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1:9-11 / 밧모섬 본문
밧모섬
이근호
2026년 4월 26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9-11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멜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밧모섬은 지금 튀르키에 남동쪽 끝에 있는 섬입니다. 죄인들을 귀양보내는 섬입니다. 국가 입장에서 누구를 귀양보낸다는 것은 살아있다 할지라도 일방적으로 ‘산 자’라고 취급해 주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리어 이 세상의 평가가 성도 입장에서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떨어져 나가야 하늘과 연결성이 진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강제성 있는 상황으로 인하여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의 고난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밧모섬을 기피한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이나 주님의 고난에 집중하는 것을 싫어하는 상황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상황을 기대하고 원하는 겁니까? 그것은 스스로 설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끌어모은 힘 한가운데서 인간들은 잘 버티는 존재이고 싶어합니다. 언젠가는 자신이 죽겠지만 늙은 죽을 때 죽더라도 그동안은 ‘참 잘 살았다’는 평을 남들에게 듣고 싶은 겁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데 늘 참조로 할 그 타인들이 없는 곳에 살게될까봐 두려운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없이는 살아도 같은 사람없이는 못살겠다는 겁니다. 밧모섬에 하늘로부터 계시가 주어집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사람들은 하늘의 계시를 그다지 반기지 않습니다.
도대체 사도 요한이 외롭게 귀양생활 모습을 보면서 측은하게 생각하고 인생 망했다고 여기는 이유는 그 근원에 마귀의 심보로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8:29에 보면,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귀신들인 자들은 자진해서 예수님을 밀어내는 걸까요? 그것이 자신은 어디까지 이 땅에 속한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속한 인물입니다. 땅에 있으면서 땅에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자들이 가는 그 섬에 있습니다. 곧 사도 요한은 이 땅에는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시는 그 땅에는 있습니다.
땅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땅, 곧 약속의 땅을 따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구약 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상황과 같습니다. 약속의 땅이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민족’을 만들어내시는 순간, 그들만 들어가서 살아야 할 땅이 따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약속을 원치 않거나 싫어하는 자들은 도저히 들어설 수 없도록 차별화시키는 땅에 바로 약속의 땅입니다. 그렇다면 그 땅에서 사는 자들은 기존의 인간들과 어떤 차이가 있어야 할까요? 그것은 홍해서 일어난 사건으로 알려집니다. 홍해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몽땅 집단적으로 죽게 되었다는 겁니다. 뒤에서 애굽 군인들이 맹렬한 기세로 따라 붙었습니다. 약속의 민족이라고 자부하던 그들은 위기감으로 가득찼습니다. 이게 꼼짝없이 죽었다고 낙담했습니다. 누가봐도 죽음을 모면할 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과연 이 땅에 굳이 사람들이 살아야 합니까? 왜 내가 꼭 살아야 하고 또 살아야 하는지 그만한 정당한 근거가 있습니까? 이미 악마는 인간들의 각자 마음 속에 여차하면 다음과 말을 늘어놓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당신과 나는 무슨 상관있습니다. 상관없음을 분명히 합시다”라는 식입니다.
깊은 바다로 가로 막힌 상황에서 바가가 갈라진다는 아이디어는 그 누구도 상상 못할 일입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진 것은 인간 내부에서 수시로 고백하게 되는 빈정됨, 즉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그 귀신 존재를 갈라진 홍해 길에서 노출되게 하십니다. 즉 이스라엘을 뒤따라온 애굽 군사들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이름으로 바다 한 가운데서 몰살합니다.
그리고 난 뒤 그들은, 시내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은 홍해해서 겪지 못한 다른 경험을 겪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나팔소리입니다.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출 19:19) 왠 산에 나팔수들이 있었던 겁니까?
그리고 이런 경험은 왜 이스라엘로 하여금 겪게 하는 겁니까? 지상에 사람말고 아무도 없는 화산 꼭대기에 나팔을 불어대는 다른 존재를 배치하시는 일부러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여전히 인간들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세로는 미지의 땅에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갈라진 홍배 바다 한 가운데서 그들은 자신들을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들 이스라엘도 여전히 애굽인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는 이유와 목적도 없습니다. 마치 아무런 표정도 없이 하프 코스 마라톤을 일등으로 완주한 중국 로봇 같습니다. 자본주의 생리에 푹 젖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2:16에,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본주의 시장 원리 안에서 사람들은 본인을 버텨 내려고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은 뒷전이 됩니다. 말씀 안다고 해서 세상이 안 알아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 8:29)만 되풀이하면서 이 세상에 있는 밧모섬의 존재를 거부합니다. 홍해도 거부합니다.
따라서 나팔소리가 안 들려도 상관없다는 식입니다. 나팔소리는 바로, 그곳에서 말씀이 시작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나팔소리가 없는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나팔소리를 듣게 되는 자들만 하나님의 약속된 백성이라는 겁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모두 귀신의 소리를 듣고 자라났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홀로 버텨내기 위해 사력을 다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에게 늘 감사해야 하는지는 찾는 식으로 살지는 않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하나님 말씀이 돈보다 귀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밧모섬과 홍해의 바닥을 발견하고 거기에 하나님의 원수가 파멸당하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기쁘게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늘 이 세상을 쪼개어 그 내부 원천을 보면서 무엇이 하나님의 원수인가를 발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4강-요한계시록 1장 9~11절(밧모섬)260426-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1장 9~11절입니다. 신약성경 400페이지입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이 말씀이 기록된 그 밧모섬이 지금 이 현장이 됩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사도 요한의 성령의 감동에 같이 동참이 되려면, 이 밧모섬이라는 곳이, 귀양 보내는 그러한 외딴섬이라는 것을 아셔야 하고, 로마 국가가 사도 요한을 밧모섬에 보낼 때는, ‘너는 이미 죽은 자야’라는 그러한 딱지를 붙여서 밧모섬에 보냅니다. ‘그래서 네가 어떻게 살든지 우리는 너한테 관심이 없다’라는 이게 얼마나 고마운 대우입니까?
알아서 세상이 나의 존재를 끊어주니까, 이제는 우리가 연결되고 관계하는 것은 더는 이 땅이 아니고 하늘나라입니다. 그 하늘나라로부터 연결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밧모섬에 외로이 귀향 갔을 때,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예수의 증거가 그 밧모섬에 있는 사도 요한에게 작렬하고 또 일어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건 쉽게 말해서, 이게 쉽게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땅속에 특이한 땅의 등장, 이거는 구약 때부터 있었습니다. 땅은 땅인데 약속의 땅. 그리고 인간은 인간인데 약속된 인간, 선별된 인간의 등장, 이것이 일관된 하나님의 말씀에 준해서 일어나는 특이 현상이 되는 겁니다. 그거는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러한 특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특수한 약속의 땅,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찬 땅에 도착해야,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이 마귀의 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마태복음 8장 29절은, 이거는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외워야 해요. 사실은 이 말씀은 여러분들이 밤이나 낮이나 툭 치면 나와야 할 말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기 전에 미리 말씀드리면, 이 말이 어렵지 않은 이유는 평소에 우리 안에 이게 내장돼 있었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쉽게 말하면, “주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제가 만나고 있고 또 만났던 사람들, 앞으로 만날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대할 때, 그 사람 마음속에 기본적으로 태생이 아담의 후손이니까, 우리 자신의 정신부터 해서 악마와 결탁된 아담의 후손들이니까, 기본 베이스로 깔린 게 뭐냐 하면은, ‘예수? 하나님? 나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 나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 독촉하지 마. 내가 알아서, 내가 교회 가고, 안 가고,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독촉하지 마’
그냥 기본 정신은 뭐냐? 나는 내가 중요하지, 예수나 하나님이 안 중요해요. 그게 바로 모든 인간이 툭 치면 나오는 전부 다 마귀의 본심입니다. 마귀의 본심. 이거는 교회 다니고 안 다니고는 상관없어요. 다 그런 본심이 툭툭 이렇게 나오게 돼 있어요. 만나면,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면서, 심지어 구약성경을 달달 외우면서, 자신이 이 세상 가운데 유일한 선택된 민족이라고 자부했던 그 유대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 그들을 볼 때, 주님은 그들 속에서 마귀를 봤습니다.
악마를 봤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8:44) 그러면 그 마귀가 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여호와에게 속했다고 자부하는 그들이 주님을 속일 수가 없죠. 누가 누구를 속여요. 다 들통나는데, 뻔한데요. 그들이 성전에 대해서 했던 그 일에 대해서, 주님의 평가가 이렇게 나옵니다. 요한복음 2장 16절, 주께서 성전에 가서 소위 성전 청결이라고 말을 표현하죠.
성전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라고 했어요. 여기서 제가 눈을 쫙 집중해서 보는 대목은 뭐냐? “장사하는 집”이라는 거예요. 이 자본주의를 주께서는 이미 알고 계세요. 우리가 자본주의의 늪에서 아무리 헤엄쳐도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거. 인간이 산다는 것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이득을 매일 얻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게 내 모습이어야 한다는 철두철미한 내 인식.
그것 때문에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말이 서슴없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어요. 물론 교회 다니는 사람은 그걸 안 튀어나오게 하려고 노력하죠. 행동 막 튀어나오는데. 그 장사하는 집, 장사하는 집에서 주인이 제일 신경 쓰는 것이 뭐냐 하면은 재방문율입니다. 재방문율. 왔던 손님이 한 번 더 왔으면 좋겠네요. 왜? 단골 되니까.
단골 되면, IMF 터져도 어지간하면 이게 버틸 수 있거든요. 나머지 집은 못 해도. 그 재방문율을 기존 장사하는 사람도 신경 쓰잖아요. 서비스를 왜 합니까? 뭐가 이쁘다고 서비스해요? 아니, 주인 되는 사람이 손님한테 말을 거는 이유가 뭡니까? 뭔데 말을 걸어요? 언제 봤다고 말을 걸어요? 재방문율을 높이기 위해서 말을 하죠.
‘아이고, 이 집 친절하다’, ‘다시 오실 거죠?’ 이런 거, 그것도 서울 말로, ‘다시 오실 거죠?’ 이렇게 해서 붙잡아야 되잖아요. 재방문율. 이것을 교회가 하는 거예요. 교회가, 목사들이, 또는 장로들이 이것에 신경 쓰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재방문율, 쉽게 말해서 단골이 모여야 오래 간다는 의식, 그 의식이 자본주의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사고방식의 강도가 너무나 심해서, 마음속으로 예수와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주 편하게, 편하게 이야기하면, 그것이 늘 나와요. 중국에서 하프 코스 마라톤 대회가 있었는데, 41km 뛰는 게 아니고 이것에 반절만 뛰는 대회에서, 로봇이 같이 뛰는데, 52분 만에 주파했대요. 주파해서 결승선으로 뛰어서 들어오는 그 표정들을 보니까, 표정은 없고, 피곤한 기색도 없고, 뭐만 있느냐? 오직 동작만 있어요. 팔 저으며 뛰는 동작.
어쩌면 그 마귀한테 매인 인간들이 사는 게, 평생 사는 게, 아무 생각이 없어요. 자본주의에 휘둘리면서, ‘너, 일 안 하면 돈 없다’라고 하면, ‘예, 하겠습니다’ 그냥 자본의 노예가 되어서, 누구한테 감사하기 위해서 살지 않아요. ‘오늘은 또 누구한테 감사해야지’라는 이게 아니라, 홀로 버티기 위해서 살아가요. 홀로 버티기 위해서. 잘 버티면 자기 자신한테 감사하겠죠.
이게 아담의 후손이 타고난 겁니다. 타고난 거죠. 그럴 때, 예수님하고 아무 상관이 없거든요. 하나님하고 아무 상관이 없지요. 성경 말씀 시간에도 아무 상관이 없어요. 왜? 홀로 버티는데 바쁜데, 뭐 어디 나올 수가 없죠.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무슨 소리가 안 들리느냐 하면은, 여기 10절에 주의 날에 나팔 소리가 안 들려요. 나팔 소리.
제가 옛날에 성경을 보면서, 출애굽기 19장 19절을 보면서, 소위 말씀을 설명하고 해석해야 되는 그런 입장에서, 꽉 막히는 대목이 있었어요. 출애굽기 19장 19절. 저한테 이렇게 말씀이 막힌다는 말은, 다 같은 아담의 자손이니까 다른 사람들도 이 말씀을 보면서 막힐 것이다. 사람들이 막히면, 그냥 막 넘어가요. 그러나 그럴 수가 없거든요.
출애굽기 19장 19절에 보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시내산에 도착해서 가보니까, 출애굽기 19장 18~19절에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라고 돼 있어요. 여기서 제가 순간적으로 의문점이 생겼는데, 남들도 가질 것이고 내가 해결 안 되는 것이, 그 나팔 불 때, 누가 나팔을 부느냐 하는 문제예요.
그 나팔은 무슨 금속으로 만들었느냐? 합금으로 만들었느냐, 나무로 만들었느냐 하는 그런 문제. 아니 브라스 밴드(Brass band)가 왜 거기서 등장합니까? 주님 계신 곳에 나팔 소리가 왜 굳이, 꼭 있어야 해요? 이게 안 풀리는 거예요. 나팔 소리가 있다는 거. 거기에 누가 계십니까? 이 벽 뒤에 나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은, 나팔이 저절로 불리지는 않을 거고, 누군가 나팔을 불어야, 나팔이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나팔아, 너 어디 있어?’라고 묻지는 않아요. ‘누구세요? 거기’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정답은 이렇습니다. ‘나는 이 땅에 내가 없습니다’ 이 땅에 내가 없어요. 자꾸 있다고 착각들을 해요. 우리가 어떻게 존재한다는 것은요,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영토에 소속이 될 때, 내가 속해 있는 땅에 소속이 될 때, 그 땅에서 ‘나는 있다’가 성립이 돼요.
그런데 이 땅에서 내가 없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되냐 하면, 이 땅이 아니고 다른 나라에, 다른 영토에 내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 땅에 없다가 돼요. 그게 바로 밧모섬입니다. 밧모섬은 위치가 어디쯤 되냐 하면, 지금의 튀르키예(Türkiye), 자동차로 본다면 자동차 운전석 바퀴 근처에 있는 섬, 거기 있어요. 운전석 바퀴가 에베소서인데, 에베소서가 조금 더 가면 해변가잖아.
해변 옆에 있는 게 밧모섬이에요. 분명히 땅이 있죠. 이 땅에, 지도상에 있는 땅인데, 그 땅은 뭐냐? 너는 이 땅에서 이미 내놓은 자식이다. 너는 이미 죽었어. 있어? 아니, 없어? 우리는 네가 없다고 간주할 거야. 그래서 요한을 보낸 그 섬이 밧모섬이에요. 그 밧모섬에서 나팔 소리가 들리더라는 이 말입니다. 왜 우리는 우리의 밧모섬이 없습니까? 이 자본주의 땅 외에는 왜 다른 밧모섬이 없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가 내심, ‘주여, 당신과 나와 아무 상관이 없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주님을 이렇게 밀어내는 그 본성이 너무 강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성경에는 밧모섬에 나팔 소리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다는데, 왜 우리 마음에는 이 밧모섬이 없죠? 이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잘못도 있어요. 이스라엘의 잘못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 가로막은 게 있어요.
그게 바로 홍해입니다. 홍해 바다를 보면서 거기에 길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 이스라엘 사람 중에 아무도 없었어요.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이 길을 알아요. 왜? 길을 준비했으니까. 그런데 그 길은 뭐로 덮여있느냐? 현재 깊은 물길로 덮여있어요. 그리고 그 물길로 인하여 사람들은 뭐라고 단정하느냐 하면, ‘길이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길이 막혔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일단 애굽에서 나왔지만, 갈 곳은 막혀 있다’
그다음에 나오는 감정은, ‘우리는 이 땅에서 쓸쓸하게 죽는다. 살았다는 희망은 깨자.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네’ 그다음에 마지막 나오는 건 뭐냐? ‘하나님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도저히 끝까지, 우리가 아무리 교회 다녀도 끝까지, 이게 우리 죽을 때까지 안 지워지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 마귀의 본심은 낙지처럼, 그것도 산낙지 같아서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아요.
조금만 내 일이 좀 안 되면, ‘주님이여, 당신하고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이건 뭐 습관 같아요. 불쑥 튀어나와요. 조금만 내 뜻이 뜻대로 안 되면. 주께서 거기에 대한 해답은 뭐냐? “이스라엘아, 네 배(뱃속)를 한번 갈라 봐라” 이 배를. 배를 가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적이 나와요. 원수가 나와요. 그게 홍해 건너갈 때, 애굽 군사들입니다.
주께서는 홍해를 갈라버려요. 홍해를 가르고 그 가른 홍해 길에 누가 들어서도록 하느냐 하면,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살아오고, 인식 받고, 교육받았던 이 마귀의 생각이 우리 배 안에 가득 찼어요. 가득 찼어요. 그걸 홍해 바다를 통해서, “약속의 땅에는 안 받아주는 요소가 지금 네 안에 있다. 따라서 너는 너희들이 생각지도 못한, 예상치도 못한 루트(길)를 내가 홍해 바다를 갈라서 길을 내고, 그 길을 따라오게 했다”
이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아야 하는데, 이걸 모르고 시내산까지 올라오는 거예요. 제가 인간 속에 마귀 생각 들었다는 것은, 이거는 뭐 살아가면서 늘 풍성하게 예를 들 수 있는데, 그중에 한 예가 이런 예입니다. 어떤 학교 급식에 대해서 문제 삼는 한 초등학교 학부모가 있는데, 교육청에다가 고발했어요. 왜 고발하냐? 이번 급식에 만두가 나왔는데, 그 만두가 냉동 만두였다는 거예요.
‘아니, 천오백만 명의 학생들에게 냉동만두 주는 게, 그게 뭐가 고발감입니까?’ 그걸 손으로 일일이 빚어야지. ‘왜 그래야 되는데요?’ 우리 애는 집에서 내가 손으로 빚어서 먹이고, 냉동만두는 몸에 해로워서 안 먹이는데, 이걸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초등학교 애한테 냉동만두 먹였다는 거예요. 이거 시정하고 사과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자, 이 문제의 근원적인 문제가 뭐냐? 그 학부모는 평소에 자기가 도시락을 싸지 않고 국가에서 세금으로 점심을 사준 것에 대해서, 고마움을 놓친 거예요. 감사를 놓친 겁니다. ‘예수여,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요? 그러면 햇빛 공짜로 받고, 달, 별빛 그리고 공기, 봄에 피는 꽃, 여기에 대해서 평소에, 이런 햇빛과 공기 주신 주님께 결사적으로 감사하기 위해서 삽니까?
결사적으로 감사하기 위해서 살아요? ‘어쩌면 또 감사를, 어디서 감사할 게 있지? 주님께 감사할 게 어디 있지?’ 이럴 경우만 주와 상관이 있고 연결돼 있는 사람이잖아요. 제가 교장 같으면, 당신 애는 이제부터 일체 급식 손도 대지 말고, 당신이 알아서 도시락 싸서 보내라고, 손으로 빚은 만두를 하든지 알아서 싸 오라고 하겠어요. 싫으면 전학 가든지.
사람이 남 탓하는 것이 버릇이 돼 가지고, 걸핏하면 자기의 이 땅에 사는 괴로움을 남 탓으로 돌리기 위해서 마음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창세기 3장 10절에 보면, 아담의 후손들은 이 땅에서 땀 흘려가면서 실컷 고생하다가, 결국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게 돼 있어요. 이 원칙에 대해서 주님한테 양보를 받아낼 생각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어떤 이혼 직전에 있는 한 여자가 그렇게 남편한테 불평이 많아요. 하도 불평이 많고,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빈둥빈둥 놀면서 자기가 생각했던 결혼과 다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키 큰 서장훈씨가 딱 한 마디 했어요. ‘당신 땀 흘려 봤냐? 땀 흘려봤어?’ 땀 흘릴 새가 어디 있어요. 지금 논다고 바쁜데. 땀도 흘리지 않으면서, 남편한테 ‘내 성에 안 찬다’라고 불평하는 거, 이게 데살로니가후서에도 있어요.
“일하지 않거든 냉동 만두도 먹지 말라” 뭐? 해롭다고? 물론 알아요. 베이컨 해롭고, 부대찌개가 해로운 건 아는데, 살아 있다는 것이 권리가 아니잖아요. 살아 있다는 것이 권리가 아니고, 살아 있는 이유는요, 내 배를 말씀으로 째기 위해서 살아 있는 거예요. 말씀으로 가르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올 수 있는 건 불평의 강도밖에 없어요.
나팔 소리가 왜 있느냐? 나팔 소리는 말씀의 원천지로 인도하기 위해서 나팔 소리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시작은 나팔 소리가 들리는 그쪽에 있는 분들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분들의 존재가 합류함으로써, 너는 그 세계에 있음이 되고 이 땅에서는 네가 없음이 된다. 없고, 네 속에 말씀이 들어있는 채로, 이 땅에서 주의 장차 올 메시아의 삶을 미리 앞당겨서 살아라.
이게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약속만 있다는 그 점을, 약속의 백성을 통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성도로 우리 속에 말씀이 들어온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지려고 하니까,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만지지 마라” 그때 예수님의 얼굴도 보이고, 사람의 눈에 다 보였어요.
“만지지 마라. 네가 만질 그러한 대상이 아니다. 만질 대상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여러분, 우리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치지 마세요. 우리는 주님께 감사한 마음만 내놓으면 되지, ‘나 어때? 나의 지금 위치는 이 땅에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떤 식으로 인정해 줘’라는 그러한 것은 나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예요.
그것은 홍해도 아니고 밧모섬도 아닙니다. 세상에 맞추려고 힘들게 살아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저 주께서 없다는 것을 늘 반복해서 인식하면서, 없는 자로서 자유롭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자유케 하는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마귀가 있으니까, 자꾸 말씀이 우리를 압박한다고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오해합니다. 발목 잡힌 우리 인생의 연약함을 아시고, 강제로 심하게라도 우리로 하여금, 이미 우리가 거할 땅은 이 땅이 아니라, 약속 안에 이미 들어 있음을, 그 안에서 비로소 살아 있음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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