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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1:4-6 / 주관해석의 한계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1:4-6 / 주관해석의 한계

정인순 2026. 4. 12. 20:00

 

 

주관해석의 한계

 

이근호
2026년 4월 12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4-6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성경에서 알파Α요 오메가Ω라는 말은 더는 인간의 언어나 숫자가 적용될 수 없는 최극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시작과 끝이라는 말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인간의 인식으로는 도저히 시작과 끝을 벌써 알 수는 없습니다. ‘끝’이 오면 ‘끝’을 알겠다고 생각하지만 ‘시작’을 모르는 인간의 입장에서 ‘끝’이 되어서 ‘끝’을 알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시작’은 ‘잘못된 ’끝‘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더는 지상적 시간이 아니라 이미 종결된 시간성을 예수님의 활동에 의해서 펼치고 성사시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작이나 중간이나 끝이나 모든 것은 ‘그의 피’와 관련되게 하셨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의 활동 공간은 특별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마치 초등학교의 어린 여자 학동들이 쉬는 시간에 즐겨하던 ‘고무줄 놀이’를 연상하면 됩니다. “휙휙!” 고무줄을 허공 속에 돌릴 때마다 아이들은 그 고무줄의 진동으로 임시적으로 만들어지는 낯선 공간을 들락거리면서 위기를 즐깁니다.

아이들은 운동합니다. 그러나 정작 인류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시간의 고무줄 놀이’는 고무줄의 궤적이 아니라 사건의 유발로 형성된 역사의 굴곡면을 따라 조성됩니다. 이 특이한 사건의 공간 안에서는 인간들이 지니고 있던 주관 해석을 사건의 고무줄에 닿아서 심판받습니다. 그리고 자리에는 객관 해석이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 혹은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품고 기어이 죄사함을 성취하신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묘사해도 됩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빠트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의 피’입니다. 왜냐하면 피 사건은 모든 인류가 거기에 가해자의 입장으로 들통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즉 성도들이 예수님의 피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주관해석을 객관해석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객관해석이란 역사의 시작과 끝을 다 알고 계시는 주님과 공동의식을 공유하는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내가 곧 예수님 살해자’라는 객관적 안목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예수님의 피에 근거해서 인류에 대한 전면적인 심판 타당성이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빌라도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가 없습니다. 그저 주관적 해석만 내릴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습니다. 진리란 모든 주관적 해석에 대한 심판의 근거입니다.

따라서 성도라면 주관적 해석에서 객관적 해석으로 이전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해 주시지요? 어떻게 절차가 진행되는가요? 여기서 우리는 ‘변화’와 ‘운동’의 차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움직인다고 해서 다 ‘운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람에 이는 나뭇잎이 그 예입니다. 나무가 스스로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유일하게 객관적 안목을 지니신 주님의 인간 다루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인간에게 그 어떤 성과도 허락하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성과는 ‘예수님의 피’라는 객관적 이해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즉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이 가해자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관여했음을 인정하는 자는 없습니다.

이는 인간들이 스스로 움직이고 운동하는 바를 하나님께서는 배제하시는 식으로 악마와 대결하십니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나서는 일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해내시는 일을 벌리십니다. 그런 식으로 하게 되면 인간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변화에 대해서 이사야 1:18에서는 이렇게 예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즉 죄에 색깔을 입힙니다. 그리고 그 붉은 색의 죄가 양털 색깔로 변합니다. 이 색채에 맞추어서 어린양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인간 세계에서 일하셨고 희생되셨습니다.

이 결과에 입각해서 요한계시록 7:14에서는 천국에 입성하는 광경이 나옵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러한 객관적 변화를 성사시키는 특수한 공간에서 이미 참여된 성도는 새로운 주관적 변화를을 입어 전에 가졌던 자기 중심의, 주관해석이 객관해석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5-8)

여기서 이사야는 새로운 존재를 갖게 됩니다. 전에 주관해석에 의해서 수립된 ‘내가 여기 있다’가 아니라 주님의 나타나심과 언약 수행 현장에서 수립된 새로운 공간에서 정립된 ‘내가 여기 있음’입니다. 객관적 의식에 의해서 형성된 존재 의식입니다. 이 존재의식은 주님의, 의해서 지시와 명령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묻는 물음은 형식적입니다. 답변은 즉각 튀어나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자신의 주관적 해석을 버리고 주님의 객관적 의식으로 무장된 새로운 주관을 지닌 채 변화가 일어나는 고무줄 시간 공간에 보내지게 됩니다. 성도가 가게 되는 세상은 온통 서로들 끼리 모방하고 흉내 내는 세상입니다.

‘남 따라하기’란 예수님의 피 사건의 가해자라는 인식이 누락이 된 상태에서 형성되는 공간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공간을 향하여 피를 근거로 전면 저주와 심판에 나서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의식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2강-요한계시록 1장 4~6절(주관해석의 한계)26041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1장 4~6절입니다. 신약성경 400페이지입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예수님을 언급하면서 5절 끝부분에 이런 게 나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다음에 나온 단어가,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고 나옵니다. “그의 피로” 피를 이 땅에서 제공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라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핵심을 놓치면 안 됩니다.

‘하늘에 계셨다, 하나님 같은 분이다’라는 여러 가지 이야기할 수 있고, ‘그분의 희생을 본받자’라는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런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에 의해서 나올 수 있는 겁니다. ‘대단한 분이기에, 그분은 하늘에 계실 것이고 하늘에서 오신 분이 하나님의 큰 사랑을 품고 왔다’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핵심은 그게 아니고, “그의 피”에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본질과 이런 것을 다 제끼고 그분의 피를 강조해야 하느냐 하면, 그 피 안에, 피를 내게 한 주동자가 거기서 밝혀집니다. 그 주동자가 누구냐 하면, 인간이에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되게 예수님을 높이는 것처럼 그렇게 본인들은 생각하는데, 본인은 왜 그 가해자로 거기에 끼워 넣지를 않지요? ‘예수님께서는 훌륭하시다, 하늘에서 오셨다, 사랑이다’라는 말을 나열하면서도, 그 피가 나오게 된 그 사건에 모든 인간이 연루해 있는 거예요.

개입돼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내 아들 피 흘리게 한 자에 대해서 내가 그냥 두지 않겠다”라는 식으로 예수님의 피를 앞장세워서 현실을 만들어 가는 거예요. 이 세상 살면서 우리들은 전부 다 자기 위주의 해석을 하죠. 그걸 주관적 해석이라 할 수 있는데, 인간은 주관적 해석에서 본인이 벗어나지 않아요. 주관적 해석에서 벗어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객관적 현실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나와 내가 잘났다는 것과 관계될 때만, 말하고 행동하고 남하고 대화할 용의가 돼 있어요. 내가 잘났다는 거. 만약에 처음부터 ‘너는 잘못되었어’라고 하면 그거는 뭐 호르무즈 해협 협상할 필요 없어요. 일단 ‘나는 잘났어. 그러니까 나는 가치 있고 나는 존귀해’라는 여기에 대해서는 토 달지 말라는 식으로, 이거 토 달지 않는 식으로 우리 이야기하자는 겁니다.

이게 부모와 자식 간에 이야기도 마찬가지고 부부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거 없는 가운데서 하자는 이게 무슨 해석이냐 하면, 주관적 해석이에요. 전부 다. 주관적 해석에는 객관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제가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성경 로마서 12장 19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다시 한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이거. 우리가 언제 하나님 일을 한 적이 있습니까? 주관적 해석에 미쳐서 자기 일만 했잖아요. 자기 일만 했으니까, 원수도 누구 원수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는 우리는 모르고,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나의 원수만 기억해요.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라는 내 원수, ‘너 때문에 내 인생 망쳤다’라는 내 원수. 그러니까 그런 사람한테는 로마서 12장 19절이 아무 짝도 소용이 없어요. “네가 뭐 나의 일에 가담한 적이 있나? 없잖아” 주께서 친히 갚아줄 원수가 우리에게 없잖아요. 그런 원수를 우리가 애초부터 만들지를 않았잖아요. 주관적 해석 때문에, ‘나는 너한테 참 섭섭하다. 나는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너에게 복수할 거야’라는 이거는 자기 원수지요.

주님의 원수가 아니거든요. 우리 원수에서 주님의 원수로 옮기려면, 내가 주관적 해석에서 탈피돼야 하고 거기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해요. 내 주관적 해석에서. 주관적 해석에서 왜 못 벗어나느냐? 자기는 잘났거든요. 내가 남한테 어떠한 잘못을 한다고 할지라도, 나 잘났다는 본질은 변함이 없다. 이거 죽을 때까지 계속 갖고 갑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보겠어요.

바람 불 때, 나뭇잎은 운동합니까? 운동하지 않습니까? 바람 불 때, 나뭇잎은 분명히 움직이죠. 움직이는데, 그게 운동이라고 할 수가 없죠. 그냥 움직이죠. 그러면 또 질문 나갑니다. 답변하든 말든 질문 나갑니다. 가을에 나뭇잎이 단풍 됩니다. 그거 운동한 겁니까? 변화한 겁니까? 변화한 거죠. 나무는 뭐 자기 자리에서 꼼짝 못 하고 어쩔 수 없지요.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자꾸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이 죽었다는 거예요.

왜 죽었냐? 인간들의 주관적 해석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주관적 해석의 한계를 들추어냄으로써, 진짜 해석은 진짜 객관적 해석은 주님에게, 주님의 피를 앞장세워서 주님에게만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에게 해석이 있는 그걸 뭐라고 하나? 진리라고 이야기해요.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을 재판하는 가운데서, 본디오빌라도에게 예수님이 재판받습니다.

38절에서 빌라도가 말합니다. “진리가 뭐꼬?” 예수님께서 “내가 진리를 위해서 왔다”라고 하니까 ‘진리가 뭐꼬?’라고 물은 거죠. 여러분이 예수님 같으면 뭐라고 답변하겠어요? 여기 본문에서는 답변하지 않았어요. 진리가 뭐냐? 주님이 왜 답변 안 하느냐 하면, 주관적 해석에 절여있는 인간이 객관성 진리는 알아서 뭐 할 건데? 그거 알아서 뭐 할 건데? 아무 소용 없어요.

객관적으로 이렇다고 설명해도, 자기 주관을 자기가 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건 진리가 아니고 지식이 돼버리죠. 그러면 진리는 뭐냐? 너 같은 인간 박살 내는 게 진리죠. “너는 내 앞에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그 진리로 너는 이제 지옥 가는 거야”라는 그게 진리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해석이 객관적 해석에서만 진리라는 게 있습니다.

그 객관적 해석을 그러면 목사님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그거는 새로운 공간이 마련돼야 해요. 새로운 공간. 무슨 공간? 지옥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저주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새로 마련된 공간. 그거는 더 이상 저주가 없고 죄가 없는 공간. 그 공간에서 비로소 우리는 객관적 해석을 가질 수 있는데, 이거는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입니다.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잘못되었습니다. 죄인입니다’라는 거 소용없어요. 내가 어떻게 고백하느냐가 아니라, 주께서는 너의 소속이 어디냐를 물어요. 네가 속해 있는 공간이, 네가 딛고 있는 공간이 주관적 해석의 공간이냐, 아니면 객관적 해석의 공간이냐? 주님이 내린 안목에 의해서 밝혀지는 공간이냐를 묻습니다.

그러면 그 공간은 어떻게 형성되느냐. 이 공간 형성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 1장 4절에서 6절까지 아주 어려운 말씀을 하셨어요. 요한계시록이 어렵습니다. 어려운 말인데, 어느 정도 어려운 말이냐 하면, 4절에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돼 있죠. 어떤 시간 속에 주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오시는 그곳에 기존의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이 통하는 새로운 공간이 마련된다는 거예요.

알파와 오메가는 시작과 끝인데요. 8절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라는 헬라어 단어로 설명하는데, 시작과 끝은 인간의 언어를 붙일 수 없는 순간을 말합니다. 기존의 인간한테 통하는 어떤 언어로도 표현이 안 되고 묘사가 안 되는 그 상황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는 뭐냐? 시간이 흘러요. 무슨 시간? 인간이 느끼는 시간이 나와요.

인간의 주관적 해석을 주고받는 그 공간이 알파와 오메가로 안에 묶인 채로, 그 시간이 흐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사건 사건을 통해서, 말씀 사건을 통해서 그 시간을 흔들어버려요. 여러분에게 적절한 예가 필요하다면, 바로 어릴 때, 특히 여자 아동들이 어릴 때, 국민학교 때 했던 놀이가 있어요. 고무줄 놀이. ‘금강산~찾아가자~일만 이천 봉~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라고 노래하면서 뛰는데, 그 구경하는 남자아이들은 입을 벌립니다.

그거는 거의 묘기에 가까워요. 땅을 짚고, 돌고 하는데. 노래도 ‘금강산 찾아가자’는 아주 순한 거고 더 과격한 노래도 나와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두 쪽에서 묶여 있어요. 두 쪽에서. 오징어 게임(드라마)에 이 이 노래가 나왔을 건데, 이미 시간이 앞뒤로, 알파와 오메가로 확정된 채, 돌려버립니다. 돌려버리면, 거기서 인간은 운동하지 않는데, 인간이 변화가 일어나요.

나뭇잎이 빨갛게 변하는 것처럼.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시간 그리고 인간이 아는 의식 시간 속에서, 운동하지 않는 것을 외부에서 일방적인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새로운 공간에 들어갈 사람을 모집하고 전환시키는 작업에 나섭니다. 그게 뭐냐. 색깔 변화인데, 흰색이 붉은색으로 변하고 붉은색이 흰색으로 변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죄한테 색깔을 입히고 색깔을 제공합니다. 그냥 죄를 씻어준다고 하면 되는데, 왜 죄에 대해서 색깔을 입히느냐.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색깔을 달리함으로써 스스로 어떤 주관적 해석에서는 할 수 없는 객관적인 사건에 의해서, 붉은색이 흰색으로 변하는 변화를, 인간이 갖고 있는 시간 속에 합류해 들어오신 분이 그 일을 시도해 나가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7장 13~14절에 보면, 이건 여러 번 이야기해서, 여러분도 잘 아실 거예요.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천국에 있는 분이, 어떤 이가 흰옷 입고 오니까 의아한 거예요. ‘네가 흰옷 입을 잽이 못 되는 거 뻔히 아는데’ 지상에서 올라온 인간치고 천국에 합당한, 흰옷을 입을 위인이 없어요. 이 땅에서.

사람이 알고 지은 죄는 얼마 안 돼요. 인간은 대부분이 모르고 지은 죄입니다. 아주 특이한 빵을 받아서 손자한테 나눠주는데, 엄마가 나눠줘요. 딱 나눠서, 손녀와 손자 보고 어느 거를 할지 물으니까, 둘 다 제일 큰 거를 골라요. 본인이 죄라는 것을 몰라요. 그래서 엄마가 제일 큰 걸 둘로 또 쪼갰어요. 어느 걸로 할지 물으니까, 이번에는 다른 것으로 고릅니다.

이 말은, 인간은 왜 죄를 지으면서 죄가 아니라고 우기냐 하면, 그다음에 준비된 흔들기 사건이 오기 전까지는 기존의 사건에서 자기가 주관적 해석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게 나한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라고. 아침에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살아 있다는 게 아닙니다. 이미 죽은 자가 죽은 티를 팍팍 내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뭐냐 하면, 나쁜 짓을 하면 교도소에 간다는 게 그런 겁니다.

그러면 그걸 보고 ‘저런 인간은 죽여야 해’라고 하면서 본인은 그렇게 죽을 죄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수십 년 전에, 부산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을 접하는데, 동네 주택가에 다니면서 옥상에 있는 빨래를 다 걷어서 찢어버리는 범인이 있었는데, 그 범인의 존재를 체포했어요. 체포하고 난 뒤에, 그 체포된 자가 경찰에 끌려오는데, TV 보니까 고개 푹 숙이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누구냐 하면, 신창원 원숭이예요. 고개 숙이면서, ‘국가와 사회에 누를 끼쳐서 죄송합니다’라는 표정을 지어요. 그걸 보고, ‘야, 원숭이가 인간 흉내를 내는구나’라고 아주 놀랐어요.
또 미국에서 어떤 여자 경찰이 범인을 잡아서 벽에다가 손 짚고 서게 해서, 흉기나 권총이 있는지 수색하려고 하니까, 범인 집에 키우는 개 두 마리가 옆에서 같이 벽 짚고 서서, 경찰관에게 검문받고 있는데, 여자 경찰은 웃으면서 체포하고 있어요.

이게 다 어디서 모방한 거예요? 어디서 위장된 겁니까? 흉내 낸 거예요. 인간은 오마주(hommage)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모방 외에는 하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창원 원숭이 욕할 게 아니고, 우리가 신창원이고, 우리가 바로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며 살아가는, 그러면서도 ‘뭐가 잘못됐는데?’라고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그 장소를 만듭니다.

주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고 만들었던 그 일의 공간을 주께서 하십니다. 하시는 방식은 뭐냐? 언약궤 언박싱(Unboxing). 이 언약궤 언박싱이 뭐냐. 언약궤를 인간의 손에서 떠나게 해서, 언약궤가 해체되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영역을 드러냄으로써, 주님께서 새로운 공간은 언약궤가 담당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일어나요.

그게 사무엘상 5장 3절에 나옵니다. 상당히 흥미로워요. 재미있어요. 한번 들어보세요. 5장 3절에 보면, 이제 블레셋 사람이 언약궤를 뺏었습니다. 뺏어서 아스돗 사람들이 있는 거기에, 그들이 살던 공간에 집어넣어요. 그 공간이 뭐냐? 다곤 신, 물고기 신을 섬기는 그 성전에다가 넣죠. 신이 신을 이겼으니까 패배한 신은 이 승리한 신의 뭐가 돼요? 포로가 되겠죠.

블레셋 사람들이 포로로서 끌고 와서, 다곤 신 앞에서, ‘위대한 다곤 신이여, 우리 위대한 다곤 신의 전쟁하신 포로를 잡아 왔습니다’라고 하면서, 언약궤 상자를 그 앞에 두었어요. 두었더니, 3절에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꼭 인물 같아. 인간이 인간과 만나서 하는 행동이 상자와 물체, 물체와 물체끼리 모방해서 보여주는 것 같아요.

거대한 다곤 신이 조그마한 상자인 언약궤 앞에 엎드려 있다는 겁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이게 재미있어요. ‘아하, 우리가 중심을 못 잡았구나. 다곤 신의 기초가 부실했구나. 아이고 우사스러워라’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다곤 신을 다시 위엄 있게 조그마한 포로 잡힌 언약궤 앞에, 여호와의 신이 거기 있으니까, 그 앞에 턱 세웁니다.

그게 3절입니다. 4절에 보니까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또 엎드러졌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어떻게 엎드러졌느냐.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손모가지 다 날아갔어요. 이게 공간입니다. 특수한 공간이에요. 이거는 사람이 만들지 못하고, 주님이, 인간을 지배했던 그 근원적인, 배후에서 인간을 장악하고 꼼짝 말라 했던 그 근원적인 보이지 않는 영을 친히 다루시면서 공간을 만드신 거예요.

피 흘리기 위해서 오신 주님이 그 피를, 그 피로 인하여 인간을 장악했던 이 세상의 신, 악마죠, 성경에서는 무저갱에서 올라온 악마, 임시적으로 올라온 악마가 있어요, 그 악마와 그리고 주님이 어디에서 만나는가? 피 앞에서 만나요. 불행했던 주님이 죽었던 불행의 피가, 이제는 모든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당성을 확보한 피가 됩니다.

이게 바로 주관적 해석에서 벗어나 객관적 해석으로 옮길 때만, 이게 나의 모든 일보다 더 우선된다는 것을 발견해요. 그래서 저는 당부하고 부탁합니다. 인간의 것은 그 어떤 성과도 주님이 허락한 적 없습니다. 왜? 인간은 늘 제자리 뛰기였으니까. 어떤 성과도 주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인간의 어떤 성과도 예수님의 피라는 객관적 해석에 나온 그 성과를 모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끝으로,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 했지만, 아침 것 말고, 오후 것, 이사야 6장 5~8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다시 복습한다면, 성전 안에는 뭐가 있다? 시간이 없고 뭐가 있다? 변화만 일어나죠. 운동은 없습니다. 운동 없습니다. 변화가 일어날 뿐이죠.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내용이 6장 5절에 나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기존의 공간, 주관적 해석의 공간, 그 공간을 언급하고 난 뒤에, 6~7절에, “그때 스랍이”, 천사죠.

“그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것이 신약에 오면, 그 제단에 흘려진 피, 피의 유효한 능력이 우리에게 도달되는 걸 의미하죠. 이게 뭐냐? 붉은 죄가 있을지라도 양털같이 희어진다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변화를 우리한테 채색하는 거예요. 묻히는 거죠.

우리를 유화 캔버스라 하면 주님께서 그 피를, 죄를 붉게 만들고 그걸 씻어서 하얗게 만드는 그 채색의 작품을, 우리를 캔버스 삼아 그걸 칠하는 거예요. 이제 그다음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질문, ‘그럼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그건 제가 이야기할 필요 없겠죠. 8절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여기서 우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주관적 해석을 가진 인간이 아니고, 객관적 해석에 동참했던 그리고 천사와 하나님과 그리고 성도, 그걸 우리라고 하고, 이 “우리의 해석을 위해서 누가 갈고?” 이제 심판하러 가는 거예요. “누가 갈고?”라고 할 때, 그때 우리가 할 일은 뭐냐? 이사야가 대신 이야기해 줍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여기 ‘새롭게’ 있습니다” 있는 것은 그냥 있는 게 아니라, 객관적 해석을 위해서 여기에 새롭게 있음이 성립되면서, “그 있음을 이 땅에 보내시옵소서. 저를 보내시옵소서” 그것이 현재 여러분들이 있는 삶의 현장입니다. 체험의 현장입니다. 세월이 얼마나 되고 나이를 얼마나 잡수셨어도, 그동안 ‘누가 보냈습니까?’라는 질문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여기 있고, 살았다’라는 자기 성과를 말하지 말고요. 성과 빼고, 그건 변화가 아니고 변화는 ‘누가 나를 이 땅에 보내서 이렇게 살고 있고, 이제 주님과 합류되었고, 합류될 거라는 것을 기뻐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하는 성과가 아니고 주님의 피의 효과고, 혜택이요, 성과였습니다. 도대체 우리의 주관적 해석이 주님을 얼마나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고 죽게 했는지, 새록새록 늘 반복해서 깨닫는 우리의 삶의 현장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