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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고린도전서4-3 / 05,03,26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4-3 / 05,03,26

정인순 2010. 10. 11. 11:58

05광주강의(실로암교회) 11 - 고린도전서4-3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gwangju/gwangju050326c.mp3


                                                                

 

 

05,03,26    

강의: 이근호 목사


◈ 예수님의 기적은 역사적 관점을 고발 !!

세 번째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었는데, 그 기적은 예수님 관점에서는 묵시적 기적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야, 하나님이 우리 소원을 들어 주셔서 역사적 기적을 허락하셨구나" 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기적은 역사적인 것이 맞아요.  실제로 일어났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 기적은 역사적 관점을 고발하는 기적이에요.   즉 "너희들이 마음속으로 품고 있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연결 고리가 아무짝에도 쓸데없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차원에서의 기적이란 말입니다.  

만약에 기도할 때마다 방언이 나왔다면, 처음에 기도했는데 방언 나오고, 두 번째 기도에서도 나오고, 세 번째 기도해도 방언이 나오고, 열 번 기도해서 열 번 다 방언이 나왔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기도했는데 방언이 안 되더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방언과 방언을 연결해서 하늘로 도달하려는 이것이 열 한 번째부터 되지 않으면, "그럼 나는 지옥가나?' 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요.

"병이 나서 기도할 때마다 아픔에 완화되더라. 또 기도하니까 고통에 멈추더라. 그래서 계속 기도하는데 열두 번째 기도할 때는 응답이 안 되더라. 나, 신앙이 떨어졌나?" 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신앙을 북돋우기 위해서 기도원에 가서 배터리 충전을 좀 해야 합니까?  이런 것이 바로 착각입니다.

이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질문자 : 목사님, 뭐 좀 물어봅시다.
이근호 : 예, 물어보든지 꼬집어보든지 하세요.
질문자 : 어떻게 묵시에서 역사 속에 있는 사람을 건져내는 능력이 나옵니까?  

우리가 과거를 생각하고 현재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고 현재를 생각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못 벗어나는데, 그러면 실제로 우리의 구원은 역사에서 안 나오고 묵시에서 나온다면, 묵시가 도대체 어떤 힘을 가졌기에 역사 속의 우리를 달랑 들어서 건져낼 수 있겠느냐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궁금증이 되겠지요.  즉 "묵시에서 어떤 일이 있었기에, 역사 속의 우리가 구원될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찾는 것이 처음이지 싶은데, 고린도전서를 한번 찾아봅시다.  1장 18절을 보겠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믿는 것은 너희들이 알아서 다 믿어라" 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 능력 자체가 어디에서 나옵니까?  오직 십자가에서만 그 능력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말입니다.

◈ 십자가는 마징가 젯트의 레이저 광선 !!

예를 들어서, 레이저 광선이 마징가 젯트에서 나오지요?  마징가 젯트가 우리를 향해 레이저 광선을 쏠 때 "야, 이 능력이 대단하네" 라고 느끼는 것처럼, 십자가가 마징가 젯트라는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쏩니다.  이 능력에 우리가 맞을 때, 그 때부터 우리는 죽은 자가 되고 묵시적 존재가 되지요.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렇다면, 그 묵시적 능력이 우리 쪽에서 나온 능력이 아니라, 어떻게 그쪽에서 우리를 쏘며 우리를 완전히 구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게 좀 어려워요.  오늘 2시간 잘 견디셨는데 마지막 조금만 더 견디시기 바랍니다.  한 30분만 더 참으세요.

마징가 켓트에서 레이저 광선이 나옵니다.  그래서 인간을 쏘고 하는데, 여기에서 마징가 켓트는 개인이고, 개인의 그 능력이 우리에게 미치고 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러나 이 사고방식이 잘못되었어요.  질문 자체가 성경 내용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에는 뭐라고 되어 있는지 찾아봅시다.  고린도후서 3장 16절에 보면,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라는 말씀이 있어요.  어디로 돌아가야 수건이 벗어집니까?  주께로 돌아가야 수건이 벗어진다고 했지요.  

(고후 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이게 무슨 의미냐 하면, 모세가 4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산에서 내려왔어요.  산 위는 무슨 존재입니까?  묵시적 세계 아닙니까?  즉 "묵시적 세계에 있던 사람이 역사적 세계에 들어왔을 때 제대로 만나겠느냐, 안 만나겠느냐?" 라는, 이것을 따지는 것입니다.  제대로 만납니까, 못 만납니까?  

만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모세의 얼굴에는 거룩한 광채가 비취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 광채는 마징가 젯트가 쏘는 레이저 광선이라는 말입니다.  이 거룩한 광채는 사람을 죽입니다.  왜 거룩한 광채가 사람을 죽이는가 하면, 세상은 너무나도 더럽고 속되기 때문에 거룩 앞에 속됨이 버텨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세계에 대해 인간은 산 체로 버틸 수가 없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지요.  그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놓고 야곱이 하는 고백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났는데 세상에 내 목숨이 붙어 있다니, 놀라운 축복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 장소 이름이 뭐냐 하면, '브니엘' 입니다.  이 브니엘이 뭐냐 하면, "휴유, 살았다" 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히 하나님과 직접 대면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있다니, 이건 놀라운 은총이야!" 라는 것, 이게 바로 브니엘인 것입니다.  

◈ 하나님을 만난 모세 !!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왜 있는가 하면, 창세기 3장 23절에 보면, 인간은 생명나무에서 추방된 상태에서 만약에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거기에는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고 있는 천사가 있는데, 그 천사에 의해 생명나무 근처에만 가도 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올라갔어요.  그리고는 하나님의 거룩한 묵시적 광경을 받아 내려오니까 사람들이 그 모세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 광채가 겁이 나서.  그렇게 되면 모세와 사람들이 영원히 격리되니까 모세가 수건을 가지고 얼굴을 덮었습니다.  

이렇게 수건으로 덮었다는 말은 거룩성을 차단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룩성을 차단시키고 난 뒤에 비로소 모세는 묵시적 존재에서 역사적 세계로의 진입이 가능했습니다.  이 때부터는 모세는 밥 안 먹으면 못살아요.  탕수육도 먹어야 하고, 자장면도 먹어야 하고 말입니다.

산 위에서는 떡이고 뭐고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라는 말을 모세는 다 경험했습니다.  산 위에서 자장면 시킬 필요 없어요.  그리고 천하의 '이창명' 이라도 그곳으로 배달을 올 순 없어요.  거기에는 자장면이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이 주는 생명을 누리기 때문에 더 보탤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 '살아 있음' 자체가 '살아 있음' !!

목숨을 더 보탠다는 것은, 어제, 오늘, 내일을 생각하는 역사적 존재에서는 있지만, 묵시적인 존재는 항상 현재이고, 시간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살아 있음' 자체가 '살아 있음' 이라는 말입니다.  더 살아 있음이나 덜 살아 있음이 없어요.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죽는 것도 없고, 아픈 것도 없고, 그냥 생명 그 자체로 충만한 세계, 거룩과 영광으로 충만한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때가 되어 가기만 하면 됩니다.  미리 가려고 자살하지는 마세요.  주께서 죽이실 때까지 기다리세요.  하늘나라 가기 전에는 이 땅에서 고생은 겪어야 한다고 하셨으니, 환란을 너무 어렵게 여기지도 마시고, 그 환란이 끝나면 우리는 천국에 갑니다.

◈ 김밥을 먹으면서 환란을 겪고 !!

오늘 낮에도 우리는 김밥을 먹으면서 환란을 겪고 했습니다.  김밥을 맛있게 먹는 것이 무슨 환란이냐고 하시겠지만, 거룩에 비해서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기에 환란이라는 말입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그러면 여러분 모두 죽습니다.  죽으면 영원한 안식이 기다리고 있고 말입니다.

모세가 묵시적 세계에서 역사적 세계로 들어올 때에 수건을 썼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개인 대 개인에 의해 누구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모세에 의하면 영역인 것입니다.  어떤 영역 속으로 우리를 잡아당기는 힘이 십자가의 힘이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죽이고 다시 살려서 어떤 영역 속에 우리를 편입시킵니다.  이곳이 거룩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거룩과 세속이 만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거룩은 팔팔한데 세속은 죽지요.  그런데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모세는 수건을 썼고, 그래서 백성과 모세의 대화가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3장 16절 보니까, 주께로 돌아오면 그 수건이 벗겨지는데, 이 수건이 벗겨지면 그 세계는 거룩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세계에 가면 우리는 죽는데, 17절에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에서 자유함이란 말은 안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즉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것입니다.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수건이 벗어지면 마땅히 우리는 그 앞에서 죽어야 하는데 안 죽더란 말이지요.  왜 그런가요?  주의 영이 죽어 마땅한 우리를 "너는 산 자기 때문에 안 죽는 거야!" 라는 식으로 우리를 거룩에 편입시키면서도, 안 죽는 사람으로 거룩에 편입시켰다는 말입니다.

◈ 묵시적인 지붕이 아래층으로 내려앉아 !!

우리는 개인적으로 생명을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넘치는 풀장에 초청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필요 없습니까?  자기 신앙이 필요 없어요.  자기가 개인적으로 따로 가질 자기만의 신앙은 없는 거예요.  자기가 속한 세계만 있으면 되지, 즉 예수 안이라는 세계만 있으면 되지, 자기 개인이 주머니에 소유하고 있는 그런 신앙은 더 이상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묵시적인 지붕이 아래층으로 내려앉아 버린 거예요.  저는 그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 믿을까, 말까?" 라는 것이 아니라, "묵시의 지붕이 내려앉아서 나는 졸지에 죽은 자가 되고, 죽었다가 깨어나 보니, 수건이 벗어지고 영적인 세계 안에 들어와 있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다시 내용을 한번 정리해 봅시다.  묵시적 세계가 어떻게 역사 속에 있는 우리를 구원합니까?  거룩의 능력이지요.  거룩이 오게 되면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죽습니다.  좀 전에 모세 이야기를 했지요.  그런데 수건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면 성령이 우리를 살리는 수건이 됩니다.  

주의 영이 오면 성령이 수건이 되어서 수건을 벗어도 되지요.  그런데 성령 안에서는 뭐가 있다구요?  '자유함' 이란 말입니다.  죽음에서 벗어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 영이 오기 전까지는 안 되는데, 그런데 성령께서 죽은 우리를 거룩에 집어넣는 작업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 주님께서 어떠한 고난과 어떠한 희생을 !!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성령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뜻으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주님께서 어떠한 고난과 어떠한 희생을 치렀느냐?" 라는, 이 점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 레이저 광선을 받아 구원되었다. 좋다. 신난다. 그럼 안녕히" 라고 하면서 도망치지 말고, "분명히 죽어야 되는데 왜 살았는가?  아하! 나 대신 고난받은, 내 대신 희생하신 그분 덕분에, 나는 죽어야 되지만 주님 안에서 용서를 받아 산 자가 되었구나" 라고 하는 주님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능력이 임했다고 할 때, 이 능력은 그냥 강압적인 물리적 힘이 아니라, 고난과 희생에서 나온 거룩이 우리에게 적용됨으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5장 19절과 21절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고후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저주의 원자폭탄이 날아오다가 어디론가 !!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났지요?  뭔가 저주가 날아오다가 엇길로 샜지요.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땅히 저주의 폭탄이 날아와야 하는데, 저주의 원자폭탄이 날아오다가 어디론가 새버렸어요.  어디로 갔는가 보니까, 예수님께서 그 저주를 거둬가 버렸어요.  그 이후에 날아오는 것은 사랑의 폭탄이 우리에게 덮쳤어요.  이렇게 되어 우리는 "주여! 우리는 주님 은혜로 구원받았군요" 라는 기쁨의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살았습니다" 라고 하는 그 감격이 우리에게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 용서에 의해서 나오는 것을 가지고 바울은 '성령의 열매' 라고 했어요.  이미 용서함을 받았기에 그 용서 받은 자에게서 나오는 처신, 이것이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 용서받음 속에 있으면, 그 자체가 온유이고 화평 !!

그런데 만약에 용서를 놓쳐버리면 모든 행동이 억지가 됩니다.  성령의 열매와도 비슷한 것 같은데 그게 아니고, 모두가 억지로 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받음 속에 있으면 그 자체가 온유이고 화평인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큰아들은 내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에 해남에 있는 땅 200마지기를 준다" 라고 할 때, 둘째 아들이 하는 말이 "저는요?" 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너는 평소에 예수를 믿었고, 그래서 천당에 갈 건데 그런 것이 뭐 필요하노" 라고 할 때, 섭섭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지요.  미래에 땅 200마지기 중에 100마지기는 내가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그 기대가 무너졌거든요.  이럴 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주님, 왜 이렇게 일을 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땅 100마지기와 용서를 바꿀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용서받을 때에 땅 100마지기를 바쳐서 용서를 따냈습니까?  우리가 용서받은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저주를 대신 다 받으셨기 때문에 값없이 우리가 용서를 받았잖아요.  챙길 때는 공짜로 챙겨놓고서 우리가 무엇 때문에 화를 냅니까?  땅을 바쳐 용서서 받은 것 아니잖아요.  

가만히 있는데 알아서 다 용서해 주시고, 시험도 안 쳤는데 나중에 '축 합격' 라고 하면서 통지서가 날아왔다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연필로 이름 쓴 것도 없는데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어요.  이렇게 구원이 이뤄졌는데 얼마나 감사합니까?

따라서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한 미움 같은 것이 없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형님 땅 100마지기만 주세요" 라고,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예요.  말이 좀 이상하지요?  왜 제가 땅 100마지기를 포기하란 말이 아니고,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감사와 온유와 화평으로 하라고 했잖아요.

만약에 용서를 받은 것이 없으면, 칼을 들고 "형, 너 입 닦을래" 라고 하며 설치겠지만, 이미 용서를 받은 상태에서는 웃으면서 "형님, 나도 좀 나눠주세요. 100마지기 못 주겠거든 50마지기만 주세요" 라고, 이렇게 나올 수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기분 좋게 나오면 형님도 즐겁게 좀 나눠주겠지요.  

이렇게 되면, 천당도 가고 땅도 좀 받고, 그 얼마나 좋은가 말입니다.  그게 아닌가요?  "내가 주님의 용서를 받았는데, 땅 100마지기는 포기해야지" 라고 나오면, 자기 본심과 달라서 두고두고 자기 의인 것처럼 자랑하게 되요.  사실은 땅을 계속 아까워하면서 말입니다.  

흔히 목사 사모가 이런 말을 하지요.  "당신은 복음 좋아서 그렇게 살지만, 아이는 어떻게 키우느냐? 곤란한 문제는 내게 다 미뤄놓고, 자기는 거룩한 주의 종이라고 하고, 얘는 같이 만들어놓고 책임은 내가 다 져야하고, 무슨 이런 팔자가 다 있노?" 라고 말입니다.  사모님들 정신병에 걸리겠지요?

그리니까 목사들이 "나는 복음 아니까 돈은 안 밝힌다" 라고 거짓말하지 말고, 챙길 때는 챙기고 어려울 때는 아쉬운 소리도 하고, 이렇게 솔직하게 나오면 그게 좋은 거예요.  목사 본인도 주님의 용서로 구원을 받아놓고, 마치 자신은 훌륭한 사람이어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점잔은 척 하면, 그게 역겨운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이 땅에 오실 때, 그냥 달랑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체 내에 묵시적 원칙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땅에 있는 자는 모두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왜요?  땅에 있는 것은 다 세속이고 묵시는 거룩이기 때문에, 생명나무 있는 쪽에서 이 저주받은 쪽에 오면 다 죽게 되어 있어요.  다만 구원될 사람은 예수님을 증거해야 하기 때문에, "왜 우리는 마땅히 죽어야 하는가?' 라는 것를 보여주기 위해서 계속 사건이 떠지는 것입니다.  

무슨 사건 말입니까?  '묵시와 역사의 만남',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일어나는데, 일어날 때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라는 것을 느끼면서, 이 사람은 뭘 증거하는가 하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뜻입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주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속이지 말고, 부족하다 못해 악랄하기까지 한 우리를 대신 가로막아 주시고, 가로막아 모든 저주를 한 몸에 받아 십자가의 모진 매와 고통 속에서 우리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피까지 흘리신 그 피를 모독하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5년 5월 19일  10시 28분  서경수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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