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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10:19-20 / 길, 길 없음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10:19-20 / 길, 길 없음

정인순 2025. 3. 9. 15:52

음성 동영상 Youtube

 

 

이근호 


2025년 3월 9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19-20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성소, 휘장 같은 것은 성막, 혹은 성전 안에 있는 겁니다. 성전이나 성막은 유일하게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유일한 성전이나 성막을 걷어치웠버렸습니다. 성전을 거부했습니다. ‘휘장은 곧 예수님의 육체’입니다. 인간들에 의해서 예수님의 육신이 살해당할 때, 비로소 하늘로 가는 길이 열립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길이 없습니다. 인간들의 생각들이 길을 틀어막아버린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줄곧 따라가면 자신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요 13:36)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거절당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에 베드로의 처소가 그때는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이는 곧 현재는 인간을 위한 처소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처소가 마련되면 그때 다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시겠답니다. 이게 바로 ‘길’입니다. 즉 ‘길’이란 인간들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에게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있음’을 지켜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에게 있어 모든 가치와 의미, ‘나 있음’에 비롯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을 증거하게 됩니다. 인간들의 가치란 자신의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나 보상을 가지는데 있습니다. 남들에게 당당하게 내세울 것이 있는 ‘자기 있음’의 위용을 갖추는 것이 인간들이 세상 사는 즐거움이요 이유입니다. 문제는 이런 ‘있음’의 가치를 가지고 천국을 넘보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창세기 3:19로 이미 규정되어 있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따라서 인간은 이 규정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다른 처소를 넘보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천국은 ‘아들의 나라’입니다.(골 1:13) 이는 예수님께서 초대장을 보내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인간이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도리어 천국에 자기 자리가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이처럼 ‘있음’의 세계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로서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이미 ‘길이 성립되는 그 성막’자체를 인간들을 기피했기 때문입니다. 덩달아 천국 가는 길도 치워버린 바가 된 겁니다. 그렇다면 없는 천국 길이 어떻게 해서 마련되는 것일까요? 창세기 15: 9-10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하었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개체로 되어 있는 제물을 그 가운데를 쪼개입니다. 그리고 그 쪼개진 두 면을 마주보도록 배치합니다. 그러면 그 안에 ‘없음’으로 나타납니다. 그게 길입니다. 즉 길이란 있음이 죽어서 쪼개짐을 마주하면서 나타납니다. ‘제물의 있음’ 안에만 길이 포함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 쪼개진 제물 사이로 한 밤중에 횃불이 지나갑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하나님께서 지나가신 겁니다. 한 밤중에는 인간이 노동하지 않는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입니다. 그 횃불는 하나님이시기에 제물은 곧 신체성으로 나타내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렇게 해서 ‘길’이란 하나님의 자신의 구원에만 충족되는 조건입니다. 그 나타난 길을 따라 가신 예수님은 이미 사전에 아버지 하나님과 이야기된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데리고 있을 자를 자신이 선택할 수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렇게해서 예수님은 처소가 마련되면 자신이 데리고 싶은 사람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 성령을 보내십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1-22) 따라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란 철저하게 인간의 무신앙심을 들추어내시는 일입니다. 즉 인간의 육신은 아무리 해도 ‘믿음’이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막 6:48-49)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간주했다는 것은 평소에 제자들은 전혀 믿음없음을 반영하시는 겁니다.

게다가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에게 가겠다는 베드로는 도중에 실패하고 맙니다. 마태복음 14:29-31에 보면, “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율법에 의해서 철저하게 죽은 자에 불과하기에 그들의 믿음, 소망, 사랑도 다 헛겁니다. 이런 자들을 구원하는 것은 곧 ‘말의 내용과 말하는 행위의 내용이 다르다’는 원칙에 준해서 이루어집니다. 즉 인간들이 성경 말씀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믿겠다는 것은 진정한 성경 내용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은, 예를 들면 “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셔서 그것을 결과로 죽은 성도에게 주어진 결과입니다.

즉 인간이 진리를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알게 된 것이 곧 진리가 되는데, 이로 인해 인간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성도의 가치는 ‘예수님 증거’입니다. 모세가 이런 인물이었습니다. 모세가 속한 율법의 공간과 일반 이스라엘이 속한 있는 공간의 차이로 인해 모세는 얼굴에 수건을 써야했습니다. 그 수건이 오늘날 성령입니다.(고후 3:18)

성도는 이제는 성령 안에서 ‘나의 증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자유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모두에게 예수님의 행하심을 증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