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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고린도전서4-2 / 05,03,26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4-2 / 05,03,26

정인순 2010. 10. 11. 11:57

05광주강의(실로암교회) 10 - 고린도전서4-2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gwangju/gwangju050326b.mp3


                                                                

 

05,03,26    

강의: 이근호 목사


◈ '묵시'와 '역사'가 어떻게 다른가?

두 번째 시간은 첫 번째 시간보다 좀 어렵습니다.  잠은 다 깼다고 생각하고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세계에 오셨지요?  오셨는데, 여기서 여러분들이 꼭 주의할 것은, 하나님이 몸만 달랑 오신 것이 아니고, 땅의 원리를 통째로 품고 오셨다는 거예요.  이 하늘의 원리를 '묵시' 라고 하고, 땅의 원리를 '역사' 라고 하는데, 이번 시간에는 "묵시와 역사가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을 설명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모두가 다 엉터리며 죄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엉터리며 죄라고 고발한 그 기준이 뭐냐 하면, "왜 묵시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역사적으로 이해했느냐?" 라는 것을 가지고 책망을 한다는 것입니다.  왜 묵시적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 죄를 '하말티아' 라고 가르치는 그 자체가 죄 !!

이 '묵시' 란 말을 잘 모르겠지요?  "죄가 무엇이냐?" 라고 할 때에, 흔히 목사님들이 신학교에서 좀 배웠다고, 원어를 써가면서 '하말티아', 즉 "표적에서 어긋나는 것이 죄다" 라고 설명하지요.  그러나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그 자체가 죄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유대주의적인 문자 해석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표적을 잘 못 맞춘 것이 죄니까, 우리는 제대로 표적을 맞추자는 것인데, 이런 사고 자체가 역사적 관점이란 것입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알아야 된다고 했지요.  아직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답변을 안 드렸는데, 언제쯤 이 문제를 논할지는 잘 모르겠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모든 것은 다 죄로 규정하신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죄라고 하신 근거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번 둘째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죄라고 하신 근거가 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인간에게 죄라고 말씀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근거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왜 땅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역사적 관점으로 이해하느냐?" 라는 것으로, 인간을 죄인으로 따지고 듭니다.  물론 역사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 세상 지혜고, 묵시적 관점에서 나온 것은 하나님의 지혜이고 말이지요.  그래서 묵시로서 역사를 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 지혜를 친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또 십자가로서 인간을 친다는 것도 같은 말이고 말입니다.

역사적 관점이 뭐냐 하면,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약속을 했으면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것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알아서 지킨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지당한 말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어떤 식으로 지키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 지키는 최종 모습이 어떤 식이냐 하면, 그들은 역사적으로 그것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실제로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굳건히 설 것이고, 실제로 메시야가 와서 자기 백성을 만들어서 유대나라를 최고의 나라로 구축할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여기서 골로새서 3장을 보겠습니다.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여기에 보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고" 라고 했지요?  그런데 현재의 한국신학은 대부분이 땅의 것도 생각하고 위엣 것도 겸하여, 땅에서도 복 받고 죽어서도 좋은데 가고,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땅의 것을 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땅의 것을 쥐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바울은 땅의 것을 두고 "우상 숭배이고, 탐심이다" 라고 했습니다.   왜 땅의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되는가 하면, 3절서 "너희는 이미 죽었다" 라고 되어 있지요.  그래서 우리가 사우디에게 2:0으로 지든지 말든지,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우리든 말든, 그런 것들은 생각지 말란 말이지요.  하여튼 땅의 것은 생각지 말란 말이지요.

◈ 고(故) 이근호 !!

왜요?  아니, 죽은 놈이 뭘 생각합니까? 그런데 "아직 살아 있는데요?" 라고 하면, 하나님은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네가 지금 안 죽은 것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안 죽은 것이지, 땅에서는 이미 죽은 자로서 호적을 파갔다" 라는 것입니다.  즉 '고(故) 이근호' 라는 것입니다.  땅에서는 이미 고인이 되고, 다만 아직도 안 죽은 것은 하늘나라에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니까 고린도전서 1장 4절을 우리들을 보고 지키라는 말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이 우리보고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성령께서 이런 식으로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말입니다.

◈ 인간 속에는 언제나 환상이 !!

그러면 우리 속에는 뭐가 있는고 하면, 환상이 있어요.  그 환상이 뭐냐 하면, 땅에서도 잘되고 하늘나라도 가고 하는 환상이 있습니다.  땅에서 주식을 사면 주식 값이 팍팍 오르고, 땅을 사면 땅 값이 껑충 뛰고...  그래서 "하나님 땅값 오르게 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잖아요.  

◈ 우리의 환상과 성령께서 적용시키는 실제와 항상 충돌 !!

하지만 이런 것은 우리의 환상입니다.  성경에 "땅값을 위해 기도하라. 그러면 땅값이 오를 것이다"  라는 내용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의 환상과 성령께서 적용시키는 실제와 항상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충돌에서는 늘 성령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환상을 못 버려요.  땅에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잘 살고 싶어요.  그런데 성령께서는 이런 것을 일체 부정하고, "너는 고인이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이미 죽은 자고, 다만 하늘나라에서 새롭게 산 자로 간주하고 우리를 세상 끝 날까지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한 고집을 하지요.  물론 우리 고집도 대단하지만 하나님 고집을 이길 수 없어요.  한 평생의 삶을 뒤돌아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고집으로 나를 꺾으면서 이끌어 오신 생애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 환상대로 인도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역사를 주장하고, 하나님은 묵시를 !!

그러니까 우리는 역사를 주장하고, 하나님은 묵시를 내세운다는 겁니다.  우리는 늘 지금보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역사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은 역사만 생각하는 철없는 우리를 묵시적 관점에서 구원하시는데, 이 갈등이 지금도 성령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어떤 가게를 개업했다면, 그 다음부터는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 이것밖에 생각 안 해요.  그리고 지금 죽으면 안 되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밑천이 아깝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들었는데 갑자기 인자가 오셔서 데려갈 자를 데려가고 나머지는 버린다" 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묵시적입니까?  역사를 초월해요.  역사와 상관없이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그렇게 합니다.  사고 팔고 하는 것도 오늘보다 더 여유 있는 내일을 위해서 하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서, 이혼하는 것도 오늘보다 나은 행복을 위해서 하고 말입니다.

◈ 인간이 우는 이유가, 역사적 관점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

제가 텔레비전을 거의 안 보는데 어제 아내 때문에 같이 조그만 봤습니다.  '사랑 공감' 이란 것인데, 등장인물이 네 명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우는지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조금 진행되면 또 울고, 또 좀 지나면 울고 있고, 왜 그렇게 우는지, 그 이유가 뭔가 하면,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에 운다는 것입니다.  자기 기대처럼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못 돼서 울고, 내일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울고 있는 것이죠.  즉 우는 이유가 역사적 관점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골로새서 3장을 이야기하면 무슨 생뚱맞는 이야기인가 하겠지요?  그 드라마에서는 상호 얽혀있어서 복잡하게 되어 있는데, A와 A'가 결혼했고, B와 B'가 결혼했고, C와 또 누가 얽히고, 뭐 이렇게 교차되어 있는데, 무엇이 그렇게 울 일이 있습니까?  서로 좋은 데로 맞춰 살면 되지 그게 뭐 문제가 되느냐는 말입니다.  시집가고 또 시집가고, 어떤 사람은 다섯 번 결혼했고, 여섯 번째 시도를 하고 있더군요.  몇 번을 결혼하든 그게 뭐 대단한 일입니까?  

인간의 이러한 역사적 관점은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만약에 아빠 엄마가 이혼을 했습니다.  그러면 결손 가정의 애들이 정서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에, 나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사랑으로 보살피고 등등, 여러 가지 방안들을 말하는데, 그러나 근본적으로 아이들이 달라지려면 역사적 관점을 버리고 묵시적 관점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12살인데 부모가 이혼을 했습니다.  그러면 용돈 타는 출처가 두 군데잖아요.  그러면 엄마한테 용돈 받고, 또 아버지한테 받고,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 살면 돼요.  본인 생각에, "남들은 엄마, 아빠 화목하게 살고 있는데 우리 가정은 왜 그렇지 못할까?" 하는, 그런 생각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고 사회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지하철에 불을 지르고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사회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본인이 묵시를 몰라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어린애가 어떻게 묵시를 알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어른은 묵시를 압니까?  어른이고 어린 아이고, 누구든지 간에 무조건 성령이 임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묵시적으로 침투해서 수시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그 순간에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이런 틀에서 벗어나서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하는 것과 관계없이, 이미 우리는 구원된 사람이란 것을 깨닫는 눈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시적 관점인 것입니다.  

◈ 성령의 은혜가 임하기 전까지는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거기에 반해 이 역사적 관점이 세상 지혜인데, 이것을 좀 더 생각해 봅시다.  "이러한 성령의 은혜가 임하기 전까지는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점을 아셔야 됩니다.  세상의 지혜는 그 뿌리가 역사에 있다고 했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묵시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기껏 역사적 관점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성경적으로 말하면,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미 생명나무라는 묵시적 세계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땅의 저주 아래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땅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역사적 순환을 하거든요.  그러니 가을을 위해서 봄에 씨를 뿌린다든지, 역사적으로 뭔가 대비하고 준비하고, 그런 식으로 자신을 버텨내지 앉으면 못사니까, 자연적으로 묵시에서 벗어나서 역사 속에 갇혀있는 꼴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적 관점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게 중요합니다.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역사적 관점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면 오늘날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는 모든 신학이 다 여기에 속합니다.  이 신학을 유명한 말로 ' 개혁주의' 라고 합니다.

◈ 개혁주의 - 개혁해야만 한다 !!

개혁주의가 뭡니까?  개혁주의란 일변도입니다.  우리 집은 여성 우선 이라고 하면 여성 일변도, 우리 집은 자식주의라고 하면 자식이 최고란 말입니다.  개혁주의라고 하면 날마다 개혁하는 데서 교회의 본 모습이 있다는 것이 개혁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개혁해야만 하는 것이 개혁주의 특징입니다.  머무르지 않고 계속 달라지고 또 달라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 과연 어느 놈이 제대로 된 판단을 !!

제가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어떤 탈북자가 자녀를 데리고 중국에 갔다가 여의치 않아서 베트남에 왔습니다.  그래서 베트남에 메콩강을 건너는데, 우기라서 비가 많이 내려 강물이 불어서 강을 건너는 것이 좀 위험합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하겠습니까?

1) 일주일을 기다리다가, 비가 그칠 때 건넌다.  
2) 비가 계속 내리면 우리는 굶어 죽는다.  지금 건너자.

1번을 선택할 것인가, 2번을 선택할 것인가?  이게 개혁주의와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자식이 둘 이었습니다.  2번을 선택해서 건너가다가 큰아들이 살고, 둘째 딸은 죽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결국은 한국에 왔어요.  그러나 아들이 엄마한테 엄청난 원망을 합니다.  "어머니, 그때 일주일만 더 참았으면 동생은 안 죽었을 텐데, 엄마가 너무 성급하게 강을 건너서 죽었어요" 라고 말입니다.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경우는, 일주일 기다렸는데 과연 비가 그쳤습니다.  가족이 다 살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왔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정착금을 몽땅 사기를 당했습니다.  이렇게 되니 큰아들이 이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자기도 사기를 치다가, 그만 잡혀서 교도소에 가서 화병에 엄마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경우에 어느 것이 선택을 잘 한 것입니까?  어느 것이 개혁된 것입니까?  어떤 결과가 왔느냐 하는 것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하면, 차후에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가를 가지고서 앞의 이야기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탈북한 것이 6개월 전이고, 내일이면 아들이 교도소에 간다면, 이런 상황에서 6개월 전 우리가 강을 건넌 것이 잘못이었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겠지요.  그런데 만약 1년 후에 아들이 교도소 갔다 와서 사람이 바뀌어서 나중에 변호사와 결혼을 했다면, 이럴 경우, 6개월까지에서 생각해 보니까 강을 건넌 것이 잘못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1년 후에 보니 강을 건넌 것이 잘 한 일이 돼요.  그러면 6년 후에는 어떻게 결론이 날까요?  또 10년 후에는 말입니다.  

과연 어느 놈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습니까?  부흥사들이 교회에서 간증하면서, "내가 6.25때 죽을 뻔했는데, 기적적으로 하나님 은혜로 살아나서 지금 부흥회를 하고 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놈은 진작 죽었어야 좋았어요.  그 놈이 안 죽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더욱 섞어 빠진 무당교회가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이 부흥사는 자기는 살아있다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그 때 안 죽은 것이 옳은 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결국 역사주의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다 "나에게 유리하냐, 아니면 불리하냐?" 라는 것으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 세상의 판단기준 - 자기의 소유 !!

유리한 것이 뭐냐 하면, 장수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지요.  결국 땅에서 악마가 쥐고 있는 것을 제공받으면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네가 이렇게 살았으면 부귀영화가 돌아갔을 텐데, 네가 잘못 살아서 그런 것이 돌아가지 않았다" 라는 식으로, 이렇게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습니다.  

자기가 역사적으로 잘 살았다, 잘못 살았다는 것을 무엇으로 판정합니까?  명절이 되면 가족들이 다 모이잖아요.  첫날은 서로 웃고 화목하게 잘 지내요.  그러다가 하루 밤 자고 고스톱도 치고 술도 한잔 마시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형, 아버지한테 한 게 뭐 있는데" 라고 하면서 멱살잡고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개혁입니까?  "어느 것이 유리하냐, 어느 것이 불리하냐? 누가 돈 많이 버는 자식인가?" 라는 것이 말입니다.  

만약 자식이 둘 다 돈 못 벌면 어머니가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내가 하나님 믿고 예수 믿어도 소용없더라. 내가 새벽제단에서 그렇게 울부짖으며 자식을 위해 기도했건만 두 자식 저렇게 싸우는데, 하나님이여! 제가 어떻게 해야 이 자식들이 내 소원대로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자식 될 수 있습니까?" 라고,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 예수님 -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

어머니는 뭐냐 하면, 이 세상 부귀영화를 기준으로 해서, "내가 자식 잘 키웠구나. 혹은 내가 자식 잘 못 키웠구나" 라고, 이렇게 나오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하면,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예수님처럼 불효자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어버이날만 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요한아! 내 어머니를 부탁한다" 라는 구절을 가지고 효도하라고 하는데, 그런 효도는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말로 "어머니를 부탁해!" 라고 하는 것은 너무 쉽잖아요.

예수님은 장남인데 자기가 죽으면서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효도입니까?  남편이 일찍 죽었는지 어쩐지 모르지만, 장성한 아들 의지하고 살아가는데 그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이게 얼마나 불효한 자식입니까?

◈ 불효자는 웁니다 !!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불효자는 웁니다" 라는 내용의 말씀이 성경에 담겨 있어야 해요.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면서 "다 이루었다" 라고 했지요.  이것이 묵시적 관점에서 보는 것과, 역사적 관점에서 보는 차이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제가 방금 이런 예를 들고 보니, 이것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지요?  이미 인간들은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서 교회에 옵니다.  빈손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교인들을 향해서 목사가 묵시적 관점으로 설교를 하면 교인들은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자기는 역사적으로 원하는 부귀영화만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데 목사가 엉뚱하게 묵시적 관점으로 나오니 어떻게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역사적 관점이 마지막으로 내뱉는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내뱉는 모습이 무엇인고 하니, 묵시는 가고 우리가 원하는 역사적 축복만 달라는 것입니다.

◈ 역사적 관점을 '강자', 묵시적 관점을 '약자' !!

역사적 관점을 성경에서는 '강자'라고 하고, 묵시적 관점을 '약자' 라고 합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당연히 약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하고 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자기가 약하면 약할수록 예수님의 능력이 더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약자라는 것 때문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는데, 반면에 당시의 고린도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여 나를 강자로 만들어주세요" 라고 나왔어요.  자기가 강자가 될 때에 비로소 예수님께 복 받은 것을 확인하겠다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떠난 후에, 그 교회에 누가 왔느냐 하면 가짜 사도가 왔는데, 이 가짜 사도에 대해 바울은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사람들이니라"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 사도가 떠난 자리에 마귀가 양의 탈을 쓴 노략질하는 이리를 파견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고후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 11: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 묵시가 역사와 섞일 때, 묵시는 더욱 더 묵시로 드러난다 !!

그래서 우리는 "아니, 하나님이 계시는 교회에 어떻게 거짓 목자가 들어올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는데, 이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묵시가 역사와 섞일 때 묵시는 더욱 더 묵시로 드러나는 것을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복음을 아는 부교역자가 있는데, 그런데 전혀 복음을 모르는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담임목사가 와서 교인들을 흥분시켜서 교회를 부흥시키자고 외칠 때, 역사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교인들은 그 소리를 듣고 소망을 갖고 같이 기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 아는 부교역자가 "하나님, 왜 주님의 교회에 저런 사단의 종을 보냈습니까?" 라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양을 탈을 쓴 이리가 와야 복음 전하는 부교역자는 점점 더 약자가 되겠지요?  이렇게 될 때 부교역자는 점점 더 묵시적 존재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관점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 관점이 필요합니다.  곳곳에 역사적 관점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묵시는 역사와 대비될 때 묵시로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는 묵시인지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 복음서 - 예수님을 따를 자는 아무도 없다 !!

예수님 말씀 중에 참 재미있는 것이 있는데, 마태복음 8장 19절 이하에 있는 말씀인데,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와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제자는 "아버지의 장래를 치리고 와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했어요.  그때 예수님의 답변이 참으로 가관입니다.  그냥 장사 잘 치르고 오라고 하시면 좋은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라고 하셨어요.

제가 이 구절을 보면서 참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왜 예수님을 따르려하는 순간 아버지가 돌아가게 하셔서 장사를 치르려 가도록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을 따르고 난 후 5년 지나 돌아가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 만나기 전에 돌아가셨으면 아무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청년이 예수님을 따를 자가 못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것이 참 많이 있어요.  아니 성경 전부를 이런 식으로 해석해야 돼요.

(마 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마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 8: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마 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그 뒤에도 동일합니다.  평소에 아무 풍랑도 일지 않던 그 바다에서, 제자들은 어부출신이 많기 때문에 지금 이때 이 시간에는 풍랑이 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아요.  그래서 아무 걱정 없이 예수님을 배에 태워 바다를 건너고 있었지요.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풍랑이 일어서 그동안 어부로서의 경륜과 기술을 다 동원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어요.  이런 풍랑이 일 것을 아시면, 잠자지 말고 풍랑에 조치를 취하시면 좋겠는데 꼭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주님은 주무시고 계셔요.  주무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이 깨우니까, 풍랑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깨운 제자들을 꾸짖었어요.  '왜 깨우느냐?  이 믿음이 없는 자들아!' 하시면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깨워야지 무슨 다른 도리가 있습니까?  역사적 존재들이 지금 현 상황에서 역사적으로 대처를 해야지 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왜 깨웠느냐 꾸중을 하셔요.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몰랐어요.  풍랑을 만나고 나서 비로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았지요.  

◈ 예상치도 못한 사건들 - 묵시적 존재임을 일깨움 !!

이렇게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풍랑이 일어나고, 그 풍랑에서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고, 이런 모든 장치가, 그들은 자신이 역사적 존재인줄 알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구원받은 묵시적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차원에서 이런 일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마 8: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마 8: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마 8: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마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마 8: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그러니 이처럼 성도에게는 이런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오히려 이런 일이 일어나야 성도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일부러 그런 일을 일으키십니다.  

역사적 관점에 대해서 좀 더 나가봅시다.  아직까지는 '사람의 지혜'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그것으로 나아가는데 까지 서론이 너무 길지요?  놀이동산의 입구보다 더 길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한번 따라가 봅시다.  

◈ 역사적 관점 - 어제보다 나은 내일 !!

역사적 관점에서는 뭘 생각하는가 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연결성 가운데서 현재를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과거보다 나은 현재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기대합니다" 라고 기도합니다.  이 때 뭘 잊으면 안 됩니까?  과거를 잊으면 기도할게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가 있어야 기도할 맛이 나잖아요.  "어제보다 나은 내일!" 말입니다.

지난달에는 수입이 300만원이었는데 이번 달에는 150만원 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없어요.  "한 달 수입이 100억인데 이만하면 됐다. 다음 달에는 50억으로 줄이자" 라는, 이런 기업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100억이 되었다는 말은, 200억 될 가능성을 신께서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에 100억이니 다음에 200억을 기도하자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만약 이번 달에 5천 만원을 벌었는데 다음 달에 200억 달라고 기도하면 스스로 생각해도 뻔뻔스럽잖아요.  

◈ 세상 지혜 - 역사적 관점에서 어떤 하나님을 구성하는가?

여기에서 바로 '절제' 가 나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는 항상 과거가 기준에 되어 플러스알파, 즉 약간의 추가분을 더해서 현재를 만들지요.  그리고 현재의 것으로 만족합니까?  아니지요.  미래를 염두에 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은 현재란 과거와 미래에 의해서 항상 재구성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어떤 하나님을 구성하는가?" 라는, 이것이 바로 세상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 세상 지혜 - 현재 자기가 소망하는 것과 하나님을 연관시켜서 생각하는 것 !!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잘 몰랐을 거예요.  보통 세상 지혜라고 하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아니에요.  세상 지혜는 현재 자기가 소망하는 것과 하나님을 연관시켜서 생각하는 것이 세상 지혜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차 올라가서 하늘에 이르지요.  이게 바벨탑인데, 하늘에 까지 올라가서 신에게 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미있는 것이 세상 지혜 속에 묵시가 들어있고, 초 역사가 다 들어있어요.  역사적 관점 속에 있으면서 역사적 관점을 능가하는 묵시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고,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미래까지 내다보신다는, 이런 관점까지 얼마든지 역사적 관점에서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미래를 미리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자기의 이런 어려운 형편을 아시니까, 자기에게 어떤 조치를 내리셔서 미래에 모든 상황이 잘 풀리도록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세상 지혜라는 말입니다.  

◈ 유대인들은 '기적'을, 헬라인들은 '지식'을 !!

이 지혜는 누가 만들어 냅니까?  유대인들이 만들었어요.  그리고 헬라인들이 만들어 냈어요.  유대인들이 만든 것은 '기적' 이라고 합니다.  헬라인들이 만든 것은 '지식' 이고 말입니다.  기적은 사물이고, 지식은 정신적인 것입니다.  너무 조용한 것을 보니까 이해가 안 된다는 것 같은데...

역사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 상을 만들어내는데, 어떤 하나님일 때 괜찮은 하나님으로 인정하는가 하면, 유대인들은 예상치도 못한 기적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셨구나.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는 식으로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헬라인들은 지식으로, 관념적으로 초월적인 신을 생각하면서 움직일 때 그것을 신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기적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 해 봅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실제로 이 땅에서 일하시는데 그것을 사건을 통해 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직접 사건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믿는 사건의 대표적인 것은 노아 홍수, 출애굽 때 홍해 갈라짐, 여리고 성의 무너짐, 광야시절에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짐 등등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m 묵시적 존재인 예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사건들을 모두 다 일으켜 주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유두고' 라는 사람이 밤늦게까지 강의가 계속되니까 졸다가 난간에서 떨어져 죽었지요.  그때 바울이 유두고를 살려냈는데, 난리가 났다는 것입니다.

또 누가복음 10장에서,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셔서 전도하러 보냈을 때, 가는 곳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가고 했지요.  제자들이 너무 기뻐 예수님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라고 자랑했을 때, 예수님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생명록에) 기록된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라" 라고 하셨어요.

여기에서 생명책은 묵시의 책 아닙니까?  역사가 아무리 바뀌고 변해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묵시의 세계입니다.  "너희 이름이 영원히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라. 네가 이미 묵시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라는 것입니다.

◈ 기적 - 기적 없이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여기는 것이 엉터리 신앙임을 고발 !!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그런 사건을 일으키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미 유대인들은 사건 없이는, 기적 없이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그들 보기에는 대단한 신앙인줄 알지만, 바로 그런 신앙은 마귀가 준 엉터리 같은 신앙이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은 그들이 원하는 사건을 보여주고, 그 사건에 대한 해답은 거절해버리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유대인들이 "만나를 줄 때 하나님이 메시야인줄 알겠습니다" 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기 전에 먼저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니까 그들은 뭘 생각했는가 하면, "이것은 옛날 만나 사건의 재판이다. 저분이 메시야가 아니면 누가 메시야인가?" 라고 하면서 좋아하며 따라왔어요.  이렇게 주님을 따라왔으면 주님이 "그래, 내가 메시야다" 라고 밝히시면 되는데, 이미 그들이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내 떡과 잔을 마시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 너희들이 나를 찾는 이유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그것은 만나가 아니야. 내 죽음이 만나야" 라고 할 때, "이 말씀은 어렵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 떠나고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너희들도 갈래?" 라고 말씀하시니,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고 대답했지요.  이때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라고 하셨고 말입니다.

◈ 진짜 기적은 오직 십자가 !!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인간들이 원하는 기적 비슷한 것을 보여 주면서도, "그 기적은 사실은 기적이 아니고, 너희들이 만든 환상에 불과한데 진짜 기적은 뭐냐 하면 십자가이다.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하지 기적이고, 지식은 우리를 속이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5분 쉬고 합시다.

2005년 5월 9일 23:33분 서경수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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