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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7:1-3 / 존재의 뒤편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7:1-3 / 존재의 뒤편

정인순 2024. 9. 8. 16:26

음성 동영상 Youtube

 

존재의 뒤편 

 

이근호
2024년 9월 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7:1-3

(7: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7: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7: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전쟁을 벌리시는 이유는 공의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전쟁을 통해서 무엇이 하나님에게 합당하게 존재해야 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전쟁으로 여기고 소돔에서 전쟁을 치렸지만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떤 분을 만나게 됩니다. 그 순간 아브라함은 이번 전쟁이 자기를 위한 전쟁이 아님을 압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은 뭘까요? 멜기세덱과 비교하면서 밝혀집니다.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 사람입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데’도 있는 존재입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아비도 있고 어미도 있습니다.

이 차이가 결국 하늘에 무슨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지상에 나타난 것일까요? 그것은 이 땅의 사람들은 의나 평강을 논할 자격이 없음을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그 이유는 제사 기능에 의해서 드러납니다. 멜기세덱은 영원한 제사장입니다. 이런 영원한 기능을 위해서 이 땅에는 미리 모형과 여러 부분으로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모형 중의 하나가 성막입니다. 성막은 ‘성막 밖’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낳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거룩한 공간은 오직 성막 안입니다. 하나님에게 성막 안의 공간만 의미있습니다. 이 공간 속에서 어떤 경로가 나타납니다. 휘장에 의해서 성소와 지성소로 나뉘어지는데 경로는 휘장 앞에서 멈쳐집니다. 그렇다면 이 휘장 뒤 지성소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존재하는 자는 더는 들어설 수 없는 공간입니다. 1년에 한 차례씩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담고 휘장을 열고 들어섭니다. 그는 이미 죽은 자로 들어서는 겁니다. 그곳이 바로 존재의 뒤편입니다. 저주만 가득찬 곳입니다. 저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만약에 휘장이 찢어진다면 이 저주는 온 세상에게 쏟아져 전체를 저주로 덮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전체적인 저주를 감추려는 악마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하든지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제사기능을 덮고 감출려고 할 겁니다. 바로 짐승이 이런 일을 합니다. 짐승이란 바다에서 올라옵니다. 바다는 약속이나 언약이 없는 세계입니다. 바다에 언약이나 약속이 없다는 것은 땅에 약속이 나타나니 비로소 바다에는 약속의 없음이 밝혀지는 겁니다.

짐승이 출현하는 곳은 바다입니다. 창조의 세계에서 바다의 출현은 셋째날에 나타난 겁니다. 처음에 어두움만 있는 세상에 첫째날 빛이 있었고, 둘째날은 물만 있습니다. 이 물이 위로 아래로 나뉘어지면서 비로소 ‘하늘’이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동시에 ‘아랫 물’의 세계도 나타납니다.

아랫물에서 약간 거두어지니 바로 땅이 나타났고 그 땅에 나중에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면 약속의 땅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땅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가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모형적 나라 속에서 이루어진 모형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더불어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짐승, 곧 악마는 압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멈춰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 악마는 제사를 공격하려 합니까? 그것은 존재의 뒤편, 곧 지성소에 고여있는 저주가 이 세상을 온통 덮는 것을 거부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필사적으로 존재의 가치를 지켜온 겁니다.

마태복음 6:19-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땅과 하늘을 구분하셨습니다. 그것은 진정하고 온전한 제사는 바로 하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존재의 뒤편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없음’부터 매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있음’부터 이해하려고 합니다. 과학이 바로 대표적입니다.

이미 ‘있음’을 줄기차게 ‘있음’으로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있음’과 대결 사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있는 인간을 인간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흙’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인간들을 거부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은 살육의 현장이 됩니다.

인간이 인간을 사냥하는 사냥처로 변한겁니다. 인간 자체가 악마가 들고 설치는 권총같은 겁니다. 무기입니다. 다니엘에 보면 여렷 짐승들이 줄이어 나옵니다. 이미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무기화된 제국들이 이스라엘의 제사제도를 노리고 집요하고 공격합니다. 이것에 대해 제대로 전쟁할 수 있는 것은 미가엘이라는 천사장 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을 멸망합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들로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아들께서 제사장직을 완수해버린 겁니다. 여기에 대응해서 짐승들이 인간들이 현혹할만한 온갖 기적들을 베풀어서 현‘있음’에 세계에 신봉하게끔합니다.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계13:12-14)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간결합니다.

제사제도의 완료에서 나오는 지성소의 저주 퍼부음입니다. 곧 이 세상은 불사름을 당하여 그동안 간수한 바가 되는 겁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십자가에서 달성한 제사는 ‘제대로 된 영원한 대제사장의 피로 말미암아 영원한 평강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평강의 왕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휘장을 찢는 것이 존재의 뒤편을 드러낸 유일한 방법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