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11:11-12 / 사라의 임신 본문
사라의 임신
이근호
2025년 6월 1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11-12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믿음’이라는 요소로 인하여만 허상 말고 ‘실상’이 나타난다는 바를 히브리서 11장을 통해 내내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왜 허상만 믿고 사는지가 아울러 드러나야 합니다. 허상 혹은 거짓의 특징은 불가능성이 없고 가능성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가능성의 한도는 ‘주께서 친히 기르시나니’에 대한 조롱과 모독으로 드러납니다.
“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26,30) ‘친히 기르심’에 대해서 인간은 반발하고 있습니다.
사라의 임신은 완전히 사라의 자궁을 죽었음을 전제로 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까 불가능성입니다. 이 불가능함으로서 실상의 세계가 허상 안에서 어떤 식으로 등장하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불가능함으로 인해 비로소 인간 세계의 가능함이 얼마나 허상들을 그동안 양산해 내었는지가 드러납니다.
이 사실은 인간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인이 세상에 ‘다른 믿음’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뱀의 후손’들을 악마가 다루는 가운데 드러난 결과였습니다. 이 세상에 있어 모든 남자와 여자는 다 남자의 후손들입니다.
따라서 남자 없이 출생한 ‘여자의 후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성립되지 않는 불가능함이 이스라엘 역사의 전 후 계통 안에서 불쑥불쑥 나타났습니다. 모든 남/녀는 모두 아담의 후손이기에 흙으로 돌아가야 마땅합니다.(창 3:19) 하지만 난데없이 여자의 이름은 ‘생명’이 됩니다.(창 3:20)
생명이 도대체 여기서 출몰한다는 겁니까? 모든 임신 가능성이 없는 데서 나오겠지요. 그것이 바로 사라의 임신입니다. 아기가 생길 것이라고 예상도 못한 상황에서 임신이 된 겁니다. 아브람과 사라가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좋아서도 보다도 더 어처구니가 없는 점에서 믿지 않아서 웃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웃음을 주목하십니다.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창 18:10-15)
이미 인간 세계는 자신의 가능성으로 목적과 기대에 부응하는 식의 신앙체계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이 생각한 이 세상이 모두 허구요 거짓이라는 것을 감히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오로지 ‘할 수 있다, 아니 해야만 한다’로 정신무장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나도 터무니없었음을 ‘웃음’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이란 ‘나’여기 있고 ‘나 외의 다른 사물들’은 거기에 있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내가 만들지 않은 것들이 왜 저기에 있나?”라고 말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해와 달과 별들입니다.
옛날부터 인간들이 신이 그런 것들을 만들었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옳다고 자부했습니다. 문제는 ‘신이 만들었음’을 알고 있는 나에 대해서 실제 이득을 인간들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설명하고 포함시키려고 한 겁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12:1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이 여인에게 해와 달과 별이 집결되어 있습니다. 이 여자를 찾아야 합니다. 이 여자는 남자의 노선과 별개의 노선을 형성할 여자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는 지점에 ‘여자’를 찾아야 합니다.
사라의 임신이 특이하지만 신약에 나오는 마리아의 임신이 더 최종적입니다. 마리아는 결혼한 적도 없고 남자와 동침한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임신이 된 겁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미리아를 자신을 생산하는 인큐베이트로 사용하신 겁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의 몸에서 태어난 자들을 하나님 관점에서 보면, 더 사람 같지도 않는 존재들입니다.
남자의 후손, 곧 뱀의 후손들의 특징은 가짜 지옥과 가짜 천국을 비롯해서 모든 생산된 것들이 다 가짜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약속의 땅을 돌아다닙니다. 그러면서 사라의 몸에서는 약속된 여자의 후손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이 허상의 세계는 불모의 세계에 마땅히 황폐해져야 될 세계인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점을 두고 ‘없다’고 말합니다. “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즉 모든 인간에게 ‘나’는 없습니다. 사적인 이름인 사래(내 집안의 공주)는 사라(집단 무리에서의 여자 주인)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사래와 사라 사이에 죽음이 끼어있는 것처럼 나와 새로운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십자가 죽음이 끼어 있습니다. 농감거리, 웃음거리에 해당되는 분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이 불가능하게도 성도가 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자신을 만들고자 하고 자신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사랑이 오면 시간은 멈추고 더는 이 세상에서 진리 찾고자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보이는 세계가 나 안에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가능성을 불가능성으로 절단하고 또 불가능성으로 용접작업을 해서 이어붙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말씀에 응하기 위함’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귀한 자기 백성을 친히 기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만들지 않는 나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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