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10:32-34 / 보복성 폭력 본문
보복성 폭력
이근호
2025년 3월 30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32-34
10: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10: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10: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세상이 아무리 폭력적이지만 하나님의 폭력에는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어떠한 폭력보다 더 센 폭력으로 실행됩니다. 그것은 인간쪽에서 하나님을 건드린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이 세상의 멸망을 통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등극시키는데 있습니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히 1:10-11) 친히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것을 친히 부셔버리십니다. 그 부셔져야 할 대상 속에 마땅히 인간도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일찍이 하나님의 선악과 과실을 떠먹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가만 계시지 않고 보복성 심판을 감행하십니다. “정녕 죽으리라”(창 2:17) “꼭 죽으리라”는 뜻입니다. 안 봐주신다는 말이요 예외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구원이란 안 죽는다는 말이 아니라 ‘두 번 태어난다’는 취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로서 ‘한 번 태어난 자’와 ‘두 번 태어난 자’와의 차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한 번 태어난 자는 육신으로 태어난 자들인데 이들은 어디서 태어났느냐는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인생 한 번 살고 그 다음에 뭐가 있는지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있어 관심사는 태어남의 전과 죽음 이후가 아니라 오로지 ‘살아있는 것, 계속 삼아남기’입니다. 끝까지 살아남기입니다. 죽고 난 뒤에 천국가서 또 영원히 살아남기입니다.
자기 살아남기 위해 이들은 세상을 주관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합니다. 인간의 주관적 해석에 의할 것 같으면 자신을 살리기 위해 세상이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서 자기 내부에 굳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계속 살리기 위해 나의 모든 믿음의 역량을 총동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으로는 계속해서 휩싸여지는 공포와 공포를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인간들은 자기를 살리기 위해 선택하고 또 선택합니다.
“어느 문을 열고 나가면 천국일까? 하나님 믿는 믿음으로 문을 열어야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문을 열어도 지옥입니다. 문제는 바로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믿는 믿음을 갖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 “불신이면 안 된다고”고 공포에 떨고 있으니 그것이 더 지옥스러운 양상입니다.
예수천국, 불신 천국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믿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면 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보복성 폭력을 미리 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동안 내가 의지했던 나의 믿음이 불신으로 변하는 겁니다. 이것이 ‘불신 천국’입니다. 더는 내가 나에 대해서 지킬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복성 폭력으로 인하여 우리의 주관은 완전히 죽은 주관이 됩니다. 소용없는 주관이 됩니다. 두 번 태어났다는 말은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것을 말하는데 이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보복성 폭력이 도리어 은혜요 복이요 선물이 됩니다. 이 작업을 위해 세례요한은 불도즈 같은 말씀을 외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눅 3:4-5) 인간에게 제일 힘든 것은 자기 내부에 의미의 사슬들이 방울져 있다는 점입니다.
일종의 ‘마음 뽁뽁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들은 세상을 주관적으로 헤아려서 얻어낸 실적들입니다. 그 의미들은 새로운 소망과 기대를 품게 됩니다. 이 기대와 소망이 사람을 망하게 합니다. 삶이 억지가 됩니다. 부드럽지가 못합니다. 말이나 행동에 늘 분노가 품어져 발산됩니다.
자기 것 지친다고 환장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광기의 세계’입니다. 세상은 온통 각자들의 광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광기로 폭력들이 남발하지만 하나님의 폭력은 이들 폭력보다 훨씬 더 셉니다. 하나님의 폭력은 인간들에게 덮어쒸워진 공포가 실재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인간들이 노벨상을 제정한다고 해서 지진이 없어질까요? 아무 상관없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주관을 노리고 폭력을 행사하십니다. 이 폭력의 예가 구약 42장에서 44장에 걸쳐 있는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나타나 있습니다. 꿈에 의해 형들에게 미움받아 애굽의 노예로 팔린 요셉은 꿈으로 말미암아 갖은 고생을 하면서 드디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됩니다.
요셉의 꿈이 하이라이트는 7년 풍년, 연이은 7년 흉년입니다. 요셉이 이 꿈의 진행이 자신들의 형과 부모님을 말씀 안에서 살게 하시는 보복성 폭력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를 위해 요셉은 억울하게 희생물이 된 것입니다. 요셉 자기 앞에 와서 돈들고 양식 사려온 형들에게 요셉은 그냥 곱게 원대복귀하지 못하게 합니다.
즉 다시 자기 자신을 위해 살겠다는 힘보다 더 센 힘으로 요셉은 형들을 붙듭니다. 자기네들 입에서 ‘피 값’을 언급토록하고 고백케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실시되는 모든 폭력의 절정은 ‘그의 찔림’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성도가 다시 태어난 자라는 것은 자신의 주관은 죽고 하나님의 주관이 삽일되어 세상을 전혀 달리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신이 관여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 복이요 은혜입니다. 육으로 태어난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보복성 폭력과 관련성을 지녔다는 살을 알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기존 세상의 강한 힘과 폭력성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강력한 폭력권으로 인해 형들은 애굽에 있는 요셉 발 앞에서 묶이게 됩니다. 그 묶임 속에서 그들은 드디어 요셉이 새로운 주관을 위해 희생물이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오직 나만이 살면 그만이다는 생각이 예수님을 죽게 한 원인과 연관되어 있음을 고백하는 자가 바로 다시 태어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 성도들을 통해서 이 시대에 예수님께서 당했던 희생을 반복 경험토록하십니다. 이것이 ‘고난의 큰 싸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일상의 피곤이 소유의식에서 비롯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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