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516강 / 517강) 부끄러움 / 두로의 변신 / 260519 본문
녹취:이하림
516강-YouTube강의(부끄러움 예레미야 14:4)20260519-이 근호 목사
제516강, ‘부끄러움’. 보통 부끄러움 같으면 개인적으로 타인이 있을 때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저 사람 보기에 내가 참 수치스럽다.’ 그런데 원래 창세기 보면 아담과 하와가 자기 부부만 있었어요. 타인이 없었어요. 타인이 없는데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거예요. 수치를 느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 앞에서 부끄럽다. 혼자 있을 때는 옷 갈아입지만 남 앞에서는 옷도 못 갈아입는다, 부끄럽다.’ 하는 이 논리가 근원적으로 문제 있는 거예요. 부끄러움은 그보다 더 깊은 데에 근거, 원천이 따로 있다고 보셔야 돼요. 그 원천은 이방사람들은 모르고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계시, 율법이 주어지면서 이스라엘에게 특화된,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않으면 몰랐던 부끄러움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새롭게 다른 차원의 부끄러움이 노출됩니다.
예를 들어서 ‘동창생 만났는데 옷차림새가 나보다 못하다. 부끄럽다.’ 이건 뭐 계시를 받을 것도 없이 이방인들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도 없는 인간들 사이에 얼마든지 그런 현상이 일어나잖아요. 그러다 보면 인간들은 그저 인간들 눈앞에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서 부끄럽다, 덜 부끄럽다, 또는 자랑스럽다는 그러한 느낌을 갖는데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가 없을 때,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지 않을 때 인간들 입장에서 자연스러운 부끄러움, 또는 자랑스러움이 되겠죠.
허세죠. 허세고 위선이고 그런 겁니다. 사람 있으면 고상한 체하다가 사람 없으면 제 마음대로 사는 것. 그건 이미 계시 없는 세계에 물들여진 상태에서 타인의 존재를 전제로 해서 부끄러움이 발생되겠죠. 범죄한 인간이 교도소 가도 전혀 안 부끄러운 이유가, 거기엔 자기와 똑같이 죄지은 인간들밖에 없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쟤보다는 죄 덜 지었다는 데에서 오는 어떤 뿌듯함? 나도 인생 나름 선방했네? 저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잖아, 이런 거. 스스로 위로할 수가 있죠.
그런데 계시가 왔을 때 이 부끄러움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있고 없고 관계없이 근원적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하나님의 계시가 도달했을 때 비로소 밝혀집니다. 그 예가 예레미야 14장 4절입니다. 예레미야 14장 1절에 보면 가뭄에 대해서 나와 있고요. 그리고 2절에 보면 유다가 슬퍼하며 예루살렘에 부르짖음이 있다 했고요.
그다음에 3절, 4절을 유념해서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14장 3절,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길으라 하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 머리를 가리우며” 4절에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 머리를 가리는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절망적인 상황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절망적인 상황, 예를 들면 비가 있으면 모내기한다. 그런데 비 없으면 모내기 못하고 농사 망친다, 이렇게 되잖아요. 농사 망치면 되죠. 망치면 왜 안 되는데요?
인간들이 뭔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어요, 오해.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내가 비리비리하게 못 살면 이건 나한테 수치가 되고 부끄럽다고 하는 그 기준 있잖아요. 그 기준 누가 정한 거죠?
이 본문에 의해서 인간들은 자기 위주로 어떤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미흡하면 본인이 거기에 대해서 수치감을 느낀다는 그 사실을 오늘 본문은 이야기합니다. ‘나는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돼.’라는 그 기준.
그런데 3절에 귀인들이 자기 종들을 보내어 물을 길으라 하는데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바짝 메말랐기 때문에 물이 있을 턱이 없죠. 물이 없으니 빈 통을 들고 왔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귀인들이 그걸 보고 하는 말이 “부끄럽구나.” 부끄럽다는 거예요. “물이 없다.” 이러면 될 걸, 부끄럽다는 거예요.
자연에 비가 오지 않는다, 날씨가 덥다, 구름에 가렸다 이런 자연현상에 대해서 인간은 거기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면서 내가 필요한 물, 내가 필요한 햇빛, 내가 사는데 아주 만족스러운 적정 온도가 되지 않을 때 인간은 자처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 부끄러워라.” 이렇게 돼요. 부끄러워라.
그러면 이 세상에 자연현상과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이 그 인간 안 부끄러우라고 돌아가는 겁니까? 인간은 분수를 넘었어요. 세상 돌아가는 것이 자신의 기준대로 딱딱 떨어져야 된다는 그 옹고집. 억지죠, 억지. 그건 말도 안 되잖아요.
영화감독이 아역을 뽑는데 아니, 내 손녀 빼놓고 다른 손녀를 캐스팅해서 넣었을 때, 그럼 이제 할아버지는 ‘내 손녀 빼고 다른 손녀 들어갔으니까 영화 망해라.’ 했는데 영화 너무 잘됐어요. 시청률이 막 10% 넘어요. 그 집 손녀는 아주 경사 났어요. 그런데 자기 손녀가 캐스팅되기를 은근히 기대했던 이 집안은 ‘아, 부끄럽구나. 내 인생 내가 보기에 참 수치스럽다.’
이럴 때 하나님의 계시가 도대체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된 표준, 나는 이 정도 되어야 나답다는 그 기준 자체의 문제성을, 이방민족 말고 이스라엘한테는 가뭄이라는 자연현상으로 이걸 깨우쳐줍니다.
우리 하나님이 함께 있는 나라에서 먹을 물조차 없다는 것. 남수단도 아니고 에티오피아도 아니고 이슬람 무장단체가 설치는 소말리아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전국적으로 다 여호와를 인정한다는 나라에서 먹을 물도 없다, 그럴 때 백성들은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그 부끄러움이 자동적으로 발생된 데에 대해 도리어 질문하죠.
“내가 비 오지 않게 했는데 부끄럽기는 네가 왜 부끄러워해? 너 지금 엉뚱한 생각을 품고 세상 하루하루 살아온 것 아니야? 네가 여호와한테 뭘 기대했어?”
“저 하나님 믿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저 예수님 믿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예수 믿을 때 난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습니다.”
“그래? 가뭄 한번 줘봐? 3년 6개월 째 안 비 안 오게 해줘봐?”
그럴 때 네 입에서 ‘하나님 참 잘하셨습니다.’ 이런 고백이 나올 것 같으냐 이 말이죠. 나오겠어요?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하나님 이렇게 나오면 우리 곤란하죠. 나 안 믿는 수가 있어요, 이렇게 나오면. 하나님 쪽에서 먼저 건드렸잖아요, 나를. 나도 어지간히 성격 좋지만 더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습니다.”라는 이런 본성이 나오겠죠.
바로 그 본성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러한 자체적인 이유 때문에 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망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나라가 있어서 백성들은 ‘우리나라 최고. 이 나라와 더불어 우리 열심히 후손까지 살자.’라고 의지하고 기대고 믿는 구석이 있는데, 주님께서는 그 믿는 구석을 날아가게 했어요.
누가요? 너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 믿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한테 혜택을 주는 그것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믿게 했던 겁니다. 중요한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살아있음 그 자체가 좋은 게 아니고, 살아있어서 나를 안 부끄럽게 만드는 어떤 현상들을 채워주길 은근히 고대하고 희망하고 기대했고 우리는 그 기대한 것을 감추면서 ‘저 하나님 믿습니다.’라고 자기 주제도 안 되면서 믿었던 거예요. 주제도 안 되면서.
끝으로 이 이야기하겠습니다. 골프를 처음 배워서 신이 났는데, 골프 내기에서 평소 실력대로 잘 안되었어요. 그때 골프 처음 배운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부끄럽구나.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내가 골프 배우는 게 뭐 나쁩니까? 그런데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 부끄럽구나.” 이러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도대체 내가 안 부끄러우려면 안 부끄러울 조건을 얼마나 그동안 해대야 됩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종이에요?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존재한다는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그런데 인간은 ‘이왕 존재하는 거 내가 기분 좋게 만족스럽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거래하듯이 이렇게 한 거예요.
이스라엘 예레미야서에서 ‘부끄럽다’는 말은 네 본래의 자리, 아예 없던 자리로 가라. 없음의 자리로 가라. 그러면 부끄러워할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게 다 주 앞에 고맙고 감사할 하나님의 은혜로만 보일 것입니다.
517강-YouTube강의(두로의 변신 에스겔 27:31)20260519-이 근호 목사
제517강, ‘변신’. ‘변신’이라는 것은 중국에 옛날 연극할 때 가면 쓰고 나오는 것 있죠.(경극 변검(變臉): 중국 전통극 중 배우가 가면을 순식간에 바꿔 쓰는 기술). 이런 프로그램도 있잖아요, 옷을 확확 바꿔 입는 것, 또는 가면을 순식간에 바꿔 쓰는 것. 관객들이 놀라죠. 그걸 ‘변신의 귀재다’ 이렇게 하죠.
인생 자체가, 인간은 자기를 주인공이라 여기면서 환경 따라 변신해요. 바뀝니다. 그런데 인간 내면에 마귀가 넣어준 어떤 고집이 있어요. 그걸 어렵게 표현하면 ‘동질성’ 또는 ‘자아의 동일성’이라 합니다. 이것은 사실은 억지에요.
왜냐하면 세월 가면 얼굴도 달라지고요. 오랜만에 동창생 만나면 전에 알던, 기억 속에 있던 고등학교 때 모습이 아니니까 다른 사람인 줄 알고 얼른 못 알아봐요. 나중에 여러 가지 기억들, 증거들을 주고받는 데서 경상도 말로 “아, 갸가 갸가? 그 때 너가 너였어?”라고 이야기하죠.
인간은 흐름이지, 잠시도 똑같은 걸 유지하지 않았습니다. 바람은 흘러간다, 맞죠. 강물도 흘러간다, 전도서에 나오잖아요, 맞죠. 그럼 인간은 어떻습니까? 인간도 자연의 일부기 때문에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그냥 변신해요. 자꾸 변화한다고요.
자꾸 변화하는데, 사람들에게 마귀가 넣은 고집이 뭐냐 하면 한때 자기가 스스로 자기 보기에 흡족했던 순간이 와요. 그러면 그것이 진짜 내가 나답다고 아주 대만족을 하면서 거기서 자기가 스톱을 해버려요. ‘나는 이래야 돼. 이것보다 더 발전되면 발전되었지, 이것보다 퇴보하면 나는 못 살아. 나는 힘들어 못 살아.’ 한순간에 바짝 자기가 잘되었다고 해서 그걸 고정적으로 계속 유지해야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제가 말로 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들이 어떻게 어떻게 변신되고 변화하고 어디로 처박히는가, 어떻게 끝나는가에 대해서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에스겔 27장 31절, “그들이 다 너를 위하여 머리털을 밀고 굵은 베로 띠를 띠고 마음이 아프게 슬피 통곡하리로다 그들이 통곡할 때에 너를 위하여 애가를 불러 조상(애도)하는 말씀이여 두로 같이 바다 가운데서 적막한 자 누구인고” 그다음 계속 보면 “네 물품을 바다로 실어 낼 때에 네가 여러 백성을 풍족하게 하였음이여 네 재물과 무역품이 많으므로 세상 열왕을 풍부케 하였었도다” 그다음 36절, “열국의 상고-상인들, 무역상들-가 다 너를 비웃음이여 네가 경계거리가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라 하리로다 하셨다 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두로라는 것은 지금의 레바논을 이야기합니다. 레바논 해변가에서 약간 떨어진 섬나라인데 거의 10m 가까이 되는 엄청난 성벽을 쌓았어요. 난공불락이죠. 난공불락의 성벽을 쌓고, 그 자리는, 지금의 스페인에서 지금의 이란, 이라크, 그때의 아시아, 그리스를 거쳐서 튀르키예, 인도까지 가는 그 중간 길에 두로가 있어요.
두로는 오늘날 싱가포르처럼 무역상을 해서 떼돈을 벌었어요. 최고 잘 살았어요. 인구는 별로 안 되는데 떨어지는 돈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서역에 있는 인도, 중국 저쪽에 있는 사람들이 유럽에 물건 팔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될 곳이 두로였습니다. 가면서 이윤 남기고 오면서도 이윤 남기고. 그 가운데서 중계무역해서 거기서 가공을 하면서 남는 이익 또 따로 있고요. 환차도 있고 하여튼 서류 조작만 해도 돈을 버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었어요.
에스겔 27장 18절에 보면 “너의 제조품이 많고 각종 보화가 풍부하므로…” 이게 왜 제조품이 많고 보화가 풍부하냐 하면 주문생산이거든요. 본인이 공장에서 만드는 게 아니에요. 어느 나라에서 생산되는 걸 미리 알기 때문에 자기가 그 물건을 (주문받아) 미리 갖다놓으면 동쪽에서 받아가고 서쪽에서 받아가면서 거기서 이윤 떨어지잖아요.
17절에 보면 “유다와 이스라엘 땅 사람이 네 장사가 되었음이여 민닛 밀과 과자와 꿀과 기름과 유향을 가지고 네 물품을 무역하였도다” 이 물품들은 두로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두로는 조그만 섬인데 뭐가 생산되겠어요. 온 각처에서 나오는 모든 귀한 것들이 다 모아지는 하나의 터미널 같은 곳이 바로 두로입니다.
14절도 마찬가지고 15절도 마찬가지고요. 12절에 “다시스는 각종 보화가 풍부하므로 너와 통상하였음이여…” 하여튼 잘사는 나라들의 값진 무역품들이 두로에 다 왔다 이 말이죠. 다 왔을 때 이천년 동안이나 너무 잘 사니까 주변 나라에서 침범을 해서 잘사는 보화를 빼내기 위해 공격을 했는데, 바다로 둘러싸이고 섬이고 요새가 단단해서 어떤 나라도 성공한 나라가 없어요. 아무도 정복 못했습니다. 나중에 멸망당한 것은 바벨론한테 멸망당하고 그 전에는 없어요. 앗수르라는 강대국도 이기질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두로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이사야, 그리고 에스겔 이런 데서 뭐라고 하느냐? “우리는 하나님이다. 우리는 신이다. 우리보다 더 화려하고 잘 살고 행복한 민족은 없다. 우리는 대대로 영원토록 잘살게 될 것이다.”하고 자신만만한 고백을,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에스겔이라든지 여타 선지자들이 두로에 대해서 집중해서 이렇게 언급해놨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이사야나 에스겔에서 마귀를 빗대서 이야기했어요. 두로의 마음자세를 악마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계시에 나와 있습니다. 이들의 문제점이 뭐냐? 한결같이, 지금의 잘 될 때가 그게 딱 진짜 내 모습이라는 것을 자부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25절에 보면 “다시스의 배는 떼를 지어 네 물화를 실었음이여 네가 바다 중심에서 풍부하여 영화(영광)가 극하였도다” 인간의 예상 밖으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랬던 그가 풍랑이 불고 천재지변이 일어나면서, 무역하려면 배가 있어야 하는데 그 배가 몽땅 다 부서지고 무너진 거예요.
그래서 아까 봤던 31절에 “그들이 다 너를 위하여 머리털을 밀고 굵은 베로 띠를 띠고 마음이 아프게 슬피 통곡하리로다” 다른 사람들이 두로 걱정해서 도리어 그들이 통곡하는 거예요. “아이고, 우리의 이상적인 나라인데 망했대, 망했대. 폭싹 망했대.”라는 거예요.
자, 이 이야기가 에스겔 예언서에 들어있어요. 왜 이 예언이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델로 삼은 나라가 두로였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하나님’하지만 말만 하나님이지 안중에도 없고, 우리가 저 나라처럼 잘 살아봤으면 더는 소원이 없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두로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없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목적의식, 그리고 그들의 기대치의 최종적인 것을 두로라는 현실로 그대로 다 보여준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안 좋아요. 두로같이 사는 것이 좋아요. 하나님이 사랑스럽지 않아요. 두로 같이 사는 그 사람이 부러운 거예요. 북이스라엘 아합의 부인도 두로 사람이잖아요. 그 두로가 바알을 섬겼습니다. 왜? 복을 주는 신이니까.
그래서 이제 결론적으로 에스겔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를, ‘하나님을 안 믿어서 망했다’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동안 왜 여호와를 안 믿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찾아요. 왜 사람들은 건성으로 예수 믿고 건성으로 예수 안 믿는지 그 이유가 뭐냐?
마음이 딴 데 가 있어서 그래요. 마음이. ‘아, 나도 저 사람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 하나님 뭐하시노? 나 좀 도와주시지.’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그럼 그들이 망하면 예수님 믿고 망하면 하나님 믿습니까? 아니죠. 아닙니다. 따라서 망해서 예수 믿는 것, 그건 예수 믿는다 할 수 없어요.
진짜 예수 믿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보다도 세상 부귀영화에 정신 팔려있다는 그것이 진짜 내 모습인 것을 발견할 때, 그 발견은 진짜 살아계신 주님께서 말씀에 입각해서, 두로를 예시로 한 계시에 입각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지적할 때 그 지적해주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진짜 예수님의 활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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