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506강 / 507강) 주님의 얼굴 / 멍에 / 251021 본문
녹취:이하림
506강-YouTube강의(주님의 얼굴 시편 90:8)20251021-이 근호 목사
제506강, ‘주님의 얼굴’.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려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보죠, 표정을 읽고. 좋은 사람이라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할 것이고, ‘좋은 관계가 아니다’ 또는 상대방의 표정이 어둡다 하면 ‘그 사람은 상종하지 못할 사람이다’라는 것을 뭘 보고 아느냐 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대략 결정합니다.
상대방의 얼굴을 본다고 해서 내게 손해가 되고 이익이 되고 그런 게 있을 수 없죠. 내 눈이 상대방의 얼굴을 본다, 내가 상대방을 보면 내 눈이 갑자기 시력을 잃어야 되고 그런 게 됩니까? 그렇지 않죠. 봤다가 내 마음에 안 들면 제키면 되고 마음에 들면 계속 그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귀면 되고. 내 쪽에 어떤 이익이나 손해는 없어요. 그리고 상대방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현재 내 얼굴이 나한테 있고 이 얼굴이 있는 한 나도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 아니다’ 뭐 그런 생각이 들겠죠.
그런데 만약에 어떤 분의 얼굴을 봤는데, ‘내가 그 사람 얼굴을 보고 내 마음에 들면 사귀고 들지 않으면 사귀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그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내 낯짝, 나를 엉망으로 파괴한다면? 그런 얼굴이 있다면? 우리는 예상 못합니다.
본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너 가만히 있어. 나 혼자 보겠어.’가 ‘본다’가 아니에요. 내가 남을 본다는 것은 남에게 나의 얼굴을 보여주는 겁니다. 보여주게 되면 저쪽에서 내 얼굴 및 나의 전체에 대해서 어떻게 박살낼지, 나에게 상처를 줄지 그것은 우리가 미리 예상을 못 해요. 나의 얼굴에 손상을 가하고 내 얼굴을 박살내는 그 얼굴. 그 얼굴이 주의 얼굴입니다. 이게 주님의 얼굴이에요.
우리가 평소에 사람하고 상대하고 사람하고 만나잖아요. 그러니까 상대방 만난다고 해서 내 얼굴이 다칠 이유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뭐 소주병 깨고 달려들지 않는 한, 그 사람 만나고 난 뒤에도 내 얼굴은 멀쩡하죠.
시편 90편 8절을 보면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의 얼굴의 기능, 할 일은 우리 얼굴을 멀쩡하게 붙들고 있게 하는 게 아니고 반대로 우리 속에서 죄라는 죄는 몽땅 끄집어내는 그러한 힘이 나오는 얼굴.
그 얼굴을 저나 여러분들이 자진해서 만나고 싶어 하겠습니까? ‘나 그 사람 만나면 내 죄가 막 나와. 그 사람은 나를 가만두지 않아. 잘난 나를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려.’ 그렇게 하게 되면 겁나서 못 만나겠죠. 만나더라도 멀찍이 만나겠죠. 그게 바로 우리 자신이 타인을 만날 때 선제적으로 우리가 타인을 평가하는 관찰자로 행세하기 때문입니다. 관찰자 또는 관람자.
말까지 끄집어내지 않는다면 구경꾼이 되겠죠. 카페에서 두 사람이 만났는데 한쪽에서 이야기한다. 그러면 자기는 말 안하고 상대방 보고 하는 말이 “이야기 해보세요. 이야기 해보시라고요.” 이러면 나는 뭐가 됩니까? 턱 괴고. 구경꾼 되는 거예요. ‘자,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내가 속으로 한번 평가를 해보죠.’하고 구경꾼 되는 거죠.
이게 인간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평소에 해오던 요령입니다. 나는 안 다치고 상대를 함부로 평가할 수 있는 구경꾼 또는 관람자 또는 측정자, 이게 평소에 우리의 버릇이 되고 말았어요.
자, 지금 인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자기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얼굴은 상처 난 얼굴이었어요. 일그러진 얼굴이었고 십자가에 매달려서 고통을 보여준 얼굴이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그 상처 난 얼굴에 호응하지 못하고 그 의미도 모르고 관람객 또는 관찰자로 남았어요. ‘아, 예수님 참 안 됐다.’
어떤 아주머니들은요, 예수님이 고통스럽게 십자가 지고 가니까 너무 애틋해서 막 울었어요.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멀쩡한 너희 딸들을 위해 울어라. 지금 내가 굉장히 고통스러워 보이니까 이 십자가 문제가 내 문제로 보이냐? 나중에 너희들에게 닥칠 일을 내가 일그러진 얼굴로 너희에게 먼저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날 보고 울 생각하지 말고 너희 딸의 미래, 너희 딸의 장래가 십자가 지는 나의 일그러진 얼굴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더 어렵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달린 고통을 보고 모든 사람, 관람객들이나 관측자들이 하는 말이 “저 사람은 죄를 지어서 저렇게 고통스럽다.” 하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그 일그러진, 망가진 얼굴은 자신의 죄 때문에 망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 죄 때문에 망가진 거예요, 우리 죄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 볼 때 뽀시시한 얼굴을 보고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심을 하고 ‘휴우, 다행스럽다. 오늘도 내가 안 망가져서 참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시편 90편 9-10절 보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 하였나이다” 그냥 확 지나가는 거예요.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여기에 ‘70년 살았다, 80년 살았다’가 이 자체로 보면 굉장히 긴 기간이고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절,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주님의 진노하심이 나한테 원인이 있습니다.’라고 진노하심과 주님 얼굴 앞에 서 있는 내 죄와 관련시키는 자가 누구냐?” 이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느냐?”라고 우리에게 반문하고 있어요.
우리는 평소에 자기 이미지 관리에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나 괜찮은데. 나 정상인데. 나 멀쩡해. 나 이 멀쩡한 거 유지할 거야. 나는 잘났기 때문에 누구를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 그 사람 눈에는 타인의 얼굴, 사람의 얼굴만 보이지, 주님의 일그러진 얼굴은 벌써 잊어버렸어요. 그걸 생각 못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이런 생활을 평소 우리 일상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놓고 ‘70 살았다. 나는 80까지 살 거야.’ 그게 다 주님의 얼굴 앞에 분노의 기간, 진노 받을 만한 이유를 축적하는 그러한 인생의 기간이라는 거예요.
주의 얼굴, 하늘나라의 멋있는 천사 얼굴 찾지 마세요. 말씀이 육신이 된, 십자가에 일그러진 얼굴. 그것이 바로 우리와 관련되어서 나타난, 우리 앞에 나타난 진짜 주님의 진짜 모습입니다. 얼굴입니다.
507강-YouTube강의(멍에 사무엘상 6:7)20251021-이 근호 목사
제507강, ‘멍에’. 사무엘상 6장에 언약궤가 블레셋 쪽에 있다가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4장, 5장에 있는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아주 희한한 일이 생겨요.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기발한 일인데요. 인간은 예상도 못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나님의 이름이 자진해서 블레셋에 포로 잡힙니다. 작전인가요?
언약궤가 포로 잡혔다는 말은… 언약궤가 있는 곳에는 주의 이름이 있어요. ‘주의 이름’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주님의 존재가 거기 있다는 주님의 존재하심이에요. 몸의 덩치는 없지만 이름은 있어요. 인간에게 있어서의 이름은 덩치도 있고 이렇게 신체도 있고 그다음에 이름이 있잖아요. 주님의 신체, 덩치는 나중에 신약시대에 붙어요. 신약시대에.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잉태할 때 그 구약에 있는 여호와의 이름과 마리아의 몸에서 난 아기의 이름이 결합되면서 이게 주님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블레셋 같은 경우에 분명히 따져봅시다. 신체가 있어요. 각각 자기 몸이 있잖아요. 그러면 블레셋은 지금 ‘이스라엘하고 싸운다’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블레셋은 이스라엘하고 싸우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있던 여호와의 이름과 싸우게 돼요. 그런데 문제는 아까 이야기했듯이 여호와의 이름은 신체성이 없어요. 신체성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체성이 없는 여호와의 이름에다가 임시적으로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신체, 육신이 있으니까, 육신을 여호와의 이름과 더불어 전쟁하는 전투요원으로 거기에 같이 가담하게 했어요. 가담하게 했는데 블레셋 입장에서는 눈에 보이는 신체가지고 보니까 자기 신체를 지닌 블레셋 군사가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군사를 죽이고 쳐부쉈으니까 자기들은 뭐가 됩니까? 승자가 되어버리죠. 승리자가.
그리고 이스라엘이 앞장세웠던 여호와 이름의 신이 있다는 그 언약궤를 포로 잡아온 거예요. 그냥 전리품으로 가져왔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블레셋에 포로 잡힌 것은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전쟁 아직 안 끝났어. 너희들 이제 큰일 났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옛날 고대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면 길지만 짧게 하겠습니다. 고대 전쟁에서는 전쟁의 마지막 책임자가 그들이 신봉하는 신이었어요. 고대 신의 특징은 자기가 믿는 신과 우리 믿는 민족 간에 거래, 계약이 되어 있습니다. 계약이 되어서 우리가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정성과 희생제물을 드리면 거래 조건에 의해서 신이 그 희생제물을 바친 우리 민족을 보호하는 그러한 계약 안에서 그들은 자기 신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전쟁할 때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앞장세우잖아요. 블레셋은 다곤 신을 앞장세워요. 전쟁에서 신에게 ‘신이여 안녕하십니까? 굳모닝, 신?’ 신이 잘 있으면 자기 민족은 잘 있는 거고, 만약에 자기 신이 무너지게 되면 자신들은 신으로부터 저주받고 심판받는 민족인 것으로 인식되는 겁니다.
사무엘상 5장에 보면, 자기가 이겼다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놓아두었는데 그걸 다곤 신, 다곤 신은 하체가 물고기 모양이에요, 다곤 신상 곁에 두었는데 아침에 가보니까 다곤 신상이 자빠져 있고 모가지는 끊어져 있죠. 이건 마치 무슨 모습이냐 하면, 누가 칼을 가지고 와서 이 다곤 신의 모가지를 치고 “너는 죽어. 너는 나한테 패배해야 돼.”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왜 멀쩡한 다곤 신상, 기초공사를 잘 했던 다곤 신상이 자빠졌느냐 이 말입니다. 블레셋 민족은 그 이유를 모릅니다. 왜 이 다곤 신이 자빠졌는지를 모른단 말이죠. 그다음부터는 언약궤가 블레셋 전역에 전염병과 독종과 재앙을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것과 다곤 신상이 넘어진 것과 관련성이 있어요. 왜냐하면 언약궤에서 파생된 재앙과 징벌에 대해서 그걸 철저하게 방어해줄 다곤 신이 이미 고꾸라져서 다 깨졌어요. 없어요. 없으니까 블레셋 입장에서는 자기 신이 있었는데 자기 신이 없으니까, 그리고 지금 이스라엘 신만 남아서 펄쩍 뛰고 있으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신에게 했던 대로 자기가 그 여호와 신을 달래줘야 되겠죠. 마치 자기가 다곤 신을 달래듯이. 달래주는 거예요.
달래줄 때 그들이 어떻게 했는가? 달래주는 방법을 모르니까 그들이 자기 신, 다곤 신 섬기는 방식으로 달래기 위해서 사무엘상 6장 4절에 보면 그들은 속건제를 드리기 위해서 “그들이 가로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가로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
그다음에 어떻게 했느냐 하면 6절에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이거는 여호와 하나님, 보이지 않는 신의 위력에 대해 옛날 애굽 나라가 저지른 잘못을 이제 블레셋 그들이 회상하는 겁니다.
‘야, 이거 건들지 말아야 될 신을 건드렸구나. 원래 가야 될 자기 주인에게 돌려줘야 된다.’ 여호와를 포로 잡은 것은, 잡힘으로 말미암아 우리 전쟁에서 패배를 경험하는 거예요. ‘우리가 소유할 신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언약궤를 옮겨 갈 때에 7절,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이렇게 했어요. ‘멍에를 메어 보지 않았다.’ 멍에라 하는 것은 농사지을 때 쓰잖아요. 인간들의 필요에 의해서 자기가 소를 이용해서 부릴 만한 요건의 멍에를 씌우는 겁니다. 이랴! 부리기 위해서.
그런데 멍에를 씌우지 않은 소라는 것은 인간의 의도가 전혀 개입되지 않는 소, 생(生)소, 생판 인간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은 소에다가 언약궤를 실어서 아까 금독종 이런 것들과 같이 실어가지고 그냥 소한테 맡겨요. 소한테. 멍에 메어 보지 않은 소가 언약궤를 메고, 원래 주인 찾아간다고 인간이 나서서 ‘이랴!’하지 않고 그냥 소 임의대로 맡겼다는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당해도 보통 호되게 당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대상이 여호와다. 그럼 누가 감당합니까? 인간으로부터 감당을 당한 경험이 없는 깨끗한 소가 이 언약궤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호되게 당하고 난 뒤에 아는 거예요.
그럼 언약궤에 주의 이름이 있으니까 우리가 주의 이름을 믿는다는 말은… 내가 주의 이름을 요령껏 잘 거래해서 주님을 나의 주로 만들겠다는 그런 기대, 그러한 책략을 한다면 이것은 바로 블레셋입니다. 블레셋이에요.
여호와를 대할 때는 주님 쪽에서 우리를 움직여서 주님이 가라하는 대로 가고 오라하는 대로 오면 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패배자가 되어야 되죠. 우리 힘으로 우리 신체가지고 뭘 이겼다, 승리했다는 것은 우린 진즉에 박살난 입장이 되어야 이 언약궤를 새삼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그렇게 소가 갔는데 그 소는 이제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가요. 이스라엘 속에 들어간다면 이스라엘 속이 언약궤를 아는 방법은?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소를 어떻게 해야 되는가? 14절에 보면 아무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고 오직 소에 의해서 움직인 그 언약궤 앞에서 그 소를 주 앞에 번제로 드립니다.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언약궤를 운반한 그 소를,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 내부에 율법에 맞추어서 계속 이스라엘과 함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번제로 드리는 거예요. ‘하나님, 더러운 우리 받지 마시고 언약궤와 그동안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이곳까지 오게 한 그 소의 깨끗한 인생을 받으시고 우리 이스라엘과 함께 하소서.’
이 전쟁은 누구의 전쟁입니까? 블레셋이 하는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한 전쟁입니다. 그때 바로 멍에, 아무 멍에 메지 않은 소의 희생. 이게 바로 ‘멍에’의 의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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