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 오용익
갈라디아서 제 21강
(이 근호목사, 2007년 6월 8일(1), 서울의존교회)
갈라디아서 5장을 공부하겠습니다. 지난시간에,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은 둘 중의 어느 한쪽에 속해 있다고 했습니다. 전 세계가 여자에 의해서 수박이 쪼개지듯이 쫙, 갈라지는데 이쪽도 여자가 있고, 다른 쪽도 여자가 있습니다. 이쪽여자는 하늘에 있는 여자이고, 이쪽 여자는 땅에 있는 여자입니다.
땅에 있는 여자 쪽에 서겠습니까, 하늘에 있는 여자 쪽에 서겠습니까? 어느 쪽에 서겠습니까? 둘 중의 하나밖에 없습니다. 제 삼은 없고, 양쪽 다 하는 것도 안 됩니다. 이것은 우리 쪽에서 골라서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여자에 따라서 하늘에 속한 사람이냐, 땅에 속한 사람이냐, 이렇게 둘로 나뉘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가 두 명이 있지요. 이것을 가지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두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쪽 여자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나오고, 이쪽 여자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나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여자의 약속을 받는 사람들이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땅에 있는 여자의 약속을 받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여기 있는 여자가 자장면을 주겠다, 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자장면을 먹어야 됩니다.
다른 쪽 편에서 짬뽕을 먹는다면, 그쪽에 있는 사람들은 다 짬뽕을 먹어야 됩니다. 양쪽이 섞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자장면을 좋아하는 사람 여기 다 모이라고 하면, 자장면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 여기에 모이겠지요. 그리고 짬뽕을 좋아하는 사람 같으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두 번째 여자 쪽으로 다 모이겠지요.
이렇게 자장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장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이곳에서 어떤 아이가, 나는 우동을 먹을래, 이렇게 한다면 자장면 먹으려고 모인 사람들이, 너, 나가, 여기는 자장면밖에 없어, 하고 내쫒겠지요. 그러면 여기 있는 사람들, A라는 남자, B라는 여자, C라는 아이, 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다 왜 모였습니까? 자장면 먹기 위해서 다 모였지요.
그러면 자장면은 어떤 일을 하느냐 하면, 서로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키, 나이등등 다 차이 나는데 오로지 자장면 먹을 사람, 이 소리를 듣고, 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 키가 작든 크든, 공부를 못하든 잘하든 관계없이 자장면을 먹으려고 우르르 쫒아 오겠지요. 반대편에는 짬뽕을 먹기 위한 사람들은, 그 형편 처지와 관계없이 짬뽕 먹기 위해서 다 모이겠지요.
이렇게 세상은 두 종류의 세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교회에 나올 때는, 목사님이나 그밖에 분들에게, 나는, 나는, 이렇게 자꾸 개인을 내세우면 안 되는 겁니다. 나는 저애보다 더 낫지요? 이런 소리 하면 안돼요. 나는 저애보다 더 똑똑하죠? 이런 것을 주장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잘난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고, 자장면 소리를 듣고 그게 좋아서 모였기 때문에 우리를 묶어 주는 것은 자장면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장면 먹으로 왔다가, 나는 자장면 먹기 싫다, 나는 다른 것 먹을래,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보고, 너는 나가! 라고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장면 말고 다른 것을 주신다고 한다면 잘못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둘 중의 하나만 먹도록, 자장면 먹든지, 짬뽕을 먹든지 되도록 처음부터 세상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나는 기도도 오래한다, 나는 성경도 많이 봤다, 헌금도 많이 한다, 전도도 많이 한다, 봉사도 많이 한다, 이런 것 자랑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시는 대로 먹는 것이지, 자기 재주를 내놓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 돌아가시고 난 처음의 교회를 초대교회라고 하는데,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인사를 했습니다. 자장면, 자장면, 충성, 자장면, 이렇게 했습니다. 주께서 오십니다. 주께서 오십니다.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요새 교회 보면, 자장면 먹으러 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하려고 왔기 때문에, 네가(목사님) 먼저 나에게 인사해야지. 나 이교회 아니어도 갈 교회 많다. 날 알아달란 말이야. 난 믿음이 너무 좋단 말이야. 우리 애는 공부도 잘해. 이런 식으로 으스대고, 이런 것을 자꾸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이 이야기한 것 가지고, 모여라 하면 모이는 겁니다.
여기 의존교회 어린이들이 있는데, 만약에 천국 갈 사람은 누구냐? 우리는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지남철을 들고, 이게 하늘의 지남철인데 붙을 사람! 그러면서 죽 다니다가 쫙 붙으면, ‘아, 너는 천국 가는 사람’, 안 붙고 그냥 있는 사람들은 ‘천국 못가는 사람’, 그렇게 갈라지는 겁니다. 저는 공부를 잘했으니까 보내주세요. 안보내줍니다.
하나님께서 자석을 들고 다니듯이 죽 다니면, 종이는 지남철에 안 붙지요? 쇠붙이만 붙지요. 종이가 건방지게 “저도 천당 가고 싶어요” 하면 “너는 붙지도 않으면서 무슨 소리 하는거야, 저리가! 안 붙는 것은 할 수 없어. 너는 지옥가야 돼” 하고 “천국 갈사람 누구지?” 할 때 천국 가는 사람에 한해서만 붙는 겁니다.
지금까지 잘 이해되었다고 치고, 그러면 짬뽕에서 자장면으로 옮겨갈 수는 없을까? 옮겨 갈수는 없어요. 이 사람은 짬뽕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아무리 짬뽕을 싫어한다고 말해도, 마음속에 ‘짬뽕을 나는 좋아한다. 좋아한다’가 계속 나오기 때문에, 이 사람이 아무리 자장면을 좋아한다고 말해도 ‘나는 싫어. 나는 싫어.’ 이것이 나오기 때문에 자장면을 안 좋아하는 것이 들통 나서 자장면 쪽으로 옮겨갈 수 없고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야 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간단히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을 보지 않고 약속을 가지고 그 사람을 보신다. 개인의 믿음, 개인의 능력을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 편은 누구야?’하고 하늘나라 편을 모으는 겁니다. 그래서 같은 편이 된 사람들은 서로 싸워야 되겠어요, 안 싸워야 되겠어요? 당연히 천국 갈 사람끼리는 안 싸워야 되겠지요.
그리고 천국 갈사람 같으면 교회를 싫어해야 합니까, 좋아해야 합니까? ‘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싫어. 나는 집에서 나 혼자 천국 갈 거야.’ 이런 것이 됩니까, 안됩니까? 그것은 좀 이상한 사람이죠. ‘난 자장면이 싫어’와 똑같은 것밖에 안됩니다. 자장면 좋아하는 사람은 “자장면!”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자장면!” 하면서 같이 모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자장면과 짬뽕이 쫙! 하고 수박이 두 조각나듯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갈라내시는 겁니다. 지난시간에 이렇게 공부를 했는데 다시 한 번 신신당부를 합니다. “나는 요!”라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한테는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개인은 보지 않습니다. “저 천국 보내주세요.” 그것도 안 통합니다. “나는 … .” 이런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네가 센가 내가 센가 한번 붙어볼까?” 이런 것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체로 다루고 개인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수학여행 가는데, “제주도로 갈사람 여기 모이고, 하와이로 갈사람 저기 모여라.” 그런데 어떤 아이가 “저는 백두산에 가고 싶은데요”하면, 그런 것은 안 통합니다. ‘제주도냐 하와이냐’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미 정해졌습니다. 천국 갈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가고, 안갈 사람은 약속 말고 다른 것을 믿기 때문에, 땅의 것을 믿기 때문에 그들은 못가는 겁니다.
한가지 만 더 이야기 합니다. 짬뽕 쪽 사람들, 즉 이 땅의 여자 쪽 사람들은 무엇을 좋아할까요? 그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26,27 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는 무엇을 좋아하느냐 하면, 내 것이 있다는 것이 좋아요. ‘내 것이 있다.’ 내 지우개, 내 컴퓨터, 내 시계, 내 휴대폰, 내 것이 있다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런데 자장면쪽(천국 가는 사람들)은 무엇을 즐거워하는가? 내 것이 없다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내 직장, 내 사업체, 내 여자, 내 남자, 내 엄마, 내 아빠, 내 동생, 이런 것이 하나도 없고 심지어 나도 없다, 내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4장 27절에 “잉태치 못한 자여” 어떻게 하라? “즐거워하라.”
내 것이 없다는 것이 기분이 그렇게 즐거운 겁니다. 어린이 여러분! 여러분 것이 없으면 기분이 좋아요, 나빠요? 이래놓고 질문하니까 답변하기 참 곤란하지요? 여러분의 시계는 누구의 것입니까? 여러분의 것인데, 만약에 어떤 친구가 여러분의 것을 빼앗아 간다면 여러분은 기분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기분이 나쁩니다. “왜 내 것을 가져가? 기분 나빠”라고 하잖아요.
내 것이 없어지는 것이 기분이 나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떤 특징(개성)이 있느냐? 내 것이 없다는 것이 그렇게 홀가분하고 기분 좋다고 느껴진다는 겁니다. 만약에 두 사람이 서로 기도하는데, 한쪽은 “하나님! 저에게 믿음이 있어서 그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라고 기도하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제가 믿음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을 기뻐하겠습니까?
이 질문도 참 무지 어렵고 곤란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믿음이 있는 사람을 싫어하고 자기 믿음이 없는 사람을 좋아해요. 내 것(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약속 때문에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약속은 나에게는 없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내 안에는 없고, 내 밖에 있는 약속,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우리는 즐거워하는 것이고, 지옥 가는 사람은, 무조건 내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을 가지고 나를 천국에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4:27에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내 것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지’라고 즐거워하는 사람, 좀 정신 이상자 같기도 하고, 미친 사람 같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저보고 미쳤대요. 미쳤다는 말 앞에 붙는 것이 있어요. 복음에 미쳤답니다. 세상에 이것이 고린도 후서 5장에 나온 말씀입니다. 사도바울보고 복음에 미친 자라고 했습니다(고후 5:13-15 ※행 26:24-29).
아무나 듣는 소리가 아닙니다. “너는 왜 십자가 복음밖에 모르나? 그러니 너는 미쳤다”고 합니다. 그러면 안 미친 사람은 뭐냐 하면, 십자가 복음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기도, 내 것되는 기도, 내 것 되는 전도, 내 것으로 할 수 있는 헌금, 내 것으로 하는 봉사, 내가 믿는 예수, 내가 믿는 하나님, 그런 것이 줄줄이 있어야만 그것 가지고 천국에 들어 갈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은 개인적인 것을 보지를 않습니다. 왜? 이미 확정된 운명대로 갈 뿐이지 개인적인 자질과 능력이 얼마나 우수하고 뛰어난가? 그런 것을 일체 보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능력으로 와도 그 사람은 교회의 다른 사람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란 자기처럼 잘난 사람끼리 경쟁하기 위한 곳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왔어요?” “주님이 불러서 왔죠.” “나하고 같네요. 나도 주님이 불러서 왔어요.”
그런 사람들은 이런 소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왔어?” “나는 버스 타고 왔어”
이런 식으로 전부 다 자기 자랑하는 데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내 것이 없는데, 위에서 소집해서 불러준 겁니다. 여기 남자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남자들은 나중에 군대에 갑니다. 군대에 소집되면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제주도, 전국 8도에서 얼굴 처음 보는 젊은이들이 다 모입니다. 누가 소집했습니까? 국가(국방부)에서 소집했습니다. 이렇게 소집하면 군에 가기 싫어도 다 모여야 합니다.
이렇게 국가에서 강제로 소집하면, 전에 친했는지, 아는 사이였는지 그런 것을 물어 볼 필요 없이 강제로 소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소집해서 교회 만들었습니다. 단 소집당했다는 그것만 알고 소집장만 들고. 예수님이 불러서 여기 왔다는 그것만 있지, 자기가 자기 소망대로 오지는 않아요. 그런데 가짜 교회들은, 지옥 갈 교회들은 내 것을 가지고 발휘해서 천국에 가려고 자꾸 내 것을 내놓습니다.
지옥 갈 사람들, 땅의 여인 쪽 사람들은 ‘내 것이 있다’는 그것이 즐겁다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들은 ‘내 것이 없다’는 것이 즐거워요. 집이 세 채가 있어도 내 것이 아니고, 땅이 15만평이 있어도 내 것이 아니고, 애들이 세 명이 있어도 내 것이 아니고, 내 목숨이 내 것이 아니고, 내 것은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값으로 산 주의 것이라는 것, 내 것은 일체 무장해제 당한 상태로 내 것은 일체 없어요.
일체 없다는 것이 그렇게 사람을 편하게 만듭니다. 일체 없다는 그것을 가지고, 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그것을 가지고 (오늘 강의하려는 주제인데) ‘자유’라고 합니다. 내 것이 없다는 것이 자유입니다. 만약에 내 것이 있다면 사람이 자유롭겠어요, 자유롭지 않겠습니까? 안 자유롭지요. 내 것이 있다면. 참 성경이 정말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것이 있는 데서부터, 네 것은 일체 없었어, 라는 쪽으로 빼내어 주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자식이 없는 것을 즐거워하라는 말이지요. 왜? 없어도 되니까, 내 것이 없어도 되니까. 구원받는 것은 내 것 가지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공로(예수님의 것)로 구원받기 때문에 구태여 따로 내 것을 챙길 이유가 없다니까요.
저의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때는 초등학교라 하지 않고 국민학교라고 했습니다. 대충 기억에 국민학교 1학년 7반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한반이 60명이 있었는데, 학교에서 똑같은 필통을 다 나눠 주었습니다. 선생님이 60개를 가져와야 할 것을 59개를 가져왔어요. 죽 나눠주는데, 제가 앉은 자리가 제일 끝자리였습니다. 죽 나눠주는데 저에게까지 오더니 “얘야! 네 것은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이 “문방구에서 네 것은 따로 사서 주마” 해서, 애들 것보다 더 좋은 필통을 사서 저에게 줬어요. 제가 기분 좋았겠어요, 기분이 나빴겠어요? 막 울었습니다. 똑같은 것을 주지 않고 왜 나만 다른 것을 주느냐, 해서 그 필통을 집어 던지면서 막 울었어요. 지금 실험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20명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는데, 19개의 똑같은 셔츠를 나눠주고, 한명에게만 색다른 것을 주면, 그 애가 기분이 좋겠습니까, 나쁘겠습니까?
기분이 나쁠 겁니다. 왜 똑같은 것을 주지 않느냐고 합니다. “네 것도 있잖아”라고 하면 “내 것은 싫어, 나도 똑같은 것을 달라”고 하겠지요. 현재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일체 거부하시고 예수님의 공로로 생긴 것을 가지고, 천국 가는 사람은 똑같은 예복, 똑같은 것을 나눠줍니다. 나눠주게 되면 천국 가는 사람끼리는 서로 서로 잘났다, 못났다는 것을 자랑하겠습니까? 할 수가 없겠습니까?
저의 초등학교 1학년 때의 필통을 가지고, “내 필통이 더 좋다. 더 반짝인다”하고 자랑하겠어요, 못하겠어요? 똑같은 필통이기에 “너도 가졌나? 나도 가졌네. 와! 우리는 둘 다 선생님의 사랑을 받았구나”하고 서로 얼싸안고 좋아 하겠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으로 차이나는 것들을 가지고 경쟁 붙여서 승리하는 자를 천국 보내는 것이 아니고, 누가 더 낫다, 못하다는 말을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것을 똑같이 나누어 줌으로써 예수님의 것이 있는 사람만 구원받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입니다.
그러면 개인은 어떻게 됩니까? 개인이라는 것은 그 앞에서 없어지는 거죠. 사람이 내 것이 있어버리면 저 사람이 가진 것과 내 것을 서로 비교하게 되는데, 모두 다 자기 것을 다 빼앗겨서 자기 것이 없어요. 모두 다 자기 것이 없으니까 내 것이라고 서로 내밀 수 있는 비교할 거리도 없어요. 여기 계신 김 명현 목사님의 믿음이 나은가, 아니면 이 근호 목사님의 믿음이 나은가요? 어느 쪽이 더 훌륭한 믿음입니까?
제가 방금 질문한 것, ‘김 명현 목사님의 믿음이 나은 겁니까, 이 근호 목사님의 믿음이 나은 겁니까’라고 한다면 이미 김 명현 목사님의 믿음이 가짜고, 이 근호 목사님의 믿음 자체가 가짜입니다. 왜? 그것은 나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은 내 것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즐거워하는 반면에, 천국 가는 사람들은 내 것이 없다는 것 때문에 즐거워하는 겁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이 ‘내 것’이 있다고 할 때 이 ‘내 것’은 어디서부터 만들어졌을까요? 이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육’이라고 합니다. ‘육’을 가지고 내 것을 만들어 냅니다. ‘육’이란 육체, 신체를 말합니다. ‘육’을 가지고 ‘내 것’을 만들어서 ‘내 것’을 가지고 천국에 가겠다고 오기를 부려요.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하나님께서 안 넣어 줍니다.
육을 가지고 ‘내 것’을 어떻게 만듭니까? 여기에 율법(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내 것’이 있다고 만들어요. 이것을 가지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 ‘율법에 속한 사람’, 다른 말로 하면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은 ‘내 것’(여자로 말하면 내 자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들은 내가 잉태치 못했기에 내 자식이 없습니다.
그 말은, ‘내가 육을 가지고 율법을 지켜서 내 것을 만들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만들 수 없으니까 뭐가 됩니까? 무능한 자가 되는데, 지옥 가는 사람은 유능한 자가 됩니다. 무능한자, 이 사람을 두고 ‘자유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보고 “너는 구원 받았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무능한(너의 구원에) 자였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성경공부해도 그것 가지고는 구원받을 수 없는 무능한 자였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는 무능한 자였다”는 말은 “너는 이미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았어”라는 뜻입니다. 유능한 사람, 이 사람은 자기공로 자기 육을 가지고 만들어 내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자기 육을 포기를 못합니다. ‘나는 율법을 가지고 육으로 지켜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내 것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겁니다. ‘저 사람이 아니고 내가 노력했기에 내 것이라고 인정할만한 내 것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들은 자기 것이 따로 없습니다. 왜? 자기는 하나님의 법(율법)을 통해서 무엇인줄을 알았어요? 무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 것은 없고 하나도 없는 겁니다. 선생님께서 숙제를 내어 주면서 “두 시간 뒤에 올 테니까 숙제를 해놓아라”고 했어요.
“1번, 숙제 했나?” “예 썰!” “2번, 숙제했나?” “예 썰!” “너는 했어, 안했어?” “못했습니다.” “왜?” “숙제 할 줄 몰라요.” “이중에 천국 갈 사람은 너 밖에 없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숙제가 안 되는데 저마다 숙제 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한 겁니다. 십일조를 하려면 의와 인과 신이 있어야 십일조 되는데(마 23:23 ; 눅 11:42) 사람들은 수입의 10%를 내면 그것으로 십일조를 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숙제를 내 주신 예수님이 와서 보니까 숙제를 제대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는데 안식일을 지키는가를 보니까, 자기들은 지켰다고 하는데 보니까 다 거짓말입니다.
어떤 부자청년인데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쳤습니다. “네 것을 다 버리고(이러면 내 것이 없게 되죠) 나를 좆아라”하니까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마 19:16-22)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지켰다는 십일조, 십계명 다 거짓이었습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은 “나는 십일조, 구제, 금식 다 했습니다”(눅 18:12)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다 집어 치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세리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보니 저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죄인 맞습니다”(눅 18:13)할때 예수님이 “네가 바로 의인이다”(눅 18:14)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어떤 노인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한 아들은 가출해서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 다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 탕자입니다. 또 한 아들은 가출도 안하고 충실하고 아버지를 도와서 일했습니다. 둘 중에 어느 아들이 아버지를 기쁘게 했을까요? 탕자가 아버지를 흐뭇하게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탕자는 무능하기에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집에 있던 아들은 삐져서 “나는 가출도 안하고, 충성을 다했는데 …”라고 이러쿵 저러쿵 한다는 겁니다.
“아버지의 맘을 네가 그렇게 모르는 구나.” 그 탕자는 아버지가 사랑을 주면 그 사랑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은혜를 주면 그 은혜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가 소를 잡고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탕자는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 옷도 나는 무능한데 아버지가 그냥 은혜로 주셨고, 이 가락지도 은혜로 주신 가락지다.’
큰아들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역시 나는 이런 옷을 받을만해. 나는 한 번도 아버지 속 썩인 일이 없거든. 이 가락지 받는 것도 너무 늦었지. 사실은 진즉에 받아야 할 가락지를 이제야 받는구나.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지’라고 할 겁니다. 하나님께서 둘중에 누구를 쥐어 박겠습니까? “이게 어디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과 은혜를 자기 공로로 다 바꾸어 놓는가! 엉망이구만!”하고 나무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준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지키지도 못하면서 자꾸 내 것, 내 것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그것을 박살내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사람들은 오히려 율법을(자기를 부수는) 가지고, 오히려 자기가 지켰다고 으시대는 거예요.
옛날 조선시대 때 임금님이 자기 신하가운데 못된 신하가 있어서 사약을 내려 줬습니다. 사약을 내려 주니까 이 바보 같은 신하가 하는 말이, ‘임금님이 나에게 보약을 다려 주셨다’고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임금님이 나를 인정해서 내려주신 보약이기에 이것은 함부로 먹을 수가 없다’고 선반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나중에 임금님의 관리가 와서 “이보게! 임금님이 준 사약을 마셨는가?” 하니까, “너무 귀해서 아까워서 모셔두고 안마셨다”는 겁니다. 임금님이 노해서 “에이 무엄한 놈! 더 독한 약을 아예 양푼에 담아서 먹여라. 이 약은 네가 폼을 잡으라고 준 약이 아니고, 먹고 죽으라고 준 약인데 세상에 ‘임금님이 나를 사랑해서 줬다고’ 한다고? 먹고 죽어라!”
그래서 그 신하는 하사받은 독약을 먹고 죽었다는, 제가 마음대로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은 죽으라고 주는 하나님의 사약입니다. 그러면 이 약은 오늘날 어떤 약으로 오느냐? 그림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유능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여기 있는 천국 가는 사람은 자기를 뭐로 봅니까? 무능한 사람,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받지, 내 행함, 내 공로로 구원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내 것이라고는 없고 몽땅 주님께서 다 빼앗아 가는 것을 아주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율법을 가지고 착각을 하는데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율법이 들어오면 육(율법)에 속한 사람들은, 평소에 자기를 돋보이고 싶고 으시대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기에 율법을 주니까 그 율법을 자기가 지켰다고 아주 좋아들 했습니다. 다시 그림을 그립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옛날에 율법을 줬습니다. 율법을 주니까 그들이 매우 자랑을 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십자가를 주면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율법을 지키다가 이제는 십자가까지 주니까 이제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을 하겠지요. 여기 비타 500을 주니까 맛있다고 하면서 잘 먹어요. 그런데 “이것은 십자가인데 한번 드시겠습니까”라고 줘서 “십자가를 먹어 보니 어떤가?”라고 하니까, “맛있지요!” 뭐든지 주는대로 먹고 맛있다는 식이어서 괴물 같아요.
다 내 것을 만들어요. 말씀을 주면 말씀대로 잘 지키고, 예수 믿으라고 하면 예수도 잘 믿고, 십자가를 믿으라고 하면 십자가도 잘 믿고, 전부 다 잘 믿어요. 저는 그것을 쓰레기통이라고 합니다. 휴지통에 휴지 들어가니까 골인, 공들어가니까 그것도 골인, 이것 저것 많이 들어갑니다. 다 들어가니까 하나님께서 여기에 폭탄을 집어넣었어요. 폭탄이 들어가니까 슛 골인, 합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쓰레기통이 폭발해서 다 날아가 버립니다.
십자가는 율법 지키듯이 그렇게 믿으라고 준 게 아닙니다. “너는 이제 죽었어!” 하고 폭탄을 터뜨리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받은 순간 펑, 하고 폭탄이 터지면서 우리는 죽습니다. 그렇게 터지기 전에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십일조면 십일조, 안식일이면 안식일, 목사님이 시키는 일이면 뭐든지 잘하고, 율법대로 다 잘했는데 거기에 십자가가 들어오니까 펑, 하고 터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누가 죽었습니까? 율법대로 잘 지키는 우리가 터져서 죽었습니다. 왜 죽었습니까? 처음부터 율법은 우리보고 ‘지키면 산다는 것이 아니라 너는 죽은 인간이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어진 겁니다. 주니까 넙죽넙죽 잘 받아먹네. 에라, 이것도 한번 받아먹어라. 십자가를 집어넣으니까 펑, 터져버립니다.
사도바울이란 사람이 나는 율법에 대해서는 흠이 없이 완벽하다고 으시대던 사람입니다. 그는 여호와를 믿는 것을 자랑거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난 뒤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펑, 하고 터졌습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내가 지금까지 안 것은 다 엉터리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되는 것을 가지고 내가 믿고, 내가 지키고 내가 잘해서 구원 되는 줄 알고 오해를 했다.”(빌 3:4-8)
약간 어려운 질문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상이고, 예수 믿는 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내 안에 들어온 하나님이 되어서 서로 서로 공격하지 않고 좋게 지내는 하나님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면, 예수님은 우리를 자기 십자가에 함께 죽이시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을 예수님이 죽이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기존에 알고 있던 하나님을 죽이기 위해서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너희들이 알고 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다. 진짜 하나님은 너희들 손에 죽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너희들이 살아 있다고 여기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다”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당신이 누굽니까?” “네가 핍박하는 나, 예수다.”
그냥 예수가 아니고, 네가 지금 핍박하는 예수입니다. “참 힘들겠다. 나를 핍박한다고 네가 실컷 고생하고 있구나.” 예수님이 그 당시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에 열심 냈던 사도바울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까지 뭐했습니까? 진짜 하나님을 계속 미워하고 공격하고 핍박하는 가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도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인정하고, 열심히 믿는 그것으로 인해서 누가 괴롭게 되었습니까? 진짜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이 괴롭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사도바울은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우상에 불과하고, 진짜 하나님은 이 땅에 나타나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외에 다른 하나님은 다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도바울은 자기가 경험한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그 가짜 하나님을 부수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모든 이야기가 십자가로 가짜하나님을 부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어디서 나온 하나님입니까?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하나님입니다.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하나님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부숨으로써 비로소 우상은 깨어지고 진짜 참된 하나님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우리를(내 것) 죽이는 하나님이고, 가짜 하나님(우상)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내 것을 살리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한테 당하는 사람은 무엇이 기분이 좋습니까? 전에는 내 것이 있었는데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는 일체 내 것이 없다는 것이 기분 무지 좋은 겁니다.
전에는 “야, 너 쌍커플이 없는데 수술해라.” 이렇게 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내 얼굴이 내 얼굴(짝)이 아니야”라고 기분 좋아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채 하나님을 믿을때는, “하나님 아버지! 나에게 쌍커플을 주옵소서”라고 했는데, “하나님이여 나에게 내가 원하는 혜택을 입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내 것이 있어야 혜택이고 뭐고 있지요 내 것이 깨어진 마당에 뭐가 있습니까?
내 것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 날아갔는지 기분 좋은 겁니다. 내 목숨이 내 것이 아니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니까 그것처럼 편한 게 어디 있습니까? 내 다리도 내 다리가 아니고, 내 손도 내 것이 아니고 내 것이 없습니다. 내 것이 없으니까 법을 지킬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법이라는 것은 누가 지켜야 합니까? 내가 지켜야 되는데 내가 없는데 무슨 법을 지킵니까?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육에 속한 사람, 그 반대편에 영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자기가 법을 지키고 영에 속한 사람은 누가 법을 지킵니까? 성령이 법을 지키기 때문에 이 사람은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자기가 자기에게 속한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고 어디에? 성령에게 소속된 사람, 그러면 법은 누가 지킵니까? 성령이 지켜서 예수님의 공로로 그냥 우리에게 넣어 주지요.
성령이 오실 때는 어떻게 오십니까?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성령께서는 십자가의 다 이루심, 십자가의 공로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성령이 와야 십자가의 공로가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깨닫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들을 깨닫”는데 그 “깊은 것”이 뭐냐? 십자가 복음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만 깨닫습니다. ‘아하! 내가 못한 것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구나. 그러니까 우리는 내것이 없는데, 주님의 것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니까 우리는 졸지에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의인이 된다’는 겁니다. 가만있는데 의인이 되었습니다. 학교도 안가고 가만있는데 천사가 나풀나풀 날아와서,
“애야! 너 이름이 뭐지?” “철이에요.” “철이 너 의인이야.” “저는 오늘 학교도 안가고 집에 있었는데요.” “학교 가든, 안가든 관계없이 너는 의인이 되었어. 하나님이 너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어.”
이렇게 될 때 그 아이가 밖에 나가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보고 의인이래.” “꼬마가 무슨 착한 일을 많이 했다고 의인이야?” “나는 꼬마고 착한일 한적 없어.” “착한일 한 적도 없는 네가 어떻게 의인되었어?” “예수님의 공로로 의인 되었대”라고 자랑하게 될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이미 다 아시는 내용이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속한!” 육이든 영이든 “속한” 사람이 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 성령에 속한 사람은 영입니다. 내가 성령을 쥐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나를 잠식하고 덮어버린 사람, 성령에 소속된 사람. 아까 논산훈련소(군대)에서 누가 소집한다고 했습니까? 나라에서 소집합니다.
우리는 누가 소집합니까? 성령이 소집합니다. 성령이 소집해서 뭐라고 합니까?
“천당 왜 가?” “예수님 공로 때문에 갑니다.” “너는 왜 가?” “예수님 공로 때문입니다.” “너는?” “예수님 공로죠”
전부 다 한결같이 누구 공로로? 예수님의 공로로! 그럼 우리는 뭐냐?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지체, 그리스도의 몸, 개인은 가라! 오직 집단 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몸밖에 없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4장의 결론입니다. 잠시 쉬고 다음 시간에 5장을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제 22강
(이 근호목사, 2007년 6월 8일(2), 서울의존교회)
갈라디아서 5:1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여기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크게 그렸습니다. 크게 이렇게 계십니다. 우리를 그리겠습니다. 우리는 그냥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어요, 없어요? 예수님이 자유를 우리에게 주면 있지만 현재 안줬다고 보면 자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1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했잖아요. 여기 떡이 있는데, 여러분에게는 떡이 없다고 치고 떡을 주며 비로소 있지요. 예수님께서 이 자유를 줄때만 있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유를 안주면 자유가 없지요. 그러면 만약에 여러분에게 자유가 있다면 그것은 누가 준겁니까? 예수님이 준 겁니까? 여러분이 만들어 낸 겁니까? 예수님이 준 겁니다. 그러면 그 자유는 누구의 것입니까? 여러분의 것입니까? 예수님의 것입니까?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내가 구원받게 된 것은 다 누구 공로고 누구 덕이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았습니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자유’를 줬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예수님이 주기 전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가 없다는 말은 우리 힘으로 이 율법이라는 벽을 뚫어서 천국으로 갈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못갑니다.
탈옥수 아시지요? 교도소에 갇혔는데 자기 힘으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탈옥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우리 힘으로 구원을 받으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줄 필요가 있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우리 힘으로 뚫어내면 되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면 이 말은, 우리가 절대로 우리 힘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없다? 구원 못한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두 가지를 알았어요. 첫 번째는 내 힘으로 절대로 구원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 때문에 나는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두 가지를 안 겁니다. 두 가지 하면 앞에 것을 잊어버리니까 다시 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무엇을 알았는가? 절대로 나의 선행으로는 천국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두 번째는 나는 못하지만 주님은 해 내고야 말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야! 네가 구원받은 증거를 대봐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내 대신 몽땅 내 죄를 가져 가사 용서하신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볼 때, 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너는 믿는데 왜 나는 안 믿어지지?” 그때 사보바울이 “너는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모르는 거야.”라고 답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속한 사람입니까? ‘나’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영에 속한,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여러분이 안다고 치고 이제부터 어려운 것이 나옵니다.
자, 뚫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왜 뚫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5:2에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5: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한글로 되어 있지만 무슨 뜻인지 잘 감이 안 잡힙니다.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할례’라는 것은, 남자의 생식기의 끝을 잘라서, ‘너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법(언약)을 지켜야 돼’라고 하나님께서 지정을 한 겁니다. 쉬운 예로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나무젓가락이 있습니다. 나무젓가락이 여기에 꽂혀 있으면, 엄마가 ‘여기 나무젓가락이 있었는데 어디로 갔지?’하고 찾고 다닙니다.
“나무젓가락 여기 있는데요.” “어디 있지?” “여기요. 여기 있어요.”
이 나무젓가락을 할례라고 해 봅시다. 할례라는 것은 내가 가는 곳에 할례가 안 떨어지고 계속 붙어 있지요. 할례라는 말은 ‘할례’를 받고 난 뒤에 받은 ‘할례’를 없애려고 하면(나무젓가락을 빼려고 하면) ‘나’도 같이 빼야(죽어야) 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또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나는 할례를 행했다 그런데 이게 무효라고 하면 차라리 날 죽여라. 나한테는 나무젓가락이 여기 있다. 이걸 빼낸다고? 그러면 차라리 날 죽여라’ 이렇게 나온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잘라라’라고 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시키니까 시키는 대로 했어요. 나무젓가락을 꽂았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꽂았는데 예수님께서 “어이! 그거 빼라니까!” 그때 유대인들이 “이거 안 빼. 이거 빼면 나도 죽어. 할례(나무젓가락)가 있는 이상은 나도 구원을 받은 거야. 이것과 나를 분리할 수 없어. 나는 이것을 붙들고 구원을 받을 거야.” 이렇게 자꾸 우기는 거예요.
그렇게 우기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예수님의 말씀이죠), 예수님께서 자유를 주기 전에, 아직 이 사람들이 자유를 안 받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할례라는 것을 행했습니다. 할례를 받아 놓고는 “나는 이제 구원받았다. 봐라! 할례라는 법이 있잖아. 내가 할례 받은 증거(생식기)를 봐라”면서 이런 식으로 자랑하니까, 그것은 할례만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할례 뒤에, 플러스, 십일조 더하기, 유월절 더하기, 안식일더하기, 십계명 더하기 등등 365가지의 온갖 법이, 줄줄이 사탕으로 하나를 끌어올리니까 그 전체가 다 딸려 오는 거예요.
여러분 기차놀이 해보셨죠? 꼬리에 또 붙고 또 붙고 계속 자꾸 자꾸 붙는 거 있지요. 독일 동화에 이런 것이 있어요. 왕궁의 공주가 하도 웃지를 않아서 공주를 웃길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어느 날 창문을 열어놓고 밖을 내다보면 공주가 마구 웃고 있는 거예요. 어떤 바보가 황금오리를 들고 가니까 사람들이 그 황금이 탐이 나서 손을 대니까 딱 붙어서 안 떨어지는 거예요. 그것을 떼려다가 뒤에 붙고 또 붙고 그래서 한꺼번에 네 명이 그 뒤에 붙어 따라가니까 그걸 보고 공주가 뒤로 넘어가게 웃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바보와 공주가 결혼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할례만 딱 끊어서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할례라는 것은 그 뒤에 있는 그 나머지 성경말씀을 다 지킬 의무를 가진 자가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 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네가 기관차 한번 해 볼래? 객차 한 100개 달고 달려볼래?”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목사님! 저는 할례는 안 지켰지만 십일조는 지킵니다.” 십일조를 앞세워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를 앞세우면 뒤에 또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할례를 행해야 하고, 안식을 지켜야 되고 줄줄이 다 해야 합니다. ‘나는 십일조는 안해도 십계명은 지킨다’고 하면, 그 십계명 뒤에 뭐가 붙습니까? 율법이 다 붙는 거예요. 얼마나 무겁고 힘든 짐입니까?
다 지켜야 됩니다. 돼지고기 먹지 말아야 되고, 오징어도 먹지 말아야 되고, 굽이 갈라진것만 먹고, 굽이 안 갈리진 것은 못 먹고, 되새김질 하는 것만 먹고, 되새김질 하지 않는 것은 못 먹고, 이런 것을 다 지켜야 됩니다(레위기 11:1-23). 온갖 율법을 다 지켜야 됩니다. 심지어 신명기에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자식이 말을 안 듣거든 동네에서 때려죽이라’고 합니다.
신명기 21:18-21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찌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제가 그렇게 말 안 듣는 아들이라면 이 온 동네 아파트 주민들이 저에게 돌을 던져서 죽여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안식일에 나무를 했다면 그 사람은 죽어야 됩니다(출 31:15). 아빠한테 욕을 했다? 그 아이는 죽어야 됩니다. 점을 쳤다? 죽어야 됩니다(민수기 18:9-14). 모조리 다 죽여야 합니다. 나중에 살아남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겁니다.
예수님은 더 심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빼어버리라. 오른팔이 범죄하거든 잘라버리라.’(마 5:29,30) ‘마음속으로 간음하는 것도 간음죄다 … 먹을 것, 마실 것을 염려하는 것은 다 이방인이다 … 맹세하지 말라 … 남이 돈을 빌려 달라 하거든 그냥 주라.’(마 5:28,31,32,34,42) 이래서는 대부업(貸付業)이 되겠습니까? 그게 ‘쩐의 전쟁’이 되겠습니까? 어떤 것도 하나의 율법을 주었다 하면 다른 것도 다 연결연결 되어서 어느 것 하나를 달랑 지킬 수가 없습니다. 다 지켜야 됩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의 율법을 지켰다고 자랑하다가 다른 것 하나를 어기면 어긴 그것에 의해서 심판받는다’(약 2:10,11)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다른 계명은 주시지 않았겠는가’라는 겁니다. 결국 이것은 뭘 뜻합니까? 어떤 인간도 이 율법의 쇠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율법의 쇠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 그것이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누군가 이 할례를 지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과연 이 세상에 할례를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었습니다. 그게 골로새서 2장에 나옵니다.
골로새서 2:11,12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할례를 받았다는 말은, 나머지 모든 율법도 다 지켜야 된다는 의무를 함께 받은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하면, 손으로 하지 않는 할례를 우리에게 이미 줘버렸습니다. 우리가 손으로 하는, 육체에 흔적을 남기는 그런 할례는 모든 율법을 다 지켜내야 하는 의무가 있기에 우리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뭘 명했느냐 하면, 이 모든 말씀, 할례를 비롯해서 이 모든 말씀을 한꺼번에 한사람에게 다 몰아주어주었습니다. 예수님 한분에게 다 몰아줬습니다.
골로새서 2:14,15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 때 무엇도 같이 살아난 겁니까? 이 모든 법을 다 몰아서 받으신 한사람인 예수님, 그 분이 죽었다가 다시 산겁니다. 이런 비유에는 화투가 적절합니다. 패가 좋지 않을 때는 패 좋은 사람에게 한꺼번에 몰아주는 것이 있습니다. 다 몰아줘서 혼자 게임하게 하고 따면 몫을 달라는 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모든 패를 한꺼번에 다 몰아서 쥐는데, 과연 그분이 제대로 모든 말씀을 지키는가, 안지키는가의 승리는 어디서 판가름 나는 겁니까? 모든 율법이 주는 저주로부터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몰아줬던 그분이 드디어 모든 율법의 저주로부터 미리 자유(승리)를 얻습니다.
그런데 그 승리가 우리에게 올 때 몸으로 하지 않은 할례, 그런 할례가 세례라는 이름으로 대신 주어져서 이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공로가 거저 우리의 공로가 되도록 해서 우리가 이 모든 법을 이미 다 지킨 것으로(의인 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런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두 번 다시 이런 율법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5:1입니다.
십일조든 안식일이든 주일성수든 뭐가 되었든 그런 것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육을 가지고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주님께서 이 육을 대신할 이유가 없잖아요. 주님께서 내 육으로 할 수 없는 것을 대신 했다는 말은 더 이상 안 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묻고 싶어서 간질간질 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사도바울이 하는 여러 가지 명령과 권면들은 목사님의 주장에 의하면 그것도 하지 말아야 됩니까?”라고 묻고 싶을 겁니다.
자, 십자가를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십자가가 어떤 일을 하느냐 하면, 죽은 우리를 십자가의 공로(의, 은혜)가 와서 우리로 하여금 의인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2007년도라고 해 봅시다. 그러면 이 사람이 2008년도에 의인 되겠습니까, 안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주신 성령의 은혜가 오고, 그러다가 안 오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2007년도에 왔으면 2008년도에도 온다는 말입니다.
오게 되면 이 사람은 2008년도에도 의인되겠지요. 그러면 이 사람에게 무엇이 따라가야 되겠습니까? 왜 이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공로로만 의인되는가를 2007년도에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고, 2008년도에도 왜 이 사람은 예수님의 공로로만 의인되는가를 알려줄 필요가 있겠지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2007년도에 뭘 알았느냐 하면, 에베소서 5장에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는 말씀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2008년도까지는 뭘 몰랐는가 하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다’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는 거죠. 2007년도에 ‘술 취하지 말라’를 알았어요. 그 전까지는 술을 계속 먹고 있었는데 성경에 보니까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온 겁니다.
자기가 이것을 지키려고 하는데, 지킬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술은 끊을 수가 있지만, 그 다음에 연이어 나오는 ‘성령에 취하라’는 말씀은 자기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자기 능력으로 술도 끊을 수가 없지만. 이 사람은 뭘 아느냐? 이것을 알아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2007년도에 나에게 와서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가 일방적으로 나에게 일을 시켰다는 겁니다. 나에게 일방적으로 집어넣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집어넣으니까 이 사람은 술을 끊고 성령에 취하게 된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은혜로 주어진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은 아직도 뭘 모르냐?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데모데전서의 말씀은 몰랐어요. 그것은 모른 채 ‘야, 나는 이제 술도 끊어도 성령에 취해서 산다. 나 같이 완전한 인간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이렇게 우쭐거렸는데 2008년도에 가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대하고 나니까, ‘아하, 술은 끊었지만 이 말씀은 나에게는 할 수 없는, 안 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안된다고 느낄 때, ‘그러니까 너는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지, 술 끊었다는 너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소급해서 다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성령이 오고 난 뒤에 뭘 더 알게 되냐? ‘아하, 내가 돈을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이 성령의 공로요 주님의 은혜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 자기는 성령이 오기 전에는 그것을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2009년도에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하여 이득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 이런 자랑은 다 악한 자랑이다’라는 야고보서 4장의 말씀이 튀어 나오네요. 그러니까 앞에 있는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내 실력이 아니었고, ‘술 끊는 것’도 내 실력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래서 전체를 종합해 볼 때, 이 사람이 뭘 아느냐?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나를 그냥 가만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수시로 말씀을 통해서 ‘이러니까 너는 예수의 공로로 구원받아야 돼.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받는 거야’라고 그것을 통보해주고 알려주는 일들을 사도바울의 명령과 권면을 통해서 수시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2014년도에 많이 알았어요. 그런데 2015년도에 뭘 알았느냐? 전에 이미 많이 알았다고 여기는, 이미 떼었다고 여겼던 술을 마셔버린 겁니다.
이것은 뭐냐? 주님께서 수시로 자주 자주 나를 가지고 왜 주님의 공로로만 구원받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가 도저히 해내지 못하는 말씀만 계속해서 들어오는 겁니다. ‘온유, 화평, 자비, 양선 …’ 하니까, ‘온유, 화평’은 할 수 있는데 ‘자비, 양선’은 좀 못하겠더라, 이렇게 분리해서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네 가지 다 내 힘으로는 될 수 없었고, 그때 나왔던 것은 주님의 공로였고 주님의 은혜였음을 알지요.
왜 그렇게 하느냐? 그래야 십자가라는 것은 한번 그때 그 십자가가 아니라 계속해서 나에게 일어나는 십자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어려운 것, 안산에서 강의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서 만들어졌는데, 시간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나’라는 것이 과거의 산물이라는 뜻입니다. 과거가 모여서 ‘나’가 됩니다. 우리를 뜯어 보면 전부 다 과거가 다 들어 있습니다.
과거의 것이 나를 밀어붙여서 오늘날의 ‘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내일의 될 것은 지금의 과거가 앞으로의, 내일의 ‘나’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공간이라는 것은 현재 내가 가진 모든 것, 나의 안경, 나의 가방, 나의 mp3, 나의 구두, 나의 옷등 전부 다 내 것인데 이런 내 것이 모여서 ‘나’가 됩니다. “나는 과거에 이렇게 잘나가서 지금의 ‘나’가 되었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4장에 보게 되면,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졌잖아요. 그런데 예수의 죽으심이라는 것을 짊어지게 하신다는 말인데, 예수님의 죽으심은 옛날에 일어난 사건이잖아요. 우리는 2000년 전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님에게는 2000년이라는 것이 숫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2000년을 쳐주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짊어진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공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는 어린이도 있고, 어른도 있고, 선풍기도 있는데 성령께서는 선풍기가 있느냐, 어린이가 있는냐를 보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여기 있고 그 십자가에 예수님 달려 있고 나는 그 예수님을 쳐다보고 있고 그것만 달랑 남게 합니다. 성령이 그렇게 만듭니다.
옆에 친구들이 있고, 무엇이 있고, 이런 것들이 다 없어지게 만들고, 지금의 2007년도 사라지게 만들고, 선풍기도 내 것이고 마이크가 내 것이라는 이것도 없어지게 만들고, 달랑 있는 것은 뭐냐, 예수의 죽으심, 십자가 앞에 내가 등장하는 이것만 잠시 느끼게 합니다. 잠시, ‘아, 옛날 그 십자가가 옛날로 끝난 것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느낍니다.
이 순신 장군의 죽으심을 지금 짊어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순신 장군의 시체를 끄집어내서 질질 끌고 다니거나 메고 다닐 수가 있습니까? 안 되지요. 이미 죽은 모친의 시체를 파내서 끌고 다니면 그것은 안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육은 안 되는데 죽은 예수 십자가가 내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말입니다.
십자가가 꽂히게 만들어 버리면 뭐가 깨지는가? 시간 깨지고 공간 깨집니다.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지금 주님께서 만들어낸 내가 되고, 현재 내 것이라는 것은 다 주님의 것이 됩니다. 시간 깨지고 공간 깨지면 누가 깨집니까? ‘나’가 깨지지요. 내가 깨지고 내안에 주님의 십자가가 꽂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뭐가 나오는가? ‘예수님이 무엇을 행했다’는 것이 나옵니다.
누구를 통해서? 이미 죽은 나를 통해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술을 끊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취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돈을 사랑하지 않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이득 보겠다고 큰소리치지 않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줄 로 알게 했습니다. 전부 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루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통보해 줍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뭐냐? 그것이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입니다.
그게 내열매가 아니고 누구의 열매? 성령께서 내 안에 작업을 하신 열매,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못 박는 일을 나를 통해서 배태(나타나게)케 하십니다. 그럴 때 ‘아하 주님한테는 내역사가 따로 없구나. 주님께서는 내 것이라는 것을 인정 안 해주는구나. 그저 주님의 것으로서 지금도 주님께서는 내 안에 십자가사건을 일으키게 하시는구나’를 알게 합니다.
여기에 십자가높이 있고 예수님이 달려 있고 우리는 그 앞에서 서 있다고 할 때 뭐가 보입니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마 11:8)고 하지요? “너희가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하는 그 대목이죠.
“뭐가 보이더냐?” “십자가가 보입니다.” “그 십자가는 왜 있지?”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네가 왜 죄인인데?”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들을 보니 하나도 제가 죄인 아닌 것이 없네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데 원수를 사랑하지 않아서 생긴 영화가 무슨 영화입니까? ‘밀양’입니다. 그 영화 다 보셨지요? ‘해적’은 보면서 그것은 안보고. 상처받은 영혼이 원수를 용서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먼저 용서해줘 버렸어요. 여기에 그만 화가 나서 주인공이 실신해 버립니다. “상처받은 내가 원수를 용서해야지요. (그래야 자존심이 세워지니까)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야지 왜 내 허락도 없이 하나님이 내 원수를 용서합니까?”
주인공이 뭘 모르냐 하면, 그것이 바로 가해자가 되는 짓인 줄, 그것이 십자가의 피를 모독하는 ‘나’, 내가, 바로 내가, 바로 내가 예수님을 죽인다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아무나 용서하면 어떤데? 왜 꼭 자기가 해야 되는데?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을 복수하는 겁니다. 자기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자기 힘으로 지키려고 했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가로채 갔습니다. ‘원수사랑 내가 한다’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 앞에서 ‘나’는 뭡니까? 바로 그 ‘나’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 때에만 비로소, 우리 속에서 온유와 화평과 자비의 이름으로 원수 사랑이 나옵니다. ‘내가 바로 나밖에 모르는 주님의 원수였습니다. 나밖에 모르기에 나는 의인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나는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내가 때려죽인 예수님이 저기 걸려 있다는 사실, 그 밑에서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라는 이것이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만났던 경험이었습니다.
예수님 바라보면서 ‘내가 바로 죄인의 괴수다’라는 겁니다. 이 말은 슬퍼하자는 말이 아니고, 반대로 드디어 신났다는 말입니다. ‘나는 이제 되었다. 나는 이제 살았다’는 그 말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를 다른 말로 고치면 ‘나는 살았다’ 그 말입니다. 내가 절대 내 힘으로 율법을 뚫고 율법을 지켜서는 구원받지 못하고,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그 정도로 나는 죄에 가로막혀서 죄인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그 사실이 ‘이미 나는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뭐할 거냐? 앞으로 뭐할 거냐 하는 것은 내 속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맘대로 우리를 부리고 활용할 겁니다.
“사도바울아!” “예!” “로마로 가야지.” “왜 가는 데요?” “가라 하면 가면 되지 왜 말이 많아. 그냥 가!”
맘대로 활용해서 사도바울이 거기서 복음을 전하게 합니다.
“사도바울아, 이제 그만 살고 죽어야지.” “예.” 그리고 죽어 버립니다. 맘대로 활용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범사에 주의 것이기에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고, 맘대로 활용합니다. 맘대로 활용하되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죄가 되고 주님한테는 뭐가 되고? 의가 되고. 뭘 해도 죄가 되고 주님한테는 뭘 해도 의가 되고. 따라서 우리는 뭘 해도 의인되고.
그 앞에 것을 빼버리면,
“이 근호 목사는 말하기를 성도가 뭘 해도 의가 된대.” “그 앞에는 뭐라고 하는데?” “그 앞에 것은 안 들어서 몰라.”
그 앞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뭘 해도 죄고, 그것을 용서하시는 주님은 뭘 해도 의고, 따라서 우리는 뭘 해도 우리한테서는 뭐가 나오고? 주님의 의가 나오고 우리 의는 안 나오고. 그래서 우리는 의의 종(롬 6:13)이 되고 그 열매는 영생입니다(롬 6:23). 이미 영생 받았기에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겁니다. 결국 이 말은, 개인적으로 설치고 다닐 그런 처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처음에 한 것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전 세계가 어떻게 갈라진다고 했습니까? 쫙, 양쪽으로 갈라진다고 했습니다. 이쪽에는 뭐 좋아하는 사람? 자장면 좋아하는 사람, 이쪽에는 뭐 좋아하는 사람? 짬뽕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자장면 만드는 아줌마는 어디에 있는 아줌마? 하늘에 있는 아줌마, 짬뽕 만드는 아줌마는 어디에 있는 아줌마? 땅에 있는 아줌마.
여기 자장면 쪽에 모인 사람은, 뭐 하나를 보고 왔습니까? 자장면 하나 먹고 싶어서 온 겁니다. 이 사람들은 뭐 먹고 싶어서 왔어요? 짬뽕 먹고 싶어서. 짬뽕이 먹고 싶어서 온 사람들은 자기 육의 실력을 믿는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자장면 먹고 싶어 온 사람은 어디에 속한 사람? 성령에 속한 사람입니다.
자, 이렇게 나누어 보니까 결국은 여기서 뭐는 사라집니까? 개인적인 실력, 개인적인 느낌, 개인적인 봉사, 개인적인 충성은 여기서는 둘 다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개별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일괄해서 성격을 규정해 버립니다. ‘너, 누구야?’가 아니라 ‘이쪽에 속한 사람 맞나?’라고 합니다. ‘너, 뭐 될래?’가 아니라 ‘너, 어느 쪽에 속할래?’라고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스키 잘 타는데요.” 그거 치우고, “너는 무엇을 바라보느냐?”라고 묻습니다. “제 실력을 좀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어허, 네 실력 같은 것은 안 본다니까?” 개인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두 패로 쫙 갈라집니다. 하늘에 속한 여자, 땅에 속한 여자로. 그래서 이러한 사고방식이 오늘날 개인적인 주체의식이 강한 개인한테는 이런 생각이 정말 이해하기 불가능하죠.
“목사님! 저 구원받아요? 저 선택 받았어요?” 맨 날 ‘나’ ‘나’ 이래요. “당신은 없어요.” “그러면 나는 어디 있습니까?” “아마 어느 부류(집단)에 속할 겁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집단에 가보세요. 그러면 같은 사람끼리 모여 있을 거예요.” 여기에는 어떤 사람이 모였습니까? 자기의 육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기도자랑, 신앙실력자랑, 전도자랑, 성경공부 많이 한 것 자랑, 전부 다 내 실력 내 육의 노력, 이런 것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이쪽, 영에 속한 사람은 뭡니까? “당신은?” “주님의 공로로!” “그러면 당신은?” “주님의 공로로!”
“네 필통은 어디서 왔지?” “선생님이 주신 거예요.” “네 필통은?” “선생님이 주신 거예요.” “그러면 모두 다 선생님이 주신 필통!”
개인을 묻지 않습니다. 개인 간 경쟁하지 않습니다. “김 집사는 십일조를 잘하는데 당신은 왜 십일조를 안 해?” 이렇게 묻지 않아요. 개인을 물으려면 육을 물어야 합니다. “김 집사는 십일조를 하는데 최 집사는 십일조를 왜 안 해?” 이렇게 개인적으로 따지고 묻고 추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모였어요?” 그것을 묻습니다. 내 주특기 말고 우리가 무엇을 지향하면서, 누구 공로로, 누구 덕분에 살았다는 그것만 바라본다니까요!
그런데 이쪽의 지옥 가는 사람은 뭡니까?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냐고 묻는 것이 아니고, “네 실력이 뭐야? 누가 잘났어?” 개인을 묻습니다. 지옥 갈 사람들은 개인을 묻습니다. 이것이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 갈 인간이냐, 천국 갈 인간이냐'는 그 사람이 성경을 몇 독 했느냐, 신학을 얼마나 했느냐가 아니고 ‘그 사람이 아직도 개인적인 문제에 매달려 있느냐, 아니면 쳐다보는 대상이 주님이냐’ 그것으로 결정 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성화가 몇 점인가? 너는 70점, 나는 80점, 이런 개인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성경 전체 어느 곳을 펴도 “주님의 공로로 구원 받습니다. 우리는 안 됩니다. 십자가를 보세요. 우리 힘으로 될 것 같으면 왜 주님이 십자가를 졌겠습니까? 대신 다 몽땅 가져갔대요.”
제가 집에 있으면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음식쓰레기를 비웁니다. 비워보면 참 신기한 일이 있어요. 저녁에 내놓은 쓰레기가 그 이튿날 아침이 되면 감쪽같이 없어진 겁니다. 누가 가져갔습니까? 환경미화원이 가져갔지요. 저는 믿습니다. 뭘? 쓰레기차의 존재를.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뭘 믿었습니까? “내가 네 모든 죄를 용서하리라.” 간음한 여인은 그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믿었습니다.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는 누굴 믿었습니까? 옆에 계신 분이 내 죄를 다 가져간 것을 그는 믿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강도는 예수님이 쓰레기를 치운다는 것을 안 믿었습니다. 그러면 왜 안 믿었습니까? 일부러 안 믿었습니까? 이 세상 모든 인간은 개인의 자질과 상관없이, 두 부류로,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사람과 개인의 신앙적인 자질을 믿는 사람과 두 쪽으로 나뉘어져서 구원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렇게 두 사람 사이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느 쪽이냐를 묻는 거죠.
그 두 사람 사이의 십자가, 세 사람이 한 세트가 되어서 2007년도, 2008년도, 2009년도 그것이 한 세트로 우리에게 덮치면 ‘십자가를 중심해서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묻는 것과 동일합니다. ‘너는 구원받은 강도야? 아니면 다른 쪽이야? 너는 어느 쪽이야?’라고 십자가를 중심으로 양쪽포함해서 세 사람이 세트로 우리를 덮쳐버립니다. 그렇게 덮치면 ‘우리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하고 받아들일 때, 그 사람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하나님의 성도라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이거 제가 지어낸 이야기입니까? 이 근호 목사가 지어낸 이야기에요? 아니지요. 여전히 율법에 기대를 걸고, 율법에 기대를 건다는 말은 율법을 지키는 ‘나’에게 기대를 건다는 말인데, 내가 율법, 하나님을 말씀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어떤 의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기대를 거는 사람은 어디서 끊어진 사람이다? 그리스도에서 떨어진 사람이고 은혜에서 끊어진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미 ‘의롭다’하는 것이 율법 말고 다른 계통으로 이미 왔습니다. 여기 비타 500이 있거든요. 어느 집사님께서 “여기 비타 500이 있으니 잡수세요”하고 줬는데 내가 막 화를 내는 거예요. “아니, 의존교회 집사들은 뭐합니까? 비타 500 안주고! 정말 이래 나오기에요?” “보소, 보소. 눈 있거든 앞에 보소. 그게 뭔데?” “아이고, 비타 500이다. (맛있게 드시면서) 아이고, 주여! 은혜 감사합니다.” 이래서 (비타 500먹고) 구원받는 거예요.
이미 ‘의롭다’하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했는데, 그것(이루신 것) 안보고 이것(말씀)을 지켜서 남과 경쟁해서 이겨서 천당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사람인데 이 끊어진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나, 예수 믿는 법을 지켰다.” 예수 믿고 십자가를 믿는다는 겁니다. 그 사람한테는 예수 믿고 십자가 믿는다는 것이 뭐예요?
자기 육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행한 일 중에서, 더하기를 해서 다른 것도 지키고 예수 믿는 것도 지키고, 많이 지키면 뭐 하나 남지 않겠나 싶어서 온갖것을 다 지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키는 육이 여전히 살아 있는 거예요. 자기가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러면 진짜 믿음은 어디 있느냐?
갈라디아서 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좆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역사”라는 말은 ‘일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사랑으로 일하는’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 일하는’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 안겨준’ ‘사랑이 주신’ 뭐 밖에 없다? 믿음 밖에 없다. 그러면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내가 믿었다’거 하지 않고 뭘 이야기하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으로(사랑 때문에) 믿었다’고 하겠지요. 주님의 사랑을 증거 하죠. 주님의 사랑을 믿죠.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오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랑으로 구원받지 내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죠. 이것을 가지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너, 예수 믿었는데 왜 믿었어?” “내가 예수님을 사랑했잖아.”
이러면 땡!(틀렸다) 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야 합니까?
“너, 왜 믿었지?” “주님이 사랑이 내 허락도 없이 그냥 들어왔어. 주님의 사랑이 나에게 일을 하니까 나는 믿음이 생겼어. 내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는 거야”라는 것을 느끼는 겁니다. 지금 이 중에서 여러분이 남들이 하지 않는 전도를 매일 같이 해서 교인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매일같이 혹시 있습니까? 없지요? 없는 것이 자랑거리는 아닙니다.자, 그런 사람이 있을 때 제가 말합니다.
“집사님! 전도 몇 명 했습니까?” “얼마 되지도 않는 것 같은데 한 750명 정도 했습니다.” “그럼, 집사님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주님이 공로로 구원받지요.” “그러면, 전도한 게 뭡니까?” “그거는 죄지요. 뭐.” “왜 그게 죄 입니까?” “내 죄를 드러내기 위한 전도행위였으니까요. 전도행위는 주의 일이지만, 그게 내 죄고, 그게 용서가 필요한 죄인 것을 드러내기 위한 주님의 사랑의 차원에서 남들에게 시키지 않는 전도를 나에게 시켰습니다.”
이렇게 나올 때, 100점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은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안돼요.
“집사님, 교회 헌금 합니까?” “미쳤다고 헌금 합니까?” “왜 헌금 안하십니까?” “이 근호 목사님 강의하는 것을 보니 헌금 하지 말라면서요.” “헌금 하지 말라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는 ‘자발적으로 하라’는 것이 나오는데, 왜 이 근호를 들먹거리면서(핑계 삼아서) 성경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자발적으로 하라’고 되어 있거든요(고후 8:4, 9:7) ‘하라’고 할 때, 해 보니까 안 되지요? 하는 것은 되는데 ‘자발적’이 안 되지요. 더러워서 하죠. ‘아, 드러버라. 주고 말자. 아, 드러버. 조라, 조.’ 이렇게 억지로 내지요. 그럴 때 그 죄가 어떻게 됩니까? 용서를 받지요. 주님한테. 그러면 그 용서를 받기 위해서 뭘 가지고 했습니까? ‘헌금을 자발적으로 하라’는 말씀이 필요하지요. 그 말씀을 해 보니까 숨겨있던 죄가 나오고, 그 죄는 주님의 용서를 받는 겁니다.
주기도문에 뭐가 나옵니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가 나옵니다. 이것 성경대로 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이것 성경대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집에 있는 양식 다 내어 버리고 하루치만 달랑 있어야 됩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 없습니다. 말로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지만 ‘적어도 세 달치는 양식이 꽉, 쟁여져 있어야지’라고 하잖아요.
세 달치 양식 쟁여 놓았다고 해서 그것을 죄라고 우리나라 법이 이야기를 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내일 염려는 오늘 하지 마라. 내일 염려는 내일로 족하다’(마 6:34)는 이것을 지킬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밤에 잠잘 때 내일 생각 합니까, 안합니까? 하지요.
주식투자 하는 사람들은 주식 값 떨어질 때, 그 사람은 염려가 대단합니다. 그럴 때 그런 죄까지 누가 용서했다? 예수님이 용서했기 때문에, 그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하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주식 붙들고 벌벌 떨게 하시는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 주식 값 좀 떨어지면 벌벌 떨게 하고(심지어 약 먹고 자살소동 벌이고 난리 피우고…), 주식 값 좀 올라가면 찧고 까불거리게 하는(하, 조금만 더 집어넣을 것을…) 이런 것을 통해서, 자살하든 뭘 하든 간에 그런 인간까지 구원하시는 주의 십자가의 능력, 이것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를 잡고 흔드시고 사용하셔서 왜 우리는 우리 힘으로 안 되는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러면서도 그 가운데 강도처럼 놀랍게도 십자가의 공로로 이미 용서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니 이것이 큰 은혜요 기적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보다도 이 은혜를 남한테 자랑할 수 있는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