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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마지막 부분을 해 봅시다. 마지막에 사도바울이 별 할 말이 없었던가봅니다. 왜 할 말이 없는가 하면 15장에서 모든 할 이야기를 다 했다는 뜻에서 끝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15장까지는 신령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지요. 그리고 난 후에 16장을 보면, 자신의 신상에 관해서 그리고 여러 가지 현재 일어나는 복음 전파의 활동들에 관해서, 실재로 교회 형제라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해서 문안하고 관심을 나타냅니다. ‘늘 나는 당신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하는 그런 문안의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문안 인사를 한다고 해서 그 인사대로 십자가의 능력이 임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들은 다 끊어질 수 없는 사이입니다. 우리가 남남으로 헤어질 수는 없는 입장입니다.’ 라는 식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16장 22절을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하면서 ‘저주’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읽은 기독교 서적 중에 재미있는 것이 하나 있었어요. 뭐냐 하면, ‘주저’에 관해 썼는데, 그 책은 오바댜 예언서에 대한 풀이인데, 자유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는 구약 학자가 쓴 책인데 [저주하시는 하나님]인가 뭐 그런 제목이었습니다.
‘저주’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일 제가 교회사 강의 하면서 이 ‘저주’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1618-1619년 도르트 회의에서 알미니안 주의를 정죄합니다. 네덜란드에서. 알미니우스(Arminius)가 네덜란드 사람이니까. 그 때 네덜란드는 칼빈주의를 따라서 벨직 신조를 신봉했는데, 이런 신조를 만든 이유는 재산권 보호를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신조를 만들어서 신조 안 믿는 사람은 나가라는 것입니다. 신조를 믿는 사람은 시민이고.
마치 광주 시장이 신조를 만들어서 이 신조에 불응하는 사람은 나가라 하는 식입니다. 이것이 옛날 식 교회입니다. 옛날에는 경찰 따로 있고 집사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집사님이 경찰입니다.
참 우겨요. 칼빈이 있었던 교회에 장로님들은 예배 참석 안 했습니다. 왜? 그 시간에 돌아다니면서 예배 참석하지 않는 사람 적발해서 감점을 매기고 점수가 차면 제네바에서 추방시키기 위해서 감시하러 다녔습니다. 왜 이렇게 했는가 하면 성경에 보면 장로는 치리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아주 적극적으로 치리를 했지요. 교회 안 나오는 사람들을 옥에 가두거나 죽이거나 국외로 추방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 웨스트민스트 신조입니다. 이런 신조들이 21세기에 맞겠습니까, 안 맞겠습니까? 당연히 안 맞지요.
당시는 농경시대 경제구조 하에서 교회가 성립되었습니다. 교회마다 영주가 가지고 있는 사적인 토지를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신조를 이데올로기로 해서 농민들을 지배하지 않으면 당시 사회를 통제할 수가 없었어요.
따라서 옛날의 신조는 오늘날에 적용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민주주의가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봉건주의와는 달리 인민 자체가 주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민 자체에 주권이 있다는 말도 허황된 말입니다. 주권이란 것이 어떻게 여러 사람에게 있을 수 있습니까?
이 말은 오늘날은 경제가 우선이고 정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옛날에는 정치를 위한 경제였습니다. 왕을 섬기기 위해 농사(돈벌이)를 지었습니다. 지금은 돈벌이를 위해서 서비스해 주는 것이 정치(왕)입니다.
중국을 보세요. 돈만 된다면 공산당이라도 자본주의를 채택합니다. 이게 얼마나 모순입니까?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것이 공산주의인데 말은 공산주의 한다고 하면서 자본주의를 용납한다는 것은, 이제 이데올로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잘 살아보세’로 나가는 것입니다.
‘저주’ 이야기 하려다가 너무 멀리 가버렸습니다. 내일 우리교회에서 교회사 강의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인데,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이 왜 나오게 되었는가 하는 그런 내용을 공부할 것입니다.
저주론에 있어서 옛날부터 골치 아픈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시편입니다. 시편에 보면 기도를 하는데 악한 자들에게 저주하는 내용이 대단히 많이 나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아직도 해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시편 69편 24절부터 제가 읽는데, 그냥 읽는 것이 아니고 공중 기도하는 집사로서 기도하면서 이 대목을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저희 거처로 황패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이런 기도가 끝나면 “아멘” 하겠습니까?
만약 시편 69편에 나오는 내용의 기도를 못하게 된다면,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나오는 “저주”라는 말도 받아들이기 곤란합니다.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말, 이것은 말만 그런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렇게 되게 해 주시옵소서’ 라는 마음이 없으면 이 말씀은 안 받아들이게 됩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그리고 내 마음에 꼭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는 말씀에 ‘맞습니다. 옳습니다. 당연합니다.’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있는 자라야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의 ‘저주’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을 하는가? 해석을 못합니다. 겨우 한다는 소리가 ‘이것은 옛날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하니까 하나님의 공의를 펼치는 차원에서 하는 것이지 실제로 저주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만약 회개한다면 사랑으로 용납할 수 있는 마음으로 경고의 차원에서 저주한다.’ 이런 식으로 대충 얼버무립니다.
그런데 시편 69편뿐만 아닙니다. 여호수아에도 나오지요. ‘저 이방인들로 하여금 주의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옵소서.’ 예레미야에는 많이 나와요. ‘주의 언약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퍼부어 주옵소서.’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왜 제가 ‘저주’이야기를 가지고 고린도전서 대미를 장식하려는가 하면, 미리 강의를 할까요?
타락 전 선택이냐, 타락 후 선택이냐? 이런 것으로 논쟁이 된 시대를 17세기 스콜라 시대라고 합니다. 개신교가 또 다시 스콜라 화 된 시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은 자유자의 신학자들이 비아냥거리면서 하는 질문입니다. 타락 전 선택, 타락 후 선택 어느 것이 맞습니까?
나중에 보면 사람들은 이 둘 다를 맞는 것으로 칩니다. 구원은 타락 후고, 창조는 타락 전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면 칼빈은 어떻게 보는가 하면, 타락 전 선택인데 이것은 구원론에 국한해서 타락 전 선택을 말합니다. 인간을 구원할 때는 타락 전부터 선택해서 나중에 타락할 줄 알고, 타락 후에 허급지급 구원할 장치를 마련한 것이 아니고, 타락 전부터 타락할 줄 알고 미리 보험 들어놓았는데 사고가 나면 보험 타는 식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들이 뭘 놓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저주하심을 자꾸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지옥을 만드신 하나님이 부끄럽게 되요. ‘아이 참. 내가 공연히 지옥을 만들었네. 너희들 보기 민망하구나!’ 이런 식이 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고전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되어 있지요. 그 앞 절에 뭐가 있습니까? 21절입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고 했습니다.
만약 제가 오 목사님 만나서 반가워하면서 입 맞추고 하다가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한다면 이것은 완전히 놀리는 것이지요.
다정하게 입 맞추는 문안 인사를 했으면 좋은 말로 마감을 해야 하는데 저주가 나오면, 마치 가룟 유대가 입 맞추면서 예수님을 팔아먹는 식이 되잖아요.
지금 바울이 고린도전서 마지막 부분을 그런 식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문안 인사가 아름답게 끝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저주’가 아름다움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당신 교회 맞아? 당신 성도 맞아?’ 라는 물음입니다. 성도는 항상 ‘내가 성도 맞는가?’를 말씀을 근거로 해서 물어보는 것으로 평생을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좋게 좋게 위로와 치유와 평강, 이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저주 이야기 아니면 치료가 안 되는 것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고 큰 소리 치고 장담을 해도 스스로 저주, 지옥을 생각지 아니하면 그것은 교회로 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냉정합니까? 칼빈보다 훨씬 냉정합니다. 칼빈이 타락 전 선택설을 주장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칼빈을 비정한 사람이라고 비난했는데 --
저주와 지옥 이야기를 빼면 이것은 인간을 위한 교회이고 이것은 주님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마지막 구절에 우표를 붙이듯이 붙였습니다.
저주 이야기 하고 난 후에 은혜 이야기를 합니다. 죽었다가 산 줄 알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었다면 큰 일 날 뻔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땡 잡을 줄 알라는 것입니다.
저주와 은혜가 단짝으로 항상 함께 공존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저주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은혜로운 교회여도 은혜가 떠나버리면 그 자체가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도바울이 십자가의 능력만이 구원을 이룬다는 사실 즉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는 것을 계속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고전2:7-8절을 보겠습니다. 오늘은 총 정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앞부분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굉장히 중요시 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키는 것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로 말미암아 약속을 했다면, 그 약속은 반드시 그림자가 있는데 그것은 약속의 주인이신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저주가 없으면 이 십자가는 헛것이 됩니다.
제가 늘 설교에서 하는 이야긴데, 예수 믿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사람들이 대단한 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되었으면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3-4살 되는 아이들이 아이스크림 먹고, 사탕 먹고 간식을 먹으니까 밥을 먹기 싫어해요. 그러면 엄마는 아이 밥 먹이려고 밥그릇들도 따라 다니면서 먹여요. 그래서 한 숟갈 먹으면 잘했다고 칭찬하고 또 한 숟갈 먹으면 잘했다고 박수치고 하지요. 밥 먹는 것은 당연한데 박수를 치고 칭찬을 하고 난리입니다.
피조물이 되었으면 하나님 주신 생명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당연하고 주님 영광 돌리면서 사는 것이 당연한데 예수 믿었다고 보상금 내 놓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깡패 같은 짓이 어디 있어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사람이 문제지요. 이런 자들에게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고, 너에게 주어지는 모든 은혜는 공짜로 주는 것이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편지 마지막에 썼으면 이 편지를 받는 자가 진짜 성도 같으면 박수치면서 ‘그 소리 안 했으면 내가 섭섭할 뻔 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렇게 끝날 것이 분명하고, 만약에 이 편지의 마지막 부분 ‘저주’ 대목을 읽고 화를 내거나 삐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교회 다니더라도 성도가 아닌 것이 분명하지요.
따라서 마지막에 저주이야기를 반드시 해야 해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 받기 때문에 저주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태양은 떴는데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태양이 예수님이라면 저주는 그림자입니다. ‘주님 계신 곳에 저주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멋있는 표현을 썼습니다.
예수님 가신 곳에 저주가 있을지어다. 아멘. 예수님 가신 곳에 저주가 있습니다. 어느 가정이 예수를 믿게 되면 그 가정에 저주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됩니다. 만약 그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다른 가정에는 저주가 없는데 왜? 하고 말할지 모르겠는데 그 가정은 아예 태양이 없지요. 태양이 없으니까 그 자체로 깜깜하지요. 태양이 비치면 저주의 윤곽이 분명히 드러나지요. 그러면 그 저주를 보고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그 저주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 은혜에 대해 감사하게 되지요.
이런 차원에서 고전 16장을 보겠습니다. 2절에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이것은 주일 예배드릴 때마다 연보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이기는 매일 모였는데 연보는 매주일 첫날에만 연보를 해서 모아놓으면 내가 가면 연보를 가져가겠다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읽고 만약 어떤 사람이 ‘바울이 또 돈 이야기하네. 싫어!’ 이렇게 나오면 ‘저주를 받을지어다’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왜? 주를 사랑하지 않기에.
태양이 뜨면 그림자가 생기듯이 예수님 가신 곳에 저주가 있다면 바로 이러한 사도의 말에 대해 반발하든지 불쾌하게 여긴다면 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고 저주를 받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저주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면, 억지로라도 ‘예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올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13-14절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안 하면 저주입니다. ‘애야 밥 먹으라.’ 이렇게 부탁하는 식이 아닙니다. 싫으면 말라는 것입니다.
믿는 신자에게는 오히려 저주가 있는 것이 행복해요. 왜? 심판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비로소 시편에 나오는 저주 시(詩)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 교회 나오는 자 중에 예수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에 아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편의 저주 시를 왜 해석 못하는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는 이 저주를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해석을 포기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지만 그 앞의 내용의 저주의 선포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는 지옥 간다는 것을 분명히 말 했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복음에는 바로 저주의 검은 그림자가 동반되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사람은 자기 힘으로 구원된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구원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고린도전서를 볼 수 있도록 은혜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받아들이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십자가를 믿게 된 사람인 것을 저희들이 놓치지 않게 해 주시고, 이미 부활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는 상태에서 원 없이 한없이 감사하고 기뻐하는, 예수님 십자가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5. 12. 17. 11:36 녹취 마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