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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말라기 3:13-15 / 헛되이 섬김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말라기

말라기 3:13-15 / 헛되이 섬김

정인순 2024. 9. 19. 11:27

 음성 동영상 Youtube

 

헛되이 섬김

 

이근호
2024년 9월 18일                

 

본문 말씀: 말라기 3:13-15

(3:13)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3: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3: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선지자를 통해서 말을 건네는 민족은 이스라엘, 즉 유대민족입니다. 말을 건넨다는 것은 의미를 주고 받고가 가능한 관계라는 겁니다. 다른 민족에게는 율법이나 선지자의 말씀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말을 건네시고 그 반응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유대민족은 이스라엘 역사의 끝자락에서 끝까지 남아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견해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 견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대적’에 관한 겁니다. 하나님의 대적이란 그동안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민족이라고 그동안 이스라엘이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유대 민족의 끝자락에 와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의 대적이라고 규정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견에 대해서 유대민족은 자신들의 의견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숨기고 있는 본심을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호소입니다. 인간들이 호소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쪽에서 먼저 호소하시는 겁니다.

왜 인간들은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지 못하는 걸까요? 그것은 시편 116:11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 그렇습니다. 인간들은 처음부터 거짓말장이었습니다. 인간은 거짓말장이가 지배하고 다스리는 세상에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출생 자체부터 이미 망해야 될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 안에 시작과 끝, 모두가 응축되어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에게 건네게 되면 그 건넴을 받은 인간은 자신 안에 자신의 최초와 최후 모두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인생이란 바로 응축된 시작과 끝을 발산하고 펼쳐보이는 생애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테스트하는 행위의 반복입니다.

행여 자신이 하나님 믿음으로 어떤 효력이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면서 꾸준히 하나님을 믿고 섬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서 나름 성실하려고 해도 자신이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러합니다.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다!”

맞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대했던 바입니다. 거짓말쟁이인 인간으로서 마땅히 도달하고마는 결과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대적자였던 겁니다. 그동안 꾸준히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다’라는 허무한 결과에 당도하지 않기 위해서, 뭔가 하나님쪽에서 성의를 표하기를 기대하면서 믿었지만 결국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다’에 당도하고 마는 겁니다.

성도가 되었는데 그냥 성도가 아니라 교회에 착실한 교인이 되었던 끝으로 내려지는 결과는 한결같이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다’입니다. 그렇다면 불신자가 성도에게 다음과 같이 의문을 가지고 물을 수가 있습니다. “소용없는데 하나님 왜 믿어?” 성도는 말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성도는 비로소 자기 자신이 거짓말쟁이로 태어난 인생을 그동안 살아온 것에 기뻐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저로 하여금 하나님 믿는 것이 소용있는 일이 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제가 저주받은 자라는 사실을 왜 굳이 저에게 알려주시는 겁니까?”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건네주시는 그 말씀의 취지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과 같은 마음, 같은 시선을 가진 한 식구가 되고 한 가족이 되고 한 울타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저주받는 같은 울타리의 성도를 껴안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곧 자신이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사실을 아는 자만이 구원과 생명이 보인다는 겁니다. 즉 내가 오래 살아남아야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끌어가시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맹세입니다. 노아 홍수 아래서 구원받은 자는 노아와 세 아들과 그들의 가족입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에서 저주가 발생됩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창 9:24-26) 홍수에서 구원받았다고 해서 저주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라지는 것은 인간들입니다.

영원한 것은 저주와 복입니다. 지금 말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 멸망 이후의 하나님의 말씀을 건네 받을 자는 누가 될까요? 신약에 오면 하나님의 영광은 비참한 저주와 결합이 됩니다.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목자에게 비친 영광은 실은 그 영광이 아기 예수님이 출생에서 비롯된 겁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변화산의 영광은 예수님께서 처참하게 망가지는 십자가 처형 공간과 결합에서 비롯된 겁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너무 좋아서 거기에 머물겠다고 자처했지만 막상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이고 나머지 제자들은 황급히 현장에서 피해 숨었습니다.

시작과 끝, 그리고 최초와 최후는 이제 예수님 한 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7-10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인생에게 있어 굳이 실수나 실패 같은 것, 성공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뭘 한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인간은 사라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나타나고 지속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과 약속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너무 잘 알아서 주님 오신다는 약속만 기대하면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 외에 다른 현실이 있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