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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30:1-3 / 주님의 현존성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30:1-3 / 주님의 현존성

정인순 2024. 10. 27. 22:31

 음성 동영상 Youtube

 

주님의 현존성

 

이근호
2024년 10월 2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0:1-3

(30:1)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니라

(30: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네게 이른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

(30: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이킬 때가 이르리니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어차피 돌아올 곳이라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없는 이방나라로 포로잡히게 해서 돌아오게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약속의 땅이 당연히 자신들의 살 땅이라는 곳이라는 생각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에게는 ‘약속의 땅’이란 없는 곳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죽고 벌받는 것이 진정 마땅합니다.

그 이상을 생각하는 것이 탐욕에 불과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오면서 백성들 스스로 전에 자신이 생각한 자아가 아님을 알게 하시면서 데려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의 자아가 깨어지는 데는 말씀만한 것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이 개입되면 자아는 그 앞에서 붕괴됩니다.

자아가 붕괴되지 아니하면 그 자아는 하나님의 ‘다 이루심’을 가리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는 것은 말씀, 혹은 말씀 다발이지 인간 자아가 아닙니다. 따라서 말씀이 다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약속의 땅도 없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된 하나님의 백성도 없는 겁니다.

결국 이래나 저래나 약속의 땅은 인간에게 없는 곳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말씀을 못 지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들이 못 지켜서 말씀이 없는 나라에게 살게 된 이스라엘 민족과는 달리 말씀을 다 지켜내신 분이 계십니다. 모든 말씀을 다 이루어내시므로 서 그 분만이 들어설 수 있는 약속의 땅이 마련됩니다.

이 약속의 땅은 인간들이 이해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아들의 나라’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이 ‘아들의 나라’에 들어서려면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음’이 상태로 된 몸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죄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조건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부활시켰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원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성령이 오시게 되면 성도의 내부는 말씀의 ‘다 이루심’이 자리잡게 되고 성도의 육신은 껍질을 해당됩니다. 곧 성도의 모든 활동이 모든 말씀의 ‘다 이루심’의 활동이 되는 겁니다.

이런 상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이것이 주님의 현존성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성도는 주님과 함께 하십니다. 이 함께 있는 상태에 대해서 마태복음 7:24-27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성도는 뿌리부터 머리끝까지 말씀이 통으로 들어있음을 나타냅니다. 즉 성도와 함께 계신 주님께서 끊임없이 일을 만들어내시는데 그 모든 일은 오로지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현존성의 양상입니다. 성도가 따로 일을 꾸밀 필요가 없이 모든 상황에서 주님께서 일을 벌리십니다.

그 일을 통해서 성도는 더욱더 주님의 현존성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애초부터 자기 백성을 아에 약속의 땅을 떠나게 하시지 않게 하실 수도 있는데 왜 약속의 땅을 떠나고 나서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백성의 교체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새로 시작되는 새로운 피조물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구원받겠다는 자와 구별짓기 위함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더는 자기를 위한 삶이 존재하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시편 90:5-11에 보면,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약속의 땅에 돌아올 자는 더는 자기를 위한 세계는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점을 잘 보여준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행전 26:16-18에서는 그는 왜 주님에게 호출되었는지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두움→빛, 사단의 권세→하나님의 권세, 죄있음→죄사함, 더러운 존재→거룩한 백성이 되눈데 있어 결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일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을 남들보기에 홀로 로마로 가는 배를 타게 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27:23-24에서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면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실시한 체험이 아니라 주님이 실시한 체험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에 가서 예루살렘에 있으니 다른 이방지역에 있으나 그는 혼자가 아니라 주님을 함께 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은 약속의 땅에 이미 들어선 사람들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만이 있음을 늘 잊어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