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사도행전 3:16 / 삶의 터전의 한계 / 250422 본문
녹취:홍민희
강남-사도행전 3장 16절 (삶의 터전의 한계) 250422a-이근호 목사
오늘은 사도행전 3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베드로 요한 육신을 갖고 있는 인간이죠. 나면서 못 걷게 된 자, 역시 육신을 갖고 있는 인간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육신을 갖고 있는 베드로 요한과 앉은뱅이라는 육신이 만나서 뭐를 보여주느냐 하면은 16절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라고 했어요. 그러면 인간 대 인간, 베드로라는 이름 있고 요한 이름 있지요. 앉은뱅이도 역시 자기 이름이 있을 겁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사람마다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을 가진 자들이 모여서 그냥 만남과 결과를 한다. 그럼 그 이름은 육신을 가진 이름이 된단 말이죠. 3장 16절에 그 이름, 예수의 이름은 눈에 안 보이잖아요. 베드로 눈에 보인다 요한 눈에 보인다 앉은뱅이 눈에 보인다. 그럼 눈에 보이는 사람끼리 회개를 하는 게 일반 사람들의 마땅하지요. 그게 12절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 요한 당신들이 했잖아. 방금 뭘 했잖아.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어라. 뭘 했는데 그 결과가 앉은뱅이 그것도 오래전부터 앉은뱅이라고 소문났기 때문에 그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앉은뱅이로 살 것이라고 누구나 짐작했던 그 사람이 일어났단 말이에요.
보이는 인간과 보이는 인간과의 만남에서 어떤 결과가 나왔다면 그것의 원인을 찾는 것은 보이는 인간이 보이는 그 사람에게 뭘 했느냐를 주목하는 거예요.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어라. 자, 먼저 질문 나가겠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어라 하는 그걸로 앉은뱅이가 낫겠습니까?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그 사람을 낫게 했습니까? 어떻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분이 했지요.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어라 하는 문장을 베드로 요한이 그 사람을 낫게 한 게 아니에요. 있는 자, 눈에 보이는 자가 다른 눈에 보이는 자를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바꿀 수가 없어요. 능력이 안 나옵니다. 눈에 보이는 인간의 능력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포기한 사람이 여러분과 저 아닙니까. 안돼. 뭐 되야 하지. 기도? 기도 응답 안될 거 뻔히 아는데 무슨 기도를 해 이런 거. 주기도문은? 주기도문은 외우는 것이지.
우리 주일학교 사회 보는 집사님이 주일날 사도행전 성경할 때 처음이 인상적이었어요. 이제부터 사도신경 외웁시다. 고백합시다가 아니라 외웁시다. 맞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 여기서 인간이 인간을 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할 수가 없다. 인간이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주님이 인간 일에 개입할 필요가 없어요. 보이는 인간끼리 알아서 잘 맡겨가지고 탄핵을 하든지 재판을 하든지 관세를 때리든지 어디까지나 인간이 인간 상대로 하는 거죠. 예수님이 관세 때렸습니까? 아니잖아요. 같은 인간이 인간을 보고 그렇게 하는 거죠. 오늘 사도행전 3장 이야기인데 앉은뱅이도 보이고 베드로도 보이고 요한도 보이는데 이들이 와서 한 것이 있느냐 예요. 그래서 일반인들은 베드로 요한이 성실히 했잖아 하는 쪽이고 베드로 요한은 우리가 안 했다는 쪽이에요. 그럼 그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뭘 안 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느냐? 그럼 안 했는데 결과가 나왔다면 그 예수 이름으로 걸어라 하는 베드로 요한은 무슨 일을 했습니까? 나를 갈아 넣은 일을 했지요. 이게 나를 갈아 넣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 무거운 걱정과 근심으로 하루를 살더라도 지옥 갔습니다.
걱정 근심이 내 뜻대로 안 되서 걱정 근심이 아니고 걱정 근심 하는 주체 내가 멀쩡하게 살아있어서 문제에요. 살아있는 내가 뭘 함으로서 어떤 결과가 나오기를 누가 걱정하느냐? 걱정을 내가 하는 거예요. 문제가 그렇게 쉽게 간단하게 풀리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주님은 눈에 안 보이는군요 라고 생각할거에요. 그러나 요한일서 4장 2절 보면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다” 라고 되어 있어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눈에 안 보이니까 눈에 보이는 우리끼리 뭘 해봅시다 라고 하는 것은 적그리스도. 예수님은 눈에 안 보이다 뿐이지 그분의 이름은 지금도 작용하고 있잖아 하는 이것은 참된 영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라는 거예요. 참된 영,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보이는 나를 보이지 않는 주의 이름 앞에 나를 갈아 넣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말살. 갈아 넣지 않고 말살해야 되는데 말살하지 아니하면 여기서 뭐가 밀려오느냐 하면 공포와 두려움의 압박감을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럼 악마는 악한 영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떻게 하겠어요? 자꾸 우리를 심각하게 만들겠죠. 우리 존재를 소중하게 만들어요. 네가 설치지 않으면 아무 결과 나타나지 않아. 정신차려라. 네가 안하면 어떤 결과가 안 나타나. 그러니까 너는 너를 주목하고 너를 심각하고 진중하게 생각해. 이런 식으로 악마가 우리 자신의 역량과 우리 자신의 모든 계획과 모든 비전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철두철미하게 거기에 매몰되고 매진하게 만들어요. 누가요? 악한 영이. 악마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일이 잘 될 거야. 아니야. 순서를 이렇게 바꿀까. 아니야. 이렇게 할까.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일상생활에서 매일같이 겪는 겁니다. 오늘 누굴 만난다. 만날 때 어떻게 말을 던져야 되지? 식당은 어디 카페는 어디 카페가 좋을까? 몇 시에 만나면 좋을까? 특히 여자분들 옷은 뭐 입고 나가지. 오랜만에 동창 만나는데 후질근하게 해가지고 인생 조졌구나 이런 소리 들을까 봐. 옷은 뭐 입고 가고 머리는 또 하러 가야하는지. 상대방하고 머리 싸움 하고 이런 식으로. 빽은? 옷 색깔은 세련되게 했느냐. 몇 년 만에 만나서 야 너 품격 있다. 품격 이야기. 그게 자동적으로 나올 수 있도록 야 너 품격 있구나. 너도 만만치 않아. 서로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그렇게 품격 갖추고 품위 있다 칩시다. 그래서 뭐? 그래서 얻고자 하는 고대하는 어떤 결과를 원하는데? 너 성공했구나 부럽다! 이런 이야기? 너 차림 보니까 많이 성공했는데 남편이 나한테 잘 해줘. 그러면 슬슬 썰이 풀리지요. 살아있는 내가 가정은 이렇게 이렇게 하니까 우리 식구가 나를 그야말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내가 이 정도까지 했는데. 결국 이것을 사자성어로 뭐라고 하느냐. ‘일상생활’. 일상생활의 한계 그 문제점 거기에 대해서 마가복음 1장 3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입 다물어 이런 거예요. 쉿! 너는 말하면 안돼. 악마가 사람들을 속이는 이유는 악마가 귀신같이 예수님을 알아보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 악마밖에 없어요. 마귀밖에 없어요. 야고보서 2장에 나오잖아요. 마귀도 믿고 떠느니라. 마귀만 주님을 알고 아무도 주님을 몰라요. 선수는 선수끼리 안다고요. 타짜는 타짜끼리 알잖아요. 뭣도 모르고 내가 했어 이러고 있단 말이죠. 인생 내가 알아서 잘했다 이 말이에요.
지금 요한일서 4장 2절에서 예수님이 육체로 왔다 이게 육체로 왔다 이 사실 하나가지고 성령 받은 자냐 아니면 악령 받은 자냐 결판이 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악마의 이론을 알아야 돼요. 악마의 전략을 알아야 돼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보이는 것은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을 우선순위로 치자는 거예요. 마귀의 주장은. 예수 좋고 하나님 좋고 다 좋은데 그 하나님 예수님마저도 일단 보이는 내 몸뚱아리 잘 챙기려고 있는 쪽으로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하자 라는 것이 마귀의 주장입니다. 교회 한 20년 다녔으면 복음 알았으면 뭐 괜찮은 결과를 챙겨야 할 게 아니냐. 쉽게 정리하게 되면 이런 식이죠. 그만큼 복음 아는데 집구석 왜 그래? 달라진 것도 없고 변화도 없네 왜 그래. 너 잘못 받은 거 아니야? 이런 식이에요. 예수를 믿든 하나님을 믿든 간에 중요한 것은 뭐다? 눈에 보이는 나, 나한테 내가 소중하다. 내가 나한테 집중하게 만들어요. 내가 이렇게 나를 갈아 넣을 필요가 없다. 예수님을 통해서 갈아 넣기는 커녕 내가 더 빛나게 살아나야 돋보여야 내가 신앙생활 하는 보람이 난다라는 생각을 악마가 계속 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육체는 무슨 의미냐? 육체와 왔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냐? 예수님이 병 고쳐줬다 그 정도 한다 그러면 악마도 굳이 예수님이 활동하는 일에 대해서 거부하지 않아요. 그런데 쉽게 말해서 악마가 원하는 것은 예수님 오셔서 인간들을 구원하시고 인간들 병 고치시고 어려움을 들어주는 것 그것은 악마 쪽에서도 오케이예요. 그건 해. 그건 하라고. 뭐는 건드리지 말라느냐 하면은 이 악마를 귀신을 지옥 불에는 들어가게 하지 말라. 지옥 불에는 나를 집어넣지 마세요. 이걸 원하는 거예요. 악마는 날 건드리지 마라. 그래서 악마는 어떻게 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안 보이는 분으로 계속 하고 악마가 인간을 다루는 것처럼 모든 인간 세계의 문제는 인간이 의논하고 같이 심사숙고해서 그렇게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고집하자는 거예요.
자, 다시 한번 마가복음 보겠습니다. 1장 34절 이 대목을 가지고 메시아의 비밀이라고 해요. 왜 메시아가 공개적으로 일하면서 그걸 비밀로 해달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모순되고 앞뒤가 안 맞는다. 무슨 말이냐 하면은 주님께서 여러분들 구원해놓고 네가 구원받은 것은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그 해답을 제가 제시했습니다. 사람이 구원받는 방법은 내가 여기 있는데 주님이 와서 구원한다 이게 구원 방법이 아니고 반드시 뭐를 집어넣느냐 하면은 나를 말살하고 나를 없애버리는 절차가 필요한 거예요. 내가 갈아 넣는 절차가 없는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 시켜놨는데 지가 살아가지고 또 어제처럼 은혜 안 받으면 어떡해 걱정하는데 무슨 이런 구원이 다 있겠어요. 아 어제 너무 좋았어요 주님 오늘도 그런 은혜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주의 뜻은 갈아 넣으라고 했지 내가 분명히. 그런데 왜 또 오늘 펄펄 살아서 날뛰느냐. 내가 구원의 기쁨 주는 너 시다바리냐? 이렇게 되는 거죠. 나를 없애는 조건하에 구원한 거예요. 나를 없애는 조건하에. 문장으로 쓸게요.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에 나는 죽었고 빈 무덤에서 예수님 살아났을 때 나는 이미 살았다. 이게 구원입니다. 로마서 6장. 이게 구원이잖아요. 이게 어떻게 구원이 되느냐 하면은 종속관계거든요. 예수님이 하는 일에 종속 관계가 되게 되면 이것은 예수님과 아버지가 한 일에 나를 갈아 넣은 상태가 되는 겁니다.
이거 좀 과도한 예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실제로 제가 이거 시범을 보여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죽기 때문에, 이 전구 있잖아요. 전구를 열고 전구에 손가락을 빼면 감전되서 죽잖아요. 죽는데 여러분 따라 죽어야 되는 게 그래가지고 어떻게 아이고 식겁해서 뛰면 여러분들 아이고 안심이다. 왜? 갈아 넣었으니까 한 몸에다가 갈아 넣었으니까 이걸 다윗 언약이라고 해요. 백성들이 왕의 모든 그 일에 있어서 백성들이 종속되어 있는 상태로 계약 맺은 것을 다윗 언약이라고 하고 그 다윗의 자손이 메시아라고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 저를 당신 앞에 종속시켜 주옵소서 저희들을 당신 안에 갈아 넣게 하여 주옵소서 저를 말살시켜 달라 얼마나 편합니까? 내가 할 게 뭐예요? 내가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아까 그 강의를 했지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어라 그걸로 인하여 앉은뱅이 낫게 한 게 아니에요. 베드로 요한과 다른 사람의 차이점은 베드로 요한은 지금 종속된 상태에서 움직인 겁니다. 근데 그 당시 일반인들의 해석은 이거예요. "방금 내 눈에 봤는데 CCTV 한번 깔까? 당신이 뭔가 했어. 앉은뱅이한테 뭘 했다고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뭐 중얼중얼 하더니 그것 때문에 걸었잖아" 베드로는 "아니야. 그건 아니야." 내가 중얼중얼하는 것은 베드로 요한 내 이름이고 내 이름 말고 내가 속해 있는 다른 이름이 그 사람을 낫게 했다는 겁니다. 내가 속해 있는 다른 이름.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내 증인이 되는 주의 증인. 주님은 안 보이지만 증인은 보이죠.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다니엘 5장인가 나오는 벨사살 왕 때 갑자기 글자가 막 나타나고 손모가지만 나타나요. 몸체는 안 보이고 얼마나 놀랬겠어요. 갑자기 가운데 손 인형같이 둘둘 나타나가지고 여기 하얀 글씨에다가 '페르시아 망한다. 사람 망한다.' 이야기를 쭉 써버리면 기절할 겁니다. 어떤 사람은 그 글씨가 진짜 글씨인지 현미경 볼 거예요. 그리고 또 얘가 바로 빈 무덤이잖아요. 빈 무덤의 증인으로서 막달라 마리아가 거기에 동원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만약에 신문 조치한다. "니가 가니까 거기에 누가 있었어? 예수님 있었어?" "천사 있었는데, 나중에 예수님 만났습니다." "증거 있어?" "내가 봤다니까요." 요한복음 9장에서 유대인들이 "어이 그 소경! 어 소경 아니네?" 아버지 보고 "당신 아들 소경이었잖아." 아버지 하는 말 "나도 몰라 걔도 다 컸으니까 걔한테 직접 물어" "누가 너를 눈 뜨게 했는가?" "예수라는 분이 눈 뜨게 해줬습니다." "그런 증거 있어?" "아니 내가 눈을 떴다니까, 내가" 지난 오후 설교 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편지래요 편지. "뭐 편지 어디 뭐 등짝에 있어 팔에 있어?" "백지로 보낸 쪽지다 봐라" 살면 살수록 하나님의 새로운 이해가 우리의 육신을 통해서 계속 나오게 돼 있어요.
왜? 갈아 넣었으니까. 믹서기에 주님 믹서에다 갈아 넣었으니까. 너는 어떻게 구원 됐는가? 주님께서 십자가 지셔서 구원 되었다 하면 사람들 뭐라 합니까? "아 예수님 빼놓고 너가 기도원에서 몇 분 기도해서 얼마쯤 응답받아서 구원 됐어?" 그걸 나한테 이야기하란 말이야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여기에 대한 답변은 이거예요. '구원에는 날짜가 없다.' 구원에는 날짜가 없어요. 왜냐하면, 날짜라 하는 것은 내 시간 테이블에서 내가 장악하고 내가 조정하는 내 계획에서 나는 뭐 언제쯤 구원받고 이게 있어야 되는데, 갈아 넣었기 때문에 구원은 어디서 결정돼요? 내 시간 스케일로 사용되는 게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사건이 되기 때문에 주의 사건은 창세 전의 사건과 마지막 사건이 같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시간 계산으로서 날짜는 없어요. 도를 아십니까 비슷하게 해가지고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구원받고 난 뒤에 그다음은 "당신이 달라졌습니까?" 이제 거기에 말려든 거죠. 만약에 어떤 사람 저보고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그거는 주님이 알아서 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뭡니까?" "내 말 못 알아들어요? 주님이 알아서 했다니까" "그럼 나는?" 내가 하면 주님이 알아서 한 게 아니지 주님이 알아서 했다 라는 것은 나는 할 게 없었다 그런 뜻이다. 이거예요. 한국 사람끼리 말귀를 못 알아요. 사실은 그 사람이 말귀를 못 알아들은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이 구원받는 우리 자신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그래서 지금까지 한 것을 더 알기 쉽게 해줬습니다.
'주님이 무시당한 만큼 우리가 무시당하면 족하다.' 근데 우리가 평생을 살아도 주님의 무시당한 만큼 그렇게 우리는 그 양만큼 다 채울 수가 없어요. 그동안 누가복음 1장 34절에서 그동안 악마가 인간을 지배했습니다. 지배하고 난 뒤에 악마가 예수님에 의해서 강제로 그 인간에게 귀신 나가면서 강제로 나왔어요. 나가면서 그 귀신이 그동안 인간에게 세뇌해 준 내용이 나와요. 인간들은 악마의 세뇌에 의해서 누구를 기다리느냐 메시아를 기다린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아직까지 예수님께서 일을 마무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껏 병 낫거나 귀신 나가는 정도에서 구원을 '대충 해서 구원 끝냅시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진짜 이 귀신 나가고 난 뒤에 일곱 귀신 친구 데려오면 어떻게 되겠어요? 생각해보세요. 나는 귀신 때문에 병들었다 그런데 뭐 어찌어찌 기도했더니만 내가 병이 나았다. 그럼 남는 것은 뭐가 남습니까? 멀쩡한 내가 남지요 그 멀쩡한 내가 주님의 일에 갈아 넣은 납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나의 소원 성취한 거죠.
멀쩡하고 싶었는데, 주께서 귀신을 쫓아내서 멀쩡하게 됐다 이거는 평소에 소원 성취한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 고맙다 하고 인사는 늘어지게 하는 거예요. 문둥병 10명이 왔잖아요. 주님한테 그 주님 왔는데 주께서 열명 다 고쳐줬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뭔가 기다렸어요. 뭐냐 하면은 "왜 아홉은 어디 있느냐?" 묻는 겁니다. 왜 그것도 이방인 너만 왜 돌아왔느냐 이 말이에요. 그건 뭐냐 하면은 문둥병이라 할지라도 또는 소경이라 할지라도 이미 악마에 의해서 우리가 이미 다루어질 때는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누가 더 소중하냐 하면은 내 자신이 더 소중한 존재인 것처럼 악마로부터 이미 교육을 받아온 거예요. 철저하게 교육을 받아온 거예요. 그래야 교회가 장사가 되니깐요. "여러분 소중합니다. 주께서는 여러분을 죄 용서할 준비가 돼 있고 여러분들로 하여금 병 고칠 준비돼 있습니다. 못 고치는 것은 여러분이 믿음이 없어 그러니까 악착같이 믿으시면 주께서 여러분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여러분들로 하여금 여러분의 소원대로 병도 고치고 나중에 선종하면 보통 사람들이 묻히는 그런 무덤에 겸손하게 묻힐 겁니다." 뭐 이런 식으로 88세까지 살다가 그렇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탑뉴스 나올 정도로 교황 정도 돼 가지고 할 겁니다. 이제 할 거예요. 추기경 모아놓고. 전에 이야기했죠? 쪽지 하는 거 쑤시는 거 이야기했지요? 다음 주에 교황 차기 뽑을 겁니다. 왜? 인간이니까.
인간은 무슨 누구하고 일한다. 인간끼리 일합니다. 예수님은? 그냥 제사 드리면 되죠. 부활절이다. 제사 드리자. 오순절이다. 고난 받자. 그냥 제사 드리면 돼요. 중요한 것은 예수가 아니고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절대로 나를 가리지 않습니다. '나를 소멸시키지 않겠다.' 이게 누구한테 교육받느냐 하면 철저하게 악마로부터 교육받은 증상 흔적이죠. 그러면 성령받은 흔적은 뭐냐? 주께서 내 손등을 이렇게 긁어버리면, 예를 들자면 보이지 않는 금속이 있는데 보이지 않는 금속이 새 차 옆구리를 이렇게 긁고 도망갔다면 뭐가 나와요? 긁힌 흔적은 있는데 누가 긁었는지는 모르죠? 누가 긁어서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 앉은뱅이가 낫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이 앉은뱅이가 앉은뱅이 된 것은 누가 긁었어요? 주님이 앉은뱅이 되게 한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되면 말이 어떻게 되냐면 구원이라 하는 것은 앉은뱅이가 나은 게 구원이 아니고 왜 나는 앉은뱅이로 태어나서 앉은뱅이로 살아야 했던가 그 원인과 이유까지 다 밝혀지는 것 그게 주님의 구원 안에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주의 증인이 예수 믿고 만약 구원받으면 예수 믿었던 내가 나의 증인이 되기 때문에 그거는 마귀 짓이죠. 왜 주님께서 앉은뱅이를 되게 했는가? 중요한 점이 이거죠. 예수님이 육체로 왔다는 말은 어느 인간의 육체치고 예수님보다 더 험악한 육체의 고난을 마귀로부터 받은 자가 없다 이 말입니다. 앉은뱅이 그게 뭐가 대수냐? 예수님께서는 저주받았는데 아버지한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저주받은 것을 기꺼이 감당을 했고요. 악마는 그걸 해내질 못합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오셔가지고, 아버지의 저주를 힘들게 받았지만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도 스스로 저주해달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마귀 자식이기 때문에 마귀가 그럴 생각이 없기 때문에 인간도 그럴 생각이 없었죠.
그저 주님 고생하시고 우리는 그 덕으로 천국이나 가자. 이렇게 까불락거리죠. 교회 와서 챙길 걸 챙기고 내 이득만 챙기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이 잘 되면 나는 지금 제대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구나. 또 못 되면, 이거 뭐 신앙생활 잘못된 게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계속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여러분 이해됐다 치고. 마귀로부터 입 다물어라는 말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일이 있는 거예요. 만약에 마귀의 말대로 예수님이 저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사람이 병을 낳게 했다 한다면, 사람마다 어떻게 되겠어요. 병 고치려고 떼처럼 모여 올 거예요. 예수님이 진짜 해야 될 일은 그게 아닌데. 예수님이 진짜 해야 될 일은 뭐냐 하면, 창세전의 비밀입니다. 비밀이라니까요? 예수님의 몸 안에 마귀 빼놓고 모든 인간은 알 수 없는 비밀이 있어요. 인간은 왜 모르냐면 그게 악마가 차단시킨 거예요. 이게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나옵니다.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비추지 못하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해요. 강력하게 저항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 말씀 하나 아까 로마서 6장 있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도 죽었고 예수님이 빈 무덤 살아날 때 우리도 살아났다는 이 복음 있잖아요. 이 복음이 여러분들에게 기쁨으로 다가왔다면 그것은 주의 성령의 강력한 방어체제 악마의 방어체제를 무력화시키고 그걸 힘들게 뚫고 여러분한테 그 비밀을 비밀편지를 여러분 속에다가 친히 심어주신 거예요. 복음을 심은 거예요. 그게 씨 뿌리는 비유예요. 씨 뿌리는 비유는 경로가 없어요. 인간이 감당하는 경로가 없습니다. 그냥 100배 그냥 60배 그냥 30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그 모든 악마의 장애물을 통과 못 하지만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그 말씀은 십자가에 터치해서 죽었고 죽어서 부활하는 그 능력은 이미 마귀를 이겼기 때문에 마귀를 돌파해서 자기 백성까지 무사히 자기 백성의 안쪽까지 거기다 심어집니다. 심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그 성도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로마서 10장에서는 이렇게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자기 의를 지키기 위해서 힘써 누구 의를 배척한다고 했어요. 하나님 의를 밀어내죠 성도는 반대예요. 하나님의 십자가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힘써 뭘 밀어내요? 나 자존심과 체면과 위신과 나의 의를 힘써 이걸 배설화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노력합니다. 나는 불신자요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이걸 아주 신나게 이야기해요. '나는 기도 2시간 하는데 형제님은 몇 시간 합니까?' '나는 기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중언부언은 하는데 해본 적이 없어요. '형제는 기도해서 방언이라는 응답 받았습니까?' '난 그런 거 받은 적 없고 룰루랄라는 많이 해봤습니다' '헌금한 적이 있어요?' '헌금한 적 없고 교회 월 한 2천만 원 내고 있습니다' '전도 한 적 없고 입만 떼면 나는 예수님 복음 얘기했습니다.' 근데 전도 한 적이 없어요. 이 사람이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리스도의 증인은 내부적으로 주일날도 이야기했지만, 나의 육신과 예수님의 육신을 성령이 딱 비교합니다. 해서 나의 육신이 했던 일과 반대로 예수님의 육신이 하셨기에 우리가 더러운 죄로부터 구출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내 뜻과 꼭 반대로 하는 거예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내가 생각했던 그 짐작과 정반대로 활동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 징계가 없으면 사실은 내 아들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내가 나오는 모든 뜻을 내가 그대로 수용을 하게 되면 일곱 귀신이 우리를 다시 공포와 두려움과 미래의 암담함과 절망감으로 우리에게 절망감을 한 트럭을 갖다 줘요 이걸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그걸 모이느니 농약 분사해 가지고 이 아래층 전부 다 쏘고 지도 죽어버리고 왜? 자기 의를 빼낼 방도가 없어 그래요. 나를 갈아 넣을 구실을 찾지를 못했어요. 왜 그러냐? 악마가 이게 김민재라 아무리 공격수도 성령은 못오도록 악마가 막고 있으니까 안에 해결은 안 되고 바깥에서 복음은 안 들어오고 미치는 것은 우울증 이외에는 뭐 딴 거 있어요? 참다 못해 서울에 북악산 혼자 올라가 가지고 "이 나쁜 인간들아 나 잘났다" 고함 지르고 만세삼창 10번 하고 슬슬 내려오고 "사장 네 잘 먹고 잘 살아라" 해가지고 한 10번 하고 내려오고 그 다음에 "예 알았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걸 뭐라 하냐면 화병이라고 하는데 이두용 감독이 했던 옛날 영화에 피막이란 영화가 그 화병이 무당으로 하여금 효과를 준다. 화병이 있는 자는 그 화병을 무당이 가져와서 대신 풀어줌으로써 이쪽에 원한이 풀리면서 병이 나는 방식을 옛날에 무속신앙으로 그걸 해결했어요.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하느냐? 지금은 해결을 못해요. 화병을 하여튼 화병하면 그냥 뭐 예 돈 투기죠 투자 주식 있잖아요 주식. 돈은 좀 있어야 되거든. 화병 달랠 돈. 그런데 그 화병이 없으니까 자식 보고 닦달내는 게 "공부 똑바로 해 그 수학 성적 꼬라지 하고는" 엄마 화병이 대물림하는 게 dna 확산 확대. 왜 내 뜻대로 안 되는 거야? 간단하죠. 갈아넣지를 않는 거예요. 계속 자기가 자기를 쥐고 있는 거예요 이걸. 눈에 보이는 인간과 인간끼리 어떤 해답을 얻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뭐? 그래서 나는 내 잘남의 증인으로 살고 싶은 거예요. 이게 마귀가 시키는 거죠.
주님께서 이 비밀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 비밀은 인간들이 요구하는 비밀 원하는 그런 비밀은 인간들 자체가 이 문제기 때문에 그런 비밀은 받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이 창세전의 비밀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간의 소망과 여망은 이거는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확실히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인간의 소원은 마귀가 잘 들어줘요. 그러면 이 비밀은 뭐냐 고린도전서 15장 51절입니다. 51절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아멘. 보세요. 지금 앉은뱅이가 걷는 게 문제가 아니죠? 그것은 너 자신이 소중하다고 악마가 그렇게 교육시키고 했기 때문에 앉은뱅이만 낳으면, 요번 주식만 대박 나면, 이런 거 있잖아요. 우리 애만 서울대학 들어가면 더는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 여자만 주신다면 저는 더 이상 바라지 않겠습니다. 어찌 합니까? 그 여자만 허락해 주소서 하늘이여~ 임재범 그 사람 전에는 중까지 된 사람이에요. 갑자기 가사가 막 주님 나옵니다.
예수님의 변화는요 앉은뱅이 뭐 이 정도가 아닙니다. 어디갔지? 어디갔지? 옛날의 '나'가 없어졌어요. 없어졌다고요. 남원추어탕에 뭐 넣습니까? 먹는 사람만이 알죠. 남원 추어탕에다가 그 가루 있죠. 들깨가루 덩어리째 넣습니까? 갈아 넣습니까? 갈아 넣지요 그럼 주님이 마시면 들깨가루 따로 쑥 젓가락 가지고 뽑아가지고 한꺼번에 그냥 비벼가지고 말아 다 드시잖아요. 못 찾아요 갈아넣었기 때문에. 남원 추어탕이라는 작품 하나를 위해서 전부 다 섞여버렸어요. 그 죽은 다음에 어떻게 알겠어요? 주께서 우리를 죽이시는 이유가 다시 '나'라는 것을 다시 쪽집게로 못 끄집어내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내가 나를 검사하는 일이 없도록 다시 옛날처럼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 일이 없도록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살도록 주님께서는 십자가 죽었습니다. 이것을 마귀가 싫어하기 때문에 그냥 병 고치고 할 때 "여기 메시아 왔다~ 병 고칠 사람 다 와" 이것은 주께서 "입 다물어 내 아직까지 마무리 안 되었어 입 다물어" 이렇게 하죠.
굉장히 귀신 자랑질 하는 것은 마무리 가기 전에 예수님하고 인기 맨 인기 인을 만들어서 "그냥 병이나 고치세요. 당신이 날 쫓아낸 것처럼 병이나 고치세요. 그런 식으로 목회하세요" 그거는 두 번째 시험에서 이미 마귀가 그렇게 시험한 겁니다. 한 군데 찾아보고 10분 쉽시다. 마태복음 11장 5절 세례 요한이 와서 당신이 메시야입니까? 이렇게 하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절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한다" 돼 있죠. 우리는 5절까지 알잖아요. 중요한 건 6절이에요.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모든 인간은 내 말에 다 넘어진다. 그러나 넘어가지 않는 자가 있을 건데 이거는 복 받아야 가능하다. 10분 쉽시다.
강남-사도행전 3장 16절 (삶의 터전의 한계) 250422b-이근호 목사
철저하게 암으로부터 봉쇄당했기 때문에 자기 제거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 제거가 되지 않는데 주님께서는 비밀을 통해서 창세전의 비밀을 통해서 제거되지 않는 우리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십니다. 그렇게 되려면 주님이 우리한테 뭘 해주 주님이 내가 원하는 걸 뭘 해주는 게 아니에요. "기도하라 나 응답한다" 이래가지고 안 되고 예수님의 기도에 너가 응답이 되게 하겠다. 우리가 기도한 게 아니고 주님의 기도에 응답으로서 너라는 것을 내가 새롭게 만들어 주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나의 기도와 주님의 기도가 내 안에서 투쟁과 갈등을 일으키겠지요.
자 그럼 나의 기도의 내용과 주님의 기도의 내용에 차이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도 내용의 차이점. 인간의 기도는 삶의 터전과 관계 돼 있고 주님의 기도는 생명의 터전과 관계되어 있어요. 인간의 삶의 터전은 창세기 3장 17절 네가 낙원에 쫓겨나서 이 땅에서 타지에서 뭐 어쨌든 간에 아파트 하나 얻어 가지고 어쨌든 살아야 된다는 거에요. 삶의 터전, 보험이고 교회고 다 좋은데 "다음 달로 집 비우소" 이러면 끝나는데 아닌가 집 비우소 끝나면 이 엄중설한에 어디로 가느냐 지금은 음중설은 아니지만, 애 안고 어디로 가느냐 갈 곳이 없잖아요. 그래서 모든 인간의 기도는 결국 따지고 보면 누구를 제거를 못 해요? 내가 나를 제거를 못 해요. 어쨌든 간에 살아야 되니까. 사는 이유가 뭐냐 이유가 없어 그냥. 우리 아담의 조상 아담으로부터는 속성이 그냥 터 잡고 사는 거예요. 그냥 터 잡고 살아야 내가 사니까요. 만약에 보통 여자가 결혼한 이유가 터는 남편이 잡아주고 자기는 애 낳고 가정 안에 살림 살면서 애나 그냥 잘 키우는 거예요.
남편이 든든하게 생활비 모두 다 책임지고 그게 4대 보험 다 책임진대요 식구들 이렇게 잘 먹여 살리는 거 그런 조건 하에 결혼했다 그런데 그 남편이 돈 벌겠다고 한국에서 뭐 돈 벌겠다고 서독에 광부로 와서 죽어버렸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벌써 애는 나중에 죽고 난 뒤에 보니까 임신해서 애가 태어났어요. 그러면 여자 어떻게 해야 돼요? 남편 없이 부천이나 저런 데 시장에 가가지고 식당에 설거지 해주면서 아이 도망갈까 싶어서 발 묶어가지고 이래가지고 아이 싹 잡아당기고 도망 못가고 이렇게 해가지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때 부를 노래가 무슨 노래입니까? 하얀 나비 '수상한 그대' 노래 '음~생각을 말아요' 한 적 있지요? 얼마나 슬퍼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러한 애착과 집착 집념이 있어요. 꽃이 피지만 꽃이 피다가 지는 건 맞는데 언젠가 그 가사에 보면 '다시 필 걸' 해요. 걱정하면 다시 핀다는 거예요. 다시 펴서 원하는 게 뭔데? 다시 우리 가정은 우리 애가 커서 잘 돼가지고 엄마 고생했다고 다시 우리 가정이 근사하게 삶의 터전이 된다는 거예요. 이걸 아까 사자성어로 뭐라 했다고요. '일상생활' 이게 일상생활이에요. 뭐 보험이고 선교하고 이건 뭐 얼추 밥 입에 밥을 안 먹고 뭐 잠자는 게 있으니까 그다음 이제 이야기지 삶의 터져 무너지게 되면 이거는 다 망가지는 거예요. 인간은 결국은 인간은 교회에 아무리 나와도 신앙생활을 아무리 하고 싶어도 누가 방해합니까?
내가 신앙을 방해하는 방해물로 작동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얘기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비밀을 통해서 주님의 그 비밀을 통해서 삶의 터전을 오르막길의 삶의 터전에 매여 있는 사람을 생명의 터전으로 바꾸어줍니다. 터전은 동일한 터전인데 삶의 터전이 아니고 생명의 터전이에요. 요한복음 6장 같은 경우에 예수님이 자기를 따른 사람에게 "너희가 나를 따는 이유가 뭐고?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지. 내가 주는 것은 모세의 만나도 아니야. 내가 주는 것은 너희께 생명의 떡이야 생명을 줄게"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게 뭔데 그게 뭔데" 이렇게 나오죠. 근데 주님께서 이 생명의 터전이 뭡니까?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많은 제자들이 다 모든 제자들이 따라오면서 "참 이 말은 어렵도다 저희와 같이 할 수가 없다" 하고 떠나고 말았어요. 그래서 고 이야기가 요한복음식이라면 마가복음 4장에서는 이렇게 돼 있어요.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은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12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긴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심이라"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심이라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이 생명의 생명의 터전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무슨 작업이 필요하냐? '분류 작업'. 분류 작업을 하는 그 틈에서 이 생명이 나와요. 내 백성과 내 백성 아닌 사람을 분류하고 내 백성 그 틈에서 내 백성이 아니고 저쪽 백성 그 둘 사이를 갈라놓은 그 틈에서 주님께서는 생명이 나옵니다.
왜 이러냐 하면은 내백성도 예수님이 죽였고 내 백성 아닌 자도 예수님이 죽였고 어떤 인간도 나는 영생 생명의 투자를 받아야 마땅하다 하는 인간을 아무도 없게 만들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분류 작업은 하시되 분류 작업하고 그 가운데서 주께서 틈에서 예수님의 자신의 말씀의 완성이 생명의 터전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이것을 제가 그림을 하나 그림으로써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그림이 상당히 간단해 보이지만 상당히 어려운 그림입니다. 나중에 하얀 나비 가서 한번 들어보세요. 여자 혼자 아이 키우면서 어쨌든 내 살아볼라고 온갖 허드렛일 다 하는 그런 입장에서 그런 하얀 나비라는 그런 노래 가사와 딱 맞아떨어지면서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안 돼. 어쨌든 살아야지. 얼마나 그 고귀한 의미의 삶입니까? 고귀한 의미의 삶. 그런데 고귀한 의미의 삶 지옥 가는데요. 참 이게 보기는 봐도 떠나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 영화를 보면 막 눈물 흘리는데 눈물 흘린다는 말은 알아들었다 이야기잖아요. 인간과 인간의 이야기는 서로 알아들어요. 베트남이 중국 프랑스에서 독립할 때 독립투사가 얼마나 심한 고문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기어이 베트남을 그 프랑스에서 해방시킨 거 들어보면요 눈물 나요. 문제는 그게 베트남이라서 말이죠. 필리핀도 마찬가지고 아프리카의 모든 독립운동들 보세요. 맨날 안중근 보고 이봉창이나 알죠. 다른 민족들이 그 유럽에서 그 식민지에서 벗어났을 때 그 희생한 거 억울하게 죽은 사람 생각해 보세요. 이거는 뭐 비참할 정도가 상상도 못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조국을 살려낸 거예요.
유대인도 마찬가지고요. 감동적이라 하지요 감동적이면 뭐합니까? 복음을 못 알아듣는데요. 복음은 감동적이 아니에요. 못 알아듣는 거예요. 이게 알아들을 수가 없다니까요? 여러분 뭐라 하는 게 아닙니다. 그 이유가 이것 때문에 그래요. 두 개 삼각형 때문에. 그러니까 안 복잡하죠. 전혀 복잡하지 않아요. 삼각형 둘이 역삼각형과 그냥 삼각형 이 삼각형의 특징은 b라고 하고 이것 역삼각형 a라고 하면 이 b란 삼각형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있는 감각의 영역이에요. 느끼는 것, 시각 촉각 청각 이런 거예요. 감각의 영역은 주변에 환경을 통해서 어떻게든 나의 몸에게 양식과 식량을 대어서 안에 있는 계속 dna를 살려내는 식으로 위에서 지식이 지식을 따르며 발전해 나가는데 이 감각들 무지한 감각들을 뭐로 바꾸냐 점점 질서와 법칙과 체계를 이루면서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면 이 감각 영역에서는 어떤 물질이 생각나냐 하면 사물 또는 물질 이렇게 되겠죠. 여기 사물 물질에다가 여기서 점점 더 올라가면 시간은 밑에서부터 위로 흘러갑니다. 점점 올라가게 되면 여기에 혼 또는 영혼 또는 정신 또는 마음이 사물과 물질을 물질의 법칙과 규칙을 세우게 돼 있습니다. 장사할 때 너무 이윤 많이 받지 마라 이런 거. 저울을 너무 속이지 마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 것을 감히 해보면 여기서 무질서한 감각 무질서한 감각은 이건 뭐냐 하면 바로 이게 진짜 제정신 아닌 정신병자가 칼 들고 아무나 죽이겠다 하고 아무나 찌르는 것처럼. 그러나 이게 점점 올라가게 되면 영혼과 양심과 마음으로 이 칼을 다룬다든지 이렇게 할 때는 뭔가 조심스럽게 하고 이걸 통해서 타인한테 피해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겠죠.
그럼 여기서 생기는 것이 뭐냐 물리과 사물을 다루는 방식 윤리와 도덕이 되겠습니다. '윤리와 도덕' 윤리는 상당히 인간 대 인간 도덕은 다른 자연물에 대한 그런 질서 다룸 절약하자 이런 거 윤리 도덕으로 나아가죠 최종 어디까지 나아가겠습니까? 최고 선 궁극의 거룩 또는 궁극적인 아름다움 아름다운 품성 양심의 극대화 쉽게 말해서 이거는 마치 그처럼 천사처럼 곱디고운 천사처럼 최고 선에 올라가는 거예요. 이게 누가 하는 겁니까? 바로 인간의 내부에 있는 인간의 의지와 욕망이 이 삼각형으로 가는 거예요. 점점 더 좁아져야 신은 최첨점 뾰족한 점 첨점에 신이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앉은뱅이가 예수 이름으로 걸었습니다. 그러면 그 앉은뱅이를 총회장 시킵니까? 목사 시킵니까? 아니죠. 분명히 감각적으로 예수님에 의해서 걸었잖아요. 걸었지만 뭐가 부족하다는 겁니까 사람들은? 윤리 도덕 학식 법칙 원리 과학적인 지식 이런 것들을 인간의 영혼과 정신 속에 이게 없으면 교육을 받든지 뭘 하든지 해서 이걸 위로 끌어당겨줘야 신의 경지와 좀 더 접근하는 자가 되어야 이 밑에 있는 막 되먹은 인간까지 통제할 수 있는 지도자층이 된 거예요. 들어보니 어떻습니까? 이게 눈에 보이는 인간 세계죠 바리새인이고 사두개인들이 바로 이 일을 하고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 삼각형의 문제는 뭐냐 이 기본이 뭐로 깔려 있습니까? 삶의 터전을 담보로 고귀한 영혼을 추구하죠.
삶의 터전을 담보로 해서 이거 무너지면 어떻게 돼요. 고귀하고 고상하고 간에 전부 다 와르르 와해되면서 제가 설교 시간에 이야기했던 가장 절박한 단어. "내 돈 내놔" 과거에 장관을 했던 교수를 했든 목사를 했든 관계없어요. 중요한 것은 이거예요. "왜 내 돈 떼먹었어요? 내 돈 내놔" "니 동업자가 그럴 수 있느냐?" 맨날 동업자가 그럴 수 있느냐예요. 동업을 왜 했어? 그럼 동업자가 뭐라 해요? 그동안 니 가족한 거 다 투자한 거 다 돌려주고 없다. 이 어디서 사기를 치고 있어? 그 다음에 나온 말이 뭡니까? 이 나쁜 인간아 하죠. 자 나쁘다는 말은 여기 올라갈 때 뭐라고 하냐? 선악 체계가 작동하죠. 그러면 선은 뭐냐? 선은 내 윤리에 맞아야 선이고 남 윤리는 내 윤리에 안 맞으면 어떤 고상한 인간도 공자가 맹자가 되든 그건 뭡니까? 나쁜 인간이 되는 거예요. 나만 선해요. 나만 선하고 나 외에는 선한 자가 없어요.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스바냐 2장 15절 나만 선하고 나머지는 선하지 않아요. 나만 선하다고 인정해 줄 때는 내가 봐줄 용이가 돼 있어요. 그러나 감히 감히 나만 선한데 나도 선하다 나오면 우리 갈라서자 나는 대화 못하는 거야.
이게 옛날에는요 방금 이러한 갈등 옛날에는 그냥 세상 다 그렇다 다들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게 그것까지만 다투고 뭐 해야 되는 데가 어디 있느냐 이래서 옛날에는 왜 그게 먹혔느냐 하면 옛날엔 뭐가 안 되기 때문에 삶의 기본 5대 보험 4대 보험도 안 됐어요. 먹을 것도 없어요. 니 시집가서 친정어머니 되면 그럼 누가 니 믿고 살림하냔 말이야. 어 그저 그 시집 귀신 돼 가지고 밥이나 주면 고맙습니다. 하고 맞으면 막 뭐 고추당초 맵다 하되 뭐 시집살이에 가는 거 이 노래도 있어요. 그냥 여자 이래서 노래 불러가면서 이미자의 여자는 이래 사는 거다 하고 해야 하여간 나중에 뭐 인정받을 때 올 거다 인정받는 게 딴 게 어딨어요. 나중에 시어머니 돌아가면서 손잡고 니 내 때문에 고생 마니 했지? 그걸로 끝나고 그러고 끝났어 뭐 없어 그래놓고 돈 없으면 아들 다 줘 버리고 인간의 기본은 감각적인 짐승 수준의 감각은 뭡니까? 이거예요. "내 돈 내놔" 예요. 이게 안 돼 이게 안 되면 안 된다고요. 근데 요즘은 이건 다 되거든요. 우울증 걸려가지고 그 60 넘은 어머니와 딸이 뉴스에 보면 둘 다 죽었나 그래요.
여기서 시에서 이 사람이 병 걸린 걸 알고 월 115만 원 해달라 뭐 주고 뭐 주고 다 줬는데 새 아파트 이사까지 다 했는데 안 가고 죽었다는 겁니다. 요새 최저 생계비 다 주잖아요. 시급 높지요? 이건 되거든. 이건 되는데 그럼 왜 못 하느냐 이것 때문에 니 내 뜻과 다르잖아. 그러니까 이거는 뭐, 옛날엔 시집가면 이제 다 해결됐다 하잖아요. 해결 안 됐습니다. 시집가고 애 들고 아니 너무 성급하게 미리 결승점을 찍었어 찍찍 울고 엄마 아빠 해가지고 아 한 3명 데리고 와가지고 친정들어가 이 사람 때문에 못 살겠다. 했거든요. 바로 여기서 나는 뭐다? 나는 선하다. 밥 못 먹고 살아서 하는 게 아니고 dare, 감히 내 뜻에 위화해? 나 너하고 살 맘 없다. 왜 그렇습니까? 세월이 그만큼 요 폭만큼 내 자아가 이 정도까지 올라가서 옛날에 이 정도였는데 단칸방에 그냥 둘이 밥이나 먹고 사는 감사하면 되잖아.
이게 나중에 결혼 한 20년 하고 난 뒤에 20년까지 올라갔다 이거는 기본이고 너 말을 왜 나한테 섭섭하게 해? 갈라서. 그만큼 나라가 뭡니까? 잘 먹고 잘 산다는 말이에요. 저 아프리카 가면 헤어질 이유부터 안 돼요. 하여튼 잘 먹고 잘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정도 올라가면 그다음에 노력은 뭐겠습니까? 교회 간다 하나님 믿는다 아니에요. 내가 여기 가까우니까 다 왔잖아요. 그럼 누가 하나님 되면 내가 하나님 되면 되잖아. 내가 하나님 된 그 영웅들이 있어요. 영웅담. 알뜰신잡인가 뭐 하여튼 우리나라에 유명한 물리학자 그 나온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 보고 감동받는 거예요. 야 내 인생 저렇게 살아야지 갑자기 영웅들이 등장해요. 영웅들은 뭡니까? 우리 마음의 이 시대에 뭐가 되느냐 신이 되는 거예요. 외과의사 있죠. 군부대에서 외과의사 해가지고 이국종인가. 말아먹을 지옥 조선을 떠나라 뭐 이런 거 하니까 그게 젊은 사람한테는 뭐냐? 의사는 저래야 돼 라고 신격화 된 거예요. 신이 신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걸 다양성이라고 합니다. 신들은 뭐예요? 각 분야 신들, 축구는 손흥민 이런 거 야구는 이정후 바람의 손자 이런 거 신들이 많아요.
유튜버들 맨날 외국 여행 다녀가지고 유튜브 해서 돈 몇 억 벌었다. 그 이야기 나도 그렇게 여행 다녀야지. 지금 이게 이 삼각형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더 위에서 통용되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자기를 너도 나도 신처럼 되겠다. 요리의 신은 누구냐? 백종원. 전부 다 그걸 이제 아이들이 우상시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삼각형은 뭐냐? 누구냐 하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하나님과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첨점 뾰족한 점까지 내려와요. 뾰족한 점. 근데 그걸 보고 있던 건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들이죠. 소위 말하는 인간들이죠. 인간은 뭡니까? 삶의 터전이 됐다면 나머지 삶의 터전 위에 영적인 거룩의 터전을 삶의 터전 위에서 영적인 거룩을 이룩하겠다고 시도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거기에 비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갑니다. 빌립보서 2장에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가죠. 외톨입니다. 아무도 제자들도 이해 못 해요. "내가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할 때 무슨 말인지 몰라요.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해요. 예수님 모든 말씀을 이쪽에 있는 인간들이 한통속이라서 예수님 이쪽은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안 됩니다.
디모데후서 3장을 보겠습니다. 3장 8절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뭘 대적한다 했습니까? "진리를 대적하여 이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다" 이들이 믿고 믿음을 버렸습니까? 아니면 아예 믿음을 가진 적도 없었습니까? 아예 믿음을 가진 적도 없어요. 지금 믿었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일단 내가 삶의 터전을 보장한 그 다음에 믿음 소망 사랑은 제일이라 하는 거 여기다가 b번 이 바탕 위에 이걸 쳐가지고 올린 거예요. 올렸는데 갈수록 사도 바울 이야기가 어떻습니까? 지금 자기는 그래서 우리가 같이 이 복음 알고 신에게 가깝다는 그런 걸 은근히 기대했는데 사도 바울는 뭘 받은 자? 성령 받은 사람이죠. 성령 받은 사람이거든요. 제가 그 지난 낯설교에 우리 교회 그 김재희 집사님이 기도를 했는데 기도 듣다가 깜짝 놀랬어요. 속으로 뒤에서 그것도 놀라 티 내면 안 되지만. 뭐냐 하면은 고린도후서 4장 이야기를 끄집어내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죽음에 넘기움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죽은 내 몸에 나타남이라" 그 본문을 그 기도 시간에 끄집어냈잖아요.
그 기도 들으신 분들은 끄집어낸 거 알죠? 여러분 보통 대중 기도하고 할 때는요. 지가 지킬 만한 만만한 성경 구절을 내놔요. 근데 이건 엄청난 구절을 제목을 걸었다 이 말이죠. 용감하게 한번 부딪쳐 보겠다는 뜻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주시고 뭐 하나님께서 햇빛 주시고 이건 어중간하게 아는 거잖아요. 내가 안 깨져 내가. 나는 그대로 있고 뭔가 이 위에다가 고상한 신앙 티내는 고런 성경 구절들을 섞어서 기도한단 말이죠. 하나님 앞으로 복음을 하고 복음 받아서 내 죄도 회개하고 뭐 이렇게 한다는 거죠. 왜? 죄 회개도 괜찮지요 뭐가 있기 때문에? 돈이 되거든. 사회보험이 되잖아요. 뭐 죄 좀 회개 반성하면 되죠. 그게 아니고 내가 깨진다니까 내가 그 본문을. 야 이거 공개적으로 칭찬할 수는 없고 또 다른 사람도 삐져 있으니까 '목사님은 뭐 김집사님만 좋아하나' 야 정말 이거는 모조리 다 우리 마음 다 째자 여기에 아멘 한다는 말은. 참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설교 시간에 그 본문을 언급 안 할 수가 없었어요. 보통 사람 신앙생활은 이건 건드리지 마시고요. 잘할게요 이런 쪽인데 '날마다 내가 죽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라고 나온 거예요.
여기 얌브레가 3장 8절에 모세를 대적했다는데 이걸 대적한 이유가 그 알렉산더 그 회당장이 있잖아요. 4장 14절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잖아요. 사도 바울이 설교할 때 성령으로 설교했습니다. 근데 인간적으로 설교했으면 뭐 대적해도 괜찮은데 왜 성령으로 설교하는데 왜 회개가 안 되죠? 아 이상하죠. 성령으로 설교했는데 사도행전 마지막에 나옵니다. 내가 성령으로 설교했는데 왜 회개가 안 되지요? 성령은요, 분류 작업을 하는 거예요. 들을 귀 있는 자만 듣고 못 듣게 하는 그 분류 작업 하는 거지 사람 꼬시는 게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내 말하면 다 회개하고 자빠지고 난리도 아니고 이렇게 나와야 돼 그거는 성령이 아니고 오히려 악령이 하는 짓이에요. 그게 아니고 '이거 들을 수 있겠어요? 성령 오면 듣지만 안 그러면 안 될텐데' 하는 마음으로 분류 작업에 사도 바울은 추측했습니다. 했는데 이 알렉산더 디모데전서 전체적으로 나와요 이 사람이. 이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성령받은 사도를 배격하고 대적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20절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어주었다" 니는 사탄이 딱 맞다. 이 말이에요. 니 사탄하고 놀아라 이 말입니다. 니 마음이 사탄의 마음이다. 이 분류 작업하니까 사탄의 본성이 그 현장에서 막 나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한번 물어봅시다. 이 알렉산더 후메내오가 이 사람들이 복음을 지식으로 모릅니까? 사도 바울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냥 이름도 모르고 왔다 간 사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충실하게 사도 바울을 따라온 사람이에요. 따라오다 이제 와서 거부한 거예요. 이제 디모데에게 그걸 알려주는데 이 후메내오와 1장 20절 디모데전서 알렉산더가 왜 사도 바울에게 대듭니까? 대든 이유가 뭐냐? 거기에 대해서 아까 디모데후서 3장 8절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뭘 알아야 돼요?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이유를 알면 되겠죠. 피곤하시고 할 텐데 좀 참으시고 출애굽기 10가지 재앙에 나오는 인물들이거든요.
한번 봅시다 출애굽기 7장 22절 "애굽 술객들도 자기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다" 제가 첫 번째 강의했죠. 눈에 보이는 인간이 인간으로 만나서 뭘 해내게 되면 사람들은 항상 그게 하게 된 것은 그게 어떻게 했는데? 하고 인간에게 묻는 경향이 있죠. 인간의 일은 인간의 손으로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이 애굽 술객들이 얀네와 얌브레예요. 이 사람 명단에 나오는 것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잡히고 난 뒤에 흩어진 이스라엘 유대인들을 위하여 그 당시 히브리어 쓰다가 흩어져 버리니까 히브리어 잊어버리니까 헬라어를 쓰잖아요. 헬라어로 번역된 성경 안에 여기에 이름이 나와요. 그런데 애굽 술객을 또 자기 술법으로 이렇게까지 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이유가 그겁니다.
7장 11절 12절 특히 12절 중요합니다.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아 10절부터 12절까지 한번 읽어봅시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된지라 바로도 박사와 박수를 부르매 그 애굽 술객들도 그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되 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 여기 한번 보세요. 지금 우리의 관점은, 야 이거 요술사들도 지팡이 가지고 뱀이 됐네, 그러면 됐잖아. 결과가 똑같잖아. 이렇게 되는데 12절요 "각 사람의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그러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어떻게 했다? 삼켜버렸다. 이 말을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비유를 못 알아들어요. 어떤 인간도 택한 백성도 못 알아들어요. 그럼 뭐냐? 삼킴을 당하면 돼요. 갈아 넣는 것처럼 삼킴을 당하여 더 이상 우리에 대한 효용성 우리 자신이 어떤 효과에 있다는 것은 이미 먹통이라 하는 것이 완전히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발각될 때 그게 바로 자유입니다.
내가 나한테 아무짝도 쓸데없구나 내가 나한테 아무짝도 쓸데없구나 나는 주님의 일에 삼킴을 당하면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없다는 거예요. 그 삼킴을 당한다는 그 내용을 요한복음 16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승리라고 돼 있어요. '승리' 나의 승리가 아니에요. 나에 대한 주님의 승리가 됩니다. 첫째 강의에서 우리가 갈아넣지 아니하면 우리는 마귀가 주는 그 위협과 공포와 두려움과 절망감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마귀는 맨날 와서 잔소리 하거든요. 똑바로 해라 너 의사당에 공개적으로 니 논리감 될래? 니 지금까지 쌓아놓은 거 한꺼번에 다 무너져 어떡할래? 그때 후회해도 소용없어.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학교부터 가정에서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뭐냐 하면 후회하지 않는 그럴싸한 인생을 살고자 애를 쓰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애를 쓰는데 그게 얼마나 뭐냐 하면 개별적 탐욕이에요. '개별적 탐욕' 남이 죽든 말든 나만 살아남으면 그만입니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았는데 대표적인 예시를 드릴까요? 김정은. 혼자 편해. 혼자 편하고 나머지는 다 죽어. 김정은. 혼자 배 나왔어. 푸틴. 뭐 그래 죽든 말든 난 몰라. 개별적인 성공 또는 승리 이게 바로 네가 신처럼 되리라 하고 악마가 우리한테 벌였던 거예요. 나중에 그렇게 성공한 사람 보고 어릴 때 부모님께서 어떻게 교육시키던가요? 그러면 그 사람은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니가 인생을 열심히 살아서 나중에 커서 절대로 후회할 길 없는 인생을 살아라" 이런 식으로 나는 훌륭한 어머니에게 훌륭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머니의 탐심이 자식들에게 대물림되죠. 어머니의 그 고질병이 자식의 고질병이 된 거예요. 그러면 그 자식 가진 부모로서 자식 자녀 교육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너는 꼭 크거든 후회되는 인생을 살아가라. 그렇게 역으로 갈까요? 안 그러면 니는 이래 살아도 실패고 저리 살아도 실패야 아예 살 생각을 하지 마. 이렇게 아주 기쁨의 절망을 줄까요? 그러면 어떻게 교육하게 됩니까? 출애굽기 8장 18절을 보겠습니다. "술객들이 자기 술법으로 이같이 행하여 이를 내려 하였으나" 이는 사람과 생축이니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극을 줘서 인간이 그 한계까지 그쪽으로 가도록 밀어붙이는 일을 하는 거예요. 아까 성령이 나온다는 그 대목 요한복음 16장입니다. 여기에 16장 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되어 있지요 여기에 승리라는 말 앞에 또 한 단어가 나옵니다.
평화 이 마음의 평화 여러분 딱 까놓고 여러분의 소원은 남북 통일입니까? 여러분 평화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남북 때문에 골치 아파요 그냥 내 마음에 잔잔한 호수처럼 돌멩이 하나 튀지 않는 호수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웠으면 좋겠다. 샬롬 인사가 샬롬이잖아요. 평화 살롱이 아니고 샬롬. 그냥 마음의 평화를 얻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요한복음 33절의 그 평화가 니가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마귀한테 승리해야 된다란 말이죠. 그러면 그동안 내 마음이 지옥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온통 난리를 친 것은 마귀가 그렇게 우리한테 책임감과 우리의 의와 우리의 어떤 행위로 말미암아 신의 경지에 도달하라고 채찍질을 때렸던 거예요. 여기 서울에 경마장 있죠. 경마장 말 타는 기수잖아요. 기수가 경주에 나갈 때 위에 상황실에서 카메라 가지고 말 타는 모습을 전부 다 조사를 다 잡아보고 15번을 1km 달리는데 15번 이상 치면 벌금 내게 돼 있어요. 동물학대죄로. 이거는 진짜 말이 죽을 판인지 사람이 죽을 판인지 스트레스 받아가지고.
스위스에서는 법이 있는데, 스위스 법은 뭐냐 하면 어떤 집이든 반드시 금붕어 한 마리를 키우면 안 된다는 거예요. 두 마리를 키워서 서로 짝을 짓는 기쁨을 줘야 된다. 만약 한 마리 키우면 외로움에 걸려가지고 동물학대죄에 걸려요 뭐 스위스 한 달 살기 그 금붕어 한 마리 키워도 난리 납니다. 또 하나는 스위스의 법에는 남자는 10시 이후에 소변을 금지하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소변 누는 소리가 이웃에 퍼진다고 여자는 괜찮아요. 앉아서 하면 괜찮아요. 남자는 10시 이후에 소변을 금지시킵니다. 이게 지옥인지 샬롬 평환지 바로 그런 법을 그렇게 점점 더 세밀하게 한다는 말은 우리 스위스 나라는 어느 나라에 가깝다? 지상 천국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뭐가 강화돼요. 법이 더 강화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마귀짓이에요. 그게 마귀짓이라고요.
여러분 에스더 알지요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 할 때 고민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에스더는 남편이 먼저 왕이 먼저 홀을 내미기 전에 왕비가 먼저 남편에 가까이 가면 예 죽게 돼 있습니다. 그게 법이에요. 그런데 에스더는 지금 경상도 말로 움짐 달았죠. 다급하게 된 거예요. 남편이 자기를 안 부른 지 벌써 30일 됐다는 겁니다. 하도 이 후궁들이 많으니까 대기표 잡고 대기표가 아직 멀었습니다. 30일을 지나서 아직 부르지를 않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부르지 않았다는 건 먼저 나가면 뭡니까? 죽잖아요. 그래서 에스더의 결론은 뭡니까? "죽으면 죽으리라" 그러니까 법에 걸리면 이 법은 내가 살고자 했던 모든 의욕을 좌절시키고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그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삶의 터전 위에 세워진 마귀의 세계입니다. 그 무서운 세계에 우리는 애 낳고 지금 잘 살고 있습니다. 가족끼리 살고 있어요. 자 그러다 보니까 아까 내가 문제는 던져놓고 지금 답변 안 한 게 있죠. 그러면 애 교육을 어떻게 시켜야 됩니까?
그것도 실용적인 답변을 안 했는데 성경대로 하면 만약에 사도 바울이 앉아있다면 마찬가지 답변을 했을 거예요.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8장 28절 로마서 8장 그다음에 로마스 7장 14절을 기억해야 돼요. 로마서 7장 14절에서는 우리의 육신은 어디에 팔렸다? 죄에 팔렸다. 로마스 8장 28절은 여러분 누가 한번 이야기할 차례예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뭔 뜻이냐 하면 너는 개별자 아니고 전체의 일부다 주께서 이루어 놓은 선에 너는 일부로서 이미 가담되어 있다고 교육할 수밖에 없어요. 니가 공부하고 수학하고 니가 영어 하는 것은 주께서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너에게 수학과 영어 이런 과학 국어 같은 것을 너에게 습득하게 하는 기회를 주었다. 왜 나의 운명은 내 손에 달린 게 아니고 왜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미 다 결정을 지었는가? 예수님이 나의 전부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의 전부고 나는 예수님이 왜 다 이루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이미 승리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거기에 조그마한 극히 일부의 일을 감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자녀들에게 예수의 증인으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근데 엄마 이 이야기 다른 애들은 뭐 미쳤나 하고 안 듣던데요. 이렇게 할 땐 어떻게 하느냐? 그게 바로 창세 전에 감추어진 뭐다? 우리끼리 이야기하는 거야. 너가 어떻게 됐든 개별적으로 너를 지적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서는 너의 승리를 취소할 수는 없다. 너의 이 평화를 취소할 수는 없다. 너가 만약에 예수님의 일부라는 것을 니가 인정한다면, 예수님에게 소속됐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떤 누구도 너를 비난할 자가 없을 것이다. 어이고 니가 수학을 0점이나 맞았구나. 이것도 어려운데 보통 막 찍으면 5점 정도 되는 거야. 0점이나 재주가 보통 재주가 아니다. 엄마 너무 놀아서 아니야. 노는 것도 주께서 놀게 하셨던 거야. 다음에는 또 100점 되기 위해서 많이 또 빡세게 일할 수도 있어 주님께서 뭐 이런 식으로 그러면 이렇게 하면 그다음부터는 뭐냐? 진짜 애가 전교 꼴찌하고 바보 되면 그 절망감은 누가 감당할 것입니까? 나 엄마 믿고 했더니만 엄마의 그 긍정적 마인드 때문에 나는 이제 나는 완전히 부정적 마인드로 해가지고 세상에 나 혼자 했는데 그 책임을 엄마 질 거야? 그렇게 나올 거예요. 그러면 그 이야기도 미리 땡겨서 해주는 거예요. 니 만약에 내가 이렇게 했는데 니가 엄마 탓 할래 안 할래? 내가 그 정도 내 모를 줄 알았어? 잘 된 건 다 내 탓이고 못 되면 엄마 탓이야 내가 다 알잖아. 그래서 미리 이야기하는 거야.
엄마가 아직도 살아있고 아빠가 살아있다. 하는 것도 다 하나님에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것이다. 뭐 어떤 것도 예수님의 승리에서 포기되지 않는다. 단 너가 예수님의 전체에 하나에 종속돼 있다면 일원이 된다면 그러니까 네가 개별자로 신이 되려고 하지 마라 나는 신이다. 나만 최고다. 그런 식으로 하지 말고 모든 것이 주변에서 보이지 않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지금 네가 이만큼 살아왔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교육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삶의 터전인지 아니면 다 이루어진 승리한 생명의 터전인지 저희를 돌아보게 하옵소서 보이지 않는 분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면 보이는 우리는 그 승리한 것에 보이는 식으로 일부를 받아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이제는 감사케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단독적으로 나를 내세우지 말고 주님 앞에 늘 종속되는 기쁨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 >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사도행전 4:22 / 예수님의 증상 / 250617 (0) | 2025.06.18 |
|---|---|
| 사도행전 3:21 / 2+0 / 250520 (0) | 2025.05.21 |
| 사도행전 2:38 / 계약의 실효성 / 250318 / 강남 강의 (0) | 2025.03.19 |
| 사도행전 2:29 / 한 몸의 두 마음 / 241217 (0) | 2024.12.17 |
| 사도행전 2:17 / 가려진 실상 / 241203 / 강남강의 (0) | 2024.12.0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