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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강의 6-1 / 2005년 5월 27일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고린도전서

강의 6-1 / 2005년 5월 27일

정인순 2010. 10. 11. 13:22

광주 강의   2005년 5월 27일  

이근호 목사 강의  6-1

녹취:서경수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gwangju/gwangju050527a.mp3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gwangju/gwangju050527.hwp

 

 고린도전서를 공부하시면서 이것 하나 아시면 됩니다.  
사도 바울이 우주 전체의 원리와 법칙을 다 알았습니다.  

보통 종교는 ‘내가 이것을 믿음으로 내게 어떤 이득이 있느냐’ 하는 것을 챙기는데, 사도 바울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 우주 전체가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알았기 때문에 자기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는 별 큰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이 우주 전체를 다 알았기 때문에 자기 삶에 있어서의 갖가지 일어나는 우환이나 변화, 현상 그것 때문에 주눅 들거나 낙담하거나 고민하거나 두려움 이런 것으로부터 해방됩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뭐냐 하면, 구약은 항상 장소적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애굽에 있을 때에는 이런 식으로 일하시지만 장소를 옮겨서 가나안 땅에 가면 하나님이 달리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지리적, 장소적으로 하나님께서 달리 적용하시고 효력을 주십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오면 내가 서울에서 사나, 대전에서 사나, 이스라엘에 사나 상관없이 하나님은 동일한 원리 원칙으로 일하십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신약은 전 우주적입니다.  우주와 우주 밖 이런 관계가 신약이고 구약은 하나의 교육적 관점으로 가르치기에 이쪽 장소에는 이런 효과, 저쪽 장소에는 저런 효과로 가르친단 말이지요.  

예를 들면, 지성소에 들어가면 죽잖아요.  그런데 사실 지성소에 있는 땅이나 성소 밖의 땅이나 다른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거예요.  성소에 함부로 들어가면 죽는다고.

그런데 만약 신약인 지금 예루살렘에 성막 지어놓고 그곳에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 일 없지요.  왜냐하면 지금은 특정 장소에 저주가 온다든지 특정 장소를 밟으면 축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우주 밖이거든요.  이제 우주 속에서는 장소적으로 거룩이라든지 저주라든지 그런 구분은 없단 말이지요.

제사장은 옷을 제대로 챙겨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정한 옷을 입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반팔을 입든지 긴팔을 입든지 상관없어요.  우주의 원리가 공간과 시간을 초원한 원리가 현재 우리에게 퍼부어지고 있기 때문에 신약시대에 복음을 안다는 것은 이러한 자기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 이미 극복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서울 살다가 대전으로 이사해서 사는데, 내가 서울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하셨는데 이제 대전으로 왔으니 이제 어떻게 역사하실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구약적인 것입니다.  서울에서의 우주의 원리나 대전에서의 우주의 원리가 다 같습니다.  우주에서 보면 대전이나 서울은 바로 옆 동네거든요.  우주 안에서는 다 같은 원리의 적용아래 있기에 내가 서울에 사나 대전에 있으나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집에 있으나 병원에 입원해 있으나 아무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 교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병원에 있으면 저주고, 퇴원해서 집에 있으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원리를 모르는 것이 저주고 우주의 원리를 아는 것이 축복인데, 자기 신상에 일어나는 어떤 일을 가지고 축복과 저주를 구분하는 나약함을 드러내지요.

제가 오늘 이렇게 진짜 복음을 안다는 것은 우주 전체의 원리는 아는 것이고, 사도 바울이 그런 쪽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오늘 공부하려고하는 고린도전서 2, 3장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2:14), 육신에 속한 사람(3:1), 영에 속한 사람(2:14) 이렇게 세 쪽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3절에 보면,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해석할 때, 옆에 집사, 누구 장로, 어떤 목사 이것 가지고 따지지 마시고, 이 본문을 해석을 때는 사도 바울이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느냐 하는 것을 먼저 챙겨야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우주의 원리를 다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대로 한다면 결국 영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사도 바울처럼 우주 전체의 원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고, 그런 영적인 사람은 자기 신상에 일어나는 일 가지고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 자기 개인적인 변화에 대해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말할 때, 구약 성경과는 달리 우주 전체 원리를 알기 때문에 설사 이 시대에서 자기가 굶어 죽어 객사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축복된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는 그 원리를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 사람들이 자기 신상과 결부된 자질구래한 일들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지만 이런 것들은 신약의 엄청난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들을 뽑아 세우신 것이기에 그 자체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 없단 말이지요.    

구약의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다.’ 고 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우리도 큰 일이 닥치면 다윗처럼 당당하게 이겨야 합당한 신앙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받쳤다는 내용이 있지요.  그 말씀 보면서, ‘나도 내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 하나님께 받쳐야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육신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구약으로 봐서 비로소 이해가 되는, 구약의 틀에서만 이해가 되는 사람들이에요.  갈라디아서에서는 이런 자들을 법에 매인 사람이라고 하는데, 법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육신에 속한 사람들인데, 이 법이란 것은 법을 행사하는 주체자가 있게 마련이고, 이 법을 지키면 복이고, 이 법을 못 지키면 저주니까 현재 내 신상에 이런 나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니까 내가 법을 잘 못 지켰기에 나타난 현상이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 자체는 여전히 자기중심이지요.  

그런데 영적인 사람은 뭐 중심이다?  우주 중심이에요.  우주적으로 보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주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이미 끝난 이야기란 말이지요.  이것은 구약 시대에 하는 이야기지 신약에 오면 내 인생 내가 관리해서 구원 받는 것 아닙니다.  

관리자가 따라 있어요.  관리자는 주님이에요.  고린도전서에 ‘우리는 값을 주고 산 것이 되었으니 이제 내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다.’고 나와 있어요.

우리 아버지가 건강이 좋지 못하셔서 병원에 계시다가 오늘 퇴원하셨습니다.  노쇠해서 계속 병원에 계셔봐야 특별히 좋아질 것도 아니고, 경제적 부담도 있고 해서 서둘러 퇴원하도록 했습니다.  퇴원시키면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 이제 가실 준비 하셔야 합니다.  다시 병원 찾을 생각 마시고, 지금까지 산 것도 은혜인줄 아세요.” 하면서 단호하게 얘기했습니다.  더 이상 자식이나 가진 재산을 의지하지 않도록 사전에 조치를 취했습니다.

80년 사신 것도 대단히 장수하신 것인데, 아버지가 죄 지어서 아픈 것이 아니고, 마땅히 자연적인 현실로 받아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이런 얘기를 했어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몸을 회수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 몸을 회수하는 것입니다.” 라고.  

그런데 사람들은 오랫동안 익숙해진 이 몸이 자기 것인 냥 생각하지요.  이것을 저는 지난 월요일 강의에서 ‘분여’ 라고 설명했어요.  ‘분여’는 수제비할 때 밀가루 덩이에서 일부 조각이 냄비 안에 떨어지잖아요.  이것을 ‘분여’ 혹은 ‘분배’라고 하는데, 주님의 속성이 일부가 떨어진 것이 우리에요.  그래서 결국 합치되면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여되는데 일부는 귀가되고 일부는 발이 되는데, 발이 귀더러, 또는 눈이 발더러 내가 너보다 더 귀하다든지 너는 내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뭘 이야기하는가 하면, 이 사실도 역시 구약이 아니고 신약에 와서 밝혀진 사실이지요.  구약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장 신분 따로 있고, 선지자 신분 따로 있고 다 따로 있어요.  이 때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선지자나 제사장은 나보다 더 높네.’ 이렇게 되겠지만, 신약에 오게 되면 너희들이 거룩한 제사장이요 마지막 선지자라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 몸 안에서 따져보면 각자 그리스도의 분여로서, 지체란 말을 쓰기는 하는데 저는 이 표현이 쓰기가 싫어요.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썼던 말을 또 사용하면 타성에 젖어서 의미가 새롭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체란 말을 하지 말고 ‘사지’라고 합시다.  사지 알지요.  팔, 다리.  우리는 주님의 사지입니다.  손가락이고 발가락이에요.  이 말은 결국 내 몸이 내 몸이 처음부터 아니었어요.  그냥 아닌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아니었는데, 우리는 가정교육을 통해서 내 몸은 내 것이며, 네 몸은 네 것이니까 내 몸과 네 몸 누가 더 괜찮은 몸인가 한번 겨뤄볼까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 졌습니다.

그것을 깨부수는 것이 우주적 관점입니다.  콘첼만이나 케제만 등 많은 사람들이 우주적 관점으로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경을 볼 때 우주적 관점으로 보았어요.  우주적 관점으로 보면, 우주를 지배하는 것은 우주 밖에 계시는 주께서 우주를 지배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 속의 ‘나’가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그분의 ‘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 밖에 계신 예수님의 사자로서의 ‘나’가 되는 거예요.  

나무 송판이 있는데 여겨다 못을 박을 때 못이 튀어나오지요.  그러면 이 송판 밖에 있는 것 말고 이 송판과 같이 있는 이 철 못, 이것은 나무에 속합니까 아니면 못 재질입니까?  못 재질이잖아요.  이건 이해되지요?

지금 우주적 관점으로 보면 나무라고 하는 우주 안에 섞여 있는 그리스도의 못으로 박혀 있는 입장이란 말이지요.  신약 성경의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 베드로의 글을 보면, 갈수록 감탄합니다.  이렇게 깊은 뜻이 있냐고.  그냥 읽으면 금방 읽지요.  그런데 새겨보면 엄청난 것이 담겨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민할 권리도 없고 자격도 없는 인간들이에요.  우리는 고민을 만들어서 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일을 가지고 고민을 하는데, 주님께서 ‘네가 어떻게 이 땅에서 고민할 자격이나 있다고 착각하느냐?’고 하십니다.  고민과 걱정은 우리 권한이 아니에요.  세상의 모든 불평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나도 좀 고민합시다.” 이렇게 나오니까 그런 일이 생기지요.  일단 고민거리부터 만들어 놓고 고민 해결한다고 낑낑거리고.  모든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이 이거에요.  

아침에 일어났다.  고민거리 만들고, 하루 종일 고민거리 해결하려고 설치다가, 밤에 잘 때는 잊고 잠들고.  또 아침에 일어나면 또 고민거리 만들고.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고민하는 것이 얼마나 금방지기 짝이 없는 거예요.  네가 뭔데 고민을 해.  박힌 못인데.  박힌 못이 어떻게 목재 재질과 잘 어울려보겠다고 시도하느냔 말이지요.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분여된 존재로서 예초부터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인데, 우리 아버지한테 가서 이 말을 했어요.  ‘회수’ “주께서 자기 것 회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우끼는 것이 두 사람 다 주님께 붙잡혀 끌려가면서 내가 잘랐어. 네가 잘랐어. 이렇게 다투고 있단 말이지요.  
‘이것이 아니구나!’를 깨달은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복음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강조한 것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 의가 완전히 분쇄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기 의가 박살나야 한다는 것은 사도 바울도 어찌할 수 없어요.  그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동안 쌓은 마일리지가 있잖아요.  이게 큰 문제에요.  교회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마일리지가 쌓이고 직분 맡으면 맡을수록 마일리지 쌓이고, 자기 의가 계속해서 누적이 되지요.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이 마일리지가 그 안에서 물처럼 녹아 없어져 버리고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기 의에 대한 누적 점수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주를 자기 의 중심으로 봤어요.  나는 너보다 낫다는 그 재미로 온 우주를 생각했습니다.  

이걸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자연조건이라고 하는데, 현재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조건 밖에 없습니다.  자연적 조건과 관습적 조건입니다.  자연적 조건을 관습적 조건으로 묶으려는 이것이 바로 인간의 문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것을 묶은 것이 법이고, 이 법의 여러 가지 양상 중 하나가 과학이지요.  
봄 다음에 여름 온다.  더위를 대비하자.  물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이것을 이용하면 힘이 생기겠다.  이것이 자연적 조건을 문화적 조건(관습)으로 전환해서 발전시키는 이것이 인류 역사의 발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뭐가 보이느냐 하면, 자연적인 조건과 관습적인 조건 이 두 가지를 가지고 다시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적을 베풀었다.  그 다음은 이 이적을 내가 묶어 내야지요.  묶어 놓으려면 율법이 있어야지요.  율법 가지고 똑 같은 이적을 되풀이해서 만들면 하나님도 내 손 안에 있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바울되기 전 사울 때의 생각입니다.

제가 자연적 조건, 관습적 조건 이런 어려운 표현을 썼습니다만 결국 우주의 중심은 누구예요. ‘나’ 중심으로 우주를 보는 거지요.  나 중심으로 우주를 보았을 때 우주는 뭐가 있다?  자연이 있음.  별이 있음.  달이 있음.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이용할까? 이것에 대한 느낌, 감정, 에너지의 이용 이런 것들이 대한 인간들의 결집된 지혜, 과학이 있겠지요.  이 두 가지가 전부에요.  인간의 모습을 이 보다 더 생생하게 나타낸 것이 없어요.  이것이 인간의 전부에요.  

나 중심으로 보는데, 저기 꽃이 있다.  저 꽃은 시들지도 않네.  조화를 만들어 놓은 거지요.  이것은 실제 있는 자연적 조건을 인간의 누적된 기술을 동원해 조화를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조화를 만들 이유가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주적 원리를 알고부터는 자연적 조건도 아니고 관습적인 법도 아니고, 십자가 앞에서 나는 그냥 죽어야 마땅한 자란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슬슬 톤이 올라갑니다.  고함  친다고 믿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자연적 조건과 관습적 조건을 내 것으로 만드는 나.  이런 내가 오직 십자가 앞에서만 죽어야 마땅함을 아는 순간부터 나는 걱정할 권리도 없고 고민할 자격도 없고 나는 이 세상에 대해 두려워할 입장에도 서 있지 않는 것입니다. 왜, 송판에 꽂힌 못이기 때문에.  

나는 우주적 원리가 담겨있는 매체로서 박혀있는 못이기 때문에, 주님의 분여로서, 주님의 사자로서, 혹은 지체로서, 주님의 신체 일부로서 내가 우주에 박혀 있기 때문에 나에게 걱정이나 염려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도 바울에게 처음 나타날 때, ‘주여 누구십니까?’ 물을 때, ‘나 예수다.’ 이렇게 하시지 않고,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행22:8)고 하셔서, 나는 옛날에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것을 강하게 재확인 시킵니다.  세상이 이것보다 더 화들짝 놀랄 일이 없지요.  

며칠 전에 이웃동네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후에 거리를 지나는데 어떤 낯익은 할아버지가 지나가시는데 누구시냐고 물으니까, ‘사흘 전에 죽었던 할아버지야.’ 라고 한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졸도하지 싶어요.  

진짜 맞습니까?  내 손에 못 자국을 봐라.  내 옆구리에 창 자국을 봐라.  맞네요.  주님!

이런 미친 인간들이 모여서 교회가 됩니다.  허깨비를 보는 자만이 성도가 될 수 있어요.  허깨비, 허무, 허탈, 허씨는 다 나오라고 하세요.  이것이 남들 보기에는 헛것으로 보이지만 성도에게는 절대적인 힘, 최후의 힘으로 등장하지요.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최후의 힘을 느끼는 사람은 세상의 어떤 힘 앞에서도 기죽지 않습니다.  교회 내에 어떤 세력이 핍박을 가해도 이미 최후의 힘을 품고 있기에 기존의 힘이 더 이상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지요.    

지금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유적지에 가 보세요.  먼지만 있고, 장사꾼들만 있을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 달린 현장에 가보고, 거지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구걸하는 것을 보면서 ‘아! 신을 믿는다는 것이 허망한 일이구나.’ 라면서 신앙을 포기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영화 [Kingdom of Heaven]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십자군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이 예루살렘이 거룩한 장소인줄 알고 가 보니까 그곳에는 거지들만 있고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요.  십자가도 없고 먼지 나는 빈 언덕만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신이란 인간이 조작한 것이지 진짜 이곳에 하나님이 역사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느낀 것입니다.  제대로 본 것이지요.

하나님의 역사는 어린양의 보좌에서 나오는 보이지 않는, 힘이 안 되는 힘, 힘이 될 수 없는 힘으로 다가온 사람만 궁극적인 힘으로 느끼지 다른 사람한테는 전부 허깨비요, 허구, 허탈, 허망이지요.

그래서 이런 것으로는 장사가 안 되니까 목사라는 인간들이 육에 속한 자를 위해서 구약적으로 ‘이렇게 했더니만 잘 되고, 이렇게 했더니만 이런 복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결국 자연적인 조건을 관습적인 조건으로 붙잡아 둘려는 십자가 모르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알고부터는 이런 것에서부터 벗어났어요.  보이지 않는 힘을 최후의 힘으로 본 거예요.  이것이 궁극적인 힘, 구원의 힘.  이것을 가지고 고린도전서에서는 십자가의 능력이라고 했지요.  구원이란 것은 십자가가 만들어내야 그것이 구원이지 인간이 구원 얻겠다고 나서는 것은 구원과 무관한 것입니다.  구(9)원이 아니라 5원도 안 됩니다.  오늘 개그가 안 되네.

지상에서 구원해 달라고 아무리 설쳐도 그렇게 해서 구원 안 됩니다.  구원은 우리가 요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지신 분이 자기 능력을 발휘한 현장에서만 구원이란 현상이 일어납니다.  십자가 지신 분의 고유 권한이지 우리가 달라고 요청할 입장이 못 됩니다.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산자는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산자가 살려내는 영을 발휘할 때만 죽은 자가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살려내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강의는 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 영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 이것을 이야기하려면 제일 먼저 영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합니다.

우리교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보면 지난 월요일 강의한 내용을 장병엽 집사님이 어려워서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에 대해 답변했는데 답변이 더 어려워졌어요.  무슨 소리인지 알 듯 말듯하고.  

제가 이렇게 답변을 했는데, 여러분도 좀 생각해 보세요.
질문을 간단히 줄이면 ‘영이 뭡니까?’ 라는 질문을 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영이 뭡니까?’ 할 때, 제가 답변하기를 “하나님께서 아직도 창조 원리를 발휘하는 관계가 영입니다.” 이렇게 답변했어요.  괜히 답변을 해서 더 어려운 질문만 양산하게 생겼는데,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어렵게 답변을 했는가 하면, 사람이 자기가 육체라는 것을 알지요.  근육질.  이것을 구약에서는 ‘바사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바사르’는 뼈와 뼈 아닌 그 무엇이 인간의 모든 행동의 증거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도 어려운데, 히브리어 ‘바사르’란 것은 ‘살점’이예요.  우리가 살점이라고 하면 뼈도 있지.  뼈는 안 보이고 살점만 보이니까 인간은 살과 뼈로 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히브리인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실제로 외부에 보이는 살점 덩어리가 움직이니까 살아있는 거예요.  이렇게 움직이고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작용해서 움직이는 거예요.  

뼈는 언제 드러나는가 하면 죽을 때만 드러나는 거예요.  히브리인들이 이렇게 보는데 이것이 맞는 이야기 아닙니까?  사람이 죽고 독수리가 와서 살점 뜯어먹고 남는 것이 뭡니까?  뼈지요.  뼈가 드러났다는 것은 그 인간은 산 인간이 아니라는 말 아닙니까?  그래서 히브리인들의 생각이 맞잖아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골자기에 뼈들이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까 거대한 군대가 되었잖아요.  결국 뼈가 있다는 말은 뭔가 하면, 그 사람은 산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온기와 능력과는 단절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다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니까 뼈에 힘줄이 붙고 살이 입혀지면서 거대한 군대가 되잖아요.  

그래서 사람이 뭔가 하면, 살점이 있어야 사람이고, 그것이 신약성경에서는 이것을 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영이란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아직도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고, 육과 영이 합쳐져서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전혀 터무니없는 관점입니다.  육과 영으로 합쳐진 인간이 죽으면 영은 남고 육은 없어진다는 이런 관점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인간관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을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아요.  

육 자체도 영이고, 영 자체도 영이고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입니다.  육 더하기 영이 인간되는 것이 아니고 따로 따로도 인간이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해도 아직은 여러분들이 정리가 안 될 줄 압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히브리인 관점은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 받아요.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의 관점은 내가 하나님을 알아서 그것 챙겨서 구원 받아요.  그러니까 정 반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서 그 지식으로 구원 받는 이것은 하나님이 원리 생각했던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인간이 죄짓고 난 뒤에 생긴 죄악 된 현상중 하나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걸 한 몸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현대인들인 우리는 이해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락 이후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두 몸이고 두 사람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몸의 관점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왜 우리에게는 한 몸으로 보이지 않고 두 몸으로 보이는가 하면, 내 몸이 따로 존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내 밖에서 얼쩡거리는 아내는 딴 몸, 타인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내 몸에 아내가 들어올 여지가 없어요.  꽉 찼어요.  내 몸은 나라는 것으로 꽉 찼어요.  내 몸에 타인의 몸이 들어오는 것은 내 몸 자체가 용납을 못합니다.

어떻게 내 몸이 아닌 타인의 몸이 내 몸이 되느냐.  이것은 못 믿겠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못 믿는 것이 당연한 것은, 우리는 이미 범죄한 이후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 몸에 타인의 몸이 와서 비로소 내 몸이 된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니까 인간이 살점 그 자체를 인간이란 말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고, 기껏 이해하는 것이 뭐냐, 내가 있고, 내가 어떻게 타인과 결합해서 한 몸 이뤄 구원 받는다는 이런 관점 밖에 없는 거예요.

결국은 기어이 나는 구원 받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나가 없는데, 죄 짓기 전에는 나가 없어요.  죄짓고 난 뒤에 “누가 선악과 따 먹었느냐?”고 하시니까, “저 여자가 먼저 따 먹었습니다.”라고 해서 그 여자는 나가 아닌 나 밖에 존재하는 그런 타인이 되는 것입니다.  참 어렵다.  여러분들이 이해할 것은 포기했습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부터 비로소 자아의식이 생겼고, 자아의식이 생기면 자아의식 속에 타인의 의식이 못 스며듭니다.  내 밖에 있는 것은 누가되었건 타인이에요.  나는 아니잖아요.  어떻게 여자보고 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이, 나” “나 이리와”라고 하면 “이게 미쳤나” 하겠지요.  멀쩡한 자기를 두고 왜 남을 나라고 하느냔 말이지요.  자기 배우자를 보고 ‘나’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되지요.  

노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도저히 이해가 안 되지요.
제가 이렇게 강의하면서 염려되는 것이, 또 이것을 이해하서 구원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을 이해하겠다는 것은 여전히 이해하는 당사자 나를 중심으로 이해를 시도하겠다는 것인데, 여러분 나는요 이해고 뭐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설교에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만 하나님이 나의 목을 조이고 있어요.  

인 간 : 내가 누구일까?  
하나님: 너는 내가 누구일까 생각할 자격도 없는 인간이야.  에라 죽어라 이놈아!
인 간 : 나는 어떻게 해야 구원 받을까?
하나님: 구원은 너 같은 인간과는 상관없어.  이놈아.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조차도 없는데, 타락하고 난 뒤에는 ‘내가 어떻게 하면 죽어서 좋은 곳에 갈까?’ 생각을 하더란 말이지요.  구원은 우리가 요구할 사항이 아닙니다.  주님이 자기 숙제 하다보니까 나타난 현상이 뭐냐?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었고, 주님은 날 위해 피를 흘렸고, 나는 이제부터 주님의 것으로서(예전에도 그랬지만) 주님을 증거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나 로마서, 기타 바울 서신에 나오는 그 많은 문장들이 이런 복음적인 배경을 깔지 아니하면 전혀 이해가 안 됩니다.  그 한 가지 예가, 사도 바울은 “우리가 너희에게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는 말을 했어요.

바울이 이렇게 선포했으면 오늘날 교회가 뭘 연구해야 합니까?  혹시 우리교회 목사가 전하는 복음은 바른 복음인가 연구해야 할 것 아닙니까?  또 목사는, 내가 전하는 복음 중에 다른 복음이 섞이지는 않을까를 두려워하면서 설교를 해야겠지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사람 끌어 모으기 바빠서 참 복음이고 다른 복음이고 다 관심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간절히 빌면 소원 이뤄진다.’  ‘소원 성취’

이것이 진짜 복음입니까, 다른 복음입니까?  
엉터리 교회들은 이런 질문조차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 따져서 교회 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 물으면 교회 장사가 안 된다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으면, 화들짝 놀라서 ‘아, 다른 복음은 뭘까?  진짜 복음과 다른 복음의 차이점은 어떤 것일까?’를 주의 깊게 살펴서, 이것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고, 이것은 종교꾼들이 전하는 가짜복음인 것을 가르쳐야 할 목사들이, “간절히 빌면 됩니다.  간청하면 뭐가 되도 됩니다.” 이런 식으로 외치고 있으니 원 ---

다른 복음이 뭡니까?  이것을 알려면 사도 바울이 전에는 어떤 인생을 살았는데, 지금 복음을 알고 난 후부터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영적으로 사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 원인은 좀 전에 말씀 드렸듯이 ‘간절히 빌자.’는 데 있습니다.  간절히 빌면 소원 이뤄진다고 할 때, 간절히 비는 주체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간절히 빕니까?  자기가 간절히 빌지요.  여전히 나를 포기 못하잖아요.  옆 사람이 간절히 빌어서 내 소원 이뤄집니까?  예수님이 간절히 빌어서 내가 오늘날 이정도로 살아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는 천만대행입니다.  예수님이 간절히 비는 것은 믿고 싶지도 않아요.  그것은 부도수표에요.  ‘그래 예수님이 간절히 빌어서 기껏해야 내 꼴이 이 모양이야?’  얼마나 하늘을 향해 원망을 합니까?

주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기도한다고 나오지요.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8:25)  
그리고 로마서 8장에도 나옵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주께서 간절히 비시기에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  이런 것은 인간이 오기로 견딜 수 있습니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무지 못 견디는 것이,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이런 것입니다.

주님께서 간절히 기도하신 결과가 뭔가?  밀어먹는 인간으로 만드신 거예요.  거지로.  이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까?  인생 조져놓았어요.  그런데 환란이나 기근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고 했어요.  아주 단정적으로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단정하신 근거가 뭐냐 하면, 내가 간절히 기도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우리 몸이 망가지게 하시면서 까지 그런 기도를 하셨는가?  그것은 ‘바사르’ 영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 몸은 우리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처음부터 아담은 산 영이 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창조 원리가 계속 관여하는 그런 대상이기 때문에 주님의 간절한 기도는 항상 영적으로 모든 것이 눈에 띄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영적인 존재라고 했을 때, 제일 먼저 점검하는 것이 뭐냐 하면, 자아에 대해서 포기했느냐는 것입니다.  자아를 포기하지 않으면 이 자아가 아무리 신비적은 능력을 발휘해도 구약의 ‘바사르’는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의 ‘바사르’는 구약 때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주신 창조 원리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살점가지고 행동하고 있다.  이 행동하는 자체가 내 힘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신 힘이 단절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기 때문에 내가 움직입니다.’ 라는 식으로 구약 성도들이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생각한 적이 없는데 신약에 와서 꼭 출발점을 하나님으로부터 한 것이 아니고 나부터 출발해서 ‘내가 얼마나 영적인 사람이 될 때 구원 받겠느냐’ 라고 생각하니까 이것은 영적도 아니고 개뿔도 아니란 말이지요.  자기 육을 포기 못하는 영이 무슨 영입니까?  이것은 신비적인 것을 탐내는 것일 뿐이지요.

이것이 골로새서에 나와 있는데 한 번 찾아봅시다.  먼저 18-19절 보고, 또 9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2:18-1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과와 권세의 머리시라”(골2:9-10)

사람이 자기 자아를 가지고 자기를 평가하면 신성의 충만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농사지어 가면서 힘들게 살고 있는데 겨우 이 정도야!  남들은 기도해서 복도 많이 받고 하든데’ 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제거 되어야 해요.  

이런 사람들처럼 생각하면 예수님이 목회를 하면 제일 큰 교회, 예수님이 사업을 하면 세계 최대 기업 --- 이렇게 되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서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했어요.  이게 구약에서 말하는 ‘바사르’  영적이란 거예요.  이것이 원래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 존재란 말입니다.

내 안에 신의 충만함이 있는데, 이 자체로도 충만한데 무엇 때문에 남이 혹할 수 있는 신비로운 것을 꼭 추가해야 되겠습니까?  현재 있는 그 자체가 예수님의 신성이 충만하다고 했는데.

자아의식을 가지고 보니까 너무나 싹 말라버렸어요.  러시아에서 호수물이 하루아침에 다 말라버렸어요.  그 물이 어디로 사라졌는가 했더니 바닥으로 다 새버렸어요.  마찬가지로 바짝 마른 강물이 되었지요.  이것을 가지도 유다서에서는 바짝 마른 바다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말은 풍성한데 속을 들여다보면 바짝 타들어가요.  타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논, 밭이 짝짝 갈라지지요.  
신성과 신비를 그렇게 찾는데 평소에 살아가는 것은 불안과 초조와 메마름.  바짝 마른 장작처럼 누가 건드리면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사가 없고 풍성함이 없고 여유로움이 없는, 아침에 일어나서 근심과 걱정으로 일과를 시작하는, 우리는 걱정할 권리조차 없는데 우리 자체가 영인데 이러한 관점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제가 영적, 육적, 육신적 이것을 설명하면서 또 오해할까 사전에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영적, 육적, 육신적이라고 해서 어떤 사람은 영에 분류되고, 어떤 사람은 육신에 분류되고, 어떤 사람은 육에 분류된다고 이렇게 분류시키지 마세요.

세상을 육과 육신과 영으로 볼 줄 아는 그 눈만 있어도 영입니다.  그것을 A반 B반 C반으로 나눠 이것을 고급단계, 이것은 중급단계 이렇게 분류해서 집어넣지 마세요.  이런 것은 주님이 하실 일이지 우리가 할 일이 아닌데, 자기가 이렇게 분류시킨다는 말은 자기가 또 자아를 고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께서 하신다고 믿으면 되는데 ‘나는 이것을 파악해야 되겠어’ 라고 소매 걷고 나서면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예화를 들어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예화를 들어봅시다.  ‘서태지와 아이들’이란 그룹이 있어요.  이 그룹을 미치듯이 좋아하는 A그룹, 그 다음에 약간 좋아하는 B그룹, 좋아 하기는 하는데 큰 관심 없는 C 그룹이 있는데 이들 모두를 다 펜클럽으로 봅시다.  
이것을 누가 결정합니까?  이 등급을 가수들이 결정하면 괜찮은데, 자기들 끼리 A급 B급 나누면 대 혼란이 벌어집니다.  B급에 있는 아이들은 자신이 A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자기 주체가 있는 이상은 올바른 판단이 서지를 않아요.

이것을 나누는 것은 가수들에게 맡겨야지요.  맡길 수 있는 이런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 같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아 저게 육적이고 저게 육신적이구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반대로 내가 영적이니까 육신과 육에 속한 사람을 분류해야지 하신다면 육에 속한 사람이든지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예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왜 그런 예를 들 수밖에 없는가 하면, ‘나의 판단’이라고 했을 때, ‘나’가 여전히 살아 있잖아요.  그러면 외부의 것이 들어올 수 없다니까요.  주님이든 누구든 들어올 수가 없어요.  내 고집이 너무 세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에 의해 활용되는 사람 같으면, 육이 되었든 육신이 되었든 영이 되었든 그것은 주님이 할 일이지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첫 시간 너무 어려운 것을 했는데 조금만 더 하고 쉽시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구약의 ‘바사르’ 영이 뭐냐 하면, 나라는 것이 존재하든 안하든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영이예요.  이것이 어디 나오는가 하면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분명히 두 사람인데 한 몸 되었지요.  아담이 하와에게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라고 했어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내 심장 중 심장, 내 허파 중에 허파’ 이렇게 본 거예요.

그 사람 있는 곳에 내가 있고, 내가 있는 곳에 그 사람이 있고 하기에 도대체 둘로 나눌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인데, 뼈와 살은 분리될 수 없는 거예요.  당신과 나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이해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당신과 나는 한 부부야!’ 이정도 밖에 생각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니까요.  한 부부 정도가 아니에요.  아내와 남편이 어떻게 마음을 맞춰 살아갈까 그런 것이 한 몸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아내와 남편은 두 몸이고 한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같이 잠을 자도 서로 다른 꿈을 꾸고, 한 사람은 드라마 보려고 하고 한 사람은 스포츠 보려고 하고. 이렇게 따로 놀아요.  

그렇다면 무엇을 한 몸이라고 했고,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인가?
남편에게서 일어나는 일이 아내에게 적용된다는 말입니다.  같은 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영적 차원에서 다루기 때문에 따로 따로 다루지 않고 한 무리로서 다루는 것입니다.  이게 영이에요.  

예수님께 일어났든 일이 동일하게 성도에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고 그 다음 열매는 우리가 되고, 이런 관계가 한 몸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이란 것은 나라는 존재는 파묻혀서 사라져버리고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하시든 움직이신다는 것을 믿는 관계가 영적인 인간입니다.  이해되십니까?    

내가 뭐가 되던 고민하고 염려할 자격도 없고, 주께서 작용하신 대로 내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믿는 그런 안목을 가진 사람이 바로 영적인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기준해서 다음 시간에는 육신과 육이 뭔가를 생각해 봅시다.  

5분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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