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518강 / 519강) 은혜와 보답 / 가시 / 260616 본문
녹취:이하림
518강-YouTube강의(은혜와 보답 역대하 32:25)20260616-이 근호 목사
제518강, ‘은혜와 보답’. 은혜와 보답에 대해서 히스기야에게 주어진 그러한 경우가 아주 적절합니다. 역대하 32장에 보게 되면 25절,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 이 구절 나오죠.
여기서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했다고 하고, 그 이유가 은혜에 보답지 않았기 때문이라는데, 그 은혜가 무슨 은혜냐? 도대체 어떤 은혜를 받았기에 은혜를 싹 무시하고 마음이 교만했는가? 그 은혜에 대해서 21절에 보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왕의 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장관들을 멸하신지라 앗수르 왕이 얼굴이 뜨뜻하여 그 고국으로 돌아갔더니 그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 그 몸에서 난 자들이 거기서 칼로 죽였더라”
앗수르 왕이 하나님을 훼방했죠. 훼방하니까 천사를 보내가지고 그 앗수르 왕에게 고국에서 무슨 나쁜 소식이 들렸다고 황급하게 자기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는데, 거기서 그 왕이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그전에 앗수르 왕이 유다 히스기야 왕과 예루살렘을 포위해서 겁을 주면서 위협을 얼마나 심하게 했습니까. 막 욕을 했죠.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라도 내 손에서 못 건진다.’ 거기에 대해서 예루살렘 주민들과 히스기야 왕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어요. 너무 세니까, 너무 강대하게 상황이 안 좋으니까 그 말에 그렇다 할 수밖에 없어요.
그때 히스기야가 누구를 찾아갔느냐 하면 이사야에게 찾아가죠. 이사야와 더불어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방금 21절에 나온 말씀처럼 난데없이, 포위했던 앗수르 왕이 고국에 돌아갔다가 그만 거기서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게 기적이죠. 그런데 바로 그 기적 받은 히스기야가 오늘 본문 25절에서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현재 유다는 앗수르라는 강대국과 싸웁니다. 누가 봐도 전쟁은 유다와 앗수르와의 전쟁이에요. 그런데 이 유다 왕 히스기야가 몰랐던 게 뭐냐 하면 이 전쟁이 앗수르와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전쟁이라 하는 것을 예전에 상상도 못했어요. 왜냐하면 자기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했으니까요.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 본인이 하나님의 적이 되어서 싸울 것이라는 것을 누가 감히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제가 하나님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 하나님 아시죠? 저는 하나님 편인 것을 하나님 잘 아시죠?’ 이렇게 고백하는 내가 하나님의 적이 된다, 이것은 상상하기 힘들죠.
그런데 그 앗수르가 물러가고 난 뒤에 23절에 “여러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와께 드리고 또 보물을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드린지라 이후부터 히스기야가 열국의 눈에 존대하게 되었더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기적을 자기가 듬뿍 아니까 하나님의 기적을 품은 나는 전에 보다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라는 생각, 그것을 25절에서는 ‘교만’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자, 누가 교만케 했을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히스기야는 교만의 바탕이 있었던 겁니까? 어느 쪽이에요? 처음부터 히스기야는 자기의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고 이렇게 교만한 줄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히스기야는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겁니다. 아쉬워서 하나님께 기도했고, 게다가 선지자까지 모실 정도로 겸손했고, 본인이 본인 보기에 ‘나같이 믿음 좋은 사람 나와보라 그래. 나같이 겸손한 사람 나와보라 그래.’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죠. 자기가 자기보고 ‘나같이 교만한 사람 나와보라 그래.’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이 벌어지니까 갑자기 기적을 받았어요. 이게 문제에요. 기적을 줬을 때, 기적은 내가 훌륭해서 준 게 아니에요. 그냥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게 기적이거든요. 기적을 받을 때는 ‘아이고, 하나님. 왜 이렇게 나옵니까? 나 아무것도 아닌데….’ 오히려 기적을 받을 때 더욱 더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렇게 되어야 될 텐데, 기적을 자기 안에 품어버렸어요. 기적을 소유하게 된 겁니다. 그다음부터 ‘나는 적어도 하나님의 기적을 받은 대상자다. 까불지 마. 나한테 하나님의 기적 있어. 나 이 정도야!’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런 히스기야에게 24절에 “그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 고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기도해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으로 보이셨으나”. 병들었는데 살게 된 기적을 또 받았어요. 앗수르 왕이 떠난 것도 기적, 죽게 되었는데 또 기도하니까 낫게 된 것도 기적, 기적 연발이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음은 겸손해졌습니까? 아니죠. 참, 이런 사실을 보면서 우리가 스스로 우리 자신을 파악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용없는 짓인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인지 아시겠지요.
연거푸 기적에다 또 기적을 받았어요. 앞에 있는 기적은 히스기야 나라, 유다 나라가 사는 기적, 두 번째 기적은 죽을 내가 사는 기적. 백성도 살고 나도 살고, 곱빼기 기적. 제목을 ‘곱빼기 기적’으로 할까요? 곱빼기 기적. 이건 누가 봐도 하나님이 완전히 누구 편 됐다? 내 편이다. ‘나 건드리면 하나님이 가만있지 않아.’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26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거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는데, 뉘우쳐도 하나님의 노는 취소되지 않았어요.
자, 이야기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첫 번째 기적은 유다 나라 백성 전체가 살았어요. 두 번째 기적은 뭐라고요? 히스기야 왕이 살았어요. 이걸 뉘우친다고 해서 사람이 다른 사람 되는 게 아니에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31절. 앞에 27절부터 30절까지는 엄청나게 부와 영광을 많이 받았어요. 받은 부귀영화를 곳간에 다 채웠어요.
28-29절,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산물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온갖 짐승의 외양간을 세우며 양떼의 우리를 갖추며 양떼와 많은 소떼를 위하여 성읍들을 세웠으니 이는 하나님이 저에게 재산을 심히 많이 주셨음이며” 30절에 “…저의 모든 일이 형통하였더라” 했어요.
형통한 게 좋은 게 아닙니다. 여전히 마음은 교만해있었습니다. 그 교만이 어디 나오느냐? 31절, “그러나 바벨론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을 물을 때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
바벨론 방백을 보낸 것은 누가 보냈다? 하나님이 보내신 거예요. 왜 보냈느냐? 유다 나라가 죽을 판에서 살고, 히스기야가 죽을 뻔하다 살았을 때, 어느 정도로 겸손해야 하느냐 하면 ‘우리나라 유다는 망해야 됩니다. 나라는 인간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이 선까지 내려가야 이게 바로 겸손함이에요.
그런데 히스기야가 바벨론 방백 오니까 창고문을 활짝 열어준 거예요. “봐! 나 이 정도야.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이 정도의 많은 기적들을 받았어. 어때? 나 건드리면 안 되겠지?” 그런 식으로 보여줬을 때, 그 바벨론이 창고에 있는 것 다 가져가고요, 죽었다가 살아났던 백성들 중 똑똑한 백성들 다 바벨론에 데려갔습니다.
이것이 뭐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났다.’에요.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났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항상 인간은 진작 죽어야 해. 이 나라는 원래 망해야 돼.’ 그 수준을 유지할 경우에만 그 사람을 하나님이 떠나지 않은 상태, 지금 그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519강-YouTube강의(가시 예레미야 12:13)20260616-이 근호 목사
제519강, ‘가시’. 원래 이스라엘 땅이 가시가 나올 땅이 아니에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가시’라는 표현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은 ‘땅이 나빴다.’, ‘너희들이 농사짓는 데에 게을렀다.’가 아니라, 뭘 보고 젖과 꿀을 주고 뭘 보고 가시를 주느냐? 그 약속의 땅에 사는 주민들,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젖과 꿀이 될 수도 있고 가시가 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 보기에는 뭐 곡식이 자라고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으면 저걸 ‘열매’라고 하잖아요. 성경은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예레미야 12장 2절에서는 백성들 자체를 열매라고 표현한 거예요. 예레미야 12장 2절에 보면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선지자가 그 당시 상황을 가지고 하나님께 일러바치는 겁니다. 그게 선지자가 해야 될 일이고,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오늘날 저와 여러분 성도들이 기도 내용으로 그걸 채워야 돼요. 저보고 기도할 필요 없다 하는데, 회사 직원은 일이 있기 때문에 월급 주는 거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계속 살게 하는 것은 이 땅에 살면서 고자질하라고 살려주시는 거예요. ‘주님, 사정이 이렇습니다. 인간들의 사고방식이 이렇습니다.’ 그게 요한계시록의 전체 내용이에요.
주님이 떠난 세상, 성도는 못 떠나요. 계속 성도가 생기면서 보고를 해야 된다고요, 저 위, 하늘을 향하여. 보고를 하게 되면 하늘나라에서 뭘 받느냐? 성도들이 보고한 그 보고가 하늘나라 향에 담깁니다. 향에 담기면 그 향에 담긴 양이 찰 때, 향을 거꾸로 뒤집어버려요. 그러면 땅에 내려올 때 심판이 돼요. 저주가 되고.
‘내 백성 왜 건드려?’ 딱 그겁니다. “내 백성 왜 건드려? 옛날에 내 아들 예수님 건드렸던 이 세상아, 이번에는 내 백성 건드리는구나. 너희들은 그래놓고도 살 수가 없지. 내가 심판 내리겠다.” 이 내부 순환이 돼요, 요한계시록이.
그걸 누가 보여주느냐? 예레미야 시대에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내부 순환이 된다고요. 그러니 예레미야는 바빠요. 하늘나라에서 보내준 종군기자. 요즘에 종군기자인데 국회위원 된 사람 있죠, 여자 국회위원. 유명한 사람 있어요. 종군기자. 목숨 내놓고 시리아에 가서 종군기자한 사람. 여자 분인데, 굉장히 위험하죠.
성도는 더 위험하죠. 성도는 더 위험해요.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보니까. 그래서 어떻게 고자질하느냐 하면, 쉽게 말해서 이래요. “하나님이여, 저 가나안 땅이 원래 하나님 땅이잖아요. 하나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백성답게 살라고 그들을 하나님께서 살게 하셨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그들은 하나님 버렸습니다. 어떻게? 입술로는 ‘하나님, 하나님’하는데 마음으로는 이미 딴전입니다. 끝났습니다.”
어떤 구절에 보면 ‘등을 돌렸다’ 했어요. 등을 돌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등 돌리면 그 시선이 어느 쪽을 향해요? 하나님 쪽과는 대립되는 정반대쪽을 향하겠죠. 오늘날 소위 교인이라는 사람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예레미야가 살아있다면 똑같이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뭐 힘들다, 어렵다 그런 소리하지 말고, 지금 네 가슴 쪽이 향하고 있는 그쪽 방향이 세상과 반대방향이냐, 아니면 세상 쪽이냐?”를 묻는 겁니다.
그래서 12장에 계속 보면,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서 농사지으면 농사가 잘 되어야 되잖아요. 4절,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거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약속의 땅에 살아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젖과 꿀의 혜택을 입어야 되는데 ‘아이고, 뭐 우리 대(代)에 처참한 광경이 일어날 리 있을까? 우리 후손들에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 있겠지. 우리는 아직까지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그 정도까지 막 가지는 않을 거다. 우리는 안전빵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뭘 모르느냐 하면, 갑자기 자연현상이 변해서 갑자기 우박이 내리고 그런 것이 꼭 있지는 않겠지만, 다른 나라에서 유다나라를, 하나님께 마음이 먼 나라를 침공한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왜 못했는가? 그 나라와 친하기도 하고 그 나라의 모든 문화를 다 수입하고, 특히 그 나라가 믿는 바알종교를 같이 좋다고 외래문화라고 해서 인기 있어서 섬긴다면, 같은 편인데 그쪽 바벨론이 이쪽 유다를 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늘 고분고분하고 굽신굽신했으니까.
그런데 그들이 빠뜨린 게 있어요. 하나님이 분노하신다는 사실이에요. 분노하신다는 사실을 그들은 빠뜨린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이 12장 13절인데요. “무리가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즉 그 소산으로 인하여 스스로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분노를 인함이니라”고 되어 있어요.
세상에 있는 인간들의 선언, 인간들의 주장은 뭐 말 뿐이에요. 신빙성이 없어요. 말만 꺼내고, 아니면 아닌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진노했다’ 이러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지만 그들이 ‘이 정도 농사 안 된다 그래도 언제 또… 되다, 안 된다, 되다, 안 되다 하니까 이게 뭐 끝까지 가지는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했죠. 그러나 7절에 보면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산업을 내어 던져 내 마음의 사랑하는 것을 그 대적의 손에 붙였노니” 대적의 손에 붙였노니, 이렇단 말이죠.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예를 들 때마다 자꾸 생각나는 게 어쩔 수 없어요, 봉화에 있는 ‘어린이 문구사’. 그 어린이 문구사, 장사가 잘돼요. 지금은 모르겠습니다만, 장사가 잘됐어요. 그런데 거기에 점원이 하나 들어왔다고 봅시다.
점원이 들어왔는데, 자기가 열심히 하든 안하든 장사가 잘돼요. 그리고 또 주인님이 장로님이고 그 부인이 권사님인데, 얼마나 인간성이 좋고 사람이 좋은지요. 만약에 점원이 들어왔다 하면 다 챙겨주고 밥 먹었나 물어봐서 뭐 해주고 복지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잘 해주고, 따박따박 월급을 다 알아서 주고, 장사가 잘 되니까 보너스 주고.
그러니까 아까 히스기야처럼 점원의 마음이 낮아지겠습니까, 교만해지겠습니까? 교만하겠죠. 교만하니까 ‘이거 뭐 내가 좀 게으르고 삥땅 좀 하고 애들 손님한테 불친절해도 당장 나보고 나가라는 소리는 안 하겠지.’ 이런 생각을 인간은 하기 마련이에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인간들은 다른 제3의 요소를 생각 못해요. 점원 부르니까 점원 가슴이 덜컹하겠죠. ‘나 농땡이 친 거 어떻게 알았지? 그땐 내가 미리 회개해서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야지.’ 이런 생각하고 갔는데, “오늘부로 너 나가야 되겠다.” “사장님, 이제 잘할게요.” “그게 아니고, 오늘부로 팔렸다. 그것도 갑자기 팔려가지고, 계약금 100만원 받고 보지도 않고 갑자기 팔렸다. 그러니까 난 너한테 원망 없는데, 우리는 바이바이 해야 돼.”
지금 유다 나라가 그 판이에요. 유다 나라가 내 나라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산업이 아니고 내 산업인데 이걸 누구 손에 팔아버렸다? 바벨론에 팔아버렸다.
자, 우리 인생을 꼬깃꼬깃 철두철미하게 내 거라고 여기잖아요. 그런데 근원적으로 생각해봅시다. 한시라도 내 인생인 적이 없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너한테 맡긴 것이다. 너는 종으로서 어떤 인생이든 충실해 달라.” 예레미야는 바로 이 사실을 미리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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