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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10:26-31 / 내 몸의 불신앙성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10:26-31 / 내 몸의 불신앙성

정인순 2025. 3. 23. 15:59

음성 동영상 Youtube

 

주일오전설교요약음성

주일오전예배요약동영상

 

몸의 불신앙성

 

이근호
2025년 3월 23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26-31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10: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10: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10: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성경에 뭐가 쓰여졌던 우리의 몸은 이 성경을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끝까지 놀림받는 것은 성경입니다. 그것은 본성적으로 인간은 자기를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자기를 지키는 것은 선/악의 구분까지 넘어선다고 여깁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하나님이나 하나님 말씀까지 자신의 몸이나 존재보다 앞서 존재하지 못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31절에서 ‘살아 계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는 것은 그 누구의 존재도 하나님 존재를 대체하거나 가로막거나 앞서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몸을 통해서 드러낸다면 그 드러냄을 통해서 인간의 본 모습과 속성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기 소유를 건드리면 어지간해서 용서가 안됩니다. 더구나 자기 몸을 건드리면서 죽기 살기로 나올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몸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관심이 그다기 관심도 없고 심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의 관심사로 인하여 하나님의 몸의 일이 가리워졌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하여 이 세상의 인간들은 위험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오늘 본문의 기준을 철거하고 치워버리는 것을 이 위기감을 해소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저만치 밀어나는 그 본성은 인간의 육신이 이미 기억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내막은 하나님께서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등장하신 취지이기도 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일이나 영적 존재에 대해서 무감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인간이 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들 속에서 하나님 아들을 포함시켰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 모든 이가 하나님에 대해서 감각이 없으니 오로지 예수님만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감각을 지닙니다.

그 감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시험받으심과 시험하심’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서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있어 악마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없는 존재입니다. 아예 없으니 신경쓸 필요도 없습니다. 일반인에게는 악마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시험받으심’이라는 체험을 아버지로부터 부여받게 됩니다. 이 광야의 시험을 통해서 정리되는 것은 인간의 존재보다 ‘말씀의 존재’가 먼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악마는 예수님 대해서 “네 몸부터 먼저 챙겨라”고 합니다.

바로 이 정신이 악마의 일관된 정신이며 온 인류를 정신적으로 장악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인간에게 있어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겁니다. 즉 악마의 사주를 받아 인간은 ‘자기 이전’으로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최종적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런 악마이 통치하는 공간 안에서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 시험의 취지는 이러합니다. “내가 나를 의식하기 이전에 선택되었기에 그 선택의 준해서 나를 새롭게 의식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사험에서 서로 다른 두 개념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하나는 ‘유혹’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점검’을 뜻합니다. 과연 주님으로부터 시작한 일이 어떻게 중도로 내 문제로 돌아오는지 여부‘를 전검하는 겁니다.

점검은 이미 구원된 상태에서만 성립하는 겁니다. 마치 도저히 제 실력으로 대기업에 들어올 수 없는 신입사원에 대해서 주위 사람들의 말이 많아서 그는 단호하게 알려줍니다. “사실은 우리 회사 회장님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뽑아주셨다”고 말입니다. 이게 이미 입사된 사원이 해야될 일입니다.

구원받은 자가 해야 될 일은, ‘나는 저주받아 마땅한 자’라는 점을 실습, 실습을 통해서 계속 받아들이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말씀과 성령께서 이 일을 하게 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불신앙성을 드러내면서 주님께서 감사하는 자가 이미 천국에 합격한 성도가 평생 해야 될 일입니다. 

말씀 회사 직원들이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회장님께서 지금도 열성적으로 분류작업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전의 예성하심과 부르심이 지속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3:5에 보면,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 자신을 시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았기에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이 일에 대해서 예수님의 능력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지를 보여주어야 하는 겁니다. 예를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리실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 27:52-53)

성경에 보면, 성도는 이마에 주님의 이름이 박혀있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계 22:4) 성도는 자기가 자기를 호출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호출하면서 ‘말씀 회사’가 운영되는 겁니다. 이들의 구원 권능은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몸을 장악했던 모든 윤리/도덕 체계 자체가 성령으로 인해 뜯겨지는 권능입니다.

“삼손이 밤중까지 누웠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자신을 매복해서 체포하기 위한 성문 자체가 삼손이 다 뜯어버리는 겁니다. 이와같은 권능이 ‘말씀 회사’ 안을 덮칩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십자가 권능이 임하는 것은 우리는 남의 인생을 통해서 인간의 죄사함은 결코 인간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비난하는 자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셨습니다. “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마 9:4-5) 예수님의 말씀의 권능으로 인해 성도는 비로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긍휼이나 죄사함을 요구할  자격이 없는 자였습니다”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바늘구멍보다 좁디좁은 구원의 일을 늘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