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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고린도전서4-1 / 05,03,26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4-1 / 05,03,26

정인순 2010. 10. 11. 11:55

05광주강의(실로암교회) 09 - 고린도전서4-1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gwangjugwangju050326a.mp3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gwangju/gwangju050326.hwp

 
                                                                

 

05,03,26    

강의: 이근호 목사


◈ 고린도전서 - 따로 떨어진 책이 아니다 !!

지난 강의정리를 좀 해야 되겠지요.  제가 처음 여기 와서 했던 것이 계속 반복되는데, 고린도전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부터의 성경과 고린도전서 뒷부분들이 다 연관이 되어서 고린도전서가 위치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한 것은, 밑에서 쳐 올라온 구약의 응축된 내용들이 고린도전서에 담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고린도전서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담긴 문자만을 해독해서는 안 되고, 구약과 어떻게 연결되었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 구약의 성취는 십자가로서 !!

또 사도 바울의 이야기, 즉 "구약에서 어떤 약속을 했기에 그 성취는 십자가로서 다 마무리되었는가?" 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희한한 것이지요.  우리가 보통 약속할 경우 몇 시에 어디에서 만나자고 하잖아요.  이처럼 구약에도 약속이 많이 있는데, "이 수많은 약속들이 십자가 하나로 모두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이 참으로 어렵고 중요한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잠언 3장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왼손에는 부귀영화가 있다" 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읽으면서 보통의 경우에는 "말씀에 순종하면, 오래 살고, 부자로 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잠 3:16)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잠 3:17)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그런데 고린도전서에 보면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약속의 실제적인 완성은 오래 살고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하나로 다 모아진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어째서 그렇습니까?  참 신기하지요?

흔히 교회 청년이 군에 입대할 때 뭐라고 격려를 하는가 하면, 아래 본문으로 설교합니다.  이 말씀을 군에 입대하는 본인이나 보내는 가족이 들으면, "하나님이 지키시니까, 잘 하면 후방으로 빠진다든지, 아니면 전쟁터에 나가더라도 총알로부터 안전할 것이다" 라는 식으로 이해를 하지요.

(수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수 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말씀의 완성은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있으니까 전쟁터에서 죽어도 괜찮아" 라는 식으로 해석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해석입니까?  아니면 끔찍합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성경을 보고 예상하고 짐작했던 그 완성이 이미 우리들의 마음속에 담겨있는데, 그런데 우리가 생각했던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과, 실제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것이 결론이다" 라고 내세우는 것과 너무나도 안 맞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꾸 십자가로 다 끝났다고 하신다는 말입니다.

◈ 지혜 - 세상 지혜, 하나님의 지혜 !!

오늘 강의에서 몇 가지 어려운 점을 통과해야 되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첫째 '지혜' 라는 것입니다.  이 지혜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이 고린도전서에서 '지혜'란 것은, 첫째 '세상 지혜'이고, 둘째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을 통과하려면, '세상 지혜'가 어떤 것인지도 알아야 하고, '하나님 지혜'가 무엇인가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겸해서 알아야 할 것은,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즉 그 어떤 공통점도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 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에 이르는 그 어떤 통로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먼저 지혜를 알아야 한다고 했는데, 그 지혜는 어디서 나왔다고 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미리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딴판으로서, 하나님께서 최종적인 모범답안이라고 내세운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지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지혜'를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 지혜만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는 세상 지혜를 배설물로 여겨요.  더러운 것으로 취급된다는 말입니다.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래서 오늘 우리는 강의에서 할 것이 많습니다.  "세상 지혜와 하나님 지혜가 이렇게 다르구나" 라고 하는 것도 알아야 하고, 더 나아가서 "왜 세상 지혜는 하나님 지혜 앞에서 똥오줌처럼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점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그림으로 보겠습니다.  이렇게 둥근 원을 세상이라고 합시다.  세상에서 세상 지혜가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 지혜를 가지고 뭔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하나님이 직접 오셨어요.  그 하나님이 독보적인 지혜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친히 자진해서 인간 세상에 오셨다는 말이지요.  

◈ 경악 그 자체 - 인간들끼리 사는 동네에 하나님이 파고 들어왔다 !!

제가 보기에는 인류역사상 제일 특이한 사건이고 경악스런 사건이 뭐냐 하면, 인간들이 사는 동네에 하나님이 거기에 파고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축구팀에 사우디아라비아에 0:2로 진 것이나,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것은 별 큰 사건이 아닙니다.  최고의 사건은 우리 인간들끼리만 사는 이 동네에 하나님이 뛰어든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그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지든 어떤 것은 소유했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껍데기 같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어제 TV를 보니까 이금형 총경이 나왔는데, 경찰 생활 27년 동안 하면서 여성으로 총경까지 오르고, 요즘 일진회 청소년 문제에 대해서 경찰을 대표해서(여성, 청소년 과장)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청소년은 이렇게 다뤄야 하고, 여성 성매매 문제는 이런 식으로 해야만 해결이 되고, 학교폭력문제는 이런 방법이 좋다는 등등, 여러 방안들을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분이 무엇을 모르는가 하면 하나님이 이 땅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라요.  그렇다면 경찰 40년 50년 해서 나중에 70되고 80되면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텐데, 실컷 사회봉사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열심히 헌신한들 그것은 과거 일이고, 결국 대한민국의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한 때는 필요했지요.  그래서 많은 봉급을 주고 공직자로 일을 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 들어 늙으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누구나 결국은 다 그렇게 됩니다.  늙어서 자기 자신을 한번 돌아보세요.  그동안 무엇 때문에 살았는지, 세상은 왜 존재하는지, 자기는 왜 있어야만 하는지, 전혀 해답도 없고, 해결책도 없고, 그냥 아이 키우고 세월 보내다가 자신은 늙고 나중에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남는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이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람이 살고 있는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가?" 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그런 인생은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며 살았든지 허무한 세월인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여러분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왜 우리가 사는 인간 세상에 오셨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마지막 때에 작살을 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부셔버리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엉터리이기에 말입니다.

◈ C.S. 루이스 - 인격적이신 하나님 !!

어떤 분이 저에게 십자가마을 게시판을 통해서, C.S. 루이스의 '내가 믿는 기독교' 라는 책에 대해서 서평을 해달라고 요청을 했어요.  저는 그 책도 없고, 읽은 적도 없는데 서평을 해 달라고 했어요.  사실 서평을 부탁하려면 책을 보내주면서 부탁을 하든지 하면 참 좋은데 말입니다.  전에 칼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는 그렇게 했거든요.

그렇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서점에 가서 책을 물었더니, 그 책은 이미 절판되고 그 대신 그 저자의 '순전한 기독교' 라는 것이 있어서, 그 책을 서점에 서서 한 10분 동안 봤습니다.  돈을 주고 산 것은 아니고 말입니다.  좀 아깝잖아요.  그리고 그 사람의 사상에 대해 답변을 했습니다.

C.S. 루이스란 사람의 책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젊은 사람들, 또는 교회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 수밖에 없는 그런 내용들로 가득 차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의 '회심'이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는 신이란 것을 추상적인 존재로만 알았는데, 자신이 '회심'하는 순간부터 실제로 살아있는 분으로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심'이라고 본 것이에요.

그러면 이 사람의 책을 읽은 젊은이들이, 기독교를 처음 접해서 어떤 과정을 넘으면 기독교 신자이고, 어떤 문턱을 넘지 못하면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는 판결을 무엇으로 기준 삼는가 하면, 하나님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어떤 어른처럼 인격자로서 살아있다는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 신자로 넘어오는 문턱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이 인격자란 사실을 누구도 알고 있습니까?  사람들보다 마귀가 너무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4장에서 귀신 들린 자가 말하기를, 자기들을 멸하려 왔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눅 4: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눅 4: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지도자나 백성들이 하나님이 인격자란 사실을 몰랐습니까?  아니지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돌판을 들고 왔을 때, 밑에 있는 백성들은 그 돌판이 모세가 만들어 가지고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 산위에는 어떤 어르신이 계시다는 것을 분명 알았습니다.  산이 흔들리고 난데없는 나팔소리가 온 천지에 울려 퍼졌고 하늘에는 화염이 피어올랐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을 때, 오직 한 사람 모세만을 불러 올렸던 것입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갈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40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광채가 난 얼굴로서 내려오는데, 올라갈 때는 빈손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는 양손에 돌판을 들고 내려왔을 때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느냐 하면, 저 산위에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낸 여호와 하나님이 실제로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졌는데 어느 인간이 물을 퍼내서 갈라지게 할 수 있습니까?  출애굽을 하던 밤에 문설주에다 어린양의 피를 발라 죽음을 면했는데, 이 때 애굽의 모든 가정에는 장자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았지만 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격자로서 살아 계시는 것을 안다고 해서, 그것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담을 누가 찾아왔느냐 하면,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면 아담이 구원됩니까?  구원이란 것이 아담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인정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먼저 아담에게 뭔가 하사해야 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약속' 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주신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만세, 만세!" 라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새 젊은 커플들이 결혼식을 할 때, 옛날 사람들이 안 하는 짓들을 해요.  만세 삼창도 하고, 신부를 번쩍 들기도 하도 야단을 쳐요.  만세 부른다고 해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닌데, 속으로 "저게 며칠이나 가겠나?" 싶지요.  사람들 앞에 만세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부부사이에 특별한 효과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무슨 특별한 효과가 있습니까?  그러면 저도 한번 하게 말입니다.

"여호와는 살아계시다" 라고 만세를 불러봐야 자력으로 구원되지 않습니다.  그런 결심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 결심을 항상 번복해요.  담배를 끊는 사람을 보세요.  담배를 끊는다고 사방천지 광고하고 야단을 치는데, 일주일 후에 다시 손을 대는 것이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제발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네 자신의 정체도 제대로 파악 못하는 주제에, 네가 네 자신에게 맹세를 하느냐?" 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조세형씨가 회개하고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겠다고 간증하고 돌아다니다가 얼마 후세 남의 집 담을 넘다가 또 잡혔지요.  그게 남의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을 지킬 능력이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들의 의지나 결단력은 어떻게 됩니까?" 라고 묻겠지만, 인간의 결단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저 하루하루 하나님 주신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이 맨 날 저에게 잔소리하는 것이 뭐냐 하면, 설거지를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다음부터는 잘 할게요" 라고 하지요.  어제 못한 것은 이미 다 흘러가 버렸어요.  과거는 굳이 재연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흘러간 것이에요.  

◈ 포이에르바하 - 신은 자아상의 확산 !!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을 인격자로 안다고 해서 하나님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밝혀낸 것이 '포이에르바하' 라는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데, 정확하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자아상을 확산시켜서 그대로 신에게 입혀서 그것을 하나님으로 알고 있다는 겁니다.  즉 신은 존재하는데 어떤 형상으로 존재하느냐는 것은, 자신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 신의 자태는 바뀐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국립공원 '그랜드케년'을 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색깔이 모두 달라요.  아침 10시에 찍은 사진이 다르고 12시에 찍은 사진이 달라요.  자꾸 색깔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은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은, 자기가 달라지기에 따라서 덩달아 신의 모습도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 인생을 살아온 폭만큼 성경해석이 늘 다르다 !!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절제하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절제하라' 라는 명령을 두고서, 17살 때 절제하라는 개념과 30살 때, 혹은 50살 때의 절제 개념이 다 다르다는 겁니다.  인생을 살아온 폭만큼 성경해석이 늘 다르다는 말이죠.  어느 선까지 절제하라고 하는 것인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늘 다른 것이 인간이란 말입니다.

C.S. 루이스의 책을 보면, '절제하라' 라는 내용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면, 동양철학에 보면 "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 라는 것이 있지요.  중용의 도리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 식으로 사도바울의 절제하라는 말을 해석해요.  그는 동양철학은 모르는데, 그러니까 성령을 안 받고, 하나님도 모르는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심성에서도, 자신의 주장이 그대로 다 나온다는 사실을 그 사람은 까마득히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순 엉터리 해석이지요.  그에게 있어서, 성경에 나오는 바울이 '절제하라' 라는 말과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절제하라' 라는 말이 똑같아요.  그러니까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다는 말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지요.  C.S. 루이스는 세상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설명할 수 있고, 납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런 주장을 오늘날 한국교회가 좋다고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서 한국교회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주장은 세상 지혜에 속하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이 사람의 주장이 마치 하나님의 지혜를 대변하는 멋진 작품이라고 간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 살아계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회심'을 한 것이라는, 그런 기준을 설정한 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떤 기준으로 회심, 혹은 거듭났다고 합니까?  그것은 바로 '죄' 라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에서는 죄가 전혀 안 나와요.  하나님이 인격적인 신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이 곧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들이 하나님을 인격자로 간주하는 것에서 스스로의 죄를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만약 알았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겠지요.  그들은 도리어 인격적인 하나님을 영접하고 인격적인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실제로 오신 하나님을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 워치만리 - 진짜 성령 안에 살면 하나님과 교류하는 삶이다 !!

'워치만리' 라는 신학자가 있는데, 그의 신학특징은, "진짜 성령 안에 살면 하나님과 교류하는 삶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란 사실을 아무도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의 주장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새 생명을 주셨고, 그 새 생명 안에 거하는 사람은 새 생명의 삶과 열매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 사람의 신자 됨이 판정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책이 왜 히트를 쳤는가 하면, 그 이전까지는 한국교회가 예수님 중심이 아니고, 교회성장 중심에 있다가, 실제로 조직체에 있던 사람이 조직보다 더 월등한 자유로운 기분을 유발하는 예수님과의 영적인 교류라는 여기에서 참신한 느낌을 받은 거지요.  교회제도이고, 규칙이고, 직분이고,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나의 영적 교류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참신하게 들립니까?  그래서 이들은 교회에 목사가 따로 있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은혜를 받은 사람이 그날에 설교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기도하고, 서로가 원하는 찬송들을 마음껏 부르고, 이렇게 하지요.  일정한 예배 순서가 따로 있어서 그 순서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 김홍전 - 경건한 유대주의 !!

우리나라에 워치만리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지금은 죽었는데 서울의 강변교회 김홍전도 이런 방식입니다.  이런 사람의 신학의 문제점은 유대주의입니다.  유대주의는 하나님 중심사상입니다.  김홍전이 기존 칼빈주의와 차별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원래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김홍전의 주장에 의하면, 기존 한국교회는 자기 구원받는 교리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만 했지, 실제 그 사람의 삶 속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향이 안 미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중심사상이 되면 삼위일체 된 교리가 아니라 삶이 나와야 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완벽한 삶을 추구함으로 삼위일체 된 삶이 되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이 듣든 이야기 아닙니까?  한국교회 목사들의 권위주의적인 태도나 제도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참된 자기만의 자유로운 하나님과의 교류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 김홍전이 구축한 신앙을 너무도 기쁘게 받아들인 거예요.

◈ 도대체 완전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일반 성도들이 궁금해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뭔가 하면, 도대체 "완전한 삶이 어떤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적절한 모델을 제시해 주면 참 좋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따라할 수 있는 적당한 선을 말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정관수술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몸을 왜 잘라내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기가 생기는 대로 다 낳아야 합니까?  그러면 그들의 답변은, 날짜 조절해서 피임을 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는 찬송가를 부를 때 뒷부분의 것은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쪽에 있는 것은 미국의 무디가 부흥회를 할 때 주로 불렀던 노래인데, 멜로디는 대중가요의 멜로디를 사용하고 가사만 복음적인 것을 갔다 붙였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앞부분에 있는 순수한 클래식 찬송곡만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 클래식은 18세기 대중가요 !!

하지만 이런 곡들도 다 18세기 대중가요였다는 사실을 모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18세기 바하의 곡이 당시로서는 유행했던 유행가 곡입니다.  오늘날 '사랑은 아무나 하나' 라는 곡처럼 대중들에게 익숙한 대중가요였다는 말입니다.  이게 세월이 지나니까 고상하게 들리지 원래 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찬송가도 믿을 수 없다고 해서 그냥 시편가사로 된 찬송만 부르기도 하지요.  완벽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완벽을 추구하는 삶을 보일 때 그런 마음이 얼마나 대견스럽고 착하다고 하나님이 보겠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이러한 모든 몸짓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그 중에 바리새인들과 비교조차 안 된다는 사실을 몰라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가 낳지 아니하면 아무도 천국에 못 간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이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어요.  김홍전의 사상을 보게 되면 경건한 유대주의의 재탕이라는 것입니다.  

C.S루이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는데, 그 능력은 어디서 옵니까? 성령의 주신 생명의 열매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생명을 주셔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생명의 삶은, 사도 바울이 말한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고,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보다 완벽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 스스로 나쁜 일과 옳은 일을 규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기준을 정해야 하는데, 그것도 늘 바뀌는 기준을 말입니다.  이렇게 기준을 정하다보니, 자신은 항상 어느 쪽에 서야 합니까?  자신이 기준을 정하기 때문에 항상 착한 쪽에 서겠지요.  그래야 기준을 아니까 말입니다.  

이런 말이 좀 어렵지요?  예를 들어서 '빠르다' 라는 낱말은, 달리기를 잘 하는 사람의 '빠르다' 라는 의미와 늦은 사람의 '빠르다'는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같은 말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즉 자기가 해 낼 수 있는 기준을 자신이 임의로 정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이야기할 때, "나는 이레에 두 번 금씩하고, 하루 세 번 기도하고, 십일조를 했습니다" 라고 할 때, "이 악한 놈들아, 너희들은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나와는 상관없는 자들이다. 차라리 자기 죄를 아는 저 세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의인이다" 라는 직격탄을 그대로 얻어맞는다는 것입니다.  전혀 자기 포기가 안 되는 거지요.  

◈ 자기 관리에 들어가는 며느리 !!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기 시어머니가 계시고 며느리가 있다면, 지금 하나님 모시는 것이 어떤 식이냐 하면, 며느리가 시어머니 모시는 것과 같잖아요.  그렇다면 시어머니는 뭘 원한다구요?  시어머니는 자기 영광을 원하지요.  그러니 며느리는 자기 관리에 들어가지요.  시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 며느리가 할 일은 매일 자리 관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에게 잘 보이는 예쁜 며느리가 되려고 말입니다.

아니, 이게 무슨 믿는 것입니까?  자기를 다듬는 것이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며느리의 자기 행동에 따라서 시어머니도 달라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결국 이것은, 오히려 신이 인간에게 종속되는 그런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인격에서 뭘 아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자기가 무조건 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왜 이전에는 이 사실을 몰랐던가요?  그것은 자기 관리하고, 자기를 갈고 닦고 했는데, 십자가 앞에 서면 그러한 모든 행위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겁니다.  "주여, 내 스스로를 빛내려고 했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 하나님께 영광 - 오로지 예수 믿는 것뿐 !!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영광은 오로지 예수 믿는 것이고, 다르게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받아드리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영광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많이 갈고 닦은 사람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졸지에 십자가 앞에 설 때, 자기는 벌써 주님 앞에 죽은 몸이고,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자백합니다.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기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즉 아무런 이유 없이,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그 순간부터 자기는 지금 죽어도 당연하다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자라는 것을 자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십자가를 아무나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십자가를 알 것 같으면 십자가 사건이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란 인간의 눈으로, 귀로, 마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유일한 하나님의 지혜로만 비쳐지기 위해서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모르는 사건을 왜 하나님께서 들이대느냐 하면,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밀하게 감춰진 십자가를 알고, 그 사람만 구원된다는 것이 마지막 때의 하나님 계획입니다.  다른 하나님의 계획은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잠언에서 "오른손에 장수가 있고 왼손에 부귀가 있다' 라는 말씀을 주신 것은, 그 말씀을 보면서 그 돈과 장수가 탐이 나서 그것 얻으려고 자기 의를 쌓고,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는 그러한 자기 모습을 통해서, 오직 십자가 밖에 있는 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런 말씀을 던진 것입니다.

◈ 성령의 말씀적용 - 1) 우리의 죄를 들춰내고, 2)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됨을 알리신다 !!

다시 말해서, 인간이 아무리 감추고 숨기고해도 말씀이 역사하면 다 들키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의 방정식이 생깁니다.  성령은 말씀을 적용시킵니다.  어떤 방식으로 적용시키는가 하면, 첫째, 우리의 죄를 들춰내고, 둘째로,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됨을 알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에 의해서 말씀의 적용을 받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그 말씀을 보는 순간에 자기 안에 잠자고 있던 자기의 야욕, 시기, 질투 등이 함께 일어나서, 자기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인 것을 또다시 확인시키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데, 우리가 부탁해서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이렇게 적용을 시키면, 우리 속에 있던 은근한 탐욕들이 수면 위에 떠오르고, 그러면 우리는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고, 주께서 이런 우리를 위해서 피 흘리셨다는 사실에 감격하게 되고, 그 다음은 구태여 의인될 필요 없다는 사실이 깨달아집니다.  

이렇게 되면 존재의 가벼움, 즉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는 천국인데, 물론 이 순간이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몇 초 후에 돌아서면 또 다시 의인이 되려고 하니까 말입니다.

마귀가 성도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지름길은, 우리로 하여금 "너는 착하게 살아야 해!" 라는 암시인데,  이것이 우리의 모든 기쁨과 행복을 다 빼앗아 가버립니다.  "옳은 결정을 해야 네가 복 받는다" 라는, 이런 속삭임이 바로 마귀의 술책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평생을 주눅이 들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마귀의 말만 듣고,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라는 말은 안 들린다는 것입니다.

◈ 잘사나 못사나 성도의 운명은 십자가에서 이미 확증된 운명 !!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에게 뭔가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를 확증시켜주는 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뭐 새삼스럽게 "잘 살아보란 말이야, 바르게 살란 말이야" 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바르게 사나, 잘못 사나 네 운명은 십자가에서 이미 확증된 운명이야" 라는 것입니다.  잘나도 십자가 아니면 구원을 못 받고, 못나도 십자가 아니면 구원 못 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구원은 우리 선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선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왜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첫째시간은 서론 격으로 했는데, 다시 강조하지만, 성도는 가만있어도 성령께서 말씀을 적용시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의인되려는 심적 고통에서 해방시켜 기쁨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5분 쉽시다.

2005. 5. 11.  08:15  서경수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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