극이 나오고 내 팔자가 나옵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아이고, 나의 인생아! 아이고, 내 자식아! 아이고, 내 마누라야!” 내가 있으니까 자꾸 따라 나오는 거예요. “내가 응원하는 프로야구팀, 내가 응원하는 한국축구가 잘해야 할 텐데.” 다 내가 있으니까 다 따라 나오는 거예요. “왜 내 나라는 기름이 안 나오느냐? 왜 우리 민족은 남북이 갈라졌는가?”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천국을 모르는 교단에서는 남북통일을 위해서 기도하잖아요. 남북통일을 위해서 하는 기도가 응답이 되겠습니까? 응답이 안 되죠. 왜? 남북통일 하겠다는 말에 무엇이 들어갑니까? ‘나’가 들어가잖아요. 그래서 복음을 모르는 교회들은 ‘우리 교회 부흥시켜 달라’고 기도해요. ‘우리’라고 하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천국에서는 ‘나’ 혹은 ‘우리’가 해당이 안 됩니다.

천국에는 교회만 있지 우리교회가 없어요. 천국에는 중심이 없습니다. 어떤 특정 교회가 중심이고 특정인물이 중심이 되는 그런 것이 없어요. 예수이름으로만 구원되고, 예수님이 알아서 건져오기 때문에 “주여! 주여!” 손든다고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알아서 데려가는 세계이기 때문에, 점차 점차 “‘나’라는 것은 쓸데없는 대명사가 붙는구나”라고 이해하시면 되는 겁니다.

 

 



 

‘나’라는 것 때문에 괴로워요. 이것은 내 땅, 이것은 내 것, 전부 다 ‘나’가 들어가잖아요. ‘내 인생은 이래야 되는데 왜 이 모양이냐? 나는 의대를 들어가야 되는데 왜 의대를 또 떨어졌느냐. 에라, 죽어버리자.’ 자기에게 집착을 하니까 자기가 알아서 ‘나’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와 더불어 폭발하는 식으로 자살하잖아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라는 것이 없는데. 그래서 ‘칸트’는 말하기를, “‘나’라는 것은 귀찮은 것이다”라고 했어요.

제가 <현대철학의 단초>(단초라는 말은 단추가 아니고 기초라는 말입니다)라고 해서 헤겔과 하이데거 철학에 대해서 십자가마을에 글을 올려놓았지요. ‘칸트’는 말하기를 “‘나’라는 것 때문에 고민인데 없어지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모르겠다”는 말이거든요. “모르겠다”고 할 때, ‘헤겔’은 말하기를 “‘나’라고 집어넣는 것은 반성하라고 준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라고 집어넣은 것은 줘놓고 ‘버리라’고 하기 위해서 ‘나’라고 집어넣었다.” 이것이 ‘헤겔’의 철학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하이데거’의 철학은 “‘나’? 그것은 없어질 것이다. ‘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를 만든 그 밑바닥 ‘신’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요즘 시시한 신학자들은 그 사람들에게 다 배운 겁니다. ‘하이데거’에서 나온 것이 ‘불트만’이고 그 뒤의 신학자들이 다 거기서 배웠어요. 헤겔은 너무 어려워서 제대로 못 배웠어요. 헤겔에서 십자가신학까지 나오니까. 헤겔은 하나님의 절대적 부정성을 말해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를 비우고 부정해서 우리를 구원했다. 부정된 자기를 가지고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구원해 냈다.” 이것이 헤겔의 철학입니다.

성경구절 하나 안 들추고도 철학적으로 다 해명해 버렸어요. 이미 헤겔이나 하이데거는 신학을 다 한 사람들입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요지를 다시 정리해 봅시다. 그림으로 하면 쉽습니다. 현재 ‘나’가 여기 있잖아요. 현재 있는 ‘나’를 자꾸 밀어서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가는 거예요. 지금 이 노력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가 되는 겁니다. 왜 죄가 되느냐? 주님이 하시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도록 되어 있어요.

미래의 ‘나’는 무엇이 없습니까? 미래의 ‘나’는 ‘나’가 없지요. 미래의 천국에서는 ‘나’가 없어지고 그리스도가 아시는 사람이 되었잖아요. 그래서 따로 ‘나’가 누구냐고 할 것 없이 이미 주께서 다 아십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이사야의 특징이 뭡니까?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것이 특징이었어요. “나를 위해서 누가 갈꼬?” “제가 여기 있나이다.”(사 6:8) 그래서 이사야가 순교를 해도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주께서 다 아시는데요.

여러분!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 사람을 원망했습니까? 원망 안했지요?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이렇게 했지요? 왜 그렇게 했습니까? 주께서 아시고 ‘나’라는 것을 버리기 위해서 주께서 알아서 일을 벌이신 것이기 때문에 내 목적을 꺾어버리고 주의 목적을 그냥 받아들이니까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언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느끼냐 하면, ‘나’라는 것이 생각나지 않을 때, 그때 천국의 묵시가 여러분 속에 작용하고 있다고 믿으셔도 좋습니다. ‘나’라는 것이 생각이 안나요. 그러니까 내가 걱정할 것도 없지요. 내가 있어야 어떤 걱정을 하고, 내가 있어야 어떤 결정을 하겠는데, 내가 없어지니까 결정할 것도 없어지지요. 결정할 것이 없어지니까 ‘잘했다, 못했다’가 어떻게 됩니까? 그것도 없지요. 만약 내 결정이 있다면 그 결정한 것에 대해서 ‘잘되었다, 못되었다’가 되는데, ‘나’가 없으니까 ‘나’의 결정도 없어지고, 결정이 없어지니까 ‘잘했다, 못했다’도 없어지는 거예요.

‘잘했다, 못했다’가 없어지니까 자신을 자책하지 않고 그냥 감사가 나오지요. 이것이 한 2초 갑니다. 2초 가면 다시 원상태로 되어서 또 내가 결정합니다. ‘오늘은 뭘 해야 되겠다’고 결정합니다. 그렇게 결정하고 저녁이 되면, ‘오늘 아침에 이렇게 결정했는데 그것이 몇 개는 되고 몇 개는 안 되었다. 내가 왜 이 모양일까?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렇구나. 내가 왜 이렇게 게으르지? 이래 가지고 내가 하나님의 복을 받겠어? 나는 나쁜 놈이야’ 하고 ‘잘했다, 못했다’ 하는 거예요.

‘잘했다, 못했다’ 하는 그 자체가 사실은 건방을 떠는 겁니다. 다 못했는데 뭘 잘한 것이 있습니까? 그저 감사할 뿐이죠. 스스로 자책하면서 ‘하나님! 두 번 다시 이런 짓은 안 하겠습니다.’ 이렇게 수정합니다. 수정한다는 그 자체가 아직도 ‘나’를 버리지 못하겠다는 말이죠. 이것은 현재의 ‘나’를 억지로 미래로 밀어붙이겠다는 거예요. 힘만 들죠. 여러분! 젊을 때는 자기의 소원대로 됩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고 온몸이 쑤시게 되면 만사가 귀찮습니다.

여고생의 소원중의 하나는, 자기는 병원에 입원해서 하얀 침대에 누워 있고 선생님과 친구들이 꽃다발 가지고 문병 와서 위로의 노래도 불러줄 때 “선생님! 오셨습니까?”(힘없는 소리로) 하면 선생님이 “수연아! 어서 나아서 공부 열심히 해야지”하고 친구들이 “수연아! 보고 싶었다. 너의 빈자리가 그렇게 클 줄 몰랐다”는 이런 소리 듣기를 원하고 상상하잖아요. 그런데 막상 아파보세요. 사람들 오는 것도 귀찮아요. 다 귀찮아요.

아프다가 좀 낫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이제 나았으니까 놀아줄 사람이 필요하죠. ‘이것들이 내가 아픈데 오지도 않아?’ 그런 식으로 나옵니다. 진짜 아프면 만사가 다 귀찮아요. 무슨 말입니까? 자기가 결정할 것이 없으면 ‘옳다, 그르다’도 날아가 버립니다. 지금 내가 생생하게 살아 있으니까 ‘옳다, 그르다’하지만, 만약에 90살이 되어서 하는일 마다 엎어지고 자빠지고 죽을 때가 다 되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이 “할머니! 육교로 가셔야지 왜 도로를 무단으로 횡단하십니까?” 해도 그런 소리가 아무 소용없습니다. “내 맘이다. 왜? 너도 늙어봐라. 육교로 갈수 있는가? 못 간다.” 자기 맘대로 입니다. 북핵문제? “난 몰라! 김정일이고 뭐고 난 몰라! 만사 귀찮아.” 드라마 보는 것도 아직 볼만 하니까 보지요. 진짜 나이 들면 드라마 보는 시간이 자는 시간입니다. 내용이고 뭐고 아무것도 관심이 없어요.

점차 ‘나’가 사그라지는 순간, ‘나’가 소멸되는 순간, 그 순간이 원래 하나님이 의도했던 죽어 마땅한 죄인의 진면목입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하고, 죽어서도 지옥가도 마땅한데 웬 은혜인지. 웬 사랑인지 주님의 십자가가 있어서 지옥 가지도 못하게 만들고, 죽은 우리를 하늘의 영광으로 다시 돌변하게 해 주겠다는데 내가 요청한 적이 있습니까, 돈을 써서 뇌물을 먹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에게 거저 주겠다는데 그냥 받는 거지요. 그냥 받을 뿐입니다.

“고맙습니다”하고 받을 뿐이지 뭘 거기에 생색을 내면서 “착하게 살겠습니다. 바르게 살겠습니다. 앞으로 성경 두 장 읽겠습니다” 합니까? 그런 쓸데없는 오기는 부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남자가 여섯 명이나 되었어요. 요한복음 4장 시절에 여섯 명이지 예수님 십자가에 부활하고 난 뒤에 몇 명이 더 붙었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 버릇 어디 가겠습니까? 제가 예상하기는 아마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 만난 뒤에 열댓 명 더 만났을 것 같아요.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 만나는 그 전까지의 관심사가 뭐였습니까? “내가 목마른데 어떻게 하면 생수를 얻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귀찮게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될 수 있습니까? 관심사가 전부다 ”내가 어떻게 편하게 삽니까? 내가 어떻게 자기 정당성을 가질 수 있습니까? 내가 남자가 여섯이나 된다고 해도 너무 심하게 닦달 내지 마세요”라는 자기변호와 자기사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지난 과거가 어떠하든지 물동이를 버려 버리고 “심봤다!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는 그 소리 밖에 안했습니다. 아마 물동이를 버리고 왔기 때문에 시어머니에게 많이 당했을 거예요. 더 착해진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요한복음 8장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이 예수 믿고 난 뒤에 다시 간음을 했겠나, 안했겠나?” 이렇게 물으니까 답변이 “그것은 그 여자 맘대로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정답은 “주님 맘대로 입니다.” 왜 처음부터 주님 맘대로 였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그 여자는 자기 맘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내가 언제쯤 태어나게 됩니까?”라고 물을 수도 없어요. 왜? 창세전부터 택한 사람은 어느 시점, 어느 마을에 태어나는 것도 이미 창세전부터 확정되어서 태어나서 사랑받기로 되어 있고, 그 사랑이 와서 그 이후로 주께서 자아가 없어지는 방향으로 인도하셔서 오직 “주께서 구원하셨습니다”소리만 하면서 천국에 합류할 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킨다”는 말은, 하나님의 목적은 외면하고 나름대로 또 자기 세계를 정립하려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짓이 되는 겁니다. 그런 것을 안 지키는 법칙을 사수하는 그것도 또 문제가 됩니다. 안지 킨다는 그것이 또 새로운 지킴이 되니까.

“그러면 목사님!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주께서 알아서 여러분을 자아가 별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닫는 식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항상 ‘나’라는 것이 안 깨지기 때문에 ‘나’라는 것을 내세우시고 내세운 그 ‘나’는 항상 깨질 만반의 준비를 하시면 되는 겁니다. ‘나는 지금부터 성경 다섯장을 읽겠다’고 마음먹으면 처음에는 약간 진지하게 읽어요. 그런데 이것이 한 두번 하게 되면 마치 과업을 이룬 것처럼 됩니다.

처음에는 성경 다섯 장을 읽는데 보통 진지하게 읽으면 1시간 정도 걸립니다. 그런데 그것. 이 숙달이 되면 1분만에 다 읽어 버립니다. 다 아는 내용인데요, 뭐. ‘다 읽었다. 숙제 끝!’ 뭐든지 그래요. 복음을 아는 교회 와서 어떤 사람은 울어요. “세상에 평생에 이런 말씀을 언제 들어 봤는가! 주여, 이 교회에 보내주셔서 복음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런 마음이 딱 한달 갑니다. 처음에 예배에 올 때 11시 예배 같으면 10시 30분에 옵니다. 30분 전부터 와서 “주여 감사합니다. 이런 교회 보내 주셔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분이 두 달 지나면 11시 10분에 옵니다. “차가 밀려서---.” 그런데 그분이 자기 신상에 사건이 터져서 어떤 일이 생기게 되면 또 일찍 와요.

그래서 제가 박사교회에 있을 때 하루도 안 빠지고 늘 새벽기도회를 인도했는데, 새벽기도회에 늘 오던 사람 말고 평소에 안하다가 갑자기 오는 사람이 등장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뭔 일이 터졌구나. 그런데 몇 주 가겠는가?’ 딱 1주 나오고 그 다음부터 안나옵니다. ‘아, 문제가 해결 되었구나.’ 자아를 버려야 하는데 자아를 버리지 못하고 자기 목적을 위해서 자꾸 하나님을 도용하는 식입니다.

자아를 없애 버리면 나머지는 두 가지 노선밖에 없습니다. 이 강의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니 바짝 정신을 차려 주시기 바랍니다. 자아가 없는 상태에서는 예수님의 목적을 위해서 마지막에는 한쪽은 천국으로 한쪽은 지옥 가야 되지요? 그래서 “나는 어느 쪽으로 넣어 주세요”라고 할 수 없고 일방적으로 예수님께서 언약에 속한 사람, 하나님의 약속에 속한 부류와 율법에 속한 부류로 두 종류로 나눠 버렸어요. 모든 인류를 청군 백군 나누듯이 쫙 나누어 버렸습니다.

한쪽은 천국 가기로 작정된 사람이고, 한쪽은 지옥가기로 작정된 사람으로 처음 태어날 때부터 쫙 갈라져 나옵니다. 여기서 자아가 있는 사람은 저에게 대들어요. “목사님은 하이퍼(초) 칼빈주의입니다. 말은 맞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사상이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 말은 되는데 너무 심하십니다. 너무 극단이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잖아요. 이 목사, 당신 말대로 한쪽은 천국가기로 한쪽은 지옥가기로 이미 확정되었다면 그것만 달랑 남기고 성경에 나오는 많은 명령들과 많은 지시들(무엇을 하라)은 다 매직으로 그어야 되고, 찢어서 없애버려야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들거든요?

그렇게 대드는 이유는 아직도 무엇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까? ‘나’가 있어서 일단 ‘나’는 확보하고 ‘내가 천국에 갈까? 아니야. 지옥도 한번 구경해야지. 아니야. 천국에 가야지.’ 이렇게 ‘내가 결정하도록 좀 하나님께서 자유라는 영역을 좀 허용을 해 주시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아니냐.’ 이래 나와요.

이것이 ‘칸트’의 윤리에 나옵니다. 칸트의 윤리관입니다. “무한한 신은 알수 없다. 다만 신이 준 것은 판단력뿐이다. 신은 우리가 접근 할 수 없다. 왜? 너무나 위대하고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조건적으로 윤리 도덕을 행해야 한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알려면 선과 악이 성립되고 마지막 심판이 심판답게 되려면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여지를 줘야 나중에 잘못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있지, 억지로 강제로 로봇처럼 다루었다면 마지막에 시행하는 심판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칸트의 주장입니다.

심판을 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불러다가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는 겁니다.

“어이!”
“예!”
“너는 내가 준 자유를 가지고 이따위로 썼기 때문에 너는 지옥이야.”
“아이고! 그때 내가 제대로 자유를 사용할 것을 함부로 방탕했구나. 아이고! 할 수 없지.”
“어이! 너는 이리 와. 내가 준 자유를 가지고 제대로 사용했구나. 너는 천국에 가라.”
“주님 주신 자유를 가지고 와! 천국 가는구나. 역시 그때 자유를 날 위해 쓰지 않고 주님 위해 쓴 것이 참 잘했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에는 무엇이 전제되어 있습니까? ‘나’가 있고 내가 있으니까 ‘나’에게 허용된 자유라는 것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포기 못한 채 먼저 내고 있고 난 뒤에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의 나름대로의 자유가 있어야 하고, 그 자유가 있다면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도 부여해야 된다는 거죠.

이것이 평등의 원리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못할지언정 행할 수 있는 기회는 부여하자는 기회균등의 원칙이라는 것이 민주주의에 나오죠. 머리가 안 따르고 실력이 모자라서 못하는 것은 자기 잘못이지만 애초부터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위배되기에 기회를 주는 자유를 허용하자는 것이죠.

그것을 그대로 하나님나라에 적용시킵니다. 하나님도 처음부터 지옥 갈 사람을 확정하는 식으로 하지 말라는 이야기죠. 아무리 사랑, 사랑, 십자가 이야기를 해도 본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서 나는 그것을 거부한다고 했을 때 “그래 이놈아 이제 혼 좀 나봐라. 네가 지금 헛다리를 짚었다. 네가 큰 실수 한 거야. 내가 그때에는 두 팔을 벌리고 환영하면서 오라고 했지만 이제는 네가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해도 너는,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는 핑계를 할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앞뒤가 맞다고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봅시다. 방금 한 그들의 주장이 맞는 것인지요? 피조물이 존재하는 이유가 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을 알기만 하면 방금 이야기한 그러한 반발이 일어날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 밖에 없지, 따지고 들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면 그 자유를 가지고 잘했으면 복을 주셔야죠” 하는 식으로 대들지 않는다는 말이죠.

마태복음 25장 36, 37절에 보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할 때 천국 가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의아해 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자유를 주셨으니까 주께서 어려울 때 돌보고 주께서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겠습니다,. 주의 형제에게 한 것이 주께 한 것이 되니까 제가 예수 믿는 형제에게 제가 이런 식으로 하겠습니다”라고 했다면 “얘야! 네가 목마를 때 마시게 해주었고 내가 벗었을 때 입혔느니라” 할 때 “예! 제가 진작에 알고 그렇게 했지요” 이렇게 나올 겁니다.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오히려 반문을 하지요. 뭐라고 반문 합니까? “제가 언제요?” 경상도 말로 “어데예?” 전라도 말로 “무엇이 라고라고라고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마 25:37-39)

의인은 그냥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냥 살아간 그 모든 행동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데 사용하게끔 하신 것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결국 마지막 심판때 까지 주님은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공로를 덧입혀서 그들을 구원하는 겁니다. 그 공로를 버린 사람은 말하기를, “주여!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본인이 알아서 주님을 위해서 일했다면 “아아! 그때 고아원에 기부금 보내준 것 그것을 주님께서 아셨구나” 이래 될 텐데 그게 아닙니다.

“아아! 그때 안 입고 묵혀 두었던 옷을 베트남에 보내주었는데 그것이 주님을 위해서 옷 입힌 것이구나”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마지막까지 그냥 살았는데 그 모든 주님의 공로가 그런 식으로 영광을 돌리도록 조작했다는 겁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지옥 가는 사람들은 더 억울하죠. “제가 언제 악한 감정 품고 예수님께 악 쓰면서 대든 적이 있습니까? 그런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죠.

“내가 주릴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마 25:42-44)

그런데 이 반발에 대해서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고 합니다. 결국은 “무엇을 입혔고, 먹였고” 하는 거기에 무엇이 들어가면 안 됩니까? “내가 입혔고, 내가 먹였고, 내가 마실 것을 주었습니다”라는 것이 천국에서는 용납이 안 된다는 겁니다.

“주께서 입히게 하셨습니다.” 딩동댕! 그것이 맞는 말입니다. “주께서 주의 형제에게 먹이게 하셨습니다.” 딩동댕! 그것이 맞는 말이에요. “주께서 나를 가지고 옥에 갇혀 있는 주의 형제를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믿어지고 느껴질 때 바라기는 우리 의존교회와 여기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그것이 바로 천국 가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나’가 없어지는 겁니다. 있는 나를 없애려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깨어져야 되죠. 바라기는 우리 의존교회와 여기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매일 같이 깨어지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뭔가를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써, 대신 피 흘리심으로써 거저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영접하는 순간, “내가 무엇을 했다”는 것이 의미 없이 깨어져 버립니다. 그것이 한 2초 갑니다. 돌아서면 내가 또 툭 튀어 나옵니다. “주여! 주님께서 대신 죽으심을 제가 알았습니다. 제가! 저, 참 기특하죠. 내가 그것을 눈치 챘잖아요.” 또 내가 튀어 나와요.

“내가 알았으니까 이제 내가 안 것을 가지고 복음을 열심히 전하겠습니다.” 그래 놓고는 목사 같으면 ‘이제 심방을 두 번 다녀왔으니 다음 주에 나오겠지’하는데 다음 주에도 안 나옵니다. ‘아하! 주의 성도였지 내 성도가 아니었구나’하게 됩니다. “내가 심방을 하지 않았더라면 심방한 효과를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인데 ‘내가 심방했다’는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부터 은연중에 심방한 값을 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했구나. 와! 이 나쁜 놈! 내가 나쁜 놈입니다.”

그러면 그때 왜 심방했을까? 아아! 주께서 시키셨구나. 내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나’라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나’는 늘 깨어져야 할 대상이기에. 깨어져도 괜찮기 때문에 깨어지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약속에 속한 자와 율법에 속한 자를 나누는데 율법에 속한 자는 지켜야 하기 때문에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엇을 먼저 설정해야 됩니까?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다면 구원받는 당사자가 설정되어야 합니다. 누구입니까?

‘나’가 있어야 되고, 약속에 속한 사람은 무엇이 없어져야 됩니까? ‘나’가 필요치 않지요. 왜? 약속을 이룬 분은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약속을 받는 하나님이지, ‘나’는 약속을 만들어 내는 사람도 아니고, 지키는 사람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약속이 와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이삭의 자손이 따로 있고 이스마엘의 자손이 따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이 만들어 낸 사람과 내가 나를 지키는 사람, 이 두 종류로 죽 나눠집니다. 그래서 약속에 속한 사람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 고백해서 ‘나’를 버리게 되고, 율법에 속한 사람은 ‘내가 이만큼 충실하게 교회 잘 다니고 예수를 믿었는데 설마 나를 버릴까?’라고 자기 자신을 더욱더 공고히 합니다. 그렇게 ‘나’를 공고히 하게 되면 ‘나’앞의 누구와 경쟁상대가 됩니까?

‘나’앞에는 ‘너’가 있지요. ‘나’혼자 있으면 ‘내가 배고프다’는 소리를 안 하잖아요. 자기 혼자 있으면 “어이! 나! 나, 배고파.” 이런 사람은 없잖아요. 그냥 “아이고! 배가 고파” 하지요.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는 외부에서 “누가?” 할 때는 “내가 배고파. 내가”라고 하는 겁니다. 약속에 속한 상태에서는 ‘나’라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요. 왜? 주께서 만드신 작품이 ‘나’이기 때문에 구태여 나를 끄집어 낼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속한 사람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기 때문에 기어이 ‘나’를 설정해야 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가’ 비교해서 경쟁해야 합니다. 제가 지난주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타인이 나를 힘들게 해요.” 나만 혼자 살면 편하고 집에 혼자 있을 경우에 파자마 바람으로 있어도 상관없는데, 갑자기 외부에서손님(타인)이 오면 갑자기 옷을 갖춰서 입어야 되요. 나를 힘들게 해요.

여자들이 집에 있으면 화장을 안 합니다. 밖에 나갈 때는 화장을 하지요. 집안사람은 다 자기식구지만 밖에 나가면 전부 남의 식구 아닙니까? 흉보잖아요. 나를 지켜야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어요. “타인보다 더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에서 실망하는 ‘나’가 자기를 힘들게 한다”고 했습니다.

‘과거에 내가 이렇게 살지를 않았는데 내가 왜 이 모양인가? 앞으로 내가 이렇게 되고자 했는데 왜 나는 그렇게 못되는가?’ 자기가 자기를 힘들게 해요. 자기가 자기 목적을 만들어서 힘들게 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내가 어떤 법을 지키면 내가 원하는 법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라고 나설 수 있죠. 이게 율법에 속한 사람입니다. 끝까지 ‘나’를 포기 안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약속에 속한 사람은 약속이 날아와서 된 통으로 ‘나’를 깨어 버립니다.

“네가 너를 지키지 않더라도 내가 너를 이미 지킨다.” 끝! 끝난 거예요. ‘너를 지키는 사람은 너 아니더라도 따로 있다’는 말이죠. 꼭 우리가 운전해야 안심됩니까? 내 대신 운전하시는 분이 있으면 옆에서 안심하고 푹 주무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믿지 못하고 수시로 잠깨어 일어나서,

“김 기사! 이리 가면 안 되는데---. 어? 저리 가면 안 되는데. 저리가면 망하는데.”
“사모님! 가만히 계세요. 제가 다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목적, 그것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을 때까지 작게 콩나물 키우듯이 우리의 목적을 매일 같이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 되었음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허용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해 놓고는(교회 와서 설교 들을 때는 ‘아!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이라고 감탄해 놓고는) 문만 열고 밖에 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내 목적이 있어요.

‘여기서 콜택시를 불러? 아니면 그냥 버스를 타나?’ 또 내 목적이 있어요.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가 회사에 늦게 되면 ‘그때 버스 타는 건데 괜히 택시를 타가지고---.’ 이렇게 또 자책을 하죠. 자책한다는 것은 그 자책이 반성이 아닙니다. 서글픈 거예요. 그것은 할 필요도 없는 자책입니다. 해도 또 일이 생깁니다. ‘버스 안탔다’고 자책하는데 그때 만약에 버스 탔으면 더 큰 탈났어요. 그걸 몰라서 그래요.

우리는 그냥 우리 식대로 매일 같이 자기목적을 만드세요. 제가 만들라고 명령 안 해도 계속 만드니까 만드시되 제가 꼭 당부하고 싶은 것은 늘 십자가 생각하시면서 그게 의미 없음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 없이도 이미 대신 죽음을 통해서 구원이 확정되었음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왕 한평생 사는 것 내 욕망이 요구하고, 내 천성이 요구하는 대로 멋들어지게 남부럽지 않게 보란 듯이 떵떵거리면서 살고 싶습니다. 이것을 허용하심은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인줄 압니다. 평생가도 지워지지 않는 이 버릇 주께서 아시오니 십자가만 바라볼 수 있는 저희들 심령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