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11:8-9 / 봉인된 옛 사람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11:8-9 / 봉인된 옛 사람

정인순 2025. 5. 18. 16:58

 음성 동영상 Youtube

 

봉인된 옛 사람

 

이근호
2025년 5월 1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8-9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경고성이 노아 이후에 연이어 세상에 출현합니다. 하나님의 일관성이 멈출 기색이 없으십니다  기어이 세상을 멸망시키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집념이 언약의 이름으로 세상에 차례차례로 등장합니다. 노아 이후에 거론된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노아 때는 방주였습니다. 방주 안에 내용이 아브라함이라는 인격 속에서 계속 됩니다.

이 방주는 세상 사람의 어느 누구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물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이라는 존재도 이 세상에 아무 쓸모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십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아무 쓸모없어도 하늘나라에서 쓸모가 있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점은 이삭이나 야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혈통적 이름이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 자신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부르심’이란 하나님께서 친히 꽂아주신 자신의 이름을 하나님 자신이 불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이미 pass입니다. 곧 합격입니다.

하지만 이 부르심은 그 사람이 소지하고 다니라고 준 은사가 아닙니다. 도리어 관통하라고 주신 은사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은 평생을 성실하게 일하면서 점점 지옥불 속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부르심은 입은 자들은 동일하게 이 세상을 살면서 이 세상 말고 다른 세계를 같이 경험하는 중첩된 세계관을 갖고 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이러합니다. 시간이 쭉 흐르고 공간도 쪽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 한 점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아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관은 기존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기를 규명하는 방식입니다. 1914년 독일의 물리학자인 슈바르츠 쉴트는 큰 별 주변의 시공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있게 연구했습니다. 

태양처럼 무거운 곳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공간도 늘어난다는 겁니다. 실제로 태양 표면의 시간은 지구보다 백만분지 2초 느리게 갑니다. 어떤 상식적인 이들을 말하기를, 태양 표면에서 시간이 그렇게 흐르지만 다른 곳에서 시간은 어디서나 동일하게 흐른다고 대꾸할 겁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누가 재지요? 인간이 시계를 가지고 말하지요. 각자의 어디에 있는지, 누가 그 시계를 보는지에 따라 다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이 붕괴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블랙홀입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이 더는 진행될 수 없는 검은 구멍, 빛조차 막대한 질량에 의해서 빨려 들어가서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 물리학자는 전쟁이라든지 개인적인 기분이라든지 감정과 상관없는, 객관적인 중립적인 사실을 알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개인 대 개인의 관계에서는 이러한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실보다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상대가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오늘 날씨가 좋지요?”라는 것도 빚쟁이에게는 모독하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주관성이 무시되고 단절되고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세계가 바로 ‘부르심의 세계’입니다.

불랙홀에 어떤 비행기가 접근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여태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금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 비행기는 폭발하듯이 불타버릴 겁니다. 하지만 막상 그 시간과 공간의 지평선을 넘어선 그 비행기는 블랙홀 안에서 말짱합니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렇듯 블랙홀 밖의 세계와 블랙홀 안의 세계 사이에 정보 교환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을 인간들이 알아 듣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부르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약에 탕자가 다시 아버지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와 마주하고 대화한다면 어떤 대화가 오고 갈까요?

탕자: “아버지 제가 건방지게 감히 아버지 유산을 미리 챙기고 독립하겠다고 나섰지만 나쁜 친구를 만나고 기생과 놀아나서 많은 다 탕진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여기에 대해서 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아버지: “ 너는 내가 입힌 옷이 참 잘 어울리는구나 네가 낀 가락지도 햇빛에 아름답게 반찍여서 참 보기좋다 야”

부르심의 세계에서는 중첩된 세계입니다. 여기서 기존의 세계, 즉 부르심을 받지 못한 세계에 대해서 성경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등장인데요, 이 사람의 출현이 중요한 이유는 악마의 태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노골성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필요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냥 성령이 없기에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수시로 자기 쪽에서 점검하게 됩니다. 초반의, 예수님의 예언은 가룟 유다의 기대에 부응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모든 희망이 실망으로 사그라들었습니다. 기대한 만큼 주님에 대한 미움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도 자신도 죽기로 결심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팔아넘긴 자신의 모습이 자기에게는 너무나도 실망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룟 유다의 모습은 제자들의 내면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불안의 요인은 종교적인 실천과 행위로 물리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차라리 삼켜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악마의 사주받고 여태 살아왔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은 그 악마의 한 통속이 된 그 인간을 예수님의 피에 잠기도록 봉인하십니다. 그리고 준비된 새 사람으로 그 사람을 다루어주십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요 8:10-11)

예수님께서 벌이신 모든 일은 옛 것과 새 것을 말씀에 끄집어내는 대비시킴으로서 이 일을 성사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 본인임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새 사람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주의 이름을 걸고 만드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수시로 성령없던 경우를 보면서 십자가의 죄사함을 늘 확인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