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7:16-19 / 생명의 능력 본문
생명의 능력
이근호
2024년 10월 6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7:16-19
(7:16)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7:17)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7: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7: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율법은 육신과 관여합니다. 그런데 이 육신이라는 것이 매우 수상합니다. 육신 내부에 율법은 온전케 할 수 없는 괴물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셔서 인간 육신의 요구를 배제하시면서 따로 영생을 완성하십니다. ‘영생을 완성한다’는 것은 그냥 하늘 나라에 열매가 있는 것으로 달성되는 게 아닙니다.
선악과 나무 열매나 생명나무 열매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관계 맺으므로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즉 이 지상에 오신 예수님에 의해서 생명나무나 선악과 나무의 취지가 완성이 됩니다. 인간들이 선악과 나무 열매를 따먹을 때, 그들은 ‘정녕 죽으리라’는 빼놓고 따먹었습니다.
즉 인간들은 ‘정녕 죽으리라’가 뭔지를 모릅니다. 살다가 힘들면 그냥 콱 눈 감고 죽으면 그만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죽고 난 뒤는 어떻게 되는지 그냥 “모르겠다”고 외쳐버립니다. 쉽게 말해서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를 여전히 무시하고 모독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해하고 경험하고자 하는 죽음은 선악과 열매와 관련된 ‘제대로 된 죽음 그 자체’가 아닙니다. 제대로 된 죽음은 ‘영원한 형벌로서 받게 되는 저주’입니다. 이 저주의 전부는 짧은 기간 동안만 사는 인간의 육신으로 다 구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만 온전하게 구현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마저 율법과 연계해서 체험하셨습니다. ‘죽으리라’의 온전함을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내용으로 십자가에서 온전하게 달성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들은 이제 사나 죽으나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성경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생명나무 과실이 있는 곳에서 추방시켰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영생이나 영원한 생명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의 능력이란 곧 이 생명의 능력을 실어내는 형식을 요청하는 겁니다.
어떤 형식 말입니까? 생명나무이신 예수님께서 생명나무의 취지와 선악과 나무 과실의 취지를 완성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일을 하실 때, 인간들의 폭력 안에서 달성하셨습니다. 즉 인간들의 폭력 속에서 영생의 반대되는 성질이 내포되어 있었던 겁니다. 인간들이 영생을 기피하는 이유는, 영생은 필히 영멸과 연관되어 있는 성질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쪽이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어느 한쪽은 영원히 멸망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영멸되기 싫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빈 형식이 아니라 뭐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악마가 심어준 ‘자기 의(義)’입니다. 즉 인간들은 창피당하기 싫은 겁니다.
자살하는 이유는 창피당하기 전에 자신에게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끝까지 지켜내는 마지막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죽었지 창피당하기는 싫다는 정신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16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있어 이미 목숨보다 자기 의를 더 챙기고 최후까지 사수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인간들에게 아무리 복음을 말하고 성경 지식을 전해도 먹히지 않는 이유는 ‘자기 의’를 끝까지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의에 도달되는 복음의 능력은 결국 폭력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영생이 이런 폭력을 통해서 구현되었기 때문입니다. 폭력성을 품고 있는 영생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오게 되면 성도의 일평생은 하나님이 주시는 폭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며는, 영생은 ‘빈 형식’에 가득 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육신이라는 형식은 이미 자기 잘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을 토하게 하고 게워내는 작업은 영생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율법을 받게 되는 모세도 출생부터 이런 지경 속에 놓였습니다. 출애굽기 2:3에는 어린 모세는 바구니에 담겨서 자기 집을 떠나게 됩니다.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이 상자는 모세가 율법을 받고 난 뒤에는 ‘언약궤’가 됩니다. 어린 모세의 막강한 애굽 나라의 권력에 시달립니다. 죽음에 처하게 됩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친히 모세를 키울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인간은 본질 자체가 저주의 자녀이기에 자신의 힘으로 자기 본질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냥 태어난 게 세상이 죄요 존재하는 것이 죄요 사는 게 죄입니다. 죄 아닌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원이란 노력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건짐받는 겁니다. 주님의 손길이 오기 전에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모습을 드러낼 수 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21:28-31에,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즉 구원은 순전히 주님의 뜻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쪽에서 “싫소이다”는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폭력을 가하시는데 “좋소이다”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이미 온전한 채로 주님께서 겪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다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율법을 육신에게 주신 것은 바로 영생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고질적인 자기 의’거치면서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비로소 바구니에 담긴 모세의 처지에서 주님을 압니다. 영생은 바로 거기에 이미 담겨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에 의해서 폭력당하신 그 분이 영생 주시는 분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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