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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26:20-24 / 사랑의 경작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26:20-24 / 사랑의 경작

정인순 2024. 9. 8. 16:33

음성 동영상

 

사랑의 경작 


2024년 9월 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6:20-24

(26:20) 또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는데 곧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라 그가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성과 이 땅을 쳐서 예언하매

(26:21) 여호야김 왕과 그 모든 용사와 모든 방백이 그 말을 듣고는 왕이 그를 죽이려 하매 우리야가 이를 듣고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하여 간지라

(26:22) 여호야김 왕이 사람을 애굽으로 보내되 곧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몇 사람을 함께 애굽으로 보내었더니

(26:23)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끌어내어 여호야김 왕께로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 시체를 평민의 묘실에 던지게 하였다 하니라

(26:24)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보호하여 예레미야를 백성의 손에 내어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구원은 분명 일반성을 띠고 우리 인간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는 인간들은 구원을 개인화로 오해해서 받아들입니다. 즉 ‘우리 구원’인데 이것을 ‘나의 구원’으로 여기는 겁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사적 거래에 의해서 나의 구원이 성사된다고 여깁니다. 이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 때문입니다.

본성은 바뀌지 않은 채 하나님의 구원을 수용하려 합니다. 자기를 위한 자기 구원으로 여깁니다. 이렇게 되면 본인 구원받은 것을 타인에게 자랑질하게 마련입니다. 구원은 나의 구원을 자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방적인 조치에 주목하라고 주어지는 겁니다. 따라이 이 차이남을 대해서 하나님께서 조치를 취하시면서 구원해 내십니다.

그 조치란 다름이 아니라 인간성 발굴이요 내막을 들추어내심입니다. 즉 말씀이 인간을 뒤집어놓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3:1-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복음이나 말씀의 주어짐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더불어 주어진다는 겁니다. 이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에서 ‘∼ 아니요’라는 말씀에 유념해 보시기 바랍니다. ‘뭘 하라’가 아니라 ‘아니요’가 동반해서 동원되어야 될 이유는, 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자신을 치장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말씀의 가치를 위해 봐주시는 것없이 단호하게 조치를 하십니다. 그 예가 오늘 본문 우리야 선지자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사람들의 평에 의하면 예레미야와 우리야 선지자가 같은 내용의 말씀을 전하니 다같은 부류에 속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전한 것과 동일하게 전했다고 당사자는 생각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우리야에게 참으로 위협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우리야 선지자는 애굽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왜 도망갈까요? 그것은 살고 싶어서, 죽기 싫어서 그런 겁니다. 왜 죽으면 안 되지요? 여기에 대해서 우리야 선지자는 본인이 알고 있는 신학지식으로 해결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즉 자신이 전하는 그 말씀을 자신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낳게 됨을 알게 될 때, 우리야 선지자는 자신을 살리는 쪽으로 나온 겁니다.

왜 말씀과 더불어 죽을 생각을 못한 겁니까? 그것은 자신이 말씀보다 더 가치있다고 여긴 본성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적 사실을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한다고 장담합니다. 여기에 그 어떤 조건도 필요없다고 여깁니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있어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무너져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본인이 못 받아들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 자신이 그 복음의 훼방자라는 사실을 인정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동원할 때는 말씀을 받는다는 그 당사자를 갈아엎는 식으로 전달하십니다.

마치 해변가에서 모터 달린 보트에 매달려가는 바나나 보트 같습니다. 앞선 보트가 속도를 높여부리면서 뒤따라가는 바나나 보트 위에 탄 사람들은 보트가 뒤집어지면서 다 물에 풍덩 빠집니다. 이때 바나나 보트 탄 사람들이 기분 나빠합니까 신나합니까? 신나하지요. 그 재미로 바나나 보트를 타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가감없이 온전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다 받아들인다고 자부하다가 집안 일에 우환이 생기면 다 뒤집어집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다음과 같은 타협안으로 내어놓습니다. “하나님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버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말씀이나 복음 때문에 내 인생이 종치는 일에 대해서는 제쪽에서 거리를 두고 싶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즉 나는 나로 인하여 죽고 나로 인하여 살고 싶지 결코 하나님 때문에 죽고 하나님 때문에 살고 싶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동안 애지중지하면서 보살펴 온 내 인생이 너무 귀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모르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자기 본색이 말씀으로 인하여 이미 들통났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이대면 무슨 심정이 될까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1-2)

즉 이미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딴 자에게 차후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호의는 도리어 그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우리야 선지자가 예레미야와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그는 자신의 본성이 다 들통난 입장에서 왕에게 애굽에서 체포되면 죽임을 당하고 일반인들이 묻히는 무덤으로 갑니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그냥 죽임을 맞이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지켜주어서 그 당시에는 왕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에 의한 경작입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시온은 밭 같이 경작함을 당하며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며 이 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들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렘 26:18)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경작용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뒤집어서 그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래놓고 다음과 같은 선언적 계시를 나타내십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 9:13-14)

말씀은 곧 사랑의 환경입니다. 모든 죄는 용서받되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은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사적 체험을 덮는 하나님의 체험입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갈 6:15)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감히 사적 용도로 끌어당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