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29:15-19 / 하나님의 개입 본문
하나님의 개입
이근호
2024년 10월 1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9:15-19
(29:15) 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바벨론에서 우리를 위하여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다 하므로
(29:16) 여호와께서 다윗의 위에 앉은 왕과 이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되어 가지 아니한 너희 형제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29: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로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 같게 하겠고
(29:18)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 보낸 열방 중에서 저줏거리와 놀램과 치소와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
(29:19) 이는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듣지 아니하며 듣지 아니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람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힘으로 삽니다. 비축한 힘이 많을수록 삶에 여유를 부릴 수 있습니다. 그 가진 것 중에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 땅(토지)입니다. 땅이 없이 살면 떠돌이 신세가 됩니다. 여기 가면 여기서 치이고, 저기 가면 저기에서 치입니다. 추방당하고 배척당합니다. 도무지 안정적인 삶을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 결사적으로 땅을 소유해야 하고 일단 소유가 되면 목숨걸고 지켜내려고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통적으로 땅 차지하기를 벌리는 투쟁의 역사입니다. 하나의 민족으로 대를 이어 자기 후손을 남기기 위해 땅은 필수적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이 본성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내어 약속의 땅에서 나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남겠다는 주님들이 예레미야를 참된 선지자가 아니라고 배척했습니다. 즉 그들이 이해하는 참 하나님은 자신들의 생존 욕구를 충족시켜는 하나님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약속의 땅에서 추방시키시는 겁니까?
그것은 그들의 비축된 힘을 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힘을 자신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훼방하기 십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성전도 파괴하시고 또한 왕도 없고 나라도 없애버려서 더는 이스라엘이 힘을 비축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이는 곧 국가도 종교도 없는 나라가 된 겁니다.
즉 자기네들 쪽으로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조치를 내리시는 이유는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11-13)
특히 이 대목에서 ‘십분의 일’이라도 삼키게 된다는 겁니다. 이는 인간의 그 어떤 각오와 결심도 하나님의 구원에 섞이지 않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것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계시를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편에서 이스라엘이 구원되는 방식은 하나님의 개입 뿐입니다.
이러한 개입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은 하나님의 계시의 연속성에 가담되도록 조치해주시는 겁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행 2:17-18)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에 가담된 백성들은 이사야 6장에 나오는 그루터기의 절단면을 유지하게 되는 자들입니다. 그 절단면에서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을 하십니다. 그 시작에 해당되는 사례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죽음 사건입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 11:3-4) 참으로 차갑게 냉정하게 들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이 죽던 말던 자신의 영광만 챙기는 분으로 이해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계시 차원에서 보면 나사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고 있는 겁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 이 말을 듣은 제자들은 아직 나사로가 죽지 않았다고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의 계시 차원을 자신들의 육신적인 상식 차원에서 해석해 버린 겁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분명 죽었습니다. 이미 죽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지경입니다. 이것도 모르고 도마는 다음과 같이 자신만만해 합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요 11:16)
즉 인간은 자신의 이해성이 하나님의 계시로 인하여 싹뚝 단절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못받아들입니다. 나사로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자신이 죽음을 전제로 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평소 삶이 타인들과 상대해서 끊임없는 대화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아무도 자신을 찾지도 않고 또 자신이 찾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사회적으로 이미 죽은 자에 해당됩니다. 그 어떤 변화를 추구할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는 어떤 골짜기로 인도받는데 거기에는 산 사람이란 전혀 없고 오로지 선지자 본인과 하나님만 계셔서 대화가 됩니다.
그 대화의 효과는 어떨까요?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겔 37:1-5)
이렇게 부활된 자들만이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이스라엘입니다. “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겔 37:10-11)
즉 하나님의 계시 완성의 능력이 임한 바로 그것이 약속의 땅에 영원히 살 백성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통해서 매사에 하나님의 개입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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