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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7:11-15 / 존재와 기능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7:11-15 / 존재와 기능

정인순 2024. 9. 29. 13:37

음성 동영상 Youtube

 

존재와 기능 

 

이근호
2024년 9월 29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7:11-15

(7: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7:12)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7: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7:14)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7: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멜기세덱은 왕이면서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이 기능의 원천은 인간 육신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부터 주어진 겁니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3) 하지만 이 기능이 이스라엘 역사 내부에서 장애를 만나고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미 악마의 사주를 받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의해서입니다. 그 존재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12지파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의 지파가 레위지파입니다. 이 레위지파가 담당하는 기능이 제사기능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 레위지파가 담당하는 제사기능이, 다른 지파에 의해서 온전함을 보인다는 겁니다.

그 지파가 유다지파입니다. 왜 도중에 바뀌어야 하지요? 왜 그냥 줄곧 레위지파가 하도록 맡기지를 못하는 거지요? 그것은 그 어느 지파이든 이스라엘은 이미 인간이라는 점 때문에 온전히 완성되지 못하는 겁니다. 제사기능을 담당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 한계란 다름이 아닌 인간은 자신을 ‘절대 존재자’로 행세한다는 점입니다. 즉 제사 기능을 특수한 죽음, 곧 흠없는 제물의 죽음 앞에 기존의 모든 존재자를 함께 죽이는 기능입니다. 하지만 인간 존재는 자기를 살리고자 자신을 친히 다루고 있습니다. 처음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말씀을 준수하는 기능자’로 만들어졌습니다.

“선과 악을 아는 과실을 따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창 2:17) 그런데 인간이 신에게 승리하는 방식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에 대해서 따르지 않으면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따로 독자적인 존재로 행세할 수 있어 하나님의 권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배후에 악마가 인간에게 이런 심성을 심어주었습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에게 놀아나지 말고 너는 너의 인생을 살아라 는 겁니다. 그게 너답고 네게 합당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를 가동시키십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이런 이야기를 인간을 얼마나 화나게 하겠습니까? 참새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인간의 근원적인 자율권 자체를 예수님이 공박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실 때, 인간들이 자기 생각하지 않고 그 하나님만 정신없이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동네에 방역차 나타났을 때, 아이들이 그 소독약 냄새에 취해서 그 연기 안에서 자기를 소멸시키고 그냥 따라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자칭 어른이라는 자들은 방역차 안 따라갑니다. 왜냐하면 자기 존재에 집중하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따지는 것은 이것입니다. “존재나 기능이냐” 존재라는 것은 스스로 서는 것을 말하고, 기능이란 다른 존재에 철저하게 종속된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을 너무나도 감사하고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시범쪼로 이스라엘에게 보내어서 철저하게 존재를 기능으로 바꾸시려고 하셨습니다. 그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9-10)

하나님께서 존재를 기능으로 바꾸는 방식은 ‘진멸’입니다. 다 죽여버리는 겁니다. 이 진멸을 전제로 해서 ‘희생 제물’이 투입됩니다. 이것이 제사기능입니다. 즉 제사기능이란 다수의 존재들을 특수한 하나의 존재의 죽음 앞에서 다 죽여버리는 기능입니다. 인간들이 범죄하고 난 뒤의 특별한 단 하나의 가치보다 다수의 가치를 선호했습니다.

이러한 존재 중심적 생각이 레위지파 내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민수기 16장에 보면, ‘고라’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 사람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출애굽 할 때에 분명 다수가 나왔는데 모세 너만 우리의 지도자가 되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불만이 민수기 16:13-14에 나옵니다.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민 16:13-14)
그렇습니다. 자기 존재 관리자가 본인이라고 여기게 되면 자기 존재를 파괴하는 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보존하는 식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기에 고라는 반발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안 망하고 안 죽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죽음 앞에서 모든 자를 말씀 속으로 끌어당겨 죽이는 곳입니다. 그래야 제사가 됩니다. 자신이 죽는 것마저 하나님의 허락하신 일로 알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자기 껍질인 존재를 벗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렁쉥이(멍게)를 손질하면서 껍질은 벗어고 안 쪽만 취합니다. 마찬가지로 제사직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존재라는 껍질을 벗기도 악마의 심성을 채택해서 어린양의 죽음과 섞여 죽여버립니다. 바로 이 기능이 제사기능의 완성이요 이것을 유다 지파가 ‘왕’이라는 이름으로 담당하게 됩니다.

제사 기능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은 민수기 18:5-6에 나옵니다. “이와 같이 너희는 성소의 직무와 제단의 직무를 다하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너희의 형제 레위인을 택하여 내게 돌리고 너희에게 선물로 주어 회막의 일을 하게 하였나니”

즉 최후의 심판을 미리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존재 앞에서 하기에, 성도는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된 존재로서 새로이 덧입혀지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내부를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얼마나 악마적인 가를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