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29:1-4 / 새로 생긴 열매 본문
새로 생긴 열매
이근호
2024년 10월 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9:1-4
(29:1)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내었는데
(29:2) 때는 여고니야 왕과 국모와 환관들과 및 유다와 예루살렘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후라
(29:3) 유다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가게 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의 손에 위탁하였더라 이렀으되
(29: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이스라엘은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농부가 되셔서 계획적으로 만들어 내고자 했던 열매입니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사 5:1-2)
그런데 오늘 분문에서 이스라엘은 다시 이방나라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전에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가 되어서 살던 자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유민으로 만들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농사는 완료될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들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 다시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고 약속의 땅에서 얻을 열매나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계획적 농사가 실패로 끝난 겁니까? 과연 하나님의 열매는 이 지상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포로잡혀 있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편지를 전합니다.
이것은 애굽이나 나와서 약속의 땅에서 살게 하신 이 과거사는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진정한 열매,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은 인간이 고대하는 바는 넘어선다는 점을 말해주시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시는 열매는 일단 인간이 고대하는 자신의 열매성과 결부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15:1-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열매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단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분이 먼저 포도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로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열매로 받지 않겠다는 바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것은 곧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경작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꾸만 자신을 인간으로 간주해서 “인간이라면 인간의 기본 도리는 해야한다”는 정신을 인간 자체가 자기보다 강요한다는 점입니다. 즉 내가 바라고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자신이 원하는 열매상을 인간이 짐작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열매상을 받지 않으신 겁니다. 이상적인 인간상?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만 해당됩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있던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애굽에서 벗어났을 때, 그들은 자신만을 위한 자아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었을 때, 그들은 그 율법을 가지고 자신이 기대하는 자화상을 완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는 복만 주어진다고 되어 있지 않고 위반했을 때 저주도 주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저주받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적으로 부정할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이와같은 사고 방식은 구약이 끝나고 신약에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16:20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가요? 그 다음 말씀이 안 나왔으면 이 글에 담긴 내용을 모를 뻔했습니다. 즉 제자들이나 구약 백성들이나 하나님 덕분에 자기 안녕을 고려한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너무 사랑하셔서 늘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이런 은혜 베푸심에 호응해서 원하는 바를 얻으면 된다는 식의 마음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인간이 얻고자 하는 것은 자기가 기대하는 완전한 자아상입니다. 따러서 베드로도 우리 주님의 멀쩡하게 활동하셔야 자기들에게는 이런 실익이 주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사람 손에 죽는다고 말씀하시니, 베드로가 이런 본성에 입각해서 자신들이 예수님을 안전되게 지켜주어서 그런 비극이 닥치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장담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런 자세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3)
즉 인간들은 각자 자신의 생각의 한도를 넘어설 수가 없었던 겁니다. 자기 보호, 자기 보존, 자기 안녕, 자기 이익, 이런 것들을 관련되는 메시야를 원하고 구했던 겁니다. 누가복음 11:9-13에도 마찬가지 취지를 나타내 주십니다. “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도대체 인간들이 간절히 구하고 기도하는 내용이 뭐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고대하는 자기 잘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내용은 기껏 아비가 자식에게 해가 되는 것을 제공하는 것에 해당된다고 하십니다.
자식에게 뱀을 주고 자식에게 전갈을 주는 아비가 악한 아비가 되는 것처럼, 자신이 생각해놓은 열매는 못버리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자는 이런 수준에 머문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것은 인간의 한도를 넘어선 겁니다. 쉽게 말해서 김치는 없는데 ‘예수 안’이라는 김치냉장고부터 들여놓고 그 안에서 김치를 만들어내는 식입니다. 성령님께서 이 일을 성사시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구상하는 일이 주님의 일의 방해가 되고 훼방됨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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