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8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15, 16강 / 갈라디아서 4:19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갈라디아서

15, 16강 / 갈라디아서 4:19

정인순 2010. 10. 12. 10:59

http://media.woorich.net/~woorich1/study/seoul/seoul070309a.mp3
http://media.woorich.net/~woorich1/study/seoul/seoul070309b.mp3


 

녹취 : 오용익

갈라디아서 제 15강

(이 근호목사, 2007년 3월 9일(1), 서울의존교회)

성경전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람에게, 그리고 사람은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사람밖에 없지요? 이 세상에 사람밖에 없다고 해서 성경이 사람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성경이 처음에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 사람에게 오고 다시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이 말이죠. 그런데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사람뿐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안보입니다.

사람만 보이고 사람밖에 없고 하나님은 눈에 안보이기 때문에 생각을 안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생각 안 해도 살 수 있고, 하나님 생각 안 해도 맛있는 것 먹을 수 있고, 하나님 생각 안 해도 공부만 잘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이고, 착하다. 참 훌륭하다”고 칭찬을 해 주니까 하나님 같은 것은 빼먹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끼리는 서로 이야기하면서 잘 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하고 사람하고 어떻게 연결 되는가’를 잊어 버렸어요. ‘하나님하고 사람하고 사귈 때 어떻게 사귀는가?’ 여러분은 친구하고 사귈 때 어떻게 사귑니까? 서로 이야기하면서 사귀겠지요. 그러면 친구끼리 서로 알아듣는 겁니다.

그냥 허공을 향하여 “친구야! 반갑다!” 그런다고 친구가 오는 겁니까? 그렇지 않지요. 전화번호 찾아서 눌러서 ‘신호가 가는가’ 확인합니다. “전화 받으세요. 전화 받으세요(신호음 가는 소리).” 그 다음에 친구가 전화를 받아서 “왜 전화 했는데?” 하면 그때서 이야기가 되지요. 연결이 된 거지요. 이렇게 친구하고는 전화를 하든지 만나서 대화하면 연결이 되는데, 하나님하고 사람하고는 어떻게 연결됩니까?

무척 어렵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어려운 일을 안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하고 연결하는 방법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모른다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끊어진 상태에서 사람끼리는 잘 지내는 것 같지요. 그런데 그렇게 지내다가도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언제 끊어집니까?

A라는 친구와 B라는 친구와 서로 사귀고 놀다가 헤어져서 집에 가는데 갑자기 차가 들이닥쳐서 A라는 친구를 받아서 그 친구가 죽어 버렸어요. 그 친구는 화장터의 재로 사라져 버리니까 더 이상의 사귐이 끊어져 버립니다. 더 이상 사귈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사이가 끊어지는 것을 가지고 ‘죽음’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도 죽음이 있습니다. ‘나, 하나님 그런 것 몰라. 하나님이 있다고 해도 연락할 방법도 나는 몰라. 연락해 봐야 소용도 없어.’ 이런 경우를 가지고 죽었다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죽었다’는 것에 두 가지 종류가 있지요? 첫 번째의 ‘죽었다’는 것은 교통사고를 당해서 흙으로 돌아간 경우같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죽었다’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 밖에 모르잖아요. 누가 ‘죽었다’고 하면 ‘어떤 사람의 숨이 끊어졌다’는 것밖에는 모르지요?

그런데 여기에 두 번째 ‘죽었다’가 있지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를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의 친구가 여러분을 보고 “너, 죽었다”고 하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나쁘겠습니까?” “내가 왜 죽어? 내가 이렇게 살아 있잖아. ‘내가 지금 살아 있다’고 하면서 말도 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살아 있잖아.” 이렇게 마구 대들겠지요. “오! 그래 너는 살아 있어. 말을 하는 것 보니까 안 죽었구나”라고 하겠지요.

여러분이 하얀 병원침대에 누워있는데 친구가 와서 “의사 선생님! 얘가 죽었어요. 내가 쿡쿡 찔러도 얘가 깨어나지를 못해요. 얘가 죽었어요.” 그러면 잠자고 있던 여러분이 화가 나서 “내가 왜 죽어? 병원에 누워 있다고 다 죽은 거야? 나는 아직 살았다” “의사 선생님! 얘가 말을 해요. 살았나 봐요”라고 이야기를 하겠지요. 이처럼 사람이 말을 하고 움직이고 밥을 먹고 잠을 자면 그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움직이고 밥 먹고 전화하고 시시덕거리면서 살아도 하나님을 모르면 그것을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둘 중에 어느 말이 맞습니까? ‘살아 있으니까 살았다’는 말이 맞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모르면 죽었다’라는 그 말이 맞습니까? 다시 들어 보세요. 학교갈 때 빗질해서 머리 다듬고 옷매무새 다듬고 꾸미는데 하나님은 그걸 보시면서 “너는 아무리 꾸며도 죽은거야”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여러분이 거울 보면서 ‘나는 참 예뻐’ 이러고 있는데 여러분의 친구가 “얘! 너는 죽었어”라고 한다면 우리는 화를 덜컥 낼 거예요. “내가 왜 죽어? 이렇게 살아서 거울을 보면서 나를 꾸미고 있는데”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다 죽은 사람입니다. ‘죽었다’는 것을 이야기 해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들은 죽은 것이다”라고 할 때 사람들이 수긍을 했습니까, 화를 냈습니까?

화를 냈어요. “예수 네가 뭔데 멀쩡하게 살아 있는 나를 보고 ‘죽었다’고 하느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소경이 본다고 하면 소경이고 ‘나는 본다’고 하면 그것은 소경이 아니다”(요 9:39)라고 아주 어려운 말을 했어요. 반대로 이야기 했어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

우리가 지금 친구끼리 이야기를 하면서 ‘살았다, 죽었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을 안 해줍니다. 사람은 사람들끼리 보면서 “너는 죽었어. 혹은 너는 살았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끼리만 보는 것이 아니고 여기 있는 이 전부를 다 봅니다. 전부를 다 보다 보니까 하나님과 끊어지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현재 죽어 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죽어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구원시킬 사람은, 그냥 100살 혹은 200살 이런 식으로 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서 진짜 산 사람, 하나님과 관계가 다시 이어진 사람, 하나님과 안 끊어진 사람을 만들어서 그 사람을 산 사람으로 만들어요. 어린이 여러분들이 약간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사람들끼리 ‘죽었다. 혹은 살았다’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일체 인정 안 해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체를 다 보고 있는데 하나님은 전체는 안보이고 자기가 똑같이 닮은 꼴, 닮은 사람만 보이다 보니까 숨만 쉬면 ‘살았다’고 보고 숨 끊어지면 ‘죽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체를 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살았다’고 보지 않고 ‘죽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살았다고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면 그 사람은 산 사람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평생을 거지로 살았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거지가 하나님은 알았어요. 그 거지가 평생 거지로 살다가 죽자 다른 사람들이 “아이고! 저 거지가 죽었구나”하면서 가슴 아파 할 때, 그 사람은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그 사람은 계속 살아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죽었느니 살았느니 하는 것은 신경 쓰지 말라는 말입니다. 남들이 “쯧쯧! 거지 나사로가 죽었구나”라고 이야기를 해도 그 거지 나사로는 그런 말을 안 들어요.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살아 있어요. 거지 나사로는 전체를 다 볼수 있기 때문에 전체를 다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안다고 하는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여러분이 성경책을 펼친 이유가 있습니다. 친구들끼리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죽은 것을 살릴 수는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람을 제대로 살릴 때 ‘이렇게 살립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책이 성경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보면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요. ‘하나님이 하는 일은 우리가 죽어도 산 사람으로 만들어 줄 정도의 이야기다’라고 해야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도 산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덮어 버리면 ‘죽으면 어떡해? 죽으면 안 되지. 죽으면 안 돼. 죽으면 다 헛일이야.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라는 생각이 들어가죠. 그러다가도 성경을 보게 되면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구나. 진짜 하나님의 생각은 그런 뜻이 아니구나’ 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를 처음부터 산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어떻게 해서 내가 산사람이 되었는가’를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 힘으로, 우리 생각으로 살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앞선 안산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남편이 코를 골아요. 코골이 남편이 너무너무 심하게 코를 골아서 아파트 위아래 층까지 소리가 날정도로 소문난 남편입니다.

그런데 이웃이 와서 “와우! 댁의 남편이 코를 심하게 골던데요”라고 할 때, “제가 열심히 기도를 해서 그렇게 제 남편이 코를 많이 골았습니다”라고 하면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지요. 아내가 기도를 하나 안하나 남편은 코를 골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는 이렇게 해야지요. 제가 기도를 안 해도 제 남편은 코를 잘 골아요. 그 코골이를 구원해주는 ‘구원의 능력’이라고 봅시다.

그 남편이 코를 골 때 마다 “나는 다시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드르렁). 너는 이미 구원받았다(드르렁)”이라고 코를 곤다면 옆에 있는 아내가 그 코를 골 때마다 무엇이 들리겠습니까? 자기가 기도, 전도, 헌금 안 해도 남편이 일방적으로 계속 구원의 능력을 주고 있지요. 그럴 때 그 아내가 옆사람과 이야기할 때, “당신의 남편이 코를 잘 골던데 누구 능력으로 코를 잘 고는 겁니까?” “제가 잘나서 남편이 코를 잘 고는 겁니다”라고 이야기하면 그것은 틀린 거지요.

맞는 것은 뭡니까? “우리 남편은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그냥 코를 잘 골아요.” 그분의 주특기, 그분이 하는 일이 그 일이란 말이죠, 제가 이런 예를 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끊어진 사람을 죽은 사람이라고 했지요? 죽은 사람이 스스로 살아나면 그 사람은 죽은 자가 아니에요. 죽은 자는 아예 죽어 있어야 합니다.

드라마에서 죽은 사람이 숨 푹푹 내 쉬면서 산사람처럼 하고 있으면 영화를 찍을 수가 없어요. 꼼짝 안하고 죽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왜 우리는 자꾸 꿈틀거리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지요. 죽은 자 라면 죽은 자 시늉이라도 해야 돼요.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어떻게 스스로를 꼬집어서 살릴 수가 있겠습니까? 죽은 자입니다” 이렇게 나와야 합니다.

사람의 가장 생생한 현실은 죽음입니다. 죽음 빼놓고는 나머지는 다 환상입니다. 사람이 아프다가 죽게 되면 자기가 자기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완전히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죽어서 부활 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 그 부활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하느냐 하면 그 앞에 있는 죽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때만 생생하게 주의 능력으로만 부활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안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도 잘하지, 헌금도 잘하지, 전도도 잘하지, 춤도 잘 추고 공부도 잘하죠.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고 내가 펄펄하게 살아 있다’는 겁니다. 이러다 보니 무엇을 놓칩니까? 생생한 현실, 죽어도 부활되고 죽고 난 뒤에 생명의 세상이라는 것을 자꾸 놓치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내가 코 안 골고 잠을 푹 잘 때, 다시 말해서 남편이 코를 골 때는 남편이 코고는 소리가 잘 들리지만 남편이 코를 곤다고 자기도 같이 골아 버리면 남편이 코 고는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안 들리겠습니까? 안 들리죠. 자기의 코고는 소리가 더 심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지금 남편께서는 “너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었다”고 코를 골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코를 심하게 골면서 “드르렁! 내 기도는 귀한 기도, 드르렁! 내 헌금은 귀한 돈, 드르렁! 내 전도는 너무 끝내줘.” 이래 버리면 남편이 주는 용서가 들리겠습니까? 하나도 안 들려요. 들릴 리가 없어요. 그러면 가만있는 남편이 좋은 남편이겠습니까? 정말 사랑하는 남편 같으면 발가지고 차면서 “조용히 해! 내가 골 때는 가만있어. 내가 코 고는데 왜 네가 골아. 너는 내 코고는 소리나 감상해” 하겠지요?

그렇게 발길로 차는 그 기간이 보통 90년 갑니다. 평생가요. 좀 오래 사는 분 같으면 95년 갑니다. 평생 우리가 살아가면서 뭐 합니까? 예수님이 일하신 공로를 누가 방해를 놓습니가? 내가 방해 놓습니다. 이유가 뭐지요? ‘나는 지금 이런 일을 통해서 살았다’고 우기니까 그것을 뭉개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해서 구원 한다”고 하니까 “하나님! 저도 하나님을 사랑할 줄 압니다.”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저 인간이 코를 고는구나. 내가 골면 될 일을 혼자서 또 고는 구나” 하죠. 사람이 갑자기 몸이 아프다든지 지갑에 돈이 떨어지게 되면 그때부터는 이웃 사랑이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몸이 아프면 기어가는 개미조차 귀찮아요. 날아다니는 모기는 물론이고요.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친구도 다 귀찮아요. 교회에서 목사님과 장로님과 집사님들이 몰려와서 부르는 찬송가도 귀찮아서 마귀의 노래처럼 들리고 성경말씀 들려줘도


‘빨리 좀 가 주세요. 제발 혼자 있게 놔두세요. 이제 그것도 마이(많이) 묵었다(들었다). 고마 해라(그만 해라). 이제 아예 내가 설교해볼까? 예수고 삼위일체고 십자가고 다 귀찮다.’ 내 몸 아프면 모든 것이 귀찮아요. 그리고 돈 없으면 모든 것이 다 적개심과 분노로 와요. ‘돈 있으니까 교회도 다니지 나같이 돈 없으면 무슨 수로 교회를 다니나’하는 식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에 대한 분노가 터지죠.

신학을 한다, 성경을 많이 봤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 들어가면 달랑 두 가지가 남아요. 하나는 ‘몸 아프고 배고픈 것’을 위인이 세상에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평소에 신앙생활 한 것은 뭡니까? 몸 안 아프고 배 안 고픈 상태에서 철저하게 덮어씌운 포장지죠. 위장술, 위선들입니다. 그 위선들을 가지고 우리는 마치 구원받은 것 인양 으스대면서 교인행세 꽤나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리 봐도 ‘저 인간은 지금 산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인데 교회를 오래 다니다 보니까 그것으로 자꾸 ‘자기는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 있다’고 우기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래도 우길래?” 하면서 또 한 꺼풀을 벗깁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시련을 주었지만 나는 욥처럼 견뎌낼 것입니다’하고 버티거든요.
“그래? 욥처럼 이라고? 욥이라고 했지?” 그리고 또 한 꺼풀 벗겨냅니다.
“주여, 이것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면 제가 교회 안 나가는 수가 있습니다.” “슬슬 본색이 나오는구만. 자, 한 번 더 갑니다.”
“평생 예수 믿고 난 뒤에 하나님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이제 내 앞에서 예수 소리 하지 마라. 이제 나는 예수와 작별했다.”
“진작 그러지. 진작.”

비로소 그 순간에 남편의 코골이가 들리게 합니다. 죄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자기 생각이 죄입니다. 성경에서 죄가 뭐냐? 자기 생각입니다. 중요한 거니까 적어 놓으세요. 근거가 뭡니까?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읽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7-39)

죄라는 것은 ‘자기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 생각이 보통 몇 년 갑니까? 보통 평생 갑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다룰 두 언약에 대해서 기초를 다지기 위함입니다. 오늘 강의가 어렵기 때문에 코골이에서부터 쉽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정리해 봅시다.

남편이 코를 고는데 그 내용이 뭡니까? “너희의 죄를 용서했다”고 코를 곱니다. 이 말은 “죽어 마땅한 너희를 내가 내 피로 살린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그 코고는 남편의 옆에 있는 아내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내가 왜 죽었다고 하느냐? 이상한 분이네 죄를 안 지으면 그만이지. 죄를 용서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죄를 용서했다니?” ‘아하, 내가 몇 가지 평소에 살면서 잘못한 것을 용서해 준다는 그 말이겠지.’

그런데 그런 말이 아닙니다. “너밖에 모르는 죄를 내가 대신해서 짊어짐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너는 구원 된다”고 매일 밤마다 코골이 하시는 거예요. 죄를 안 짓게 해서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고, 죄는 죄대로 나오되 그 죄를 대신 계속해서 자기 쪽으로 퍼 담아서 옮기고 또 옮기고, 나오면 옮기고 나오면 옮기고 계속해서 퍼 담으시는 남편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사람마다 누구나 개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특색이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염을 기르고 있다든지, 어떤 사람은 머리전체가 허옇게 되었다든지,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개성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개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의 죄를 뒤집어쓰기 바쁘기 때문입니다. 남의 죄 뒤집어쓰기 바쁜 사람이 무슨 개성이 있겠습니까?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미화원이 어떤 개성을 가지고 있던가요? 환경미화원 한다면서 자기 개성 살린다고 온갖 것 처바르고, 치장하고, 자기 개성을 살려서 온다면 환경미화원 제대로 하겠습니까? 환경미화원은 도리어 개성을 없애는 겁니다. 하도 쓰레기를 뒤집어쓰기 때문에

모자도 꾹 눌러 써야 하고, 주황색 제복을 입습니다. 쓰레기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 완전히 자기를 감춰버려야 돼요.

예수님은 계속해서 쓰레기 같은 우리 죄를 뒤집어쓰기 때문에 개성이 없어요. 그냥 뒤집어 쓰고 매일 억울하게 당하면서 오해 받고 곡해 받고 핍박 받고 모멸당하고 멸시 당하는 식으로 계속 살아 온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는 모든 말씀, 예수님께서 한평생 살아오면서 보인 모든 행적과 기적은 어떤 노선에 서야만 알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자기가 짊어 졌기 때문에 억울하게 욕을 얻어먹는 그 노선, 바로 십자가의 노선에 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행적과 기적과 말씀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이 노선 말고 다른 노선에 서면 개성이 철철 넘치고, 자기 자존심이 철철 넘치고, 자기 고집이 대단합니다. 이런 사람이 말씀을 이해한다고요? 이해 못합니다.

심지어 한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써 5천명을 먹이니까 ‘예수님에게 떡을 얻어 먹겠다’고 마구 달려드는 거예요. “너는 예수 모르지. 나는 예수 알아. 오늘도 떡 얻어먹으러 가자.”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자기 자존심과 자기 개성을 더욱 살리고 더욱 훌륭하고 가치가 더 큰 사람이 되었다’고 우쭐댈 그 때 예수님께서 하는 말이 “너희가 내 살과 피를 먹을 수 있느냐”고 합니다.

죄라는 것은 자기 생각이 죄입니다. 구원을 해주신 다는데 왜 자기가 구원을 받으려고 합니까? 나는 이것이 이해가 안돼요. 그래 놓고는 믿는다니 무슨 그런 믿음이 다 있습니까?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그게 무슨 믿음입니까? 그것은 오기지요. 참 이것이 안타까운 이야기인데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 나옵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원수지간이 되었느냐’ 이말 입니다. ‘참된 말을 했다고 해서 그 말에 삐져서 원수가 되었느냐’ 하는 말이죠. “사실 너희들은 나에게 눈이라도 빼 줘야 돼. 전에는 나를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반겼잖아.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어서 눈이라도 빼어 줘야 할 사람을 가지고 원수로 간주하느냐?” 그 말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영적으로 다가오는데 그 사람들은 자꾸 육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육’이란 ‘살아 있는 나를 더 멋지게 살려줘’라는 것이 육입니다. ‘영’은 ‘너는 죽은 자야’라는 것이 영입니다. 살려주는 것도 죽은 자가 요청한 그대로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요청한 그대로 이끌려 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어이 눈 빼줘.” “예.” 하면서 눈 빼주고, “손가락 빼줘” “예.” 하고 손가락을 빼줘야 영적인 존재라는 말이죠. 그 반대가 육적인 겁니다. “이거 아까운데요. 이거 내건데요. 이것은 나의 손가락인데요.” 나, 나, 내 것, 이것이 계속 유지되면 그것은 자기 생각이 아닙니까? 그것은 육적이라는 겁니다. 갈라디아서를 해석하면서 이런 자기 개성이나 자기 가치를 높이려는 사람은 갈라디아서가 폐쇄하고 그 사람을 ‘오지 말라’는 식으로 밀어 버립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갈라디아서를 보지도 말라는 겁니다. 왜? “만약 너의 개성과 자질과 가치를 높이는 식이라면 그것은 사도바울 자신이 증거 하는 복음과 원수가 된다”는 식으로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씀에다가 복음을 집어넣어서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육적인 노림수를 가지고 사도바울을 기대하고 해석하니까 “아이고, 천사님! 아이고, 예수님” 하면서 영접할 때는 아주 기분 좋게 영접을 했지요.

“아이고, 이런 소리 첨 들었습니다. 멋있습니다. 이제 나는 잘되겠지.”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 사도바울이 실상과 본뜻을 이야기 하니까 “그런 소리 하려거든 가소. 다시는 그런 소리 필요 없습니다” 하고 밀쳐 버리는 겁니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지난 번 유성에서 했던 십자가마을 수련회, 로마서강의를 대폭 수정하고 보충해서 제목을 “정죄함이 없느니라”는 제목으로 낼 예정입니다. 거기에 이런 것을 보충해 놓았습니다.

한국에 종교가 들어오면 전부다 가족중심주의로 바뀌어 버립니다. 그게 혈연 중심입니다. 이스마엘이죠. 이스마엘이기 때문에 어떤 종교가 들어와도 효중심, 가문중심, 자기 핏줄 중심으로 다 바뀌어져 버립니다. 거기에다 이삭(복음)을 이야기 하면 된통 혼이 나고 교회에서 쫒겨나 버립니다. ‘우리 가문을 빛내기 위해서 신, 혹은 부처는 우리에게 무엇을 도와 줄수 있느냐?’ 철저하게 자기 혈연, 가족, 가문중심을 주장하고 절대로 포기를 못해요.

교회를 와도 헌금을 잘 안하는 이유가 자기 가족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송곳처럼 찌르는 말입니다. 이런 말 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런 말 듣는 사람은 ‘욱’하고 올라오게 됩니다. ‘교회는 천국이고 진짜 형제와 자매는 함께 예수 믿는 우리다’라고 백날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찬송가 부를 때뿐입니다. 우선은 내 핏줄입니다. 집에 있는 나의 애들이고 남편이고 아내가 우선입니다. 어떤 종교가 들어와도 다 바뀌었어요. 불교 들어와도 그런 식으로 다 바뀌었습니다. 부처는 “세상은 더럽다. 떠나자”고 했어요.

통일신라 때의 불교는 ‘출가’(出家)가 아니고 ‘제가’(齊家)입니다. ‘가정에서 불도를 섬겼더니 복을 받아서 효도를 더 잘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모든 불교가 ‘효’로 다 바뀌어졌어요. 그것을 보면서 눈치 채는 거죠. ‘아, 이제는 기독교 차례구나.’ ‘이왕 살아 있는 것 살아 있다고 해 주세요’라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도바울은, 또 복음은 “네가 살았다고 하는 그것이 착각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숨을 쉬고 힘차게 달리기를 해도 지금 죽은 채로 달리기를 하는 겁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우리에게 ‘과거-현재-미래’가 있다면 우리의 미래라는 것은 과거에 이미 규정된 것을 그냥 시간으로 늘려서 확인하는 그것뿐입니다. 과거도 미래도 없어요. 미래는 과거의 재탕입니다. 과거에 이미 십자가로서 하나님은 우리를 죽은 존재로 봤어요. 십자가가 무슨 일입니까? 내 죄를 가져갔더니 내 죄를 가져가신 분이 저주받은 사건이 십자가사건 아닙니까?

그분이 십자가를 진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내 죄를 가져 가셨기에 돌아가셨잖아요. 내 죄를 안 가져가셨으면 안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니 그분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사실은 누가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죽어야 되잖아요. 내가 죽어야 한다는 그런 관점으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봤습니다.

황혼의 그림자를 아시지요? 황혼에 비추인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잖아요. 이미 죽은 우리가 여기 있는데 그 긴 그림자가 죽을 때까지, 미래까지 계속 여기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라는 것은 새로운 것이 따로 없어요. 새로운 것을 기대할 것이 따로 없고 ‘왜 우리는 십자가 아니면 구원을 못받는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우리의 숨겨진 죄와 예수님의 은혜가 같이 병행해서 계속 끝까지 가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우리 집 애가 어떻게 자라서 효도를 하는지 안하는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도 결국 나라는 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확정된 운명, 확정된 존재구나’ 라는 것을 날마다 확인해 가는 겁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에 우리교회 집사님 한분이 영화표를 주셔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 이름이 <바벨>인데 이것은 분명히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으니까 이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집사님! 이 영화 보고 저더러 영화평을 쓰라는 거지요? 갑시다.” 그래서 갔습니다. 영화가 두 시간 동안 상영되는데, 영화 평을 써야 되기 때문에 그 두 시간 동안은 졸수가 없습니다. 영화평을 거짓말로 쓰면 안 되거든요. 바짝 정신을 차려서 어두운데서 메모지와 볼펜을 들고 영화 내용을 순서대로 다 기록해야 합니다.

이 무슨 고역인지 모르지만 그 영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세 네식구 모여 사는 가정의 작은 행복도 세상 돌아가는 것이 그냥 두지 않고 완전히 박살을 내더라는 말입니다. 소박하고 욕심없는 가정의 조그만 행복도 엄청난 파도 같은(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IMF같은 경우)것이 덮치면 다 날아가 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IMF때 자살한 사람들 많잖아요. 그 사람이 무슨 욕심을 낸것도 아닙니다. 세계 최고의 재벌 되겠다고 설친 것이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생각을 가지고 일을 했는데, 다른 외부의 조건이 쳐들어 와서 박살을 낼 때, 그때 소통의 단절이 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거예요. 언어가 소통이 안 되는 그것을 가지고 감독은 영화제목으로 <바벨>(혼란, 혼선, 혼돈이라는 뜻이죠)이라고 표현했어요. 각자각자 작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저쪽에서 가지고 있는 것을 이야기 해 보면 이야기가 안 되는 거예요.

각각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이 부딪히니까 힘센 사람은 정복하고 힘이 약한 사람은 거기서 깨어지면서 조그마한 행복이 다 부서지는 절망을 느낄 때 감독이 말합니다. “도대체 이 절망을 해결할 방법이 있느냐?” 없지요. 없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이것은 신이 내린 팔자이고 운명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바벨>, 이 세상은 ‘혼란의 시대’라는 겁니다.

“전체를 모르고 내 것만 알고 있을 때 어떤 사태가 벌어져서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행복마저 박살낼 수 있는 그런 사건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소통단절의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누구 해결책 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라는 취지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서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어요. ‘세상의 현실을 이렇게 넓게, 그리고 제대로 본 사람이 또 있겠느냐’라고 점수를 준거지요.

‘현실을 더욱 더 답답하게 만들고, 절망을 더욱 더 절망되게 해서 그 절망의 원인을 캐보자’는 이야기죠. 원인은 없습니다. 그런데 원인이 없다는 말은 해결책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뭡니까? 그냥 막가는 겁니다. 오늘날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교육할 것이 하나뿐입니다.

“아버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막 살아라.”

왜? 세상 자체가 막가는 거예요. 대통령 되어서 “바르게 하겠습니다”해도 1년 지나고 1년 6개월 지나면 막갑니다. 밑에 있는 참모들이 우려먹을 것 다 우려먹고 차지할 것 요직 다 차지해 버립니다. 그야 말로 막가는 겁니다. 그렇게 막 갈 때 같이 막 가줘야지 혼자 바르게 살면 그 사람만 깨집니다. 세상 막 갈 때 같이 막 가는 수밖에 없지요.

어떤 교회는, 전도 많이 한 구역은 보너스로 단체로 태국에 해외여행 보내줍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가난한 교회 교인이 큰 교회로 갈 수밖에 없지요. 공짜로 태국을 관광할 수 있잖아요. 막가는 겁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부교역자를 뽑을 때 중고등부 몇 명을 채우면 재계약하고 못 채우면 나가야 됩니다. 그러면 중고등부 채우기 위한 방법은 뭡니까? 돈으로 해결 보는 겁니다. 행운권부터 시작해서 교회 등록하면 마치 학원처럼 가방주고 선물주고 온간 것을 줍니다.

강남의 학원들이 학생들 유치 경쟁을 하면서 돈 주고 빼오는 것처럼 교회마다 돈을 주고 돈으로 도배를 하듯이 해서 다른 교인들을 다 데려와서 교회를 채워야 그 전도사와 부목사가 잘리지 않고 재계약됩니다. 그냥 막가는 겁니다. 이유가 없어요. ‘이유 없는 세대에 살고 있다.’ 그것이 바벨입니다. 그런데 그 감독이 불신자이기에 모르는 것이 있어요. 사람은 신(하나님)보다 더 너그럽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렇게 절망해도 ‘시간이 약이죠. 세월이 지나면 ‘팔자려니’ 하고 또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내고 살아가는 겁니다. 상처 낫을 때 후시딘 연고를 바르면 다시 회복하듯이 사람은 희망이 그냥 힘이 되죠. 그것을 교회에서는 ‘비전’이라고 합니다. 어느 교회 보니까 ‘비전이 능력이다’라고 써 붙여 놓았어요. 아예 강당 이름을 ‘비전 홀’이라고 이름 붙여 놓았어요.

‘고도를 기다리며’(사무엘 베게트의 작품인데 노벨문학상을 받았어요)라는 연극에 보면 희망이 오지 않습니다. 희망대로 되지 않지만 ‘단지 지금 희망한다는 그것이 사람을 살리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냥 희망하는 것이니까 ‘희망이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묻지를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참 재미있는 예가 있어요. 어떤 마을에 희망의 중심터가 있어요. 그 터는 성스런 영역이라 아무도 가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거기서 희망이 솟아 나온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나가던 엔지니어가 사람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런 것은 미신이다’고 하면서 거기에 가봤어요. 가보니까 소파 두 개 놓여 있고 거미줄이 쳐져 있었고 아무것도 없는 폐허였습니다. 그래서 술집에 가서 “당신들이 신령한 힘이 나온다는 그 터에 가보니까 그게 폐가(廢家)더라. 믿지 마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를 때려 죽여 버렸습니다. 왜 죽였겠습니까? 희망의 샘터를 공격해 버렸잖아요.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이 누군지는 몰라요. 다만 하나님이 희망을 준다는 그것 때문에 그냥 빈터로 남겨두고 계속 그것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 4천 7백 5십 6번 넘어져도, 4천 7백 5십 7번 일어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냥 가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이미 과거에 규정된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냥 갈 때 까지 가보는 겁니다. 막 사는 거예요. 깨지면 또 일어서고 깨지면 또 일어서고.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너는 이미 죽었다.” 왜요? “네 죄를 가져가신 예수님이 죽었잖아. 저주 받았잖아. 예수님의 십자가를 봐라. 그러니 이미 죽은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을 볼 때 3장을 놓치면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할 때 그 십자가는 이미 우리의 미래조차 다 확정해 버렸어요. 다른 미래는 없습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을 만나는 것 외에 다른 미래는 없어요. 그 미래가 뭐냐?

‘우리는 비록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고 이미 살아 있었구나’라는 것을 순간순간 확인하는 그런 미래가 되겠지요.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이 영이 왔다는 것은 ‘이미 우리 죄는 청산 되었구나. 우리 죄는 이미 다 없어졌구나’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이미 너는 정죄함이 없다”는 그 코골이 소리를 우리가 들어가면서 ‘이미 십자가와 부활에서 이미 해결 났구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해결 난 것이 무엇인가? ‘죽은 우리를 살렸고 우리 죄를 용서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죽음이 무엇이며, 왜 내가 펄펄 살아 있는데도 죽었다고 하며, 죄는 무엇이며, 내 생각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데 왜 내 생각이 죄인가’를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 이게 내 생각을 하지 말고 영적인 생각을 해야 되겠구나.’

사도바울이 왔다고 할 때, 자기 생각을 안 하고, 사도 바울이 전하는 그 복음 생각하면서 “눈이라도 빼드리겠습니다”라는 바로 그것을 사도바울은 지금 요구하는 거예요. “나는 영으로 갔는데 너희는 왜 육으로 돌아오느냐. 영으로 갔으면 영으로 돌아 와야지, 왜 영으로 갔는데도 육으로 돌아오느냐” 이 말입니다. “정말 당신들이 영을 안다면 육적인 눈이라도 빼 줬을 것이다”는 말이지요.

지금 눈 빼주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원수지간이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내가 너희들한테 갈 때. 너희들은 ‘사도바울이 와서 우리 교회를 아주 엉망으로 만들고 시기와 분쟁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는데 분쟁이 나야 그게 정상이다”라고 합니다. “분쟁이 나야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 것이 아니냐?” 하는 겁니다.

학원 같으면 수강료 내고 “6개월만 공부하면 (복음)다 압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지금 중장비 학원, 혹은 제빵 제과 학원을 다닌다면 학원을 다니는 당사자가 누굽니까? ‘나’잖아요. 나가 있으니까 이것은 무슨 생각? ‘나’가 있다는 것은 자기생각 아닙니까? 교회는 ‘나’생각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 6개월만 다니면 복음 다 뗍니까? 그러면 6개월만 다니고 교회 안 나오겠습니다. 목사님 말 들어보니 교회 안 나와도 구원받는다면서요. 수강료 내고 6개월만 듣겠습니다.” 이것은 원수지간이고 복음을 너무나 이해 못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육인데 육에 속한 사람이 영에 들어가면 “주여! 이제부터 나의 눈을 빼든지, 팔을 자르든지 주께서 마음대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복음을 위해서.” 이게 영적인 사람이지요.

“아이고, 아까워라.” 이게 아니라 “내생각 안하고 저는 주님 생각 할 테니까, 주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시든지 그것은 주님의 자유이십니다. 그저 저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겠습니다.” 그것을 네 자로 줄이면 뭡니까? “까라면 까”겠습니다. 그게 믿음 아닙니까? 이미 영적인 세계에서는 나의 것이 없기 때문에 “주께서 원하는 대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겠습니다. 눈 빼드리죠.”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왜 그게 안 되느냐’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안타까워서 “나는 그것을 기대하고 이야기를 했는데 왜 당신들의 반응은 나를 왜 원수취급 하느냐? 교회 분란 일으켰다고 왜 원수취급 하느냐?” 이 말이죠. 그런다고 내가 열심을 안 낼것인가 천만의 말씀 더욱더 열심내서 너희에게 나아가리라 그것이 19절이죠.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히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갈 4:17-20)

“너희가 그런다고 해서 내가 절대로 포기 안한다. 왜? 너희들 속에 하나님의 자녀가 있고 너희들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 날 때까지 나는 포기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어디서부터 발생되어서 어떻게 되는가를 공부하겠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 : 오용익
갈라디아서 제 16강

(이 근호목사, 2007년 3월 9일(2), 서울의존교회)

‘그리스도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이죠. 어떤 구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되어 있고, 어떤 구절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무엇인가? 이것이 바뀝니다. 처음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형상이 창세기 9장에 오면 바뀝니다.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쉽게 말씀드리면 사람이 영적인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보이지 않는 부분이거든요. 사람은 사진을 찍으면 자기 모습이 보이잖아요. 그리스도의 형상은 찍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어떻게 자라나는가?’ 이것을 사진 찍어서는 알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으면 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으면 비록 육을 가지고 있고, 육적인 행동이 나타나도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는 겁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주도권을 쥔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쁜 짓을 했습니다. 이런 몹쓸 짓을 했습니다”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이 ‘영적인 사람 되느냐 마느냐’를 다 결정짓는 겁니다. ‘내가 잘났다, 못났다’ 하지 마시고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일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이런 분입니다’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 사람은 영생 얻는 사람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인간에게 주도권을 쥐게 되었는가? 다른 말로 하면 언제부터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주도권이 밀렸는가? 혹은 빼앗겼는가? 그것을 생각해 봅시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상당히 복잡하지만 체계를 갖추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창세기로 가 봅시다. 창세기 9장에 5-7절에 보면,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니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기에 피를 흘려서는 안 되고”, 그 다음에 4절에 “고기를 먹되 피채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이세상에 충만하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9장에도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조건이 붙습니다. 그것은 “피에 대해서는 손 떼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인간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은 곧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9장에 가면 하나님의 형상이 따로 있고 인간이 따로 있어요. 하나님의 형상은 피를 다룰 수 있는 권한이 있고, 인간은 피를 다룰 수 없습니다. 창세기 9장은 ‘피를 다루지 않는다’는 조건입니다. “고기를 먹되 피 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피를 염두에 두고 그 조건에 굴복한 채 사람으로 살아야 된다. 안 그러면 죽여 버린다”는 겁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사람이 곧 하나님형상’이었지만 창세기 9장에서는 “피를 건드리면(음식먹을 때 피를 함께 먹으면) 나는 사람취급 안 하겠다”는 말입니다. ‘피의 조건하에 있을 경우에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간주되고 그 외에는 절대 하나님의 형상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 8장 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어려서부터.”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응애!” 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악한 놈만 태어나는 거예요. 집에 자녀가 세 명 같으면 악한 사람만 세 명이 태어난 겁니다. 아빠 엄마 합쳐서 5명.

“?곰 세 마리가 한집에 있어. 아빠 곰, 엄마 곰, 애기 곰. 전부 다 악한 곰.” 곰 세 마리가 한집에 있는데 이 곰 세 마리가 어떤 조건하에서만 살 수 있는가 하면, 피 안에서만 살 수 있는 조건으로 창세기 9장에서 바뀝니다. 그러면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것은 뭘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것인가? “피를 손대면 인간취급 안 해준대” 라는 그 계약과 그 원리(그런 정신과 사상)가 온 땅에 편만 되도록 다스리고 정복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날 때부터 악한 자이지만 하나님께서 거룩한 피를 흘려서 다시는 사람을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용서와 자비의 계약이 사람이라는 매체를 통하고, 사람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이 땅에 확산 시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라고 사람이 아니라 피 때문에 용서 받았다 하는 그 경우에만 사람으로 간주 하겠다. 그 외에는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겠다. 다 죽여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9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창세기 1장에 있다고 여기면서 “내가 먹고 싶은데 왜 못 먹어? 피? 예수의 피가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어? 나에게는 무의미해. 나는 내가 최고야. 신이시여! 신이 있다면 나를 도와주고 나를 위하면 나는 당신을 믿을 것입니다.” 이래 나온다면 그것은 무지개 언약, 날 때부터 악한 인간을 살려주었다는 그 피로 맺은 하나님의 자비를 놓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저주가 임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형상에 주도권이 있고 여기에 인간은 종속됨으로 말미암아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사람의 세계가 아니라 주도권을 쥐신 하나님의 형상의 세계로부터 출발하고 개시되는 것이 창세기 9장입니다. 그것이 언약세계이고 새로운 질서의 세계입니다. 약속이 지배하고 인간은 그 약속에 굴복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세계로 이제는 진입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세상 마지막은 그 약속이 완료될 때 드디어 이 세상도 약속을 다 끝냈으니까 “이제 이 세상은 할 일 다 했다. 이제는 유황불로 다 타서 없어져 버려라”하고 소멸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피의 언약을 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인데, 그 피의 언약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면, 인간은 여기에 종속되고 매이게 되니까 언약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사람은 두 부류의 사람으로 등장해야 됩니다.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은 한쪽은 용서받은 자와 또 한쪽은 용서받지 못할 자, 이 두부류로 나누어 져야 되는 겁니다. 지난 2월강의 마지막 대목을 기억하십니까? 그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의 이름을 위해서 인간의 이름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두 종류의 인간의 이름이 반드시 나와 줘야 된다”는 거죠.

진도를 너무 빨리 나가면 어려우니까 이것을 좀 쉽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같이 찾아봅시다. 제가 처음 의존교회에 왔을 때 어린이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받아 적을 때 본문이 아마 신명기였을 겁니다. 그때 제가 “아이들이 신명기를 적는구나. 참 대단하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27장 16절 이하에 보면,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할찌니라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할찌니라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할찌니라.”(신 27:16-18)

여기에 계속해서 뭐가 나옵니까? “저주를 받을 것이요”할 때 “옳습니다. 동의합니다. 믿습니다. 아멘”하지요?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것이요”(신 27:19) 할 때 “모든 백성은 아멘!” 하지요. 결국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저주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저주를 깔지 않고서는 일을 하지 않아요. 저주가 있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용서가 있든지 뭐가 있지, 밑에다 저주라는 장막을 깔지 않고서는 그 위에 머물지를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이 왔다’ 싶으면 밑에 저주가 깔려 있어요. 지금 여러분의 밑바닥에 방석하나씩을 깔고 앉아 계시는데 그것을 저주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주를 깔고 앉을 그 때 용서가 용서답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샌드위치로 만들어서 밑에는 저주 빵, 위에는 용서 빵으로 우리 머리위에 뒤집어 씌워서 그것을 하나에 3천 원씩 받고 파는 것처럼 팔아 버려요. 밑에는 저주를 깔고, 그 위에는 용서로 덮어씌움으로 말미암아 “그 저주를 벗어나는 능력은 우리에게는 없고 위에서 내려앉는 축복(용서)의 능력이 아니면 우리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저주를 이길 수가 없다”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경우에 어떤 저주를 받는지 그 저주 항목을 적어보겠습니다. 신명기 28장을 봅시다. 하도 많으니까 그중에서 뽑아서 보는 겁니다. 30절에 보면 “네가 여자와 약혼 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와 같이 잘 것이요.” 첫 번째 저주, 약혼 무효. 이런 저주를 받는 다는 거죠.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 할것이요.” 이것이 두 번째저주, 건축완공을 했으나 다른 사람이 산다.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과실을 쓰지 못할 것이며”가 세 번째 저주지요. 과수농사를 지었는데 남이 가져간다. 그러니까 사업을 실컷 벌였는데 돈벌이는 남이 다 하는 경우입니다. 그 다음에 계속 나오죠. 32, 33절에 보면 “네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종일 생각하고 알아봄으로 눈이 쇠하여지나 네 손에 능이 없을 것이며 네 토지소산과 네 수고로 얻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네 번째 저주, 나의 노동의 대가를 남이 다 먹는다.

그 다음에 38절에 보면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심을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라고 나옵니다. 57절에 보면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의 낳은 어린 자식을 가만히 먹으리니.” 하도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다는 말이죠. 60절에 보면,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붓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같은 사람 많잖아요. 없는 질병이 없는 사람이죠. 그 다음 61절에, “이 율법책에 기록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너의 멸망하기까지 다 내리실 것이라.” 의료보험 들어도 소용없어요. 이 책에 나오지 않는 질병까지 전부 다 뒤집어씌운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가 하면, 67절에 나옵니다.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의 보는 것으로 인하여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 얼마나 하루하루가 살기가 힘든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모든 저주를 누구를 상대로 퍼붓는 겁니까? 하나님의 택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택한 사람이라는 말은 이런 저주성을 인화지처럼 그대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신의 저주가 얼마나 혹독하고 참혹한지를 유감없이 고스란히 보여주는 일을 하라고 부름 받은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나’라는 주도권을 택한 백성에게는 일체 인정하거나 허용하지 않습니다. 소위 성도라고 하면서 ‘나’라는 것을 따로 챙길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육적인 생각입니다. 영적인 생각은,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이 언약을 가지고 우리에게 어떤 그림을 그릴지 순전히 그분의 고유권한으로 넘겨주시기 바랍니다. 순순히 말로 할 때 좋게 넘겨 주시기 바랍니다.

화투가 48장인데 제가 알기로는 48장의 그림이 다 다르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들은 본인이 원해서 그린 그림이 아니라 화투치는 사람 좋으라고 그려놓은 겁니다. 화투라는 그 게임에 재미있는 것이 있어요. 그 화투 중에서 ‘피’라는 것이 있어요. 그 ‘피’라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쓸모가 없고 어떤 경우에는 아주 유효하게 쓰인답니다.

이것은 그 계열화된 배치에 따라서 어떤 자리에서 그 피는 가치 있는 피가 되기도 하고 무가치한 피가 되기도 하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 저 가난합니다. ‘제가 죽어 버릴까요? 자살할까요?’ 라고 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그 가난이 어떤 타짜 손에 들어가서 어떻게 사용될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자살하지 말고 좀 기다려 보세요. 어떤 식이라도 쓸모 있게 쓰이도록 하십니다. “야! 너 아니었으면 이것을 따지 못했다” 하면서 그 화투장을 꺼내서 “탁!” 때릴 때가 있을 거예요. 예뻐서 뽀뽀할 때가 있다는 말이죠.

드라마를 보니까 단풍 두 장이 들어오면 굉장히 좋은 패랍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패하고 꼬이면서 대 파탄이 나는 겁니다. 화투는 오야맘이라는 소리가 있어요. 이미 선택받은 성도는 주인이 따로 계십니다. 그래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나의 주인으로서의 예수를 인정하라”는 말이죠. 그분이 나를 어디다 집어넣고 어떻게 활용할지는 우리 결정이 아니고, 우리 선에서는 이미 끝난 문제입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 활용될 뿐이에요.

화투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팔월공산이 되었든, 똥피가 되었든, 우산든 할아버지가 되었든그런 것과 관계없이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역할은 비록 촌스러운 역할이고 부족한 역할이라도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유용하게 쓰일지는 주님 맘대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맘대로 입니다.

신명기 28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축복이라는 것은 결코 우리 쪽에서 달라고 해서 내려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저주 속에서 축복이 무엇인지를 병행해서 주신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언약을 주게 되면 그 안에는 둘 다 있어요. 축복도 있고 저주도 있는데, 이 축복과 저주를 양쪽 다 아는 사람이 언약맨,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사업이 좀 잘된다고 해도 까불지를 않지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신명기 8장에 나옵니다. 신명기 8장 17,18절에 보면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되어 있어요. 20절에 보면 만약에 이것을 ‘내 능력으로 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언약에 위배되기 때문에 멸망합니다.

그래서 이 선택받은 사람들은 역할을 맡은 일종의 배우들이죠. 여러분은 나에게 주도권이 없다는 것을 괴로워할 필요가 없고, 도리어 이것을 반기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날려간 것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내 인생을 책임질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오랜만에, 거의 처음인 것 같은데, 우리교회 헌금에 대해서 설교 중에 2초정도를 언급했어요.

헌금을 하지 않으면서 ‘나는 부족하다’고 하지 말고 헌금을 하면서 ‘내가 헌금을 해도 이것으로 구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라는 말이죠. 죽도록 충성하면서 내가 죄인이며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가야지 ‘뭘 해도 다 소용없는데 뭐.’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농땡이 치는 인간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그것은 주도권을 자기가 쥐고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임하면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만들어낸 언약에 흡수된 사람이기에, ‘내가 그 언약까지 뛰어 넘어서 하나님의 형상까지 되찾을 수 있는 그런 권한이 내게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성도만 알고 불신자는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아! 내가 이 ‘피’라는 간격을 넘을 수가 없구나.’

왜냐하면 “피는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 피한테 눌리는 구나. 진짜 예수님의 피 거룩한 피로 인하여 내가 살고 죽는 것이 결정 났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형상이 너희 속에서 나와야 된다”는 겁니다. “너는 누구냐?” “나는 나다.” 이러지 말고 “나는 팔월공산이다.” 이런 식으로 나와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나올 때 그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주도권을 쥐었다는 하나님의 형상이 확인될 것이 아니냐’ 이말 입니다. 건방지게 하나님의 형상까지 잠식하지 말고 “나는 항상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습니다”라고 나오는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형상이 어떻게 다른가?’ 다른 게 아니라 사실은 같지요.

같다면 왜 어디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고 어디서는 그리스도의 형상이라고 하는가? 그리스도의 형상이라고 할 때는 하나님의 형상이 구체화 된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는 그 형상 자체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맘대로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창세기 8장에 넘어 오면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정복하고 다스릴 일체의 권한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악한 자를 가지고 정복과 지배에 나선다. 그것은 인간이 나선다는 말이 아니고, 그 인간위에 지배하고 있는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의 형상이 따로 분리되면서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실체가 뭐냐? 피에 대해서, 피라는 이유 때문에 인간을 가지고 그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새롭게 추가 되면서 인간을 다스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모세가 백성을 만날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는 영적 직분입니다. 영이죠. 시내산이 있다면 여기는 영의 세계입니다. 밑에는 육의 세계죠. 영의 세계에 속한 모세의 영적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지 육의 사람들이 바라볼 수가 없어요. 여러분이 태양을 바라볼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영의 세계에서 내려온 사람을 육의 사람이 만날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눈이 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만나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모세의 수건을 가지고 모세를 덮는 겁니다. 그런데 이 수건이 누구 수건입니까? 영의 세계의 수건이죠. 이스라엘이 각자 각자 자기 손수건을 끄집어내서 덮는 것은 인정 안 해줘요. 모세가 자기 쪽에서 내어놓는 수건을 덮어야 소통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수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무슨뜻이냐 하면 모세를 만난 사람에게,

“어이! 너 누구를 만났는데?”
“모세를 만났지.”
“그래? 그 영적인 사람, 모세를 만날 때 어떻게 만났지?”

“내가 내 수건을 덮어서 만났지”라는 말을 못하지요?
“당신은 어떻게 모세를 만났는가?” 하면,
“모세가 내민 수건에 의해서 내가 모세를 만났다”고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할 때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영에 속한 분이고 우리는 육에 속한 인간이라서 만나면 죽어요. 일시적으로 사라질 분(모세)도 만나면 눈이 부셨는데 영을 만나면 죽어 버립니다. 진짜 예수 만난 사람은 뭐라고 해야 돼요?

“내 기도와 내 헌신의 힘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쪽에서 나온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내가 예수 안에서 소통이 되었다”라는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겠지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서 내뿜는 나의 생각(우리는 나의 생각밖에 못하니까 이것이 죄 아닙니까?)을 배격하는 것도 반드시 이야기하겠지요?

우리가 90까지 산다면 평생 사는 동안 계속해서 무엇이 나옵니까? 나의 생각이 나오지요. 그렇다면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것은 예수님 쪽에서 나온 성령으로 말미암아 수건 역할을 해서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영은 나의 생각(내가 이렇게 하겠다는 것)을 차버리고 그것을 일체 다 배격한다”는 것 까지 이야기를 해야 되겠지요.

“너의 생각은 아니야. 그것으로는 안 되고 오직 성령의 힘이야”라고 우리 생각을 배척하는 것까지 이야기를 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가짜 신자는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줬다.” 거기까지는 얼추 맞아요. 그 다음부터는 뭐라고 합니까? “그래서 성령의 힘으로 기도하고, 성령의 힘으로 전도하고, 성령의 힘으로 찬송 부르잖아”라고 나온다면, 이것은 도중에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졌지요.

사람들이 뭘 놓치는 겁니까? 성령은 십자가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이 오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는 고백을 해야 될 텐데 우리는 자꾸 내 구원만 열중하다 보니까, “고맙습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 다 고맙습니다. 드디어 나는 구원 받았구나. 이제부터 내가 구원받은 값을 해야지”라고 나옵니다. 이렇게 나오니까 갑자기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이 나의 똘마니가 되어버립니다.

배격하는 것이 아니고 마치 없는 것 찾아서 더 보태주는 식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죠. 평생 계속 배격해야 되죠. 계속. ‘십자가로만, 십자가로만, 십자가로만.’ 이런 식으로 계속 배격해야 될 텐데 ‘이제는 다 지나간 것이고 이제부터는 변화된 내 선함, 내 능력, 내 양심, 내 의지, 내 감정 등등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테니, 하나님! 영광 받으소서.’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배격하는 것이 없어요.

그걸 누가 아십니까? 성령님께서 아시잖아요. 그래서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면서 빌바를 모르는 우리 대신 기도를 해 주셔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시는 겁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상담을 해 왔어요. “목사님!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이렇게 답변 했습니다.

1번) 속에 있는 것을 다 드러낸다.
2번) 기도내용을 수정하지 말 것.(중요한 것입니다)
3번) 주님이 자기 뜻대로 수정하도록 맡김.

그런데 우리는 3번을 우리가 해 버립니다. 수정을 우리가 하고 그 수정한 기도를 우리가 해 버립니다. 지금 고 3인 아이를 둔 어머니가 있다고 합시다. 어머니가 그 애를 위해서 기도할 때 자꾸 수정을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애가 고 3이지만 공부에만 열중하지 말고 세속적이 되지 말고 십자가 복음을 알게 하옵소서.” 이렇게 스스로 수정을 해요.

“주여! 공부 좀 잘해서 경찰대학 같은데 붙어서 등록금 하나도 안내고 다니게 하옵소서. 장학생 되어서 그 돈으로 부모 좀 잘 섬기게 해 주세요. 배고프고 힘 빠지면 의지할 것 자식뿐입니다. 늙어 병들고 몸 아플 때 저 자식이 효자 되어서 이 배고픈 나의 배를 채워주고 몸 아픈 나를 병원에 데려갈 수 있도록 귀한 자식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하셔야 됩니다. 기도할 때 속이 시원할겁니다.

왜 속이 시원합니까? 수정을 하면 자체적으로 흥정을 하기 때문에 자기가 더하고 빼고 흥정한다고 바빠서 쓰레기를 자기 한곳에 다 집어넣어 놓은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지 말고 솔직하게 기도해서 그런 쓰레기들까지 다 내어놓고 그 다음에는 기도만 하지 말고 응답을 받아야 됩니다. 주의 뜻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좆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좆아 온 것이라.” “네가 자식을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만!” 그런 응답을 내가 만들어 내면 안 되고 살아 계신 주님으로부터 응답용으로서 받아줘야 되죠. 본인이 똑똑한 체 다 하면서 본인이 수정을 해버리면 기도를 뭐 하려고 합니까?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면 되죠.

돼지를 키우고 있다면 “주여! 이 돼지 잘 키워서 십일조 많이 해서 교회 부흥되게 하고 선교서 많이 보내서 주의 나라에 상급에 그득 차게 하옵소서.” 자기손으로 수정하지 말고 그대로 기도하는 겁니다. “주여! 교회가 우선이 아니고 나는 우리 집안이 우선입니다. 돼지새끼 많이 쳐서 최고의 갑부가 되어서 교회 목사도 내 말이라면 껌뻑 죽고 자주 심방 오게 하고, 건방진 장로들 다 고개 숙이게 만들고, 나는 보란 듯이 사람들에게 뭔가를 줄 수 있는, 그야말로 절대적인 내가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 얼마나 속이 시원합니까?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냥 가지 말고 이리 와봐라. 알았다. 그게 너의 속마음이지?” 해놓고 그 다음부터는 작살을 내는 거예요. 그럴 때 뭘 느낍니까?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느낍니다. 내가 주도권을 가진 것이 아님과 내 속에 이런 저주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나 밖에 모른다는 이런 저주거리가 있다는 것을 언약대로 들추어내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목사님! 저는 그런 기도를 아무리 해도 안 나오던데요.” 노력하시면 됩니다. 그런 기도는 약간만 노력하면 됩니다. 그것은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것이 있잖아요. “주여! 나한테 해코지 한 인간, 내일 출근하다가 차에 치어 죽게 하시고, 이번 명절 때 나를 욕한 형수는 날벼락 맞아 죽게 해주시고, 내 말 안 듣고 까부는 내 동생의 집안이 아예 거덜 나게 해 주옵소서.” 이것이 놀부 심보인데 이것 끄집어내는데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사람은 날 때부터 악함이라.” 악한 것 끄집어내는 것은 전부 다 도사입니다.

애들 착한 줄 알죠. 조금만 잘 안 해주면 엄마 손 깨물어 버립니다. 심지어 갓난 애기도 그래요. 그런 속성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자기 배에서 나왔지요. “그러면 안돼”라고 때려서 그것을 억누르니까 무의식속에서 ‘이러면 내가 맞지?’ 라고 타협을 해서 억누르는 겁니다. 그게 안 되면 그 억눌린 것이 그대로 다 나오는 거예요.

다 들추어서 그 샌드위치 되어 있는 밑에서 저주라는 빵을 끄집어내고 그것 때문에 주님이 얼마나 깨지고 모멸을 받았는지를 알고, 그것이 어떻게 사랑으로 이어지는가를 알 때 그 순간 우리는 ‘나’를 잊어버립니다. 주님을 위해서 눈이라도 빼주게 되는 겁니다. 돈이 문제입니까? 어떤 목사치고 기도할 때 속에 들어 있는 게 없겠습니까? “주여! 저는 많이 안 바라고 한 3500명 정도, 헌금은 한 주일에 약 1억 정도(연 52억)만 나오도록 구합니다. 주시옵소서.”

물론 노골적으로 하는 목사도 있지만 보통은 이렇게 합니다. “주여! 이것 가지고 내가 배 불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다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렇게 슬쩍 위장을 하지요. “그러면 너는 쫓겨나도 괜찮겠네.” 이러면 말을 못하거든요. 이렇게 슬쩍 위장을 하는데 매일같이 주님과 솔직하게 교제를 하면서 주님의 언약이 무엇인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기회가 기도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강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어요. 가득 내어 놓았는데 무슨 기도할 것이 없습니까? 기도 응답이라는 것은 내 뜻대로 되어야 응답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대로 될 때 응답 끝 하고 손 털고 나가야 됩니다. 기도할 때 오래 할 필요도 없어요. 기도응답 되면 일어서는 겁니다. 응답이 없으면 주의 뜻을 알 때까지 앉아 있어야 되지요.

왜? 자기는 악한데 악한 것밖에는 쏟아지지 않았잖아요. 그걸로 인생이 해결 되지 않잖아요. 주의 성도라면 주의 뜻이 담겨야죠. 밑바닥은 열렸는데 천정이 없잖아요. 그 천정이 내려올 때까지 그 기도하는 무릎을 일으켜 세우면 안 되지요. 또 이말을 듣고서 회중앞에서 공중기도를 할 때 노골적으로 3000명을 달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참 촌스러운 짓이다 싶어요.

갈라디아서를 봅시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말해서 영적인 것이 배태되어 나올 때까지, 주도권이 ‘너’가 아니고 주도권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나올 때 까지 “내가 너희를 위해서 수고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오면 차츰 차츰 많이 나오는가?’ 그 문제입니다.

차츰차츰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까 말한 게임의 법칙이라는 겁니다. 화투게임이야기를 다시 해볼까요? 단풍그림이 항상 좋은 것이 아닙니다. 쓰일 때 마다 그 가치가 나오듯이 구원받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거룩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 되게 하실 때 항상 거룩이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은 세월 따라 그 분량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쓰일 때는 크게 쓰이고 작게 쓰일 때는 작게 쓰이는데, 그것은 하나님 맘대로 이지요. 일본의 유황온천을 보면 물이 뜨거워서 보글보글 올라오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어떤 온천도 여러 군데서 보글거리지 한방울이 계속 커지는 식은 아니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 보글거리고 어떤 경우에는 저렇게 보글거리면서 우발적으로 튀어 나오는 거예요.

그럴 때 이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이런 거룩의 모습이 무작위로 막 튀어 나오는 겁니다. 일률적으로 더 착해지는 것은 없다는 말이죠. 그 다음에 갈라디아서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나왔습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갈 4:21,22)라고 했습니다.

여러 번 했습니다만 ‘율법이 뭐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율법은 율법만 가지고 따질 것이 아니고 율법이 겨냥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속내, 인간의 속셈, 인간의 원천, 본질을 들추어내는 기구입니다. 외과의사가 수술할 때 그냥 손가락을 가지고 하던가요, 도구를 가지고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수술할 때 그 수술도구가 율법이라는 겁니다. 율법은 겨냥하는 곳이 있어요. “네가 이렇게 해서 죽었단다”라고 하는데, 환자를 마취를 시켜 놓았는데 환자가 마취가 덜 되었어요. 자기를 수술하는 율법을 두고 “제가 할게요”라고 나서는 이게 “내가 율법을 지키겠다”는 거예요. 누워있는 환자가 “어이, 간호사! 메스! 핀셋!” 그러면서 자기가 자기를 수술하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수술하면 엉뚱한 곳만 골라서 할 거예요. 진짜 아픈 곳은 다 빼놓고 합니다. 진짜 고쳐야 할 곳은 안고치고 건성건성 고쳐놓고, “수술 끝! 드디어 나는 살았다”고 하고 있어요. 이것은 완전히 코미디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겠다는 것은 완전 개그맨입니다. 그 개그맨활동을 오랬 동안 한 사람이 사도바울이었어요. “나는 율법적으로 흠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부자청년은 “내가 어렸을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율법 가지고 뭘 이야기 합니까? “거봐! 율법을 줬더니만 율법을 뺏으려고 하잖아. 그것이 바로 수술되어야 할 가장 원초적인 대상이다”라고 합니다. 가장 수술을 해야 될 원초적인 대상은 율법 가지고 “내가 지키겠나이다” 하는 그 대상이고 대목입니다. 그 대목을 가장 신나게 파 들어가서 완전히 해체시켜야 될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법, 쉐마, “내 백성아 들으라.”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라는 뜻이야. 신명기 28장에 분명히 있잖아. ‘누구든지 내 말을 들으면 축복을 받는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이런 식으로 전부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주는 것이라고 오인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나는 율법 없이는 못 살겠습니다”라고 하는데, 갈라디아에서는 “그것이 바로 율법에 속한자”라고 합니다.

“나는 율법 없이는 못삽니다. 나는 율법에서 떠나지 않겠습니다”하면 “너는 딱 걸려들었어. 그게 바로 네가 저주받는 이유야”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구원받습니다. 아까 모세이야기 했지요. 하나님과 성령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내가 내 나름대로 율법을 지키겠다’고 한 그것을 배척하고 차버린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식으로 성령께서 다가오시는 거예요. “십자가가 있는데 왜 네가 설치는가?”라는 식으로 다가온다는 말이죠. 박 윤진 씨가 오늘 강의에 참석하셨는데 아마 전에도 제가 한 강의를 들었던 모양인데 그때는 ‘저것은 아니다’ 정도가 아니라 화가 많이 났을 거예요. 제가 KBS 신우회에 강의하러 갔다가 몰매 맞을 뻔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분개를 했어요. 제가 다른 소리를 한 것이 아니고 구속사를 이야기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흐름을 이야기 했더니 그분들이 분개를 했어요.

그분들 중에는 유명한 여자 탤런트도 있었는데 그런 분들이 분개한 이유는, “우리가 하는 것을 왜 무시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제가 속으로 ‘걸려들었다’ 했지요. “우리가 할 것이 없다고 하니까 나는 당신을 거부 하겠다”고 한 그것이 바로 걸려든 거예요. 약속에 속한 사람은 율법에 속한 사람과 확연하게 다른데, 그들은 ‘율법에 속한 사람과 약속에 속한 사람이 섞여 있고 그게 내 안에서 융화가 된다’는 거예요. 이게 됩니까, 안됩니까?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분명히 두 언약으로 나누었어요. 그 두 언약의 방향이 서로 반대방향이에요. 지난 수요일에 84세되신 우리 장모님께서 우리 동네에 침맞으러 오시는데 “차 태워 드릴까요?” 하니까, “차 필요 없다”고 하시면서 사양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알아서 침도 맞으시고 시간 잘 보내고 가십시오”라고 했더니만 세상에, 차를 잘못 타서 칠곡에 가셔야 하는데 경산으로 가셨어요. 방향이 정반대로 가신 거예요. 그 방향은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서로 멀어요.

지금 율법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두 언약이 가는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율법은 우리 좋으라고 내려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피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 언약이 한쪽은 약속에 속한 사람과 한쪽은 율법에 속한 사람으로 죽 갈라서 그 양쪽이 전혀 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높이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어요.

한쪽은 죄를 대신 담당해준 사람들 쪽과, 한쪽은 대신 담당해주지 않은 쪽으로 완전히 결별을 시켜 줘야 예수님의 사랑이 부각되거든요. 저주라는 밑바닥을 통해서 사랑은 사랑답게 더욱 부각되어서 사랑만 증거된다는 뜻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들을 사랑했다”(요일 4:10)는 것이 드러나려면 일체 우리 쪽에서는 사랑한 적이 없음이 드러나야 할 것이 아닙니까?

“목사님! 목사님 말씀대로 율법으로는 구원 안 되고 예수 피로만 구원되니 예수 피만 알면 되겠네요. 그러면 성경책을 덮어 버릴까요?” 예수님의 피, 언약은 저주라는 밑바닥을 통하는 식으로 드러나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다” 이것은 지독하게 들어야 합니다. 아까 말한 신명기에 나온 것처럼 “자기가 낳은 아기를 배고파서 먹는다”는 저주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받아야 될 저주입니다.

그런데 그런 저주를 우리가 안 받잖아요. 십자가의 은혜로서 약속된 사람으로서 지금 그런 혜택을 입고 있죠. 저주를 저주답게 깔아줘야 세세하게 모든 것이 다 사랑이 되죠. 지금 마시는 오미자차 한잔까지도 전부 다 사랑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사람 사이란 과거에 잘해줄 때, 그 때 뿐입니다. 다 잊어버리죠. ‘사랑한다’는 천마디를 해도 ‘밉다’는 말 한마디에 그 천마디가 다 무효로 돌아가요. 그 정도로 인간은 자기중심입니다.

계란차가 와서 “계란이 왔어요”라고 방송하는 것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사랑이 왔어요”라고 방송하듯이 해도 “네가 실망스럽다”는 한마디에 “사랑(계란)이 왔어요”를 백날 떠들어 봐야 소용이 없어요. 그것 회복하는데 두 달이 걸립니다.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한번 삐지면 감당을 못합니다. 그런 것까지 이미 주님의 약속 안에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이라는 뜻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약속답게 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 육적인 아들을 낳아야 됩니다. 그 때부터 언약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하나는 육적인 율법에 속한 언약이 있고 또 하나는 어머니가 하늘에 있는 약속의 계통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육적인 것은 왜 생겨났는가? 약속이 약속답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율법에 속한 사람이 나타나야 비로소 어머니가 하신 역할이 얼마나 위대한 역할인지가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좋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하여튼 하나님이 이렇게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날 때부터 악한 자를 무지개언약으로 사랑해 주셔서 우리를 가지고 화투패 다루듯이 다루시는데 약속이 약속답게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모든 이름으로 무릎으로 꿇고 주의 이름만 높이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여러 가지 사건을 주십니다. 율법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이런 일들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밑바닥에 하나님의 저주를 깔고 앉아서 ‘우리는 약속으로 구원받은 사람이기에 모든 공로는 주께만 돌아가는 것이 분명하다’고 되는 겁니다. 끝으로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포도원 비유라는 것이 있거든요. 천국은 이와 같다는 것을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포도원에 일하러 나올 때 제일 일찍 나온 사람들은 오전 9시에 나오고 그 다음에 12시에 나온 사람들도 있고, 오후 3시, 오후 5시에 나온 사람들까지 있어요.

퇴근 시간은 여섯시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은 1시간 일했고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은 8시간 일했습니다. 식당에서 아줌마들이 일한다고 칩시다. 오전 9시부터 나와서 온갖 일 다 한 아줌마들도 있고 오후 5시에 와서 1시간만 달랑 일하고 퇴근하는 아줌마들도 있습니다. 퇴근할 때 일당 5만원씩을 나눠줍니다.

마지막에 일하러 온 사람이 돈봉투를 열어 보고 “야! 나 5만원 벌었다”고 좋아할 때, 일찍부터 나와서 일한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흐뭇한 상상을 하겠지요. ‘1시간당 5만원이니까 8시간이면 40만원이겠구나.’ 그러면서 봉투를 열어보니 5만원이 나왔어요. 그 식당 뒤집어 집니다. 그 식당 그릇 다 깨지는 날입니다.

그때 주인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놀고 있던 사람들이다. 날 때부터 악한 자였잖아. 천국이 언약의 세계라는 것을 왜 몰라?” 나의 세계, 나의 노동의 세계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우리는 백날 노동해 봐야 말씀을 못 지키기 때문에 남들이 다 가져갑니다.

“나, 노동 했습니다. 대가를 주세요.”
“남이 다 가져갔다.”

이런 것 경험 해 보면 기가 막힙니다. 자기가 정혼했는데 다른 사람이 가져가 버린다면 얼마나 놀라겠어요. 신랑은 입장에서 신부를 기다리고 있는데, 화장하고 있는 신부를 다른 남자가 데려가 버린다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그 때 “저주야, 저주! 너는 저주 받아야 마땅해”라고 한다면 기가 막히죠. “맞습니다. 난 저주받아 마땅하고 당연합니다”라고 할 인간은 없습니다. “에라이! 너죽고 나죽자”고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나의 생각을 포기 못하는 인간입니다. 그럴 때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죽어 마땅한데 십자가 피, 머리부터 온몸을 적시고 있는 그 피가 내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흘린 피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끄집어 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피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인줄 압니다. 내 생각 하지 말고 주님께서 이런 큰 은혜 주신다는 것, 주님과 성령을 증거할 수 있는 저희들 삼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