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열왕기상 1:1-4 / 아비삭 / 수요예배 본문
아비삭
이근호
2024년 10월 23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1-4
(1:1) 다윗 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1:2) 그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저로 왕을 모셔 봉양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1:3) 이스라엘 사방 경내에 아리따운 동녀를 구하다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1:4) 이 동녀는 심히 아리따운 자라 저가 왕을 봉양하며 수종하였으나 왕이 더불어 동침하지 아니하였더라
다윗의 후손들이 당연히 이스라엘의 왕들이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들이 왕위가 차지하는 이스라엘은 멸망하는 이스라엘, 역사 속으로 침몰하는 이스라엘입니다. 여타의 민족들의 역사와 한데 섞어 희석되고 증발되어 버리는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왕으로 영원한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왕으로 계신 한, 이스라엘도 영원합니다. 과연 이 ‘영원한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어떻게 나타날까요? 다윗의 후손 왕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열왕기는 ‘아비삭’이라는 여인의 관한 내용으로 출발합니다. 다윗은 노쇠했고 그는 스스로의 체온조차 조절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이 있지만 이미 일반적인 이스라엘 정치판이나 백성에게는 권력 구도에서 배제된 존재입니다. 즉 있어도 없는 존재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신하들이 아비삭이라는 궁녀를 다윗에게 붙여주는 것은 죽어가는 과거와 더불어 소실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다윗은 그 궁녀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정식으로 다윗 왕가의 권력에 끼어들 인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치 다윗이 말년에 권력판에서 배제된 것처럼 아비삭 또한 다윗과 하면 역사 저편으로 사라진 존재로 취급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여자가 열왕기 초반을 장식해야 합니까? 그것은 죽음을 앞두고는 다윗 시대에 설쳐대는 모든 이들은 실은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이는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을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소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언급해도 최종 증명하려는 것은 ‘내가 확실히 있고 나는 기어이 구원을 따내야겠다’는 자기 집념 뿐입니다. 하지만 정작 다윗은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다윗은 시편 51에서는 자신이 진적에 죽은 자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이는 율법에 의해서, 곧 하나님의 안목 앞에서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까지 살해하고 난 뒤, 왕이라는 이유로, 권력으로 이 사태를 억누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행위를 낳게 된 이유는 자기만큼 끝까지 살아남을 가치있는 자로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12:4-6에 보면,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이 율법적 판단에 대해서 나단 선지자는 이렇게 분명 지적합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 즉 율법에 의해서 마땅히 죽어야 될 자는 바로 다윗 당신이라는 겁니다. 이는 곧 진정한 이스라엘이신 왕 앞에서 다윗은 이미 죽은 자인 겁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나단 선지자와 만났던 이 상황을 이렇게 해석을 내립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4-5)
즉 다윗의 본인의 살아 있음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죄인인가를 드러내기 위해 살아있다는 겁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 실은 죽은 자로 살아있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노쇠한 것을 그 당시 백성들이나 솔로몬이나 아도니야는 하나님의 권력이 다윗의 노쇠와 함께 쇠퇴했고 이제 이 이스라엘은 권력은 백성들이 납득할 만한 권력 기관을 조성해서 왕이라고 선포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에서 진정 살아있고 보존하고 있는 것이 바로 ‘다윗 언약’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물리학에서 모든 사물이 한결같이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가 한결같이 보존한다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에너지는 결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물의 형태의 변화는 생존 패턴의 전환을 통해서 에너지의 총량은 그 어떤 모습으로 달라져도 영원히 보존함을 압니다. 언약은 비록 인간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약의 능력은 사그라진 적이 없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이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그 왕됨이 바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구현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아비삭이나 밧세바나 나단 선지자나 모두 보이지 않는 언약의 흔적이요 언약의, 글자요 언약의 기호들입니다. 아비삭은 분명 일개 궁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권력 분포에서 늙고 죽은 다윗 자투리에서 남아 있는 인물이 바로 아비삭입니다.
아도니야는 왕권에서 밀린 후에 마치 동생인 솔로몬이 다윗 다음의 이스라엘의 권력을 인수인계받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합당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살아 있음, 곧 자신이 다윗 권력의 일부로서 한 몫을 건진채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다윗의 궁녀였던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달라고 밧세바에게 요청합니다.
이는 분명히 솔로몬만이 왕이 된 시대에서 다윗에게 내려온 권력의 일부를 자신이 차지하고 있음을 백성들 앞에서 알리고 싶은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솔로몬은 대노합니다. 솔롬의 통치가 온전치 않게 만들기 위한 정치적인 수완이라고 간주한 겁니다. “가로되 청컨대 솔로몬 왕에게 말씀하여 저로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왕이 당신의 얼굴을 괄시치 아니하리이다”(왕상 2:17)
자신이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들은 모두 나름대로 권력을 휘감고 살아있는 겁니다. 자신이 죽은 자라면 자기 구원도 당연히 없습니다. 진정 살아 있는 것은 다윗 언약 뿐입니다. 이런 권력 투쟁의 장에서 아비삭은 여전히 살아 있는 죽은 다윗의 증표입니다. 소위 살아 있는 자들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만의 권력을 취득하려고 하는지 드러내는 증표로서 아비삭이 존재하는 겁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의 권력은 살아 있는 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죽은 다윗에게 주신 ‘다윗 언약의 살아 있음’에서만 나옵니다. 이 흔적이 바로 오늘날의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자는 오직 ‘다윗의 후손’이니까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살리는 구원이 아니라 우리 안에 주님을 살리는 구원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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