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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19, 20 강 / 갈라디아서 4:26,27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갈라디아서

19, 20 강 / 갈라디아서 4:26,27

정인순 2010. 10. 12. 11:02

http://media.woorich.net/~woorich1/study/seoul/seoul070511a.mp3
http://media.woorich.net/~woorich1/study/seoul/seoul070511b.mp3

 

 

 

녹취:오용익
갈라디아서 제 19강

(이 근호목사, 2007년 5월 11일(1), 서울의존교회)

갈라디아서 4:26,27을 읽겠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 하라 구로(劬勞: 자식을 낳고 기르는 괴로움)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 괴롭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일도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세상만사가 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는데 그중의 하나가 ‘여성들은 아기를 낳을때 많이 아플것이다’는 것인데 이것이 한사람을 두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세상 끝날까지 계속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 어떤 일도 이 말씀 안에 있고 그 바깥으로 벗어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여러분이 살아가시는 모든 것은 다 말씀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을 버리고 도망치고자 하여도 여러분보다 더 센 게 말씀이기에, 도망치는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는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차라리 인정하면 됩니다. “주여 말씀대로 하옵소서.”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폭발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성취성을 보이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살아 있고 말씀이 살아 있음을 나를 통해서 불쑥 불쑥 드러나게 하옵소서.”

이렇게 살아가시면 쓸데없는 걱정 근심 따위는 아마 없을 거예요. 내안에 또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여러분의 욕심이나 욕망밖에 들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태복음 10:17-20)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은 말씀 밖으로 못 벗어나는데 그 말씀의 계획이란 너희들은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한다’는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큰 고생을 하고 끌려가는 수모를 당할 것인데 그때 그 일도 다 말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쓸데없이 걱정할 일이 아니기에 안심하고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미 그들에게 잡힌 것도 하나님의뜻이요, 잡혀 있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하며, 또 어떻게 벗어날지를 걱정하는 것들이 다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말이죠.

여러분이 만들어낸 상황이 아니잖아요. 예수님께서 미리 아시는 상황이고 예수님께서 미리 아시는 상황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린이 여러분은 오줌이 마려울 때 걱정합니까? ‘주여! 오줌이 마렵습니다. 제가 이런 일을 하지 않았는데 왜 오줌이 마렵습니까? 하나님께서 마렵게 하시니 마려운 것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하늘에 태양이 떠 있는데 그게 왜 안 떨어질까요? 저는 하늘의 태양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내 맘대로 안되는 것도 있구나!’ 내 팔은 내 맘대로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면서 내 맘대로 되는데 왜 태양은 왜 내 맘대로 안 되는 겁니까? “태양아! 오늘을 뜨지 마라!”

이 세상에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합니다. 세상에 내 맘대로 안되는 게 있다는 것이 나도 내 맘대로 안 되는 존재임을 느끼게 합니다. 내가 되고 싶다고 해서 남자가 된 게 아닙니다. 여자분 들도 여자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은 전부다 내 맘대로 안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내가 태어난것 자체부터 내 맘대로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는데도 불구하고, 공연히 내 맘대로 되게 하려고 힘을 쓰다 보니까, 사지가 틀리고 스트레스를 받고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고민에 빠집니다.

안산강의 중에 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우는 이유는 자기가 그동안 생각했던 생각의 틀이 허상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게 되니까 너무 억울해서 운다’고 했습니다. 나는 세상을 내 맘대로 내식대로 봤는데 그게 뜻대로 안될 때 무엇이 부끄럽고 속상하냐 하면, 그동안 내가 세상을 본 것이 엉터리로 드러나서 분하고 원통한 거예요. 그런데 마태복음 10장에 따르면 그렇게 분하고 원통해 하지 말라는 거죠. 왜 그러냐 하면 ‘끌려가서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할 때에 너희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하는 다른 분이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여기 성도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0:19,20에 의하면 ‘성도 안에 어떤 분이 계셔서 이야기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잡혀가게 된 것도 성도를 편하게, 혹은 힘들게 하려는 뜻이 아니고 성도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일부러 어떤 의도를 가지고 붙잡히게 했기에 붙잡혀야 되는 겁니다.

태양이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이 태양을 바라보는 내 소원대로가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따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우깁니다. 그러나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고, 진짜 주인은 우리 속에 계셔서 우리 몸을 차 몰듯이 몰고 다니시는 거예요. ‘내가 왜 이 자리까지 왔는가?’ 그것은 여러분의 속에 계신 분에게 물어 보세요. 그러면 그분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라고 하시는 겁니다.

찬송가 460장의 가사에 보면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게 약간 미진하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이 주의 은혜’정도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내 맘대로 안 되더라’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내 맘대로가 아니고 내 속에 계신 그 분 맘대로 지금까지 이끌려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것을 알든지 모르든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여러분이 성도라면 ‘자기 일에 대해서는 없고 전부다 주님의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것은 주님의 일이지 내가 관여하고 걱정할 사항이 아니다.’ 내가 나를 조종한다고 덤벼들면 이것은 불신앙적입니다.

그래서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의 뜻은, ‘제가 여기서 무엇을 해야 됩니까?’라고 늘 묻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저는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합니다. 마치 태양을 움직이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침투하는 거예요. 어린이여러분! “태양, 너는 왜 거기 떠 있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입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고 답하겠지요. 그러면 참새에게 “너는 왜 하늘을 날고 있느냐?”고 한다면 뭐라고 할까요? “하나님이 날게 하셨다”고 하겠지요.

“들꽃아! 들꽃아! 너는 왜 거기 그렇게 함초로이 피어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나를 피어나게 하셨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물어 볼게요? 여러분은 왜 그런 얼굴모양을 하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답이 나오는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품고 사는 사람과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을 격리시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지옥에 가서야 하나님을 알게 만들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지금부터 천국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는 것을 같이 기뻐하면서 살도록 한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28은 매우 어려운 대목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둘로 나눕니다. 한쪽은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이고, 또 한쪽은 육체를 따라 난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두 종류의 사람을 만들었어요.

어떤 중국집에서는 머리를 써서 ‘짬뽕을 먹을까, 자장면을 먹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을 위해서 접시를 반으로 나누어서 한쪽은 자장면, 한쪽은 짬뽕을 담아서 양쪽 다를 내미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자장이면 자장, 짬뽕이면 짬뽕’으로 양쪽을 격리시켜서 섞이지 않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둘로 나누는데 ‘핍박을 받는 쪽이 짬뽕(성도)’입니다. 이 갈라디아서를 쓴 사도바울이 이런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등에 업고 사람들 앞에서 죽은 예수님을 내동댕이치면서 “이분이 죽었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내어 놓는 사람입니다. 지금 유럽과 FTA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 관료들이 협상을 하고 있는 테이블에다가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죽은 시체를 업고 와서 내동댕이치면서 “협상이고 뭐고 예수님이 고난받은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하고 내치는 사람입니다.

‘이것보다 더 심오하고 중요한 문제는 이 세상에 없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남북회담, 북한과 남한과 통일문제를 협상하는 그 회담장소에 죽으신 예수님을 어깨에 메고 와서 거기에 턱 놓고 “남북관계 협상하는 사람들아! 당신들은 예수님이 왜 죽은줄 아느냐! 죽은 이유를 대라”고 따지는 분입니다. 초등학교에서 운동회를 합니다. 청군 백군 나누어서 달리기도 하고 양쪽에서 응원전이 한창입니다. 그 한복판에 사도바울이 나타나서 "청군이고 백군이고간에 예수님이 고난받은 것을 너희는 어떻게 보나? 이분이 왜 죽은줄 알아?” 이렇게 나서시는 분이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입니다.

한가지 예를 더 들면 패션쇼에 가 보면 모델들이 죽 나오면서 사람들은 연신 사진을 찍어 댑니다. 거기에다가 예수님몸을 던져 놓고 “패션쇼고 앙드레김이고간에 예수님이 왜 죽은지에 대해서 그 이유를 아느냐? 예수님이 왜 죽었는가?”고 외칩니다. “이분이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왜 죽었느냐?”

사도바울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가? 이것보다 더 생생하게 이야기 할 수는 없어요. 이것이 전부입니다. 지금 우리 동네에 아카시아꽃 향기가 진동합니다. 그 아카시아 향기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죠. 그런데 그 아카시아 향기를 맡고 있으면 천국에 갑니까? 천국 가는 사람이나 지옥 가는 사람이 다 같이 아카시아 향내 맡으면서 ‘좋다’고 합니다. 그러면 자장면과 짬뽕이 구분이 안 되겠지요?

그런데 아카시아 향기에 흠뻑 취해서 다들 좋아하고 있는데 사도바울이 죽으신 예수님을 업고 와서 거기에 턱 부려놓고 “너희들! 예수님이 왜 핍박받고 죽은 줄 아느냐?”고 할 때 지옥 가는 사람은 “아저씨! 지금 꽃향기 냄새 좋은데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말고 저리 가소”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나오면 그는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천국 가는 사람은 “아카시아 향기도 좋다만 내가 아카시야 향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구나. 구원은 이분이 나의 죄를 다 대신 했기 때문에 구원 받습니다”라고 하는 그 사람입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코스모스나 태양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태양과 코스모스는 주님을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물개가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있던가요? 오리가 예수님을 싫다고 했던가요? 장미가 예수님을 비웃고 놀리던가요? 그런 것들로 하나님이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시여! 아카시아 향기가 너무 좋습니다. 오! 태양이여! 저 태양을 과연 누가 만들었던가!” 그런 것을 외치고 고백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 안 될 사람의 나뉨은 예수님의 고난 받음을 통해서 모두 결정 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교회는 가짜들만 모여 있는 엉터리 교회, 복음이 없는 교회입니다. 사도바울이 당회장 같으면 십자가만 이야기했을 겁니다. 다른 이야기를 안합니다. 왜? 다른 이야기를 하면 왜 안 됩니까?

“여러분! 계절이 5월이라 아카시아 향내가 진동합니다. 누가 했습니까?”
“하나님이요!”
“그렇지요. 여러분은 성도 맞습니다.”

이런 것으로 때우는 겁니다. “여러분! 어버이날도 끼어 있는 가정의 달인데 부모님 잘 섬겨서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아멘.(부모 효도 하니까 천국 가겠네)” 이러고 있는 겁니다.

아카시야 향내 맡은 것이 핍박도 아니고, 부모효도 하는 것이 핍박도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이유가 거기에 담겨 있지 않아요. 그래서 이것이 짬뽕인지 자장인지 구별이 안 됩니다. 사도바울은 확실하게 구분하려고 마음 단단히 먹고 왔어요. 육체로 난 사람과 성령으로 난 사람을 구분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양쪽이 절대 섞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취지를 담아서 “자장입니까? 짬뽕입니까?”라고 묻는 식으로 달려들고 있습니다. 거기에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을 펼쳐 놓습니다.

또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한 학생이 불이 나서 화상을 심하게 입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진짜 살아 계시다면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제가 학생회 총무이고 교회봉사도 잘하고, 예배도 안 빠지고 다 참석하고, 목사님도 잘 섬겼고 어린 시절에 유아세례 받고 신앙생활 잘해온 저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할 때, 어떤 목사님이 와서 “조금만 더 열심히 기도하면 응답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치료하는 광선을 보내시리라.’(말 4:2) 그러니 조금만 더 용기를 내세요”라고 한다면, 그 청년은 ‘본인이 왜 화상을 입어야 되는지 자신이 왜 악한자에게 묶여야 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게 됩니다.

그냥 자기 소원만 이야기 할 뿐입니다. 그런데 진짜 복음 전하는 사람이 그 청년 앞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놓으면서 “지금 너는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느냐? ‘왜 나를 불구자로 만들었느냐’고 한탄하는데 너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지금 네가 그 형편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바로 이런 것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화상을 입는 하나님의 것으로서의 운명으로 가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실컷 걱정하다가 그 걱정했던 것들이 예수님의 죽으심, 그 고난과 피 흘리심 앞에서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것이 나오죠. 그럴때 어떤 사람이 “얘! 너는 무슨 낙으로 사느냐?” 할 때, “저는 예수님이 나 대신 돌아가신 그 낙으로 삽니다”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하고자 해서 한 일이 아니고 그 사람 속에 계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길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은 육체도 있고 성령도 있어요.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은 육체와 성령을 비교해서 ‘육체는 죄가 되고 성령께서 육체를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습니다’라는 것을 이야기 할 것이 있는 반면에, 육체를 따라 난 사람은 그 안에 육체밖에 없기 때문에 기도를 하건, 뭘 하건 간에 육체의 욕심, 육체의 소원만 이야기를 한다는 말입니다.

육체를 따라 났기에 성령이 없습니다. 로마서 8:9,11에서 ‘예수님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육체를 따라 난 사람은 ‘신이시여! 왜 나의 소원대로 안됩니다. 왜 나의 처지를 이런 꼴로 만드십니까?’라는 소리만 나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너 말고 네 속에 누가 들었는지를 말해 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목사님! 누가 성령 받은 사람이고 누가 성령 받지 못한 사람입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육체를 따라 난 사람이 핍박을 할 때 그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핍박 받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핍박하는 사람은 육체로 난 사람입니다. 그러면 가만 있는 영의 사람을 육체로 난 사람이 왜 핍박을 합니까? 그것은 그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그 사람의 고집을 꺽고 예수님의 죽으심, 예수님의 고난을 증언케 하도록 해서 나오도록 합니다.

육체로 난 사람은 자기 속에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없습니다. 없으니까 약이 올라서 공격하는 겁니다. 사실은 더 깊은 내막이 있지만 쉽게 이야기하자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고난에 대해서 없는 쪽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고난이 들어 있는 쪽을 공격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사도바울에 따르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2000전에 있었던 과거 그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인류전체가 뱀(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여인의 후손(예수님)에 대해서는 참지 못하고 대들도록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싫어하는지, 얼마나 예수님을 의식하면서 감추려고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그 예수님이 들어 있으니까 육체로 난 마귀가 그 예수님을 보고 가만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의 영이 들어 있는 사람을 핍박 하게 되는 겁니다. 핍박을 하니까 2000년 전의 십자가에 죽었던 그것만이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라, 그 뒤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 있는 사람은 십자가 사건을 똑같이 되풀이 하면서 본인도 핍박을 받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때문에 고난 받는 그런 경로를 밟게 됩니다. 베드로나 요한이나 바울이나 야고보나 다 같이 들어 있는 공통된 것은, ‘예수 이름으로 핍박받거든 구원 받은 줄 알아라’고 이야기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줄 앎이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졌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린도후서 1:3-10)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이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수 없도다.”(로마서 8:17,18)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립보서 1:29,3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베드로전서 2:20,21)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야고보서 1:2-4)

지난 수요일 설교중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전부 다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데, 예수님은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합니다. 갑자기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음으로 말미암아 갑자기 관심사를 문제 삼습니다.

사람들이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습니다. “그림 잘 그리고 있어? 열심히 잘 그려야 영광돌려.” 이렇게 해야 할 텐데 그림을 잘 그리고 있는 사람을 툭툭 치면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습니다. “지금 바빠요. 그림 그리는 것 안보입니까?” 소프라노 가수가 노래를 열심히 부르고 있는데 다가가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음악이나 들으세요. 나 지금 노래하느라고 바쁘거든요”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참기름 장사는 참기름을 열심히 짜서 한 병에 5천원씩 받으면서 팔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다가가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병원에서 수술 받고 아파서 누워 있는데, 그 옆에 다가가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네 안에 내(예수님의 영)가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그 안에 예수의 영이 있으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 “네게 알게하신 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이다.”(마 16:17) 그렇게 되지만 예수의 영이 없는 사람은 단지 육체(껍데기)만 남아 있기 때문에 “저리 가세요”라고 나옵니다. 그게 바로 “네가 나를 핍박하는구나. 내가 왔으되 나를 영접치 않았다”(요한복음 1:10,11)에 해당되는 겁니다.

이것이 사도요한, 베드로, 바울, 야고보에게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이 한마디로 말하면 뭡니까? ‘예수님이 왔다’는 거예요. 얼마 전에 제가 이런 대목을 듣고 너무 감사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38년된 병자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갈때 그냥 가지 말고 담요 들고 가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때 기다렸다는 듯이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이 “누가 너더라 안식일(법)을 어기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더냐?”고 합니다.

이 때 38된 병자의 답변은 아주 간단합니다. “나를 낫게 하신 예수님이 가라 하더이다.”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 사람에게 뭐가 있습니까? 자기가 우선입니까, 자기 속에 예수님이 우선입니까? 예수님이 우선이잖아요. 그게 성경전체의 뜻(목적)입니다. ‘너는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고 나의 것이 되었노라’(롬 1:6 ; 14:7,8 ; 고전 6:19,20,23 ; 갈 2:20)입니다.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을 볼 때에 ‘책임론’이 있고, ‘자격론’이 있습니다. ‘책임론’은 ‘왜 말씀대로 살지 못했는가’라고 책임을 묻는 겁니다. ‘말씀은 지키라고 준 것이기에 지켜야 한다’는 것이 책임론입니다. ‘책임론’에 따르면 성경말씀을 지키지 못하면 지옥 갑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모든 책임을 져 버립니다. 그 다음에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자기가 자격을 줍니다. ‘너는 영생 받을 자격이 있다’고 자격을 줍니다. 자기가 다 지켰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격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지요.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너는 이러한 인간이었는데 내가 공짜로 이런 자격을 부여했다”라고 되는 겁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이기에 너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용서했다. 그러니까 너는 이미 구원받을 자격을 가진 자야”라고 되는 겁니다. 자격을 주님이 주셨기에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한번 자격자는 영원한 자격자입니다. 그 자격자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똑바로 해 똑바로 하란 말야. 똑바로 앉아 그렇게 해서 천당 가겠어?” 이렇게 묻지를 않습니다.

“네가 삐딱하게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똑바로 앉아서 구원받은 거야. 그래서 그 자격을 너희에게 부여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성경만이 아니고 그 성경을 다 지켜서 책임지신 분이 함께 들어와 버립니다. 옛날 성경은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새언약 시대에는 성경이 우리 마음속에 와 버렸습니다.

그 성경과 그 성경을 우리 대신 주님께서 다 지켰다는 것을 겸하여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지켰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습니다’를 고백하게 합니다. 이게 ‘자격론’입니다. ‘책임론’은 모든 철학과 윤리입니다. ‘인간이면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데 이렇게 살아야 인간답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격론’에 의하면 ‘우리는 인간도 아니다. 우리는 죄인이다. 우리는 짐승만도 못하다. 그런 죄인인데 주님께서 우리를 건지졌다’입니다.

인간속에는 항상 양심(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무엇이 먼저 나오느냐 하면, ‘책임론’이 먼저 나옵니다. ‘내가(목사인데, 집사인데, 성도인데) 이렇게 살아야 되겠나? 나는 죽어야 돼. 나같은 인간은 살 가치가 없어.’ 그럴 때 주님께서는 “그래 죽어라! 죽는데 너는 이미 구원받은 것으로 여기고 죽든지 말든지 해라”고 할 때 “주여! 감사합니다”가 나옵니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완벽’이 아니고 ‘감사’입니다.

그런데 ‘책임론’은 무엇을 주장하겠습니까? ‘이것은 이미 되니까 앞으로는 이것을 지켜야지. 올해는 이것 지키고 내년에는 저것마저 지켜야지. 그래서 나는 완벽에 완벽을 기해야지. 누가 흠잡아도 흠잡히지 않는 인간이 되어야지. 역시 나는 책임질 줄 아는 훌륭한 인간이야.(하하!) 십년을 믿으니까 신앙생활이 이제야 감이 잡히누나.’ 이런 사람한테는 감사보다도 ‘혹시 내 험담을 누가 끄집어낼까’ 싶어서 항상 예민해 있습니다. ‘나, 건드리지마. 나 완벽해.’ 맨 날 이러고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기도하면 잘 울어요. 왜 우는가? 그동안 내가 완벽하게 한 것(자기의)이 ‘와장창’ 다 깨지니까, 자기의가 깨지니까 속상하잖아요. 그래서 우는 겁니다. 드라마 보면 우는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왜 웁니까? 운다는 것은 ‘잘만하면 책임질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열심히 했으면 그런 실수를 안했을 텐데’라는 것 때문에 웁니다. 그동안 쌓아놓은 자기의가 무너지는 것이 원통해서 웁니다. 그것이 ‘책임론’입니다.

성경전체는 ‘예수님이 일부러 오셔서 구원했다’는 겁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구원하러 오셨다’(마 9:13)는 겁니다. ‘구원하러 오셨다’는 말은 우리는 ‘왜 내 힘으로는 안 되는가를 주님 앞에서 제대로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알고 그분이 던진 구원에 포크레인처럼 딸려 올라가면 됩니다. 그냥 자격을 주시는 겁니다.

‘네 안에 내가 있어서 네가 잘난 것이 아니고 내가 이만큼 잘났다’고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사람을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간증집회를 보면 ‘실수를 줄이면 복 받는다’고 나오는데 그것은 점점 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육체의 사람들로 들통 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27을 봅시다.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우리 앞에 내세우면서 이 말을 같이 곁들여서 내세웁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사도바울의 모든 이야기가 뭐라고요?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에게 던지면서 “예수님은 우리 위해서 고난 받았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것이 사도바울의 일관된 이야기입니다. 다른 이야기는 없어요. 그렇게 던지면서 하는 이야기가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고 합니다.

‘남편 있는 자.’ 이것은 육체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에 속한 사람은 뭐가 없어요? 남편 없는 자입니다. ‘남편 있는 자’(육체)에서 자녀가 나옵니다. 그런데 남편 없는 여자는 아기를 가질 수 없습니다. 자녀가 없어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서 이사야 54장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왜 끄집어냈습니까? 그냥 ‘십자가를 믿어달라’ 하면 될 터인데.

그 이유는 십자가를 믿지도 않으면서 가짜로 예수 믿는 사람과 성령에 의해서 진짜로 예수 믿는 사람을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진짜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이런 것도 이해하는 사람만이 진짜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라고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는데 집에 자녀가 있더라.’ 이것은 이해하기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쉬운 이야기입니다. “아빠! 나는 어디서 왔어?” “아빠하고 엄마사이에서 태어났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옆집에 보니까 아빠가 없고 엄마만 있는데 애들이 있어요. “엄마! 옆집에 내 친구를 보니까 아빠가 없는데 그 애는 어디서 태어 난거지?” “옛날에 아빠가 있었단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남편이 없는데 자녀가 있다’는 이야기가 십자가와 무슨 상관입니까? ‘남편이 있어서 자녀가 태어났다’는 것만 이해가 되신다면 ‘당신은 십자가를 가짜로 믿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남편 있고 아내가 있어서 그 사이에서 자녀가 태어났다’는 것만 알고 있는 사람은 자기육체로 자기의 의지로 십자가를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백이면 백 가짜입니다.

어떤 사람이 진짜 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전혀 남편이 없는데 여자 혼자 몸에서 자녀가 나왔다. 그것도 많이 나왔다’고 할 때 그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면 창세기 3:15과 창세기 15장 16장을 생각합니다. 창세기 3:15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 나옵니다. ‘여자 홀로인 채 자식이 태어난다’는 말은 ‘그 여자의 맞은편에 반드시 뱀의 후손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냥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그 사이에서 자녀가 나왔다.’ 그렇다면 여기에 무엇이 등장되지 않습니까? 마귀의 실체(정체)가 드러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마귀가 동원될 이유가 없습니다. 창세기 3:15에 하나님이 약속한 것이 약속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진짜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은 내가 아는 상식선에서 되어지는 세상이 아니고 그 상식 배후에 하나님이 창세기 3:15대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 그대로 되는데 그 된 증거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나 대신 죽는 십자가 사건을 일으켰다’고 믿습니다.

그 십자가사건과 세계 전체를 연관시킬 수 있는 눈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여자의 후손에서 자녀가 태어나고 그 자녀가 바로 나 자신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간단하게 하면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런 뜻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약속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마치 누구와 같이?
이삭과 같이.

갈라디아서 4:28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십자가를 엉터리로, 건성으로(성경에 있으니까, 또는 기독교가정에서 자랐으니까 억지로 믿는다는) 믿는 그런 사람들과, 진짜 이삭과 같이 약속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자기 자신을 근원부터 통채로 새롭게 이해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깊숙이 삽을 박아서 뿌리부터 푹 떠올리는 식으로 ‘나는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이고 약속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이고 약속대로 갈 사람이다’라고 자기 자신을 상식에 의해서가 아닌 전혀 다른 관점, 성경적인 약속의 관점에서 다시 볼 수 있는 그런 눈을 가진 사람만이 제대로 십자가를 믿는다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이른 댓글을 단적이 있습니다. ‘전도하는 일에 시간당 얼마씩 돈을 받고 한다’(십자가마을게시판)는 이야기에 단 댓글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거덜 나서 텅텅 비어 있기에 그 텅텅 빈 신앙의 내용을 대체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색이다. 왜 예수 믿는 것이 거덜났는가? 식상하니까. 처음 믿을 때는 좋았는데 점점 시시해졌다. 예수님이 별로 좋지 않다. 예수 앞에 서는 것이 별로 기쁘지도 않다.”

왜 그렇게 된 겁니까? 육체로 예수를 믿고자 애를 썼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믿음, 소망, 사랑은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욕망체감의 법칙에 의해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떨어져 갑니다. 처음에는 좋았다가 시간이 갈수록, ‘예수도 재미도 없고, 교회도 재미도 없고…’ 점점 효력이 떨어집니다. 사랑도 육체에서 나오는 것은 처음에는 죽고 못살것 같이 하다가 결혼한지 6개월만에 도파민의 효력이 떨어지면서 시들해집니다. 부부간에 대화도 없어요.

“밥! 아는! 자자!”
“나, 친정 가뿔란다.”
“갈라믄 가라.”
“그럼 니는 나 사랑하나?”
“사랑 같은 소리 작작 해라. 사랑 다 떨어졌다.”
“그럼 왜 사는데?”
“정으로 살지 사랑으로 사나?”

인간에게서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은 유효기간이 있어서 효력이 다 떨어집니다. 만약에 그런 식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 믿는 것도 6개월만 지나면 다 시들해지고 귀찮아집니다. 그게 육체로 난 사람입니다. 자기 힘으로 억지로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예수로 시작한 듯이 보여도 나중에는 예수고 십자가고 치워버리고 ‘내 교회 채우기, 내 교회 부흥, 내 교회 전도…’로 모든 것을 대체합니다.

이제는 설교시간마다 예수 이야기는 안하고 교회 이야기만 합니다. 목사 자신부터 예수는 식상해서 귀찮고 싫으니까 그저 돈 나오는 교회만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댓글에 쓰기를 “신학교 들어갈 때는 ‘예수를 위해서 죽겠다’고 하다가, 졸업할 때 되면 ‘교회를 위해서 죽겠다’고 하다가, 졸업해서 목회를 좀 하다 보면 ‘가족을 위해서 죽겠다’고 하다가, 나중에 나이가 더 들면 다 필요 없고 ‘나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점점 바뀝니다.”

그런 이야기를 왜 꼭 해야 됩니까? 그 이유는,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것은 내 힘이 아닙니다. 무슨 힘입니까? 약속이 와서 우리를 구원시킵니다. 그 약속이 뭡니까? 이 세상의 상식을 깨는 겁니다. 남편 있는 여자에게서 자녀가 나오기 마련이고 남편이 없으면 자녀가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상식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없어야 되고 예수를 다 안 믿어야 정상입니다.

남편 있는 여자만이 자녀를 생산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세상에 어느 인간이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님이 생명을 줬기에 예수 믿기만 하면 누가 나를 때려죽여도 나는 천당 간다’는 것을 어느 인간이 믿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하루 이틀이 아니고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미치면서 ‘예수님뿐’이라고 하는 사람의 눈에 비로소 어떤 종류의 사람이 악마(뱀의 후손)인가 하는 윤곽이 잡힙니다. 그들을 대하여 육체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을 성령 받은 사람에 한해서만 비로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내막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지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녹취: 오용익 
갈라디아서 제 20강

(이 근호목사, 2007년 5월 11일(2), 서울의존교회)

지난 시간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 믿으라’ 할 때 ‘믿습니다’ 하면 되는데, 왜 거기에 “남편이 있는 자녀, 남편 없이 되어진 자녀, 핍박당한다, 내어쫒으라’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왜 나오는 것입니까?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 믿는 그 사람은 예수님이 그 안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앞에 세워놓고,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오늘은 어떠셨는지요?”라고 시어머니나 시아버지 섬기듯이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영으로 아예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립니다.

들어오게 되면 예수님이 세상에서 당했던 것과 동일한 경험을 하게 되니까 그 사람만이 진짜 성도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하나님 여기 계시고, 예수님 여기 계시고, 모든 인간이 여기 있습니다. “자! 다들 예수 믿어라. 믿으면 구원된다.” 이렇게 예수 믿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야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사람이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꼭 집어서 지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꼭 집어서 지적된 사람이 아브라함이고, 사라고, 이삭입니다. 그리고 진짜 이런 사람만이 예수믿는 사람이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따로 정한 사람이 있는데 그게 쫒겨난 이스마엘이고, 하갈입니다.

왜 이렇게 딱 정해 주는가 하면, 그것조차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예수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약속된 사람만 믿어진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제가 믿은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으로 믿게 되었어요”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 진짜로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들어있지 않고, 약속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를 믿든 뭘 하든 간에 자신이 애를 써서 다가서야 됩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약속 없이 태어난 자식입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이스마엘이 엉터리라서 안돼!”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약속 없이 자기 육체대로 믿는 사람은 엉터리믿음이라서 지옥 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그렇다면 이 육체를 따라 난 사람들은 4:21에 보면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나름대로 할수 있다고 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율법(법)지키기’ 입니다. ‘어떤 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도 믿고 구원도 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사고방식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육체에 속한 사람이지 약속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법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육체에 속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31에 보면,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엄마가 자유하면 자식도 자유 합니다.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자유 하는 자식이 태어난다고 합니다. 자유라는 말은 어디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법하고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 법에 저촉 받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그것이 약속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육체에 속한 사람은 반드시 뭘 하든지 법(규칙)을 가지고 나갑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목사님! 성경도 법인데 법대로 지켜야 구원받지 어떻게 법 없이 구원됩니까?”라고 반문하신다면 그 사람은 “남편이 있어야 자식이 있지 남편없이 무슨 자식을 낳습니까?”라는 상식선에서 자녀를 생각하는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상식을 진리로 믿기에 무엇이 안 되느냐 하면, ‘남편 없는 자식이 많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남편 없이 무슨 자식이 있습니까?

“남편이 없어도 약속이 있잖아요.”
“세상에 남편 없는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남편 아내가 결합해서 자식이 나오는데 어떻게 그냥 남편 없이 자식이 태어납니까? 그런 인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없는 사람을 새로 만들어서 그 사람들만 천국에 보내는 그런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법이 있었지만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는 법 없이 하늘에서 오신 분의 영이 임한 사람은 법과 상관없이 구원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만 모아서 천국에 보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낳은 자녀입니다”라고 사도바울은 이야기 합니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 1:9)라고 한 겁니다. 이것은 기존의 모든 종교(열심히 해야 구원 받는다)를 완전히 다 깨버립니다. 성경을 덮은 채 들었다면 ‘저 목사가 미쳤지’라고 하지만, 저는 저보고 미쳤다고 하는 사람보고 이 성경의 본문을 해석해 보라고 합니다. 철학자여! 칸트여! 헤겔이여! 철학을 이야기하지 말고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남편 있는 여인의 자녀보다 남편 없는 여인의 자녀가 더 많다”를 해석해 보라는 겁니다.

해석 못합니다. “철학자여! 그것은 창세기 3:15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기고 그들만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라고 한다면 철학자들(법으로 난 자)은 뭐라고 합니까? “이 세상에 악마가 어디 있는데? 다 지어낸 이야기지.” 그렇게 이야기 할겁니다. 제가 ‘666’(계 13:18)을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666’은 무엇인가? 666은 짐승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666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호기심은 참 많은데 짐승이 있다는 것은 거부하거든요.

왜 거부하는가? 짐승이 실제로 이 땅에 있다면 평소에 짐승하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평소의 생활이 마귀(짐승)과 상관없다고 여기고 살아 놓고 666이 뭔지는 무지 궁금해 하는 거예요. 실제 생활은 악마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면서 성경에 666이 나오니까 ‘그게 바코드냐, 뭐냐?’고 궁금해 죽겠다는 식으로 나오더라는 말이죠. 그게 상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면 “믿지 뭐. 믿습니다.” 그걸로 끝나요. “그런데 예수 믿는 믿음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안 되고 법으로는 안 됩니다” 하면, “그런 게 어디 있어? 내가 믿을 때 나의 의지로 ‘믿습니다’ 해서 믿었는데. 그리고 믿으면 법을 지켜야지.” 이렇게 나오더라는 겁니다. 이것이 같은 아브라함의 자식으로서 한집안에 같이 있었으면서도 서로 싸웠습니다. 하나는 가짜고 하나는 진짜입니다. 똑같은 현상이 야곱과 에서간 에도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제 이야기가 듣기 싫다면 야곱과 에서 이야기를 안들은 것으로 해야 합니다. “목사님! 야곱과 에서의 복잡한 이야기를 하지 말고요. 그냥 ‘예수 믿으라’고 해주면 저는 예수 믿습니다. 다른 것은 다 안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자꾸 우기시는데 에서와 야곱이 있다는 말은 그 두 사람 다 한 부모에게서 나왔어요. 한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중의 한 사람은 남편 없이 태어난 약속의 자녀입니다. 누구입니까? 에서가 아니고 야곱입니다. 목사가 맘대로 결정한 사항이 아니고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놓고는 미움 받는 자녀와 사랑받는 자녀를 한집안에 딱 붙여 놨어요. 그것도 쌍둥이로 해 놓았습니다.

여러분 집안에 혹시 쌍둥이가 있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서 “이 집안에 한 자녀는 사랑받기로 되어 있고 한쪽은 미움 받게 되어 있구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러면 얼마나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일부러 그렇게 하십니까? 같은 이삭집안인데 둘 다 함께 천당 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보기도 좋고 안 싸워도 좋고요.

왜 하나님께서는 지옥 갈 인간과 천당 갈 인간을 한 집안에 붙여 놓습니까? 그것은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는 안 믿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 예수라는 겁니다. 십자가는 인간 힘으로는 절대로 안 믿어지게 되어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유아세례 받고, 신앙교육 받으면서 자라고, 학교도 미션스쿨 다니고 다 해도 하나님의 약속된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십자가는 안 믿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진짜 믿어진다면 그는 모든 법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 속에 양심(법)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 양심이 있다는 말은 우리 속에 율법이 이미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신의 눈치를 살핍니다. ‘하나님! 제가 잘했습니까? 아니면 못했습니까?’ 이렇게 눈치를 살핍니다. 행동 하나 하나마다 다 눈치를 살펴요. 매일 반성하죠. 그게 우리의 상식이고, 버릇이고, 관행입니다.

그런데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은 소급해서 이야기합니다. “지금 내가 특별히 뭘 더 잘못한 것이 아니고 처음 태어날 때부터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라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아예 자기 자신을 통째로 법에서부터 벗어 버립니다. “잘했건 못했건 상관없이 이미 뿌리부터 나는 죄인으로 태어났다. 상한심령이다. 우슬초로, 주께서 죄 씻는 그 장치로 인하여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진짜 통째로 ‘나는 무엇을 해도 죄’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성신이 임한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것은 잘했는데 이것은 못했고 이것은 못했지만 저것은 잘했다’고 이렇게 꼭 따집니다. 우리 안에 뭐가 있기에 그렇습니까? 양심이라는 법(율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양심이 내 허락도 없이 마구 쑤셔대니까 양심의 가책을 받고 삽니다. 사람은 14초마다 한번씩 거짓말 한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고 또 종류도 다양합니다. 과장되게 말하는 것도 있을 것이고, 말을 해야 하는데 안하는 것도 포함해서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우리는 매일같이 부지런히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을 해놓고 거짓말 했다는 것을 누구에게 들킵니까? 우리 속에 법(양심)이 있어서 거짓말 한 것을 다 집어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양심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합니다. ‘양심아! 눈 좀 감아줘. 이것은 돈 벌기 위해서 한 것이니 어쩔 수 없는 거야. 너도 알지? 나없으면 너도 없다는 것. 그 대신 이번 주에 2천원씩 하던 헌금, 3천원으로 할게. 이제 됐지? 그것으로 그만 넘어가자.’ 이러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매일 흥정합니다.

“그럼, 목사님! 흥정한 그것이 나쁜 것 아닙니까?” 흥정해서 나쁜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나빴어요. 흥정한다고 해서 더 나쁜 사람 되고 흥정 안한다고 해서 덜 나쁜 사람 되는 것은 없습니다. 다윗은 아예 소급해서 통째로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늙어 죽을 때까지 전부다 죄가 된다는 것을 일괄적으로 다 알아 버렸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심령’이며 그 상한심령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약속된 약속의 위대성이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단하게 줄인다면 “나는 너를 가지고 내 약속이 이렇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서 너를 구원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 약속중심에 예수님이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죽으심을 믿게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죽으심 자체가 구원받는 유일한 근거인 것을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알리고 싶은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요한복음 9장에 나옵니다. 한 소경이 지나가니까 사람들이 묻습니다. “저 사람이 소경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은 “자기 죄나 부모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영광을 위함이다”고 합니다. 왜 그런 관점, 그런 안목을 우리는 수용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우리 자신을 그렇게 볼 줄 모르느냐 이말 입니다. 왜 사서 고생하느냐는 말입니다. 법대로 양심대로 한다고.

지금 우리 주인이 누구입니까? 성령께서 계시고 예수님이 주인인데, 마치 내가 내 주인인양 왜 그리 철없고 무모한 객기와 오기를 부리십니까? 우리가 주인이 아닙니다. 저 어린애가 주스를 마시는데 저는 주께서 마시게 하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그 애가 물을 마시면서 뭘 느끼겠어요. ‘물을 안 흘리고 마셔야 돼. 잘 마셔야 돼. 한꺼번에 잘 마셔야 돼’ 라는 생각들을 할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 애 가운데 양심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양심껏 맘대로 해보라는 겁니다. 그러나 구원과는 상관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유자가 되는 겁니다. 자유자라고 해서 양심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매일같이 쑤셔 댑니다. 이리 쑤시고 저리 쑤시고 매일 쑤셔 댑니다.

다음 주에 책이 한권 나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이근호저. 대장간. 2007) 그 책에 방금 한 이야기들이 잘 나옵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도록 그렇게 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짓을 해도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이 한마디에 이것이 무용지물이 되도록 만드는 식으로 자기 백성을 이 세상에서 앞장세웁니다.

그러니까 누가 위대합니까? 죄를 안 지으려고 조심하는 우리가 위대한 것이 아니고, 이런 행동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위대함이 부각되겠지요. 저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대체 이것을 누가 믿을 것이냐’라는 생각이 들어요. 무슨 짓을 해도 그것은 자유입니다. 왜? 법에는 해당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짓을 합니까? 법(양심)대로 하는 짓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운명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보고 마음껏 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마음껏 하는 것이 되는가, 한번 해 보세요. 여러분 속에 법이 있고, 그래서 마음껏 하고 나서는 후회를 합니다. “주여!” (내 양심에 어긋났다고) 울고불고 난리 납니다. 주님께서 “네 마음대로 해봐라. 네 마음대로 찢고 또 찢고 뭘 하든 맘대로 해봐라.” 아무리 해도 주님의 마음에 변함이 없습니다.

욥이 울고불고 난리 났어요. “주여! 이럴 바에야 뭐하려고 태어나게 했습니까? 차라리 모친의 태중에서 죽는 것이 났지. 왜 햇빛을 보게 했습니까?”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그 밤이 심한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달의 수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그 밤이 적막하였었더라면,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날을 저주하는자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가 그 밤을 저주하였었더라면,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찌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였고 내 눈으로 환난을 보지 않도록 하지 아니하였음이로구나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욥 3:1-16)

주님께서는 가만 계십니다. “그래. 계속 해봐라.” 결국 욥에게 원하는 것은, “네 여호와가 누구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관심사가 ‘나’ 자신이 아니라, “도대체 여호와가 누구시길래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합니까? 누구시길래!” 여자의 후손(약속의 자녀)이기 때문에 상식으로 통하는 세계가 아니라 상식밖의 세계로 구원하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까짓거 믿어주지.’ 그게 아닙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나도 놀라는 겁니다. ‘내가 그걸 믿다니! 나는 내 양심을 알고, 나는 내 양심대로 살려고 하고, 법을 준수하는 그런 인간밖에 안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을 초월하는 그것을 내가 수용할 수 있다니! 이것은 주님의 놀라운 기적이다’

그러면 육체를 따라 난 사람은 뭡니까? ‘육체로 난 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육체를 따라 난 사람은 뱀의 후손, 다시 말해서 악마의 행세를 해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단호하게 말씀드립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약속대로 됩니다. 약속대로 된다는 말은 여자의 후손으로 살든지 아니면 뱀의 후손으로 삽니다. 제 삼의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살래? 뱀의 후손으로 살래?’ 둘 중의 하나뿐입니다.

육체를 따라 난 인간들은 악마의 행세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악마의 행세란 뭐냐?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예수님에게서 욕을 얻어먹은 바리새인들의 행위가 똑같습니다. 자기 손에 있는 법을 가지고 법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복음을 공격하는 식으로 행동을 합니다. 모든 육체로 난 사람은 공식이 있습니다. 악마의 행세를 하는데, 법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무용지물로 만들어서 예수의 복음이 소용없다고 외치는 사람, 그 모든 것이 불신자들의 공통점입니다.

불신자들은 갈라디아서에 있는 대로 시내산, 율법으로 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율법을 주신 것은 ‘네가 악마에 속했다. 혹은 죄에 속했다’는 그 정체를 폭로시키기 위해서 법을 줬다”는 겁니다. 모세 율법에 대해서 사도바울 외에 이렇게 확실하게 설명한 분이 없습니다. 법은 왜 줬습니까? 정체를 폭로하는 겁니다. 어떤 정체? 법 밖으로 한발자국도 못 벗어나는 채로 법에 살고 법에 죽는, 법에서 태어나서 법으로 살고 법에 의해서 죽는다는 겁니다. 저주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저주의 자식으로 살다가 저주의 자식으로 죽는데 그 이유는 ‘그토록 신봉하고 지키려고 애썼던 그 법 때문에 저주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 법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맞아! 내가 죄인이야’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소용없다. 그것은 아무 힘이 되지 못한다’고 공격하고 핍박하는 식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세상 사람이 고요히 잠들어 있을 때, 어느 한 장소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말구유에서 들린 아기울음소리를 따라 목동들이 가보니 거기 아기 예수가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제일 먼저 안 사람은 우선 부모입니다. 그 다음에는 목동들이 알았고 그 다음에는 동방박사들입니다. 이들을 아기 예수 쪽으로 몰아넣게 한 것은 사람입니까, 천사입니까? 천사입니다. 이 천사는 세상 모든 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대로 된다고 누가복음 1장에서 사가랴(세례요한의 아버지)에게 이야기했습니다.(누가복음1:13-23)

모두들 고이 잠든 밤이었습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목자들도 천사가 와서야 알았습니다. 창세전부터 감추어진 비밀이 천사에 의해서 알려졌다는 말은 그것을 악마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헤롯왕이 죽이려고 한 겁니다. 모든 사람은 다 상식선에 있습니다. 아빠 있고 엄마 있고 자식이 태어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거기에 교회 다니고 예수 믿으면 그만이라고 여깁니다. 아버지는 목사고 엄마는 사모고 자녀들은 다 교회 다니는 그것이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상식입니다.

아버지는 목사고 엄마는 사모고 아들은 중이 되는 경우가 정상인데 그것은 정상이 아닌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 경우란 아버지는 불신자 목사, 엄마는 불신자 사모, 그래서 아들은 중이 되어서 가족 세 명이 다 불신자일 가능성이 가장 높죠. 혹시 그중에 하나 목사가 복음을 안다면 그것은 기적을 받은 겁니다. 왜 기적이냐 하면 상식선에서 기독교 문화나 토양이라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독교 문화, 토양은 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마귀는 법에 대해서는 지는 예가 없고 반드시 이깁니다. 처음에 조상 아담이 법대로 해서 졌습니다. 초장부터 법대로 해서 졌기 때문에 아담 후손 대대로 선악과 따먹고 법에 졌기에 법에 다 묶여 있습니다. 물론 생명나무는 따먹을 자격도 안 되고 추방된 상태이기 때문에 뱀의 후손이 율법 하에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법대로 해서 이길 재간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상식으로 해서 예수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 출석해서 예배드리고, 전도하고, 십일조 하고, 봉사활동 참여하는 식으로 기껏 흉내 내는 식으로 다 합니다. 그것, 신앙 아닙니다. 천사가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됩니다. 성경은 그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경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안 합니다. 성경,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관심이 누구에게 갑니까? 카메라로 치면 마태(카메라1), 마가(카메라2), 누가(카메라3), 요한(카메라4)의 그 초점이 어디로 따라갑니까? 아기 예수의 출생과 그 마지막에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까지 전부다 예수님이 가는 그 행적만 집중적으로(클로즈업) 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하는 것은 예수님 중심으로만 비로소 그 안에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예수를 통해서 그 비밀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다른 사람은 뭘 믿었습니까? 신을 믿었습니다. 법으로 다가설 수 있는 신을 믿었잖아요. 여호와라고 하든, 삼위일체라고 하든지 법으로 다가설 수 있는 신을 믿었고 그것이 육체에서 난 사람의 주특기이고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있으니 신은 섬겨야 된다는 것도 알고,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선하고 착하게 바르게 살면 완전해 진다는 것도 아니까 십계명을 주면 십계명도 지키고, ‘뭐든지 법대로 해서 신(여호와)께 영광 돌리고 충성하자’는 것만 남아 있는 겁니다. 지금 아기 예수가 뭘 하기 위해서, 뭘 주기 위해서 왔는지 그것을 몰라요.

다만 ‘나’라는 인간은 여기 있고 신(하나님)은 저 위에 있을 것이고 그 사이에 법이 있어서 ‘인간 쪽에서 지키면 그만이다’는 그것뿐입니다. 이게 바로 육체로 난 사람입니다. 육체론 난 사람은 그것뿐입니다. 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갈수 없는 이유는 법은 나를 살리기 위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도 지워지고 식상하면서 노쇠한 하나님이 되어 버리고, 법은 내 안에 양심으로 굳어져서 결국 남는 것은 ‘나’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자기 부인이 아니라 ‘나’만 달랑 남아서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그런데 진짜 천사를 만난 목자들이나 선지자는 관심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2장 36절입니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주의 율법을 좆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누가복음 2:36-39)

과부된지 몇년 입니까? “팔십사년이라.” 그동안 중매가 얼마나 많이 들어왔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84년동안 혼자 살았다’, 팔자가 더럽지요? 그런데 메시아(아기예수)를 만나고서는 자기가 84년동안 혼자 살았다는 그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예수님을 만났다는 그것으로 자기 사명이 끝나는 거예요.

누가복음 2장 26절에 보면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인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누가복음 2:25-33)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가서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29절에 보면,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딘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인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 말 중에서 자기 이득, 자기출세, 자기승진, 자기가족 행복 같은 것이 들어 있습니까, 안 들어 있습니까?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내가 딴 사람이 되었다는 그 기쁨이 전부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다른 부류에 속하고 다른 층에 속하고 다른 계열에 속한 사람이라는 그것으로 그 사람은 더 이상 바랄게 없어요.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어떻고, 내 학위가 무엇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겁니다.

예수님이 자기 안에 있어요. 그런 사람 봤습니까? 없다고요? 창세기 3:15에 있습니다. 뱀의 후손이 있고 여자의 후손이 있습니다. 있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당황스럽게 만들지요. 여자의 후손이 있다는 말은 내가 뱀이 자손이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거든요. 법 없이 태어난 사람이 있다는 말은 법으로 태어난 사람은 그냥 그 자리에서 지옥 간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야기 합니다.

“내가 이런 복을 받으려면 뭘 해야 합니까? 이런 복은 기도를 며칠 동안 하면 됩니까?”라고 나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너, 여자의 후손 계열 맞아? 아니면 뱀의 계열이고.”
“왜 그렇습니까?”
“그게 약속이야.”

약속이 덮쳤습니다. 약속 때문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니까 빠질 인간은 빠지고 올라올 인간은 올라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구름타고 올 때에 한 사람은 하늘로 올라가고 한쪽은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시는 일입니다. 약속대로 하시는 겁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는 겁니다.

육체를 따라 났다는 말은 “나는 육체다!” 그런 소리가 아니고 “목사님 백날 그 소리 해봐야, 나는 그저 착하게 살면(사람이 완전할수야 없지만 그러나 최선을 다하여 남에게 해코지 안하고, 파출소 다녀가면서 험한 꼴 안보이고, 그저 착실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설마 신이 계신데. 태양을 만드시고 달을 지으신 분이 계신다면 나를 나쁜 쪽으로 몰아가지는 않을겁니다. 내가 이해하기는(목사님이 아무리 약속 이야기를 해도, 그리고 성경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옳다는 느낌이 오네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대신 죽었다는 말은 그냥 공연히 하는 말이고, ‘나처럼 착하라’ 그런 뜻이겠지요.”
“아닌데요. 그런 뜻이 아닌데요.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라는 뜻인데요. 십자가는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라는 뜻인데요. 이미 우리는 죽은 놈이라는 뜻인데요. 자기 처나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인간은 내게 합당치 않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예수님이 그런 소리를 했습니까?
“그런 소리를 했는데요.”
“우리 교회 목사님은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안하던데요?”
“그건 너희 교회 목사고 우리 교회 목사는 그것만 골라서 이야기하던데요?”

‘지켜라’가 아니고, ‘못 지킨다’도 아닙니다.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런 법과 상관없이 ‘이미 구원 되었습니다’ 하는 것을 통보해주는 거예요. ‘지키고, 못 지키고’와 상관없이 예수님은 자기 할 도리를 다 했습니다. 우리에게 해줄 것을 다 해주었습니다. 만약에 그것을 진짜로 인정하는 사람은 “예수님만이 나의 자랑입니다”라고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교회가 다 성도인데. 어느날 목사가 새로 부임했어요. “말씀대로 살아서 복 받읍시다”라고 나오니까, 모든 성도가 ‘언제쯤 예수 이야기가 나오나…’ 하고 있는데 끝까지 안 나옵니다. “여러분! 목사한테 순종해야 됩니다. ‘아멘’ 소리가 적은 것 보니까 순종을 안 하겠다는 것 같이 보이는데 그렇게 해서 저주 받은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닙니다. 헌신예배로 외부강사 한번 불러서 경험담을 들어 볼까요? 목사 우습게 여기다가 자식들 다리 부러지고 망한 이야기 들어 볼까요?”

복음 아는 교인들이 불러와 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왔어요. “여러분! 바치면 복 받습니다. 미쓉니까?” 또 아멘이 없어요. “이래도 아멘이 없어요?” 또 다른 사람 불러온다면 또 오라고 하고. 이렇게 되어야 신자인데 어떤 사람은 “목사님! 목사님 이야기가 맞는 것 같은데 다른 목사가 저렇게 말하니까 또 마음이 흔들립니다.”

이것은 자기양심 총동원해 예수 믿어 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입니다. 애 쓸 필요 없다니까요? 애 안 써도 됩니다. 애 안 쓰고 ‘내가 믿는가’ 점검 해 보시기 바랍니다. 용을 안 써도 믿어지는가 한번 점검해 보세요. 용을 안 써도 믿어지시거든 여러분에 어떤 환란 핍박이 와도 계속 여러분은 믿는 사람입니다.

너무 가난해서 예수 믿기 힘든 경우에 사람은 그나마도 믿는 척이라도 합니다. 사람이 수천억 재산을 가진 상태에서 예수 믿어 보세요. 정말 안 믿겨 집니다. 돈이 좋은데 예수가 왜 좋습니까? 예수 없어도 돈이 있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려움에 처하게도 하고 부하게도 해서 ‘진짜 네 안에 예수 주신 믿음이 들어 있는가’를 매일 같이 매일 같이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확인케 하는 그런 삶을 살게 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 있어도 ‘내가 나쁜 짓을 해서 어렵다’고 여기지 마시고 ‘나쁜 짓을 해서 이렇게 어렵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것과 구원이 상관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일은 별로 없지만 혹시 누가 여러분에게 “한 15억을 그냥 드릴게요” 라든지, “아파트 한 채가 그냥 남아도는 것이 있어서 드립니다” 하거든, 여러분이 교회나 목사에게 충성해서 받은 것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개집 하나 들어 왔군’하면서 그 개집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거 팔아서 좋은 일에 쓰겠다고 하지 말고 ‘개집인데 그냥 살지 뭐’라고 사시기 바랍니다. 착한 일 해서 복 받는 것도 아니고 나쁜 일 해서 저주받는 것도 아닙니다. 저주하고 복이라는 것은 성도하고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약속은 예수님 자신이 필요해서 우리가 들어 간 겁니다. 우리가 필요해서 우리가 예수 믿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 십자가만 이야기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서 왜 “남편 없는 여인의 자녀가 남편 있는 여인의 자녀보다 많다”는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진짜 신자 맞아요?”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4장 끝에 ‘자유’에 대해서 나옵니다. ‘자유’라는 것은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라는 것은 어떤 환경을 말합니다. 지금 여기는 의존교회인데 의존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의존교회는 환경이잖아요. 마찬가지로 자유라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자유 안에 그냥 놓여 있는 상태를 자유라고 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고 ‘네가 무엇에 둘러싸여 있는가’를 보라는 말이죠. 그 둘러싸인 것이 법이 없는 것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법으로 묻지 않고 사랑으로, 다른 말로 예수님의 자유함(자유분방함)속에 우리가 놓여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자유가 우리 자유가 되어서 우리가 예수님의 자유와 한통속이 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법의 저촉을 받지 않듯이 마찬가지로 예수 안에 있는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법의 저촉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자유라고 합니다.

예수님 바깥에 뭐가 있습니까? 인간의 법(양심)이 있습니다. 결국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인간이 말하는 어떤 법이나 양심에도 저촉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로마서 8:31-39)

“누가 정죄하리요.”(로마서 8:34) ‘주께서 위하시는데 누가 송사할 수 있겠는가?’어떤 경우에도 ‘성도는 성도를 용서하신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꽉 잡아 버렸어요. ‘너를 용서하신 사랑은 어떤 어려움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합니다. 심지어 악마? 권세자? 천사? 어떤 세력이 와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에서는 철수되지 않고 취소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나, 그 안에서 늘 살래. 나, 주님 밖으로 안 벗어날래’라는 그런 기쁨을 우리에게 주지요. ‘내가 죽어도 주의 것이 되고 살아도 주의 것이 될래’라는 마음이 생기도록 합니다. 그렇게 된 사람은 자유인이고 그 사람은 하루 살면서 어떤 사태가 오더라도 그것 때문에 기죽거나 좌절하거나 낙심할 이유가 없지요. 어떤 사태도 예수님이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주신 일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 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예수 믿는 사람은 아침운동을 하면서도 ‘예수! 예수!’ 하는 식으로 살아야 합니까?”라는 것이 궁금합니다. 여러분이 ‘아침마다 일어나서 기도하고 예수를 부르짖고 성경을 보겠다’고 규칙을 세우는 것은 본인의 자유입니다만,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세요.

‘오늘은 석장을 읽기로 했는데 두 장 밖에 못 읽었다. … 내일 놀러 가는데 오늘 다섯장을 읽고 내일은 안 봐도 된다'라고 할 때, 일단 ‘네 맘대로’ 하세요. 그렇게 하시면서 내속의 법이 얼마나 나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지를 맛보시는 기분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내 법을 가지고 장난을 쳐도 내 맘속에 그것이 내 구원과 상관없다는 것을 치밀어 오르는 기쁨으로 느끼신다면 신자 맞습니다.

그러데 석장 볼 것을 두 장 본다든지, 사흘간 안 본다든지 했을 때에, 나는 좌절하고 낙심한다고 느껴지신다면 그것은 신자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신자겠지요. ‘내가 좌절하고 낙심해야 맞는데 이상하게 낙심이 안 되네? 이상스럽게 낙심이 안 돼. 다음에 잘하면 되지’라는 생각이 드시거든 신자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법이 있고, 그 법이 있음을 무시하지 마세요. 하지만 그 법보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 법을 이겼다는 것이 모든 행동에 있어서 항상 여러분 속에 떠오르게 되어 있어요. 저녁에 식구들을 보면 다 피곤에 지친 몸으로 들어옵니다. 식구가 셋 같으면 피곤한 가족 셋이 모였어요. 작을 일에도 짜증을 부립니다.

“나, 건드리지 마. 화낸다.”
“너만 그래? 나도 그래!”

으르렁 거리면서 서로 공격을 해대니 식구대로 서로 못 잡아먹어서 난리입니다. 그럴 때 ‘우리 집이 대체 성도가정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어가는데, 개중에 철없는 사람은 일부러 찬송가를 불러요.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그러지 마세요. 그것은 괜히 귀신 굿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피곤할 때 성질나는 것, 성질나도록 피곤케 함으로 말미암아, 너의 구원은 너의 성질과 상관없다는 것을 피곤한 몸을 통해서 믿으시기 바랍니다.

피곤에 지친 몸으로 성질을 있는 대로 다 내는 내 모습, 진짜 성도가 아닌 사람은 그것으로 희망 없어요. 그런데 진짜 성도는 그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함(양심에 묻지 않고 구원해 주시는), ‘내가 이렇게 죽었다’고 십자가에 내동댕이쳐진 예수님의 그 고난 받으심을 생각하면, 주님의 고난 받으심 앞에 우리의 어떤 행동도 의미 없다는 것을 알고, 그분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걸 아는 순간 몸은 피곤해도 그 사람의 태도는 바뀝니다. “미안하다. 내 본심이 아니었어. 내몸 피곤하니까 그런 모양인데 나도 피곤하니까 그러네. 내 참 미안해. 앞으로 안 그럴게.”은혜 받은 애들 같으면 “아빠! 내가 좀 성질냈는데 미안해요.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 앞으로 안 그러기는요. 또 그러지요. 그러나 이게 바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한 식구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들 피곤한 가운데서도 자기 속에 누가 들어 있는가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대로(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우리를 덮쳤는데 우리는 그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내 스스로 완벽하고 의롭게 살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다 그것이 마귀의 속임수 인줄 압니다. 법을 의식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 법에서 고난 받고 죽으심으로, 이미 우리를 법으로 묻지 않는 사람 되게 했다는 것에 대해서, 주님 바라 보면서 희열과 감사와 고마움을 느끼는 성도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