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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고린도전서 5-1 / 05.04.22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5-1 / 05.04.22

정인순 2010. 10. 11. 13:19

05광주강의(실로암교회) 09 - 고린도전서 5-1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gwangju/gwangju050422a.mp3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gwangju/gwangju050422.hwp


                                                                

 

05,04,22    

강의: 이근호 목사

◈ 사도바울 - 세상 지혜로는 십자가를 알 수 없다 !!

"세상 지혜로는 십자가를 알 수 없다" 라고,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하나라도 더 알려주기 위해서 애를 쓰는 태도가 아니라, "아니, 십자가 모르는 사람은 난들 어떻게 하겠어" 라는 식이지요.  즉 십자가를 못 믿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무슨 하나님도 아니고 심판 주도 아닌데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현재의 교회가 마음 수련장으로 바뀌었어요.  현대인들이 돈 번다고 너무 스트레스가 쌓여 있으니까, 마음에 평안을 주고, 위로를 주고, 기쁨을 주는 그런데 초점을 맞춰서 움직여요.  그래야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바쁜 시간에 교회 온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 수련장이 과연 천국입니까?  이것이 하늘나라입니까?  전혀 아니잖아요.  기분상 붕 떠서 천국에 온 기분이 드는데,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마약을 투입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기독교가 아편이 되는 것이지요.

"십자가는 세상 지혜로 모르게 되어 있다' 라는 이 한 마디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절망감을 주는지를 사도 바울은 익히 알고 있지요.  바울도 과거에 예수를 모를 때는 예수를 전하는 사람을 심히 핍박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알지도 못하는 자에게,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이야기가 그들에게 얼마나 거부감으로 와 닿는가를 충분히 이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저쪽이 기분 좋으냐, 나쁘냐 하는 점은 아예 안중에도 없습니다.  지금 분명한 현실은 주님께서 천국 가는 기준으로 분명히 제시하신 것이 십자가밖에 없는데, 놀랍게도 이 십자가가 세상 지혜로는 알 수 없는 거예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십자가를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 전혀 눈치를 보지 않는 바울 !!

이러한 사실은 깨달은 바울은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습니다.  못 믿을 사람의 기분을 고려해서 말을 주저해야 할 이유도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말을 모두 다 합니다.  아쉬운 것 없이 당당하게 모두 다 전하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적인 장사 속으로 한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전혀 안 되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뭐라고 해야 합니까?  "세상 지혜도 잘만 교육을 받으면 십자가를 알 수 있습니다" 라고 해야 장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다시 말해서, "세상 지혜로 모른다" 라는 말은, 간단히 말하자면 그냥 "모른다. 알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 복음 - 이 땅에는 없다 !!

우리 광주 강의 첫째 시간에 한 이야기를 기억하지요?  복음은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생소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즉 이 땅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디에 있던지 어떻게 하든 찾아가서 그 신비를 밝혀내고야 맙니다.  물론 히말라야 정상에 뭐가 있는지는 그 정상에 올라가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이란 것은, 처음부터 이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인간이 그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알았으리요. 누가 믿었으리요. 경건치도 않은 인간을 주님께서 의롭게 하셨다면, 이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에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라고, 자신 만만하게 이야기한다는 말입니다.

(행 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그렇다. 그래야 하나님 말씀은 실현되는 거야. 못 믿겠거든 집에 가. 못 믿고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바다" 라고 하는, 이게 얼마나 자유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이런 당당한 자유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십자가란 것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대속의 행위가 아니란 말인가?" 라고 반박하고 물으신다면, 이렇게 대답하세요.  "십자가는 원래 모르는 것인데, 십자가를 알고 보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신 것을 알았습니다" 라고 나오는 것이지요.

◈ 세상 지혜 - '예수님이 죄를 씻는다' 라는 정도 !!

다시 이야기합시다.  예수님의 죄 씻는 십자가란 것을 원래는 몰라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죄를 씻는다는 정도는 이 세상 지혜에 속하기 때문에, 이 세상 지혜로서는 그런 십자가를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를 알고 부터는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일이다"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예수' 라는 개념은, 세상 지혜에서 나온 개념이 아니라, 이 세상 지혜와 연결되지 않는 예수님이고, 그 다음 두 번째로, 예수님이 무엇을 했다구요?  한 글자로 '죄'를 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죄' 라는 개념도, 역시 세상 지혜에서 나온 죄가 아니고, 십자가 앞에 서야만 비로소 파악되는 새로운 죄 개념이 등장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강남노회 장안중앙교회 박용기 목사님에 대한 글을 쓰면서,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죄를 모르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 죄를 씻어주는 것이다" 라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어디에 속했느냐 하면, 세상 지혜에 속한 것이에요.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예수라는 그 개념이 세상 지혜에서 나온 개념이기에 말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박용기 목사가 말하기를 "구약은 여호와고. 신약은 예수님이다" 라고 했거든요.  이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것은 유대인들이 성경을 문자로 볼 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왜요?  구약에는 '여호와'가 자주 나오고, 신약에서는 '예수'가 자주 나오니까 말입니다.

◈ 신구약 모두 예수님이다 !!

이것이 바로 세상 지혜의 관점으로 성경을 보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사도는 그렇게 보지 않고, "신구약 모두 예수님이다" 라고, 그렇게 말들을 해요.  그게 요한복음 5장 39절에 나오는데 "모든 말씀은 나(예수)에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다" 라는 사실을, 그들은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런데 만약에 "구약 전체가 예수님이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려면, 그들은 어떤 마음의 부담이 있는가 하면, 창세기 1장 28절을 예수님과 결부시켜서 설명해야 될 신학적인 부담을 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엄청 부담스럽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좀 어려운 것 같은데 쉽게 말하면, 강남노회에 계신 분이, 창세기 1장 28절에,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차지하고 다스리고 정복하라" 라고, 이게 누가 누구에게 한 이야기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기가 만든 사람을 보고 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이 세상 지혜로 한번 봅시다.  세상 지혜로서 그 본문을 들여다보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이렇게 해석하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청지기적인 사명을 부여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는 자들이 예수를 죽였어요.  유대인들이 말입니다.

◈ 창세기 1장 28절 - 그 아들 예수가 온전히 그 말씀을 완성시키는 분 !!

창세기 1장 28절을 그렇게 생각했던 자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은, 그렇게 해석한 것이 세상 지혜의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령에 의해 그 본문을 해석하는 사도 바울에 의하면, 창세기 1장 28절은,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께 주신 말씀으로, 그 아들 예수가 온전히 그 말씀을 완성시키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씀해준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그 본문을 보고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창세기 1장 28절을 보고, 그 말씀을 성취할 분이 바로 목수의 아들 나사렛 예수님이란 사실을 알았다면, 과연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겠습니까?  그런가요?  그들이 심심하면 사람을 못 박아 죽이는 살인마들입니까?

그러니 창세기 1장 28절이 예수님께서 혼자 이루실 몫이란 사실을 알았다면, 강남노회 있는 목사님들은 성경을 다시 해석해야 합니다.  구약은 '여호와'가 아니라 '예수님'이고, 물론 신약도 '예수님'으로 해석해야 하고 말입니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되지요.  그런데 저쪽에서 교인들이 하는 말이 "어떻게 그렇습니까?" 라고 설명을 요구하면, 본인이 안 믿기에 그만 십자가로만 구원된다는 것을 슬그머니 패기처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 때문에 복음을 포기하는 것이지요.  자기가 살기 위해서 다시 한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오늘날의 목사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고인입니다.  고인이 뭔지 알지요?  이미 죽은 사람 말입니다.  자기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 "내가 지금 목회가 되냐, 안 되냐?" 라는 것을 따질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의 관심은 무엇인가 하면, "세상은 무슨 중심으로 이루어지느냐?" 라는, 그것이 자기에게 전부였습니다.  

◈ 십자가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 세상 지혜로서는 도저히 모르는가?

그러니까 지금 강의가 되려면, 세상 지혜가 어떻게 되어 있기에, 왜 세상 지혜로서는 십자가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십자가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 세상 지혜로서는 도저히 모르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냥 십자가 믿으라고 하면, "첫째, 십자가는 죄를 대속하는 것이고, 둘째, 십자가는 구약의 완성이고, 셋째, 십자가는..."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열만 하지 정작 그들이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런 점을 여러분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성경에 있으니까 받아들이는 것입니까?

◈ 왜 십자가를 모르는가? '죄' 때문에 !!

인간의 어떤 지혜를 동원해도, 문자 해독을 해도 십자가는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십자가를 모릅니까?  사도 바울이 제시한 정답은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허상의 십자가, 가짜 십자가, 가짜 예수 등등, 전부가 다 이렇게 죄 때문에 발생되기에, 죄에서 나온 이런 모든 것들은 가짜이기에, 죄에서 나온 십자가도 가짜라는 것입니다.

강남노회 쪽에서 하는 말이, "예수님은 우리 죄를 씻어주셨으니까,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은 창세기 1장 28절에 있는 여호와가 주신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 라고, 이런 식으로 설명하거든요.  즉 구약은 여호와고 신약은 예수인데, 결국에는 처음 원래 여호와가 생각했던 웅대한 계획에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들에게서의 십자가는 임시적인 것이지요.  죄 때문에 투입되었으니까 죄 문제가 해결되면 그냥 빠져야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이 바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고, 바로 이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 '죄이다, 아니다' 라고 나는 것 자체가 죄 !!

그렇다면 그들이 알고 있는 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못사는 것이 죄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말티아' 라고 하지요.  하말티아는 "표적에 빗나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이것을 죄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식으로 죄를 규정짓는 그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거짓말하지 말라" 라고 해서, "내가 거짓말 한 것이 죄구나" 라고 느낀다면, 그렇게 느끼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즉 죄는 딴 데 있다는 말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라는 것이 십계명에 나오지요?   이 말 때문에 간음했음과 간음을 안 했음이 성립되겠지요.  물론 유대인들이 보기에 말입니다.  제 말이 맞지요.  간음하지 말라고 했으면, 간음한 경우도 있고, 간음을 안한 경우도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나누는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 간음하지 말라 - 이미 너는 간음한 자이다 !!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간음하지 말라는 말은, "이미 너는 간음한 자이다" 라는 뜻인데, 그것도 전혀 모르고 자기가 간음을 안 하면 간음을 한 자가 아닌 줄 알고, 간음을 했을 경우에만 간음한 자 인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맹세한 것은 지키라" 라는 말씀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자기가 지킬만한 것은 맹세하고, 못 지킬 것은 아예 맹세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뭐라고 하십니까?  아예 "맹세하지 말라" 라고 하세요.  왜요?  맹세를 하나 안 하나 모두가 다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에 저촉이 되어 있고, 누구나 죄인인체 태어나기 때문에 말입니다.

◈ 죄가 아담을 이용해서 확산시켜 나갔다 !!

그게 어떤 의미에서 우리 개인의 잘못이 아니고, 우리 조상 아담의 죄가 전수되어 그렇습니다.  아담이 죄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고, 죄가 아담을 통해서 확산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이 말도 굉장히 어려운 것인데, 다시 말씀드립니다.  아담이 죄를 전수한 것이 아니고, 이것은 기존 조직신학이 하는 이야기이고, 죄가 아담을 이용해서 자기 죄를 확산시켜나간 것입니다.

◈ 로이드 존스 - 죄를 인격적으로 봐야 !!

로이드존스 목사는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그가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죄를 인격적으로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죄를 인격적으로 보지 않았어요.  죄를 짓는 주체자가 인격자지 죄는 인격자가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 라는 말이 있지요.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러면 죄라는 글자를 써놓고 때려야지 왜 죄인을 때립니까?  세상 법에서 죄란 것은, 어떤 사람의 행위가 법에 어긋났을 때 그것을 죄라고 보는데, 이게 세상 지혜에 속한 죄의 개념인 것입니다.

◈ 뭔가 '불안하다' 라는 자체가 자기중심에서 본 잘못된 죄관에서 !!

유대인들도 마찬가지고 우리들도 마찬가지예요.  만약 제가 조금 전에 길을 가다가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경찰이 부르는데 도망쳐서 이곳에서 강의하고 있다면, 그래서 이 강의장에 그 경찰이 찾아와서 벌금고지서를 내민다면 지금 강의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경찰이 오기 전엔 당당하게 강의했는데, 경찰이 오니까 불안하고 그렇게 되는데, 불안하다는 자체가 자기중심에서 본 잘못된 죄관에 익숙해져서 나온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신문지상이나 방송에서 나쁜 짓을 해서 잡혀가는 사람을 보여주면 신나게 마구 욕을 하지요.  "저런 놈은 당장에 감옥에 넣어야해. 아예 사회로부터 격리를 완전히 시켜야해" 라고, 이렇게 욕을 퍼붓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내가 아무리 못나도, 지금 나는 그런 죄는 안 지었어" 라는 의식에서 나온 태도라는 것입니다.

◈ 죄가 뭐냐? - 자기를 변명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서 튀어나온 것 !!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의식에서 나오는 모든 사고방식 중의 하나로서 "죄가 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를 변명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서 튀어나온 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죄관을 가지고 감히 우리가 십자가와 하나님의 지혜를  파악할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바로 이것을 알았어요.  제가 조금 전에 이 세상 지혜 속에 뭐가 포함된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세상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 지셨다" 라는 것도 포함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외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결국에는 "나는 괜찮은 인간이고, 나 이외의 다른 자들은 마땅히 멸망해야 된다" 라는 것인데, 바로 이런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십자가를 이해한다면, 그는 아직도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죄인이구나" 라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십자가를 안다는 말입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색종이를 보이면서 묻습니다.  "이것은 무슨 색? - 빨강 색.  그래. 이건 무슨 색? - 노랑 색" 라는, 이런 것은 가능해요.  그런데 깜깜한 방안에서  색종이를 들고 "이건 무슨 색?" 라고 하면서 묻는다면 아무도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전혀 보이지를 않으니까요.  지금 이 세상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 이 세상 지혜는 자기 자신도 누구인지 몰라 !!

다시 말해서, 세상 지혜는 자기 자신도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 보면 이미 우리는 어둠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하는 행동조차도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까?" 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고, 단지 그 안에서 자기가 자기 중심으로 생각해서 행동하지요.  그러나 그 자체로서는 십자가를 알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사도 바울이 빛을 받았어요.  그래서 비로소 자기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실제로 그의 눈이 보이지 않았지요.  이것은 바로, 사실은 그가 처음부터 아무 것도 못 보는 인간인데, 그 전에는 눈을 떠서 잘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뜬 눈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잔혹하고 핍박하고 다녔지요.  즉 자신은 열심히 하나님의 열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을 만나서 빛을 받으니까, 지금까지 자기가 보았다고 여겼던 모든 것은 소경의 짓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고, 그렇게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그의 눈을 못 보게 만든 것이지요.  물론 잠깐이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 자기 자신이 소경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을 진짜로 아는 사람은 핍박하는 자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경이 되고 난 이후에야 알게 된 것입니다.  

◈ 소경된 자들 - 복음을 핍박하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

다시 말씀드립니다.  소경된 자들의 특징은, 반드시 복음을 핍박하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에 대해 반발하고, 복음을 싫어하고, 십자가에 대해 거부하는 자들은 어두움에 빠져있는 자라고 여기시면 틀림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둠에 속했을 때 나타난 현상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 믿는 자들을 미워하고 싫어해서 가두고 죽이고 했지요.  바울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서 예수를 핍박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있는 자라 할지라도, 십자가를 거부하는 자들은 모두가 다 똑같이 어둠에 놓인 자들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바울처럼 행동에 나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평소에 인격적이고 순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복음만 이야기하면 그의 본색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둠에 있는 모든 인간이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내가 과연 그리스도인인가?" 라는 의문이 생길 때,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 성령이 너희 위에 있는 줄 믿어라" 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일을 잘못 처리해서가 아니고, 복음 때문에 난데없이 설움 당하고, 미움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겪을 때에는, 성령이 너희 가운데 임한 줄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전서 4장 14절에 나옵니다.

(벧전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피곤하시겠지만 조금만 더 해봅시다.  그러면 세상 지혜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기적이 일어날 때 하나님이 계시다고 인정하지요.  고린도전서에 보면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하고, 헬라인들은 지식을 원하나 내가 전할 것은 십자가 밖에 없다"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에는 해당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기적과 그들이 생각하는 지혜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 십자가는 이 세상 지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그러니까 이 십자가는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유대인들이 구약을 보는 눈과 십자가는 연결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그리고 세상의 모든 지혜와도 연결이 안 되지요.  이렇게 세상 그 무엇과도 연결할 수 없는 십자가를 설명해야 하니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입니까?  

구약에서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 이런 것이 기적이잖아요.  이런 기적과 연관해서 십자가도 기적이라고 하면, 이것이 연결됩니까, 안 됩니까?  이것은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기적이 아니고 자연적인 죽음이지요.  그냥 로마 정권에 대항하다 죽은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세상 기적과 연결되지 않는 십자가라고 해야, 오늘날 복음을 아는 사람들이 그저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홍해 같은 기적과 십자가를 연결시키면, 십자가 믿는데 왜 병이 안 낳느냐는 둥, 십자가 전하는데 왜 교회부흥이 안 되느냐는 둥, 이런 식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요구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십자가라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기적관에 근거한 십자가이기 때문에, 이것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그 십자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말하는 취지를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은 유대인이 보기에는 자연스런 죽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그렇게 십자가에 사형 당한 사람은 한 둘이 아니잖아요.  

◈ 김용옥 같은 자를 있게 하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

김용옥 교수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예수란 사람은 별것 아닌데, 갑자가 웬 미친놈인 사도 바울이라는 작자가 나타나서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까불어대니까, 그 신비로운 소리에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해서 만들어진 것이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얼마나 솔직한 사람입니까?  그러니 이런 김용옥 같은 사람이 있게 하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대부분이니 말입니다.  교회 내에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우리 손에 잡히는 기적이 아닙니다.  '에라스무스' 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빈정대면서 하는 말이 "예수를 믿는다고 기적을 바라나? 이 바보들아, 그렇다면 예수님 살아 계실 당시에 예수님과 같이 먹고 자고 했던 제자들은 신비에 사로잡혀 살았겠네. 예수님 시골 마을 목수의 아들이고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다" 라고 말입니다.

◈ 진짜 기적은 십자가를 아는 것 !!

여러분!  기적이란 십자가를 아는 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오로지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경건치 않은 우리들이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된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것이 곧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기적을 연관시킨다는 것은 철학의 함정, 아니 십자가의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은연중에 구약의 기적과 연관해서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은 사단이 주는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성공한다더라. 십자가를 믿고 병 고쳤다더라' 라고 하니까, 자기도 그런 유혹에 빠져 그런 십자가를 믿는데,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5분간 쉬겠습니다.


2005년 4월 29일  15시 12분 서경수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