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열왕기상 1:11-14 / 성전을 위한 왕 본문
성전을 위한 왕
이근호
2024년 11월 6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11-14
(1:11) 나단이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에게 고하여 가로되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왕이 됨을 듣지 못하였나이까 우리 주 다윗은 알지 못하시나이다
(1:12) 이제 나로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아들 솔로몬의 생명 구원할 계교 베풀기를 허락하소서
(1:13) 당신은 다윗 왕 앞에 들어가서 고하기를 내 주 왕이여 전에 왕이 계집종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정녕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위에 앉으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런데 아도니야가 무슨 연고로 왕이 되었나이까 하소서
(1:14) 당신이 거기서 왕과 말씀할 때에 나도 이어 들어가서 당신의 말씀을 증거하리이다
여전히 기력이 남아 있는 다윗의 측근은 나단 선지자와 다윗의 아내 밧세바입니다. 솔로몬 아직 너무 어립니다. 이스라엘 왕의 특수함에 대해서 이 두 사람은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 특수함이란 바로 왕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내용으로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일반들이 생각하는 ‘왕’에 대한 이해와 판이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을 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왕되심’에 대해서 염원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즉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율법을 주셨다는 것에 대해 신뢰를 갖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막상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는 그들은 이방나라와 접촉하면서 율법으로 다스림을 받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에 이끌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방나라들이 믿는 다른 신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방나라들의 군사력과 왕의 강력한 통치성에 부러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국가가 하나님의 율법 통치와는 판이한 식으로 운영되는데 그 백성들이 느끼는 바는 이런 겁니다. “권세란 항상 인간의 시도로 채워져야 할 성질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권세에 빈 자리가 생긴다”는 겁니다. 백성들에 의해서 채워지지 아니하면 다른 민족의 권세가 들어와서 공격받고 지배당한다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즉 힘이 있는 자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어야 국가가 안정적이고 힘이 더욱 강성해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실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왕되심의 권세가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점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 예가 바로 사사시대에 일어납니다.
기드온은 결코 왕족도 아니요 왕가도 아닙니다. 일개 농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신이 임하니 전쟁을 큰 승리를 하게 됩니다. 기드온은 이런 결과가 하나님의 왕되심에 나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이나 특히 기드온 가정에서는 믿지 않았습니다. 기드온이 백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되면 아들 중에 아비멜렉이 그 인기를 권력으로 전환시키고자 했습니다.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 어미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외조부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인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의 골육지친임을 생각하라”(삿 9:12)
즉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권세놀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의 말짜 동생이 요담은 아비멜렉의 칼날을 피해서 도망치면서 이 ‘왕되기 놀이’를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에게 할 것도 없고 섬길 것도 없는 자가 왕이 되고자 한다는 겁니다. 이런 사사시대를 거쳐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으로 다스림받기를 거부하고 왕제도를 도입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뜻은 이러합니다. “왕은 도적이요 깡패다. 없는 권세를 채우고자 백성들을 압제해서 빼앗고 백성은 왕의 종이 된다”는 겁니다. 즉 왕을 찾는 백성의 염원을 담아 등장한 사울왕은 하나님에 의해서 ‘버려지는 왕’으로 세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두 명의 왕을 등장시킵니다.
한 사람은 사울이요 다른 한 사람은 다윗입니다. 사울은 버림받아야 하고 다윗은 영원히 존속되어야 될 왕입니다. 그렇다면 다윗 다음에 나타날 왕은 어떻게 등장되는 걸까요? 그 차기 왕은 다윗, 다음의 왕이 아니라 다윗 왕위로 늘 되돌아와 소속되어야 될 왕입니다. 다윗 왕에 소속될 왕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 내용이 바로 역대상 22:9에 나옵니다.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 내가 저로 사면 모든 대적에게서 평강하게 하리라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이미 구체적으로 한 인물이 지목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려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에 준한 준비를 아버지 다윗이 하게 되는데 바로 그 준비가 ‘성전을 지을 준비’입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의 왕은 성전을 보호하는 직능자’가 되는 겁니다. “다윗이 명하여 이스라엘 땅에 우거하는 이방 사람을 모으고 석수를 시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돌을 다듬게 하고 다윗이 또 문짝못과 거멀못에 쓸 철을 한 없이 준비하고 또 심히 많아서 중수를 셀 수 없는 놋을 준비하고 또 백향목을 무수히 준비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이 백향목을 다윗에게로 많이 수운하여 왔음이라”(대상 22:2-4)
그렇다면 왜 다윗은 본인이 성전을 짓지 못하는 겁니까? 그 아유가 역대상 22:8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쉽게 말해서, 인간의 모든 권세 싸움에서 폭력이 일어나는데 이런 폭력보다 더 큰 폭력으로 모든 인간들의 권세 놀이를 잠재울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바로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진정한 만유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동안 한 일은 언약궤가 있는 이스라엘을 주변의 이방나라가 건들지 못하도록 무수한 피흘림의 전쟁을 통해서 평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이제 마무리 된 그 평강의 시기에 등장해서 성전을 짓게 될 왕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따라서 다윗언약의 자손이 해야 될 일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을 이 지상에 세우는 일입니다. 이 일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시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 권세를 믿는 자들은 이 아들을 기어이 권세 차원에서 살해하고 맙니다.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요 19:14-16)
세상 권세는 이미 오직 주님에게 넘겨져 있습니다. (골 1:16)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그곳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는데 ‘아들의 능력’으로 ‘아들의 나라’로 이동된 겁니다.(골 1:13) 바로 이것을 증거하는 성도가 이 세상에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벧전 2: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악함의 활동으로 인하여 새삼 주님의 십자가 능력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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