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28:1-4 / 선지자 맞은 편 본문
선지자 맞은편
이근호
2024년 9월 2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8:1-4
(28:1) 이 해 유다 왕 시드기야의 즉위한 지 오래지 않은 해 곧 사년 오월에 기브온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집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 앞에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28: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28:3) 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곳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여호와의 집 모든 기구를 두 해가 차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가져오게 하겠고
(28:4) 내가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는지라
인간은 시간이 자기 자신보다 더 길고 세상을 통제하는 환경임을 잘 압니다. 그 시간 안에서 인간이 해내는 것은 ‘내가 나’가 되는 일입니다. 문제는 아무리 과거가 지나가고 현재가 되어도 과거의 그 ‘나’를 현재의 ‘나’로 여긴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간이 주는 새로움이 전혀 없는 겁니다.
참된 선지자인 예레미야는 바로 이 ‘과거의 한때 나였던 그 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사정없이 거부당함을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새로움에 가져다 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늘 ‘현재’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 과거를 붙들고 사는 인간 세계에서 과거와 연결없은 새로운 ‘현재’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과거에 만들어진 그 ‘나’ 현재에서 우기므로서 현재를 곧장 ‘과거’로 만들어버리고 심지어 미래까지 ‘과거’로 여깁니다. 그러다보니 장래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겠고 단지 지금 자기를 지켜주면 그것이 곧 ‘장래’라 되기라고 우기게 됩니다. 과거에 없는 현재는 참 선지자가 외치는 것이고, 과거에 있는 현재와 미래를 말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곧 ‘하나님의 요소’가 없는 자입니다. 이 ‘없는 하나님의 요소’에 과거의 인간상이 들어서게 됩니다. “잘 될거야”라고 위로입니다. ‘잘된다는 말’은 이미 과거가 자리잡고 있고 그 위에 현재를 얹지는 식으로 ‘잘된다’는 뜻입니다. 과거의 ‘나’를 잘 살려낼 것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참 선지자의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워낙 참된 선지자로 알고 있기에 꾹 참고 듣고 있는 중에 용감한 거짓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냐라는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가 이 ‘약속의 땅’은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고 외쳤지만 하나냐는 2년만 참으로 다시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이 땅이 70년이 지내야 자기 백성을 받아준다는 것은, 이 약속의 땅 자체가 사람들 끼리 사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더불어 사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사는 공간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충족되는 조건이 완성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와 상관없이 항상 말씀이 주어진 현재에서 세상 변형이 일어나는 겁니다. ‘새롭다’는 것은 ‘하나님의 요소’가 계속해서 발산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이 새로울까요? 그것은 인간이 진정 무슨 죄를 품고 있는지가 새롭게 펼쳐진다는 겁니다. 이 점을 알려주는 계기가 바로 거짓 선지자, 곧 하나님의 요소가 전혀 없는 하나냐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그 사람의 등장은 그동안 인간들이 참 선지자에 대해서 대단한 불만을 품고 있었음을 노골화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70년 만에 돌아오는 것을 하나냐에서는 2년 만에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 땅은 과거의 ‘우리들’이 계속 살 권한이 있음을 거짓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겁니다.
과거에 속한 백성들은 당연히 거짓 선지자의 말을 택하게 됩니다. 게다가 거짓 선지자 하나냐는 예레미야가 들고 있는 나무로 만든 멍에를 보란 듯이 부셔버립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쇠 멍에를 만들어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이벤트 같은 것이 현재 참 선지자가 있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우리 인간이 성급하게 참 선지자편에 설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참 선지자의 말을 이해한다고 해서도 아닙니다. 출발을 거짓 선지자편에서서 이해해야 합니다. 왜 백성들이 참 선지자의 말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발하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점을 파악하는데 있어 이사야 선지자의 글이 유용합니다.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이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 고리와 팔목 고리와 얼굴 가리개와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반지와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 주머니와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사 3:18-23) 이사야 선지자가 사치를 부리는 귀족 부인에 대해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또한 이사야 5:11-12에 보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라고 전했습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자기가 고생해서 버린 돈으로 좀 사치하고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인가요? 이 험한 세상에서 힘들어 돈 벌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자기에게 투자하는 것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나쁜 짓인가요? 이와같은 반발은 선지자편에 서지 말고 선지자 반대편에 설 때나 새롭게 인식됩니다.
즉 인간의 자기 내부는 거짓 선지자가 백성들을 선동하는 것이 얼마나 무심코 우리 본심과 합치되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과거의 ‘나’를 포기못하는 인간의 심성상 인간은 참선지자의 말보다 거짓 선지자의 말에 동조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말씀이 오기 전에 이미 형성되어 구축되는 마음이 마치 성채(城寨)와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잠 18:19) 또한 잠언 16:32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즉 타인의 마음과 통한다는 것은 마치 단단한 성을 빼앗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들 마저 자기 성에 ‘문빗장’을 채워놓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체하지요? 요한복음 1:29-31에,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할 수 있는 세례 요한은 어떤 행위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사람을 수장하는 행위입니다. 사람을 죽여버리고 다시 건져내는 의식을 행합니다. 이것은 장차 성령이 왔을 때 바로 이런 능력으로 작용하므로서 ‘과거의 나’를 제거하고 현재 주님과 함께하는 ‘나’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런 식의 자아는 감히 천국에 살 수 없는 자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에 의해서 과거가 다른 늘 새롭게 만들어지는 공간에 놓여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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