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1:7-8 / 십자가 반복 본문
십자가 반복
이근호
2026년 4월 19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7-8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본다는 것’ 이것은 보일 때에만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볼 수 없는 것은 못 보는 법입니다. 특히 인간들은 보고 싶지 않는 것은 안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의 태도에 대해서 ‘찌른 자’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신 것을 봐서 하나님께서 남은 일은 이 십자가 사건을 역사 안에서 되풀이 시키겠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보고 싶은 것을 못보게 하시고 인간들이 보고 싶지 않는 것을 볼 것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이 사람을 만나면 죽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죽이지 않고 전달하고 싶은 바는 다 하는 방법은 말씀이나 설교나 기적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직접 인간이 가담되는 일을 따로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어이 인간 내부에 분노를 유발케 하십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찌르고 싶은 분으로 나타나시고 활동하시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의 일상 생활이 그러합니다. 자기 딴에 조심스럽고 순수하게 산다고 하지만 세상 자체가 한통속이 되어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분위기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과는 차별나는 세상이 이 세상 가운데서 형성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나라를 이 땅에서 형성시켰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는 거부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눈에 보이는 증거를 주시지 않는 이유는 십자가 죽음을 반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면 죽습니다.(창 32:30)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같은 증거를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눈에 보이는 증거는 결국은 인간 본인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가장 확실히 증거는 ‘뭔가 보고 있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허점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도 경험한 겁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출 40:35-38)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눈에 회막이 보였고, 성전이 보였습니다. 구름도 보였고, 모세도 보였습니다. 하지만 모세와 대화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 성전을 완공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왕상 8:10-11)
하지만 늘 구름이 끼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시간 전체를 관장하는 알파요 오메가요 시작과 나중이지만, 인간은 기껏 지나간 것만 ‘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의 것을 보지를 못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제대로 봤다고 할지라도 그 봄이 반복이 안되면 인간에게 소용없는 일입니다.
동방박사가 봤다는 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별을 지금 우리가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복하시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의 반복이 아니라 사건의 반복입니다. 인간들이 뭘 볼때는 자신의 문제점을 굳이 거론할 필요없이 보이는 대로 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보고 싶지 않는 식으로 오셔서 십자가 시간은 반복시키십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시 113:5-7)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추시되 인간들이 도저히 찾지 못하는 곳까지 낮아졌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따라서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볼 자가 없습니다. 즉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셨지만 인간들은 그분이 하나님이신줄 몰랐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십자가에 매달라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이 십자가를 반복하시겠답니다. 그것이 바로 ‘찌른자’의 등장입니다.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 결과는 ‘애곡’입니다.
모든 자들이 애곡하게 되면 그 애곡의 근거는 오직 하나로 모아집니다. 그것은 바로 ‘찌른자’을 부각하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께서 먼저 애곡에서 면제되는 자기 백성을 빼돌리시는 작업을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찌른 자’를 부각하게 되는 그 십자가 사건은 전면적인 애곡 이전에 미리 알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즉 뭔가 보는 것 대신하여 충분하게 하나님께 낮은 데서 찾지 못한 상황을 미리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알게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나온 주파수를 성도 내부의 마음에 퍼지게 하시는 겁니다. 구름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십자가 반복’으로 나타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사건을 본다? 이것 역시 인간쪽에서 나서기 곤란한 일일 겁니다. 십자가 사건을 반복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보고 믿는 경우를 배제하십니다. 그 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릴 만한 경우들을 계속해서 역사 속에 흘러 보내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육신에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자들로 하여금 계속 부정하고 피하시는 방법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39-41)
사도 바울의 경우, 그는 십자가 고난은 자신의 남은 육체에 채워진다고 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 원칙으로 인해 나타난 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6:13-15의 말씀입니다.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즉 새로운 거주지의 이동을 위해 먼저 우리 안에 십자가 사건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찌른자요 주님은 우리의 의해서 찔림을 받은 자 맞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마음 속이 주님의 십자가가 작용하는 공간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송민선
3강-요한계시록 1장 7~8절(십자가 반복)260419-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1장 7~8절입니다. 신약성경 400페이지입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오늘 말씀을, 짧은 말씀이지만, 중간을 끊어내고 끝부분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라는 비극으로 끝나는 거죠.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무조건 애곡하고 탄식할 것이다’ 그러면 땅에 있는 것 자체가 절망적인 사태인 일이 일어난다는 거죠. 그러면 애곡하지 않으려면, 기뻐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겠는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보면, 미리 자기 사람을 공중으로, 하늘로 피신시킵니다. 땅에서 하늘로 피신시키고 나머지 인간들은 작살나고.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러니까 시신을 옮기는 거예요.
17절에,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사는 거주지가 바뀝니다. 주민등록 소용없습니다. 버스 할인권도 소용없습니다. 지하철 공짜로 타는 거 소용없습니다. 지상과 결별이에요. 지상의 모든 것과 결별입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제부터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겁니다.
‘이거 구라? 진짜로? 어찌 이게? 진짜 이거 팩트? 이게 사실인가? 이거 누가 지어낸 게 아닌가?’ 말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소리여야 하는데, 어처구니없는, 참말로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성경에서 쏟아내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이 말이 맞다는 것을 보장할 거냐고, 막 닦달하듯이 달려들 수가 있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도행전 1장 9절에 보면,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 구름 타고 올라가셨습니다. 이래도 못 믿나요? 구름 타고 올라간 거예요. 거주지가 이 땅이 아니고 하늘로 올라가는 겁니다. 돌아가시고 난 뒤에, 묘는 어느 묘원을 쓸 것이냐, 공원 묘원으로 할 것이냐, 수목장할 것인가, 화장할 것인가. 그것 가지고 남은 자식들하고 너무 다투지 마세요. 수목장을 하든, 화장해서 강에 뿌리든, 뭐가 되든 우리의 거주지는 하여튼 이쪽은 아니에요.
이 땅 쪽은 아닙니다. 거주지가 될 수 없는 곳에서 장례 치르고 하는 데서, 어떻게 장례 지내든, 그것에서 우리가 논쟁하거나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중요한 것은 남은 재산을 딸들에게 주느냐, 아들이 몽땅 다 가져가느냐, 그게 문제지, 지금 내 주민등록상 거주지에서 어떻게 죽느냐는, 거기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자칫하면 이솝우화에 나오는 개구리 엄마 이야기같이 돼요.
엄마 개구리가 죽으면서 산에다 하지 말고 강가에 묻으라고 했는데, 강가에 묻어 놓고 비 와서 떠내려가면 어쩌나 하지 말고, 어떻게 되든 거주지가 이미 하늘로 가버렸으면, 지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 좀 덜 썼으면 좋겠어요. 이란이 이기든 미국이 이기든, 좀 신경 안 썼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땅의 일이에요. 우리는 하늘에 속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우리에게 매일매일 우리의 과제고 삶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에 결국 다시 말씀드려서, 이 땅에 있는 남은 자가 저주받은 자죠. 땅에는 이제 남은 자와 더불어서 유황불 떨어지고 내가 그렇게 ‘아름답다, 보고 싶다, 대단하다’라고 하는 세상 모든 거 다 깨집니다. 또 그것에 대한 증거는 성경에 어디 있느냐? 그게 바로 성전을 46년 동안 지어놓으니까 얼마나 성전이 대단하겠습니까?
대구의 서현교회, 서울의 충현교회에 가보면 대리석으로 멋지게 지어서, 충현교회에 여러분 가 봤어요? 아직 성지순례 안 한 모양인데, 충현교회 건물이 대단해요. 영락교회도 대단하지만, 충현교회는 더 대단해요. 교회 붙들고 있잖아요. 교회 붙들고 저주받을 차례가 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 말씀을 준 것은, 사도 요한이 지금 반모섬에 갇혔거든요.
‘내 신세, 내 꼴 한번 봐라. 내가 반모섬에 갇혀도 내가 지금 내 신세 걱정 안 하잖아’라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게 되면, 현재 내 처지는 문제 삼을 일이 하나도 없고, 내 삶의 형편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이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계시(啓示)죠.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내가 살던 내 고향 떠나서, ‘죽어서 뭐 어떻게 되겠지’라고 하지 말고 살아 있으면서 우리의 존재가, 내가 알던 존재 지점이 아니고 다른 공간, 다른 자리로 옮겨져야 하는 겁니다. 그게 뭐 말처럼 참 쉬운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게 그렇게 되는가. 도대체 어떤 자리에 가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실감나게 다가올 수 있느냐.
또는 어느 지점으로 가야 되는가. 교회도 아니고, 기도원도 당연히 아니고, 집에 있는 자택도 아니고, 도대체 어느 공간에 미리 이동해야 애곡하는 자와 함께 참석하지 않는 거냐. 그거는 역시 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줬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는 거죠.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사도바울이 전한 건데,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마는 다시 한번 보면 이렇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이렇게 돼 있어요. 사도바울이 현재 있는 곳이 십자가 안이에요. 십자가 안에서 뭐가 보이느냐? 십자가 안에 못 들어오는 바깥세상이 보이는 거예요.
세상은 이쪽에 못 오고 나는 저쪽으로 갈 수 있는 형편이 못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들어가는 방법은 뭐냐?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십자가 못 오는 쪽이 어떤 쪽이냐 하면,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는 겁니다. 자기 육체로 행하는 거, 육체에서 의미 있게 살아온 모든 축적된 그것을 자랑하는 자는 여전히 그는 십자가 속으로 못 들어왔다고 그렇게 평가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 13~15절에 보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제 17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아주 정말 과격하고 도발적인 표현이죠.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 이런 이야기할 때, 여기서 이 말씀의 진도를 한번 나가봅시다. 지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못 받아들이는 이유는 뭐냐 하면, 보이는 것을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못 받아들이는 거예요.
인간의 한계가 보이는 것을 내놓으면 믿는다고 하거든요. 이게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개념은 보이지 않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거니까,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굉장히 답답한 거죠. 그러나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성도의 운명은 이미 결정 났다고 하는 거예요. 하늘에 구름이 있다는 건 보입니다. 그러나 그 구름이 예수님 개인에게 찾아와서 예수님을 둘렀다? 이거는 이렇게 반복되는 이 세상에서는 안 보이는 거죠.
동방 박사가 예수님께 왜 왔느냐, 어떻게 찾아왔는가? 별 따라왔다. 그러면 그 별은 지금 어디 있느냐? 없지요. 없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은 이 보이는 것들 속에 있기 때문에, 성경에 몇 구절 정도가 아니라, 어느 구절도 이 보이지 않는 것과 결합해 있는 성경 구절을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볼지어다” 뭐 안 보이는데 뭘 봐요? 뭐가 보여야지. “볼지어다” 사도바울도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십자가가 눈앞에 안 보여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는. 그런데 보인다는 거예요.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자, 여기서,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사를 시키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나옵니다.
그거는 뭐냐 하면,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라고 했죠. 모든 눈이 그를 보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본다는 거예요. 사람이 사람을 찔렀다. 길을 가다가, 누가 성질대로 술 먹고 막 행패 부리다가 칼 들고 사람을 찔렀다. 그러면 경찰관이 제일 먼저 찾는 것은 CCTV 찾죠. 혹시 여기 CCTV 있는가. 찔렀다는 말은 있는데 이미 지나간 거니까 보이지 않죠. 지나간 거니까 보이지 않는 겁니다.
8절에 보면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라고 돼 있어요. 그러나 우리 주 하나님은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알파요 오메가 맞는데, 인간은 알파요 오메가가 아닙니다. 인간은 지나간 것, 자기가 구경한 것, 눈으로 본 것만으로 끝났고, 앞으로 주어진 것은 안 보입니다.
알파도 아니고, 오메가도 아니고, 근원도 아니고, 그냥 중간에 있는 존재입니다. 이 중간에 있는 존재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알파요 오메가, 시작도 보이고 끝도 보이는 세계로 이동시킵니다. 이동시키는 그 지점이 어디 있느냐. 그것은 제가 오늘 주일 학교 설교할 때,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는 어디냐고 하면서, 성전이라고 했어요.
성전. 이스라엘 백성은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성전은 눈에 보이거든요. 솔로몬 성전, 성막은 눈에 보이잖아요. 모세의 성막. 그 성막에서 하나님이 나타날 때, 그 낌새가 뭐냐면, 구름이 꽉 덮였어요. 하나님의 영광이 덮였다고요. 출애굽기가 그걸로 끝나요.
출애굽기 40장 마지막에, 하나님의 성막에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모세하고 대화할 때 구름이 끼어 있다는 이런 식으로 해서 이제 출애굽기가 끝납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출 40:35-38)
그런데 그 구름은 눈에 보였던 거예요. 성막도 눈에 보인 거예요. 구름 보이고, 모세 보이고, 성막도 보이는데, 다만 거기에 주인공 되신 하나님이 구름에 가려서 안 보였어요. 구름은 봤는데, 구름과 더불어서 대화하시는 당사자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안 보이는가. 보이면 죽어요. 피조물은 하나님 만나면 죽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못 만나요. 다만 하나님 쪽에서 인간에게 나올 때, 구약에서는 눈에 보이는 구름과 성막 또는 성전 가지고 영광중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이 눈에 보이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사람의 모양으로, 죄인의 모양으로 또는 인간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저분이 과연 하나님인가 아닌가 하고 이렇게 의심을 했거든요. 의심했는데, 그 인간들이 실수한 게 있습니다. 저분이 하나님인가 아닌가를 좀 잘 보자는 이게 실수예요. 그분을 봐도 몰라요. 예수님을 만지고 해도 예수님이 하나님인 줄 몰라요. 모르는데,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는 뭘 나타내냐 하면, ‘나의 하나님 됨을, 내 폼을 봐라. 내가 멋있지? 키 크지? 인물 잘났지?’라는 이게 아니고, 나(예수님)의 낮아짐을 보라는 겁니다.
낮아짐을 시편 113편 5절에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셀프(self), 스스로 높은 데 계시는 분이 스스로 낮추었어요. 스스로 낮췄다고 됐어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6절)” 빌립보서 2장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곧 하나님이시라, 우리 주 예수님이시라.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으로 거주지 이동을 하려고 시도했는데, 누구한테 문제가 있느냐? 나한테 문제가 있었던 거예요. 내 마음이 너무 높아져서, 나보다 더 낮게 오신 분을 낮은 장소에서 발견하지 못해요. ‘에이, 나는 그런 거 아니고 뭔가 대단한 하나님을 찾는다’ 유대인들도 그렇고, 대단한 하나님을 찾았어요. 낮고 낮은, 천하고 천한 하나님을, 자기 마음이 너무 우쭐대고 그런 데는 아예 생각도 안 해서, 자기가 낮추지를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9장에서는 우리를 어느 정도 낮춰야 하느냐고 말씀하셨냐 하면, “눈 떴나? 너는 소경이야”라는 이 말씀을 받아들여야 해요. 결국 제가 여기서 내린 결론은, 천국 가고 싶으나 아무도 못 갑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오신 하나님을 자기 자력으로 알아볼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도 없어서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 쪽에서 성경 보면서 주님 가신 그 길을 가겠다는 시도는 애초부터 실패로 끝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낮아짐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이오” 하는 이 사건을, 주께서는 하나의 CCTV가 있어야 보는 단일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그 사건을 계속 유지합니다. 인류의 남은 역사 가운데 그걸 반복시켜요.
그러면 십자가가 한 번으로 끝나는 십자가가 아니라, 우리 일상 가운데 십자가를 계속 반복시켜요. 십자가 사건을 반복시킨다는 말은,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라는 이 말씀에다가 우리를 일단 그 속에다가 집어넣어요. ‘내가 죽어서 천국 가야지’라는 이러한 우리의 야망은 아예 걷어치워요. 이거 안 받아줍니다. 그러면, ‘나는 높지 말고 낮게 살아야지’라는 그것도 안 받아줘요.
낮게 될 위인도 없고요. 낮게 됐다는 것 자체도 일종의 위선이고 오만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우리 가운데서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는 겁니다. 장차 천국 가서 주와 만날 그 사도바울에게 주님께서는 그 골로새서를 통해서 사도바울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1장 24절을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절망을 즐기는 거나 마찬가지죠.
성경에 보니, 괴로움을 기뻐해요. 말을 비비 꼰다고 하지 마세요. 여기 성경에 분명히 나옵니다.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자신의 육체가, 십자가 사건이 아직도 유효하게 지금 우리 시대에 되풀이된다는 것을, 내몸 하나 주께서 사용해서 드러내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아무리 이야기해도 잘 이해가 안 될 거예요. 예, 장담합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일단 마태복음 19장 12절의 말씀을 일단 보시고 그다음에 마지막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0절부터 보면,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찐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찌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찌어다”
고자의 3종 세트죠. 이 말은, 고자가 뭐냐 하면은 육과 영의 그 중간 모습을 고자라는 겁니다. 육체가 고장 난 거죠. 육신의 자식을 낳을 수 없도록 고장 난 그 고자를 거론해서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의 중간 모습을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줬습니다. 그러면 생식 기능이 상실한 그런 사람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징징거리겠습니까? 왜냐하면 내가 고자 된 것이 내 뜻입니까? 아니죠.
그러면 나는 고자 되기를 열심히 기대했습니까? 아니죠. 그건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은 어느 누구도 제대로 된 십자가 사건을 원할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 사건으로,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천국 갈 사람을 이 지상에서 하늘로 거주지를 옮기도록 십자가 사건을 되풀이합니다. 십자가 사건을 되풀이하게 되면, 누가 찌른 자고 누가 찌름을 받은 자냐 하면, 예수님이 찔림을 받은 자이고 내가 찌른 자의 역할을 그 십자가 사건의 현장에서 하게 됩니다.
‘하나님, 왜 하필이면 저에게 이러한 불행이, 이러한 안 좋은 일이 생기게 하십니까?’라는 것부터 출발하게 하십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여러분들은 뭐 다 입이 무겁고 점잖은 분이라서, ‘목사님, 저는 하루하루 감사하고 즐겁기 짝이 없어요. 아무 누구한테도 우리 엄마한테도 불평이 없습니다. 나는 아무 누구한테도 탓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갑니다’라는 이런 인간이 이 세상에 없어요.
따져 보면 다 누구 탓이냐? 남 탓이에요. 태어나기를 재벌 집에 안 태어난 탓이고, DNA를 잘못 받아서 몸이 약하고, 전부 다 이건 뭐냐 하면, 은연중에 어디 내가 탓할 사람을 찾지 않는가. 그게 바로 결국 탓하게 되면 돌아, 돌아, 누구한테 가느냐 하면, 주님을 찌른 자의 입장에서 발각당하게 되는 겁니다. 발각. 그게 십자가 사건을 위해서, 주님께서 반복시켜서 파동을, 주파수를 맞추는 거예요.
여러분 뭐 이건 상식이니까 다 아시겠죠? 빛은 벽을 통과하지 못하지만, 와이파이는 벽을 통과하는 이유가 뭡니까? 다 아시죠? 벽 안에 있는 원자에 전자가 있는데 전자의 주파수 파장 과 빛이나 와이파이 파장과 이게 결이 맞아야, 흡수가 되든 통과되든 해요. 빛은 짧아서 안에 있는 콘크리트 벽에서 다 흡수되어서 빛이 통과를 못 해서 벽 안은 어둡고 시커먼 겁니다.
십자가 안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십자가에서 너는 찌른 자고 나는 찔림을 받았다는 이 말씀대로, 이게 알파고 오메가, 하나님의 언약을 언약대로 꾸준히 유지하시는 그 하나님의 뜻대로 파장을 맞닥뜨리도록,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있는 전자, 원자 안에 있는 전자, 전자의 주파수가 십자가 사건의 주파수와 일치되도록 하나님께서 작용하게 되면, 우리는 이미 십자가 안에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거는 이해 문제가 아니고요. 이거는 아까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처럼, 그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주파수가 이제 여러분의 속까지 말씀의 파동으로 작동합니다. 작동하면, ‘고난? 아 짜증 난다. 정말 나는 조용히 살고 싶은데, 고생을 도대체...안 그래도 고생하는데 얼마나 고생해야 해?’라고 이렇게 짜증부터 먼저 낼 게 아니라, 아까 제가 골로새서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괴로움을 기뻐하는 이 주파수는 우리가 생각하고 예상한 주파수가 아니라, 주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즐거운 주파수입니다.
주를 위해서 산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비록 이 땅에서는 알아주지 않아서 고난받지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내가 찔림을 받았다”라는 그 소식이 여러분 속에 복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느 누가 자기 능력으로, 자기가 예상해서,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을 자가 있겠습니까?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내 능력으로 말씀을 믿을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주님이 홀로 죽으신 그 십자가의 피와 고난이, 찔림을 받은 분의 위력이 이제는 우리 안에서 작동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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