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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11:13-16 / 십자가 꽂힌 공간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11:13-16 / 십자가 꽂힌 공간

정인순 2025. 6. 8. 16:36

음성 동영상 Youtube

 

십자가 꽂힌 공간 

 

이근호
2025년 6월 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13-16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1: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1: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근원이 다르다는 것은  인생 행로가 이미 되었다는 말입니다. 시작하신 분에 의해서 시작한 분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일반적인 인간들의 인생 행로에 큰 소리치는 것은 자기 생각들입니다. 이것은 시작을 자기로부터 출발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시작해서 얻어진 결과에 대해서 인간들은 철미철미하게 사수하려 합니다.

자신이 건설한 세계에 인간들이 들어앉아서 마치 자폐증 환자같은 증세를 보입니다. “내 것 건드리면 누구든지 죽인다” 이런 기세가 하나님에게까지 자연적으로 파급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 하시고 나 것은 건드리지 마세요. 만약에 건드리면 하나님 안 믿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12자식 같은 분들은 모두 불임의 어머니에게 출생한 자들입니다. 곧 ‘불가능한 세계’로부터 시작이 된 자들입니다. 그들의 삶도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이 그저 ‘가능함으로 연속되는 삶’이었습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가능성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가능성 인생 기차에 주님의 불가능함이 침입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의 기대나 목적의식이 결코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불가능함의 침투라는 것은 약속의 침투입니다. 미태복음 11:12에 보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구성하고 의도하려는 하늘나라가 엉터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출생에 문제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잘못되고 더러운 것에서 더러운 생각이 나옵니다. 그 더러움이 바로 “내 것 건드리면 화낸다”입니다. 즉 지금 ‘있는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 나갈 내 인생’이다는 겁니다.

없는 데서 있고 죽은 데서 살린다는 말은 출발점을 새로 한다는 말입니다. 기존의 시작점을 일체 부정한다는 말입니다. 안 받아들이겠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평생 교회 다니다가 죽어서는 천국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것이 본인이 시작점이 되어서 선택한 미래입니다. 인간이 선택한 미래는 그저 과거와 같은 노선에서 나온 연장선입니다.

그때가 되면 실망할 게 뻔합니다. 진짜 본향은 불가능함이 가능함에게 찾아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미 죽은 그분이 자신을 찾아주는 일’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일입니다. 나의 시간과 연결되는 노선이 아닙니다. 일방적인 개입이요 침투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의 경우, 그들은 충분히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찾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는 성령을 보내셔서 찾아주십니다. 우리 인생에 불가능함의 침투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도들은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나옵니다. 자기들 시절에는 온전한 약속 성취를 못본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다 했습니다. 즉 그 당시나 오늘날 성도는 이 가능성의 세계에서는 사실상 하등의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부끄러움을 당해야 마땅한 대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하나님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이 불가능한 세계에서는 더 이상 ‘〜하라, 〜하지 말라’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이미 내가 했다, 이미 내가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도록 했다’가 됩니다. 이들 신앙의 노선 위에서 산 사람들은 과연 훌륭한 사람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살기 위해서 모든 가능함을 다 구사했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과 가족을 살리기 위해 아내를 타인의 여자로 줘버린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로왕에게 개입하여 무사히 애굽나라를 떠나게 했습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여서 아내 덕에 자신이 살겠다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자기에게 들이닥친 삶의 위기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총동원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지속적인 개입 속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리고 그 후손들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징후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다수의 후손들을 하나로 모으는 방식으로 특별한 매장지에 묻히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23:10에서 아브라함은 헷 사람들 땅에서 막벨라를 돈으로 구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라가 거기에 묻히고 아브라함 자신도 죽어 거기에 묻히고 이삭과 리브가도 거기에 묻힙니다.

창세기 49:30에서는 살아 생전에 야곱 자신도 그 매장지에 묻어 달라고 합니다.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창 49:30-
31)

이러한 시도로 인해 약속의 땅이란 이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땅이 됩니다. 요셉도 애굽에서 죽으면서 아예 자신의 해골을 갖고 애굽에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게 됩니다.(창 50:25) 이러한 예언은 약속 성취로 신약까지 이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성도는 강도가 됩니다. 강도의 입장에서 십자가를 봐야 합니다. 가능성 속에서 가능성만 주장하면서 자신이 건설하는 자기 인생을 사수하는 바로 그 모습이 예수님을 죽게 된 자아의식입니다. 거지나 부자의 죽음을 통해서 지옥에 간 부자는 그 속에서도 자기 위주의 생각을 멈출 줄을 모릅니다.

많은 수의 성도로 하나로 집결하는 곳에서 성령이 물처럼 쏟아집니다. 에스겔 47장에 예언되어 있는 ‘물이 쏟아지는 성전’은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성취하신다고 했습니다.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4-39)

진짜 하나님 나라는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에게 나의 것이 남아 있지 않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