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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1:12-16 / 완성된 성전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1:12-16 / 완성된 성전

정인순 2026. 5. 3. 20:43

음성 동영상 Youtube

 

완성된 성전 

 

이근호
2026년 5월 3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12-16

(1: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하나님의 계시가 ‘있음’으로 계시가 유효하게 마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계시를 받는 인간이 이 계시 완성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완료시키고 완성시키고 계시로 전체를 입히게 되느냐도 같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계시의 활동에 있어 계시 방해 공작도 필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계시 완성은 예수님의 피흘리심의 모습으로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초라함이 계시 완성으로 인하여 졸지에 사라지고 화려하고 웅대하고 거대한 영광과 힘을 방출하게 됩니다. 그런데 영광된 예수님이 나타나는 그 배경에 일곱 촛대도 같이 등장된다는 것은 구약의 성전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최종 완성된 모습을 띠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에는 그냥 빈 공간이 아닙니다. 부속되는 기구들도 거기에 들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금촛대입니다. 일곱 교회를 언급 안에서 성전 안의 위치는 금촛대의 위치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성전이 완성되면 그 부피 안에 들어 있는 금촛대도 같이 완성상태가 됩니다.

바로 이런 내용의 계시가 밧모섬에 있는 사도 요한에게 주어졌을 때, 이것은 단순히 사도 요한만 구원받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도 요한 외에 또 구원될 자가 있고 그들을 오늘 본문에서 금촛대라고 표현합니다. 히브리서 12:22-24에 보면,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의 지상의 나타남은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피’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모든 말씀은 다 이루어졌다는 대표성은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흘리심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는 이 피를 믿겠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계시가 일방적으로 하늘에서부터 특정 인간에게만 주어져야 하지 일반인들의 내제되어 있는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거부당합니다.

계시가 주어졌을 때에 특이하게 나타나는 믿음은 구약 아브라함에게 나타납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1-2)

계시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믿음은 인간쪽에서 제시되는 믿음으로 방해를 받고 공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계시의 완성이 예수님 피흘리심에서만 완성되고 마감되어야 될 이유는, 개인적이고 단독적인 믿음을 차단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실 때에 ‘사랑하는 독자 이삭’까지 연관되도록 하셨습니다.

개인적인 아브라함 믿음이 새롭게 형성되는 장치를 위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 동원되어 들어갑니다. 두 사람이 같이 일을 벌리면서 결국에는 둘 다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합니다. 즉 ‘나의 믿음’을 없애기 위해 ‘내가 사랑하는 독자의 죽음에 내가 끌려들어가기를’를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제거하므로서 나도 같이 제거되는 장치 속으로 두 사람이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잃어야만 할 마당에 내가 사랑하는 자도 같이 잃습니다. 하나는 죽어도 하나는 살아 남는 식이 아닙니다. 도리어 내가 죽은 자리에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를 같이 잃어야 합니다. 그래놓고 잃었던 내 사랑하는 자가 다시 살게 되므로서 그 자식을 잃게 하려는 나도 같이 살게 됩니다.

이로써 ‘믿음’이란 결과로 나타난 것이며 내가 죽은 결과가 아니라 나를 대신 하신 분의 죽음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이 ‘대신 하심’으로 인하여 기존의 나의 부피와 공간은 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오로지 나를 대신해서 죽게 되신 예수님의 부피와 공간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거제도 조선 산업현장에 대한 안전사고 예방의 뉴스가 다음과 같다고 칩시다.

“대형 선박 건조가 이뤄지는 조선소에서는 고소 작업과 중장비 사용이 빈번해 추락과 협착 사고 위험이 큽니다. 특히 밀폐된 공간 작업에서는 유해가스 질식 사고 가능성이 제기되기에 현장에 있는 작업 직원은 안전모와 보호장비 착용, 실시간 안전 교육에 요망됩니다”

이 뉴스의 문제점은, 기존 인간 중심, 곧 ‘나를 결코 잃어서는 안된다’에 기초를 둔 기존의 부피와 공간 개념으로 인하여 더는 하늘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즉 ‘거제도’라는 공간은 계시에 의하면 유황불로 없어질 대상으로 공간입니다. 마치 노아 때, 모든 지국 전 지역이 물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말 우리가 대신 죽으신 분이 다시 살아나심으로 형성된 새로운 공간에 속했음을, 아브라함 믿음과 동일한 믿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면 다음의 성경 구절도 덩달아 의심없이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요일 5:18-19)

즉 성도는 세상에 있으되 없는 자로 규정되면서 참으로 나타난 공간인 예수님의 영광된 공간이 지금 성도가 함께 있음을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이로서 지상의 나타난 지금의 튀르키예 지방에 있는 일곱 교회는 필히 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준수하므로서 현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쓰레기가 알아서 쓰레받기에 담기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빗자루질로 인하여 어느새 성도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공간에 놓이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은 ‘눈동자같이 지킨다’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시 17:8)

교회는 주님의 몸 자체서 완성된 성전에 이미 들어있기에 벌써 완성되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멸망 당한 세상 속에서 십자가 의의를 발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5강-요한계시록 1장 12~16절(완성된 성전)260503-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1장 12~16절입니다. 신약성경 401페이지입니다.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아멘.

여기 요한계시록에 나온 밧모섬에 귀향 갔던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께서 이러한 엄청난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시를 받는 자는 지금 사람들에게 버림받아서 외로운 섬에 갇혀 있고요. 이런 섬에 갇혀 있는 이 사도 요한에게 주께서 주신 이 계시가, 결국은 앞으로의 모든 인류의 운명을 끝장내기 위한 그러한 절차 그리고 바탕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이 이렇게 쓰였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요한계시록에 유효 하려면, 효과가 있으려면, 바로 사도 요한이 있던 그 지점 밧모섬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복음의 원칙은 뭐냐. 뭐든지 ‘대체한다’ 또는 ‘대신한다’가 여기에 적용이 됩니다.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라는 원칙이에요. 사도 요한은 본의 아니게 가만히 있게 되었어요.

그냥 가만히 있게 되었단 말이에요. 인간이 가만히 있을 경우에는 무엇이 없어지고, 사라지고, 날아가 버리는가. 그것은 자기중심의 공간 또는 자기중심의 부피가 더 이상 소용없게 되었어요. ‘나 여기 있고, 나는 이것 이것이 있다’라는 이게 그냥 날아가 버려요. 그러면 대신하신 분은 뭐냐? 대신하신 분이 갖고 있는 고유한 부피와 공간의 새로운 세계,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세계는 인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면, 앞으로의 세상은 예수님 중심으로 세상이 바뀌는 그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내용 자체를 보니까, 예수님께서 발산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기존의 인간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것들이 이제 거기서 발산되지요. “금 촛대 있고, 인자 같은 이가 있는데,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하얀 눈(Snow)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으며”라고 돼 있어요.

이것을 가지고 인공지능의 이미지라든지, 그냥 화가가 그림으로 그리게 되면 꼭 괴물 같아요. 괴물 같고, 거기다가 음성까지 띄워버리면,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으며” 이 물소리 같다는 말은, ‘와글와글와글’거리면서 무슨 소리인지 분명하지 못하죠. 그렇게 돼 있는데, 이 예수님에게서 발산되는 막강한 에너지는 도대체 어느 정도냐 하면, 세상 전체를 교체할 만한 힘으로 작용하게 돼요.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할 것은, ‘예수님, 참 대단하다. 참 영광스럽다. 눈을 뜰 수가 없네’라는 이런 것만 보시지 마시고, 16절에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라고 돼 있는데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다는 거예요. 그 일곱 별에 대해서 11절에 보면,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1절에 그렇게 돼 있죠. 이 일곱 교회로 보내라 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오늘 본문을 알아야 할 것은, 여기, 현재 튀르키예죠, 여기 일곱 지역에 있는 교회가 어떻게 전체 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교회냐. 거기에 어떤 논리성으로 진행되기에, 단지 일곱 교회인데 이게 앞으로 오는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교회의 구실을 할 수 있느냐. 그 점을 우리가 알아봐야 합니다.

그 점을 알아보기 위해서 우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 말씀을 믿어야 하겠죠. 믿어야 하는데, ‘믿습니다’라고 믿으면 안 쳐줘요. 믿음에 대해서는 믿음의 조상에게 일어난 사건이 있어요. 창세기 22장 1~2절에 보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라고 돼 있어요.

두 사람이 있는데, 아브라함과 이삭, 두 사람이 있어요. 두 사람이 있는데,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을 없애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작업에 나서는 그 관계가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살아 있는 살아있는 사람이 하는 역할은, 같이 있는, 자기 존재보다 더 소중한, 정말 사랑하는 자를 내 손에서 아예 없애버리는 거예요.

없애버려요. 내 손에서 없앤다는 말은, 이렇게 없애버리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하면, 나는 여기 있어도 없는 게 되니까, 이게 대체가 가능한 거예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대체할 사람을 자기가 뽑는 식으로 ‘네가 나 대신 해라’라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보지 않습니다. ‘너 자신을 대체할 사람을 네 손으로 없애버려라’

내 손에 의해서 없어진 분이 나를 대체하고 대신하신 분이라면, 나는 여기 있어도 없는 존재가 되지요. 이게 바로 믿음이에요. 믿음 규정마저도 하나님께서 새로 정해야 하지,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내가 정하는 것은, 이거는 하나님께 안 통합니다. ‘믿음은 이렇게, 이렇게 시행돼야 해’라는 그것마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에서, 아브라함은 없음이 돼버려요. 아브라함은 있어도 없음이 되고, 없는 자가 아브라함을 대신해서 아브라함 있음을 계속 이어 나가서,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사람으로 하나님 나라에 받으시는 대상이 돼 버립니다. 전혀 어렵지 않지요. 내가 없앤 자를 하나님께서 되살려줌으로써 내가 굳이 살, 되살릴 이유가 없어졌어요.

그렇게 될 때,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떠날 수 없는 나를, 강제로 나로부터 떠나게 하는 그러한 방식이 주께서 허락한 믿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런 것은 바로 갈라디아서 2장 같은 경우에, ‘사도 바울이 있다. 사도 바울이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셨다. 율법을 주심으로써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 더는 그 죄로 인하여 천국에서 안 받아주는 사람으로 확정되었다’라는 거. 확정된 거예요.

그런데 전에, 사도 바울이 율법에 입각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듯이, 예수님께 가해 하는 존재가 돼 버린 거죠. ‘예수님은 없어져. 나는 계속 있어야 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이 전에 사도 되기 전에, 율법 체제 안에서 자기는 옳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이 말을 쉽게 하기 위해서, 특히 잠이 많이 오는 오후 설교에서 예를 들 수밖에 없는데, 뷔페에서 식사하는데, 40분 동안만 먹어야 하는 뷔페가 있다고 칩시다.

40분 동안. 근데 먹다 보니까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그 접시에는 이제 마지막에 제일 좋은 거, 스테이크 먹으려고 딱 남겨놨는데, ‘40분 되었습니다’라고 하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테이크, 실제로 저는 스테이크 별로 안 좋아하지만, 예를 들면, 내가 좋아하는 스테이크를 주인이 와서, 애슐리(식당) 주인이 와서, 그것을 뺏어가 버린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오오오...’라고 이렇게 되겠죠. ‘가려면 가라’라는 이게 아니고, 내가 강제로 탈취당한 거죠. 강제로 뺏어간 거예요. 어디로 뺏어갔습니까? 쟁반에 담겨서. 그 쟁반을 뺏어 가버리니까, 내가 있다는 그것이 없어진 쟁반에 담긴 나로 이게 전환되면서, 쟁반이 없는 나는, 있어도 없는 게 돼 버려요. 그게 믿음입니다. 이동하는 게 내가 아니고, 나의 결심이 아니고, 나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치워버리니까, 그 쟁반, 그 쟁반이 이동하는 거예요.

과연 여기서 여러분들이 지금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하나님도 아브라함을 시험했는데, 여기서 잠시 테스트 들어갑니다.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을 읽어드릴 테니까, 여러분이 믿는지를, 과연 믿는지 안 믿는지를 한번 보세요. 요한일서 5장 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스톱!! 요기까지, 요 말씀 믿습니까?

‘이 말씀 지키려고 애쓸게요’가 아니고. 그건 믿음이 아니에요.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이 말씀은 네가 생전에 듣도 보도 못한 말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일단 내가 있고, 내가 있으니까 내가 뭘 하게 되고, 내가 하게 되면 나는 내가 갖고 있는 공간, 내 부피, 내가 만들어낸 이 부피를 몽땅 천국으로 데려가야, 그게 구원받은 상태라고 우리는 자부하잖아요.

‘아브라함이 있다. 아브라함인 나는 이삭을 사랑한다. 독생자 이삭을 사랑한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 둘 다 있는데, 둘 다 하나님께 갔으면 좋겠다’라는 이게 우리 인간의 생각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천국으로 빼돌리는 규칙에 의하면, 둘 중 하나를 없앰으로써 둘 다 전에 있던 이거는 내 부피고 내 공간이라 했던 그전에 있던 공간은 둘 다 날려 보내는 방법을 쓰시는 겁니다.

우리 손에 죽었던 한 공간은 예수님이고, 예수님은 승천했고, 그 예수님을 따라야 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야 했기 때문에, 이 버젓이 있다고 여겼던 나도 같이 날아가 버리는 그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주께서 일으키는 구원의 공간, 새로운 공간이에요. 이렇게 설명했으니까, 여러분 믿습니까? 요한 1서를 다시 할게요.

요한 1서 5장 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여기 ‘우리’에 해당하는 사람 같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리가 아노라” ‘다 알고 있지? 다 알고 있지? 그렇지?’라는 이런 뜻입니다. 로마서 14장 8절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우리가” 누가? “우리가” ‘우리에 여러분 다 포함돼 있지요?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를, 제가 하는 겁니다’라는 이런 뜻이란 말이죠.

이런 뜻이다. 이 말이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누가? “우리가” “그 ‘우리’에 여러분 포함돼 있지요?”라고 사도 바울이 묻는 거예요.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해요. 예를 들어서 마귀가 있다고 합시다. 마귀가 있는데, 마귀가 천국 가는 사람들을 못 가게 막는다고 봅시다.

사람들은 천국 가려고 오는데, 이제 마귀는 고소하는 자잖아요. 딱 와서, 성경 구절 들이대면서, ‘이거 다 지켰어, 안 지켰어? 지켰어, 안 지켰어?’라고 묻는다 이 말이죠. 뭐,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저리가!!’ 그러면 진짜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떻게 지적받느냐고 저한테 물으면, 천국 가는 사람이 안 보여요. 천국 가는 자들이 투명해서, 마귀에게 보이지 않는다니까요. 뭐 지적할 것도 없어요.

있어도 없는 존재로 간주해버려요. 마귀 눈에. 이상하게 거짓말하는 느낌처럼 여러분에게 다가오십니까? 표정들을 보니까, 구라를 치시는 게 아닌가 하는 얼굴인데, 성도는요, 이 영적인 것은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는 없는 자이고, 없는 자는 더 이상 간섭하거나 시험할 필요조차 없는 거예요. 문제는 마귀가 그 정도로 시력이 안 좋아요. 성도 빼놓고 나머지는 다 보는데 성도는 못 봐요.

이런 것을, 이런 것을 우리가 기쁘게 받아들이냐 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래야, 이것을 받아들여야,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사람이 됩니다. 왜? 모든 말씀은 엮여서 결부돼 있기 때문에. ‘이거는 믿는데, 이거는 못 믿어’라고 이러면 안 되거든요. 아브라함의 믿음은 믿고 있는데, 갈라디아서 2장은 못 믿겠다고 하면 안 돼요.

아브라함의 창세기 22장의 내용은, 결국 이 땅에는,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악마에 속하고, 성도는 악마에 속하지 않고, 악마의 세계에서는 성도가 이 땅에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게 자유라는 거예요.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오늘 본문 내용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인간들이 이해하는 부피와 공간의 개념 말고, 인간의 눈, 그러니까 악마의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부피와 공간.

그 공간에 있는 그 성도를 가지고 일곱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일곱 교회가 주님 안에서 이미 분명히 완료된 채 있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보이는 교회는, 여기 오늘 본문에 나온 교회인데, 현재 튀르키예에 있는 그 교회,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 이거 다 멸망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기 때문에 멸망해야 해요. 우리 교회가 없어야, 우리 교회가 있다가 돼요. 주께서 우리 교회를 구원하심으로써, 이 지상에 우리 교회는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걸 이미 완료했다고 표현해요. 이미 완료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실천에 옮기면 구원받는 게 아니라, 계시 자체가, 신약에 주시는 이 계시 자체가 이미 완료된 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완료된 채. 여러분, 쓰레기하고 쓰레받기하고, 그 차이점을 여러분이 자꾸 혼동하시면 안 돼요. 보통 세상에서는 쓰레기가 있고, 쓰레받기 들고 와서, 빗자루로 쓰레기를 쓸어서 담았죠.

그러면 청소는 뭐냐. 쓰레기가 있고, 쓰레받기가 있고, 빗자루가 있고, 이렇게 되죠. 사람들은 세 가지를 갖고 청소하잖아요. 주님께서는 내가 저 쓰레받기에 들어가야, 그 쓰레받기는 천국 가는 쓰레받기인데, 내가 빨리 올라타야 구원받는 게 되는데, 주님께는 쓰레기가 알아서 쓰레받기로 기여서 들어오는 경우는 없어요. 주께서 빗자루 조리하는 거예요.

보통 세상은 빗자루 들고 쓸어야, 비어 있는 쓰레받기에 쓰레기가 차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빗자루질하면, 어느새 쓰레받기에 쓰레기가 와 있고, 이제 쓰레받기는 하늘로 이동, 하늘로 승천해 버립니다. 승천하면서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해야 합니까? ‘주께서 말씀으로 빗자루질했습니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일곱 교회, 여기에 나오는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은, ‘예수님 참 좋겠다, 멋있다’라고 하지 마시고, 오늘날 우리가 이 모습을, 예수님 인자의 모습을, 우리가 여기 잠복하고 있고 내재하고 있는 거예요. 일곱 교회에 예수님의 그 영광된 모습을 우리가 이 안에 들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이 부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요.

‘이 인생 뭐야? 이 인생 꼬라지가 이게 뭐야? 이게 사는 거야?’라고 이러고 있다고요? 그런데 여기에 멋있는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본다는 것은, ‘지금, 이 모습이 바로, 네 모습이야’라고 이렇게 말씀으로 주시는 거예요.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일곱 교회는 일곱 촛대거든요. 여기 일곱 금 촛대, 12절에 “일곱 금 촛대”인데 일곱 금 촛대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말씀한 새로운 부피, 새로운 공간, 그 성전에 이미 들어와 있는 촛대예요.

완성된 성전이, 구약에서 말했던 그 일곱 촛대가, 예수님의 성전 되심을 인하여 완성되게 되면, 그 영광은 바로 예수님의 영광이 그대로 전체에 차고 넘치는 그 새로운 공간에, 너희들은 일곱 교회로써 거기에 이미 도착해 있다는 거예요. 거기에. 그래서 일곱 교회는 이미 전체 교회이고 완성된 교회예요. “교회가 이미 완성됐다. 이게 전체 교회다”라고 하니까,

이거는 뭐 겸손해서 안 믿는지, ‘그럴 리 없습니다’라는 태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히브리서 12장 22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그들은 이렇게 새로운 교회 장자들, 새로운 총회가 하늘에 이미 만들어져 있어요. 우리 지상에 있는 우리는 그냥 껍데기고, 하나의 대역이고요, 하나의 그림자고요, 우리의 진짜는 지금 하늘로 가 있다고요. 제가 금요일에 울산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내가 갈 수 없는 그곳, 거기에 왜 내가 있습니까. 내가 생각지도 못한 그곳에 왜 내가 가 있지요?

그거는 빗자루와 쓰레받기가 아주 훌륭해서 그래요. 우리보다 더 훌륭해서, 쓸어 담는 솜씨가 보통 솜씨 아니라서 그래요. 믿거나 안 믿거나 모르겠어요. 저는 있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신명기 32장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라고 나와요.

눈동자같이 지켰다는 거예요. 보호해 주시고 눈동자같이 지켰어요. 누가 손가락 가지고 눈동자를 건들려고 해보세요. 대번에 눈동자부터 먼저 지켜야 할 거 아닙니까? 커버할 거 아니겠습니까. 주께서 우리를 눈동자로 심어 놓은 거예요. 에덴동산에 있던 선악과는, 그거는 보호하는 게 아닙니다. 선악과나무는 보호하는 게 아니고 선 넘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선 넘지 말라는 게 아니고, 선 넘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도록 심어놨고, 인간은 하나님의 예상대로 선을 넘었어요. 보호는 없습니다. 보호는 없거든요. 선을 넘었으니까. 이제 신약에 와서는 생명나무가 선악과를 완성함으로써, 이제는 선 넘을 일도 없고, 그냥 남은 것은 눈동자같이 보호하는 것밖에 없어요.

시편 17편 8편에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이 말씀대로, 지금이 말씀이 어디에 완성되어 있느냐 하면, 성전이 완성될 때, 성전 안에 있는 금 촛대부터 해서, 진설병, 향, 언약궤까지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성전이 완성되면, 그 안에 기구까지 자동으로 같이 완성된 거예요. 완성된 상태가 돼요. 그렇다면 일곱 교회는 일곱 촛대인데 이미 완성되었어요.

무엇이 완성되었어요? 눈동자처럼 지키겠다는 이 말씀이, 완성된 그런 작품으로써 우리가 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어디서 받게 됩니까?’라고 물으면 바로 이 없어질 공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공간으로 받게 됩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한 몇 분 동안만 문제를 낼 테니까 한 번 맞춰보세요. 다음은 뉴스에 나온 내용입니다.

‘경남 거제도의 조선 산업 현장의 안전사고 예방이 중요시됩니다. 대형 선박 구조가 이루어진 조선소에서, 고소 작업과 중장비 작업과 추락과 협착 사고, 특히 밀폐된 공간에서 유해가스 질식 사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래서 현장에서 안전 보호와 보호 장비 착용, 작업 전 위험 요소 점검, 실시간 안전 관리 시스템이 도입이 필요합니다’라고 했을 때, 이 뉴스의 문제점은?

이 뉴스의 문제점은 모르겠죠. 그러면 문제 하나 더 하겠습니다.

‘어떤 여자가 바닷가에 가서 그림을 그립니다. 코, 입, 눈, 다 그리고 미소까지 억지로 땡겨 올려서 미소까지 그리고, 턱 밑에 점 하나도 그렸어요. 근데 뭘 못 그렸냐 하면, 당신의 마음은 못 그렸거든요. 1972년에 방주연이 불렀던 ’당신의 마음‘이란 노래의 가사예요.

이 바닷가와 거제도의 조선 현장, 이 두 개의 문장에서 문제점은 그 공간이 없다는 거예요. 그 공간이 없다는 거예요. 이걸 몰라요. K2에서 비행기 에어쇼 했지요. 여기서 얼마나 시끄러웠다고요. 의장대도 막 올리고 높이고 난리 났죠. 까르륵 웃으며, 아이스크림도 먹고 좋아했죠. 문제는 그 공간이 유황불에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 모든 공간이. 조선소 산업 현장 그리고 바닷가 그리고 K2에서 한 것도 모조리 다 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끝으로 당부합니다. 어떤 장소에 가서라도, 아마 또 어디서 에어쇼 할 거예요. 참석하면 재미있을 거예요. 뭘 하더라도 십자가를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이 눈에 보이는 거, 껍데기 같은 나, 이 공간 전부 다, 십자가에 의하면 이거는 유황불에 사라지는 거, 이것은 믿고 안 믿고 할 문제가 아니라,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금 우리가, 새로운 공간에서, 성전 안에 있는 교회 입장에서 그걸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말씀을 지키려고 한 게, 이게 문제였습니다. 주께서 지켰다는 것을 못 받아들이고, 내가 지켜야 한다는 의식, 이제는 주께서 그런 죄마저 용서했기에, 주 안에 있으면, 우리의 사적인 어떤 것도 주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는 그것이 축복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