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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10:21-25 / 하나님의 휴대폰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10:21-25 / 하나님의 휴대폰

정인순 2025. 3. 16. 16:20

 

음성 동영상 Youtube

하나님의 휴대폰

 

이근호
2025년 3월 16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21-25

(10: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

(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하나님의 집’이 있는 반면에 ‘사람의 집’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집입니다. 사람들이 희망하는 바는 절대적으로 자기 만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이나 세계를 원합니다. 이 세계 안에서 자신은 그 누구로부터의 간섭도 받지 않고 신으로 살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평생 시도하는 것은 ‘자기만의 집 장만’입니다.

그런데 이런 집으로 인해 ‘하나님의 집’의 존재를 잊어버립니다. 인간들의 ‘자기 집’에서는 자기에 대한 그 어떤 부정성도 용납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집 안에서 믿을 만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 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거짓인 줄도 모르고 가까인 줄도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 집’과의, 대비와 대조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뭔가 제공하는 게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양심의 악’과 ‘더러운 마음’을 씻어주는 그 무엇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자생적인 양심과 마음은 더럽다는 뜻입니다. 엉터리라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 엉터리인지는 누가복음 24장에 나옵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으셨다는 소식을 뒤로 하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 두 제자는 자신이 거짓이라는 점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동행해주시면서 예수님에 관해서 이야기하다가 날이 저물어 저녁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식사에 축복하실 때, 제자 둘은 눈이 열렸으며 동시이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이는 다른 양심, 다른 마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기 세계에 몰입되어 자신이 괜찮은 존재인줄로 알았던 것이 모조리 거짓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두 제자가 눈을 떴을 때,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보이느냐 아니 보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영에 의해서 눈이 열리고 말씀에 의해서 마음이 뜨거워진다는 이는 곧 예수님이 한결같이 살아계시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신다면 계속에서 우리의 양심과 마음이 악하고 거짓인 것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즉 죄 용서가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주어지는 말씀의 책망입니다. 죄 용서받은 상태에서 성도의 육신은 마치 벌받는 상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집은 인간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셨다’는 부정적 요소를 근거로 해서 세워지는 겁니다. 그것이 곧 ‘세상 죄를 지고가신 분’의 집으로서의 천국입니다. (계 21:22)

사람들은 일절 자신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 아이를 주셨습니다. 그 아이는 ‘최후의 아이’입니다.(사 9:6) 그 아이 안에 세상의 시작과 끝이 관통되어 있습니다. 마치 소리 껍질 안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었는지 여부는 개미에 실을 묶고 안으로 집어넣어 도로 밖으로 나오므로서 확인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영, 성령께서 성도에게 찾아오게 되면, 예수님의 경우과 마찬가지로 성도의 몸으로도 세상의 시작과 끝을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즉 인간에게 있어 눈에 보이는 신체성은 어디까지나 결과물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사람이 되고 난 뒤에 ‘흙+하나님의 호흡’이라는 시작점을 잊어버렸습니다.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보이는 세계에서 항상 당당하고 마음껏 폭력을 행하던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살인 현장에서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아내가 다음과 같은 소리를 했기 때문입니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마 27:19)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겼던 그 마음 속에 불안과 두려움을 일어나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본디오 빌라는 자신의 시작을 몰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회당장의 딸이 살아나는 대목도 마찬가지입니다.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비웃더라”(막 5:39-40) 동일한 시체를 놓고서 인간들은 자신의 가짜됨을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집을 알리기 위해 우리 인간들이 마련하고자 하는 자기 집과의 분리를 시도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집’에 합당한 DNA를 언약으로 삽입하는 일입니다. 사무엘을 한나는 자기 집과 분리해서 하나님의 집으로 넘깁니다. 그렇게 되면 사무엘에 의해 ‘하나님을 아버지가 되시는 다윗의 가문’이 형성됩니다.(삼하 7:14)

하나님의 집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소지품이 됩니다.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휴대폰을 평소에도 못놓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부정성으로 우리의 신분이 하늘의 집에 들어갈 자라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마치 400년동안 애굽에 살면서 애굽 사람이 다 되는 그들에게 악한 바로 왕을 통해서 모든 히브리인의 남자아이를 출생부터 막는 조치를 통해서 그들이 애굽 사람과 다른 운명의 길을 가야될 사람으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이미 용서받은 상태에서 이 세상에 놓여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수모를 재현시키십니다. 벌받을 필요도 없지만 벌받는 것처럼 수난을 당하는 것은 참으로 성령이 임한 사람인지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7-18)

성도끼리 자주 모여야 될 이유는, 바로 그 현장에서 피어나는 부정성과 주님의 용서하심을 반복해서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된 상태에서 보여주는 봉사입니다. 주님이 여기 계심을 보여주기 위한 봉사입니다. 더러운 양심으로 더러운 마음으로 오로지 자기 세계 마련에 정신을 쏟는 그 가짜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기 위한 모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처음 사랑과 끝 사랑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