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11:9-10 / 이사 가는 날 본문
이사 가는 날
이근호
2025년 5월 25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9-10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구약은 하나님께 의도적으로 책정해서 벌리신 연극 무대가 들어있는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약속의 땅’이며 그 출연진들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 출연진들의 조상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지정한 곳에 배회해야 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즉 이 땅에 대해서 그 어디에는 정착해서는 안 되는 인물로 쓰여집니다. 이것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가 됩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서는 뭐라고 표현될까요? “다 이루심”입니다. (요 19:30) 그런데 이 ‘다 이루심’의 당사자는 예수님 홀로입니다. 즉 예수님 외에는 구원될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는 ‘인간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님 구원 이야기’입니다. 이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구절이 바로 요한복음 14:2-3에 나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말씀에 의할 것 같으면 영원한 처소는 어디까지는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국한되고 예수님 외에 다른 이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다시 오셔서 그곳으로 데려가지 아니하면 결코 그 어떤 자는 구원될 수 없습니다. 이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라는 분은 주님에 의해서 자신이 구원받은 상태를 ‘셋째 하늘’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어서 알려줍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2-4)
셋째 하늘이라는 말은 첫째 아들과 둘째 하늘이 있다는 말입니다. 첫째 하늘이란 인간이 태어나면서 평생 바라보면서 그 밑에 놓여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아무리 탐구하고 노력해서 해와 달과 별과 함께 환경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첫째 하늘 아래서도 하나님의 자비심과 은혜와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냥 그림자와 흔적으로 주어집니다.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19:1-4)
그리고 시편 136:7-9에 보면, “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이 하늘 아래는 ‘인자하심’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감사함’보다 ‘기뻐함’으로 찾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교회 와서 구원받아 본인이 기뻐하겠다는 일념으로 꾸준히 다닙니다. 자기 기쁨, 곧 자기 행복이 자신이 감사할 분을 발견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둘째 하늘의 존재 의의를 알지 못한데서 비롯됩니다.
둘째 하늘은 영적 전쟁이 벌어지는 전쟁터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첫째 하늘 아래 있는 자들은 자신의 삶과 평화롭고 여유로우면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여깁니다. 요한계시록 12:7-8에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둘째 층에 있는 악마는 스스로 신으로 행세하기에 ‘누구로부터 거절당한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합니다. 남들로부터 모욕당하느냐 차라리 스스로 자신을 자해는 쪽을 선택합니다. 모든 인간이 아담의 자식들이기에 이런 악마의 품성을 띠로 이 땅에 태어납니다. 즉 “내가 뭐가 모자라서 내 뜻이 관철되지 못하냐”라는 분노의 기질을 바탕에 깔고 살아갑니다.
하나님 만나도 따질 기색입니다. “저 할 만큼 했습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둘째 하늘을 통과 못합니다. 당연히 셋째 하늘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점은 사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죽음 후 다시 찾아오시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최대의 성의있고 겸손한 태도를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은 운명을 선언하십니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쉽게 말해서 끝까지 내가 원대로 되어지는 너의 인생을 내가 허락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인생사는 실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응답의 여파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다음과 같이 기도 응답받았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마 26:39) 이미 성령받아 셋째 하늘에 합류한 사도는 자기 운명을 지상에 남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운명을 재현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베드로는 거절하므로서 베드로 성령으로 인해 벌써 구원시켜 놓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비록 베드로에게 남은 지상 생애가 있다고 치더라도 그것은 ‘남은 지난 날을 마저 사는 것’에 해당됩니다. 그런 식으로 이미 다 이루심에 입각해서 남은 삶을 재해석하게 됩니다.
즉 이미 죽은 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남은 삶에 재방문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첫째 하늘에서 둘째 하늘로 거쳐 셋째 하늘로 가는 경로를 보여주게 됩니다. 이 경로를 따로 이미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뿌려 놓으셨습니다. 소위 잘난 척 하는 우리 인간의 본성이 성령의 재해석으로 인하여 더욱 더 깊이 있는 피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겁니다.
나의 기쁨에서 예수님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는 삶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시 143“11-12)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피 안에 각설탕처럼 용해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모든 게 나에 대한 보호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보호가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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