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말라기 3:8-9 / 나에게서 우리로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말라기

말라기 3:8-9 / 나에게서 우리로

정인순 2024. 9. 5. 06:04

음성 동영상 Youtube

 

나에게서 우리로  

 

이근호 
2024년 9월 4일               

 

본문 말씀: 말라기 3:8-9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3: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애초부터 인간의 도둑이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하나님과 인간은 우리로 살았고 또한 인간과 인간 사이도 ‘너’ ‘나’ 관계가 아니라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악마가 인간을 부추겨서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는 순간, ‘우리’의 관계가 깨어지도 다들 독자적인 자아로 무장된 채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도적질에서 살인죄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 인간이 도적질한 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우리’라는 사이입니다. 따럿 구약을 마감하면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전 유대 민족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단정짓습니다.

일종의 욕설입니다. 왜냐하면 욕설이란 개선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상대의 본질을 지적하고 규정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즉 ‘결과가 이미 나왔다’는 겁니다. 무슨 결과 말입니까? 인간은 어떻게 하더라도 도둑이 맞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논리상 이런 겁니다. “누가 내 것을 도적질했어?”라고 묻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 의하면, “우리는 도적질 안했습니다”로 인간들은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겁니다. “왜 너희들은 너희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왜 하지 않느냐?”고 따지십니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이렇게 반응을 보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니까 너는 너희들이 안 하고 싶은 것을 놓쳤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묻지요. “하나님 그제 뭡니까?” 하나님의 답은 이러합니다. “그것은 너희들이 도둑으로 몰리는 일이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잔소리하는 분의 말을 더는 굳이 찾아서 들을 필요없다” 이것이 인간의 독자적인 본성입니다. 그동안 이러한 독자성을 숨긴 채 계속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노력을 해왔던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오직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라는 관계가 깨어져버린 오로지 ‘나만을 위한’ 일상의 삶을 살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도둑’이라는 겁니다.

이런 도둑의 본성에 발휘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를 해버리는 일’입니다. 즉 ‘십일조를 하는 것이 곧 도적질’로 이어지는 행동을 보이는 겁니다. 아무리 도적질을 한다 할지라도 ‘나’의 관계에서 ‘우리의 관계’로 전환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다음과 같이 자기 행위를 자랑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2) 말라기 내용을 익히 아는 바리새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십일조를 정성스럽게 드리므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된다고 여겼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칭찬받은 세리는 율법적으로 전혀 자랑이 될 수 있는 것을 내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레위 언약에 준한 제사법은 그 원형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 사이의 ‘우리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아들 관계는 십자가 위에서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우리’ 관계를 성립시키게 됩니다. 골로새서 2:12에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사법의 취지에 준한 ‘우리 관계’는 십일조 드리는 쪽이 죄인이 되는 신분으로 가담되게 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를 받는 제사장들은 십일조를 드린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는 기능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 취지가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성취된 겁니다. 즉 십자가 위에 달린 분이 분명 예수님 한 분이시지만 실은 거기에 죄인을 함께 있었던 겁니다.

이것은 ‘나’ 중심의 독자성에서 벗어나 오로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성취에서 진행된 하나님의 레위언약 성취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그 ‘나’는 제거되어야 될 ‘나’이고 영원한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그 위에서 죽고 살아난 ‘나’입니다. 이것이 ‘우리 관계’의 성립입니다.

기존의 인간 독자성 시선에서 보면, 인간들은 아무 대책도 없이 유유히 지옥으로 떠내려가는 탁류에 몸을 담근 채 떠내려가고 있는 중심입니다. 이는 인간이 ‘독자성’을 토대로 하기에 자신의 자아성을 자기에게 빼낼 수가 없는 겁니다. 이는 곧 인간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영원’과 접촉되지 아니하면 구원으로부터 탈락하는 겁니다.

그 영원성이 바로 사랑입니다. 로마서 13:9-10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드론처럼 단체로 꼼짝 못하게 지옥으로 떠내려가고 그 중에서는 공중에 드론처럼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사랑이라는 영원성과 접촉하지 못할까요?

이문세라는 가수가 부른 [사랑이 지나가면]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그 사람 나를 보아도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두근거리는 마음은 아파도이젠 그대를 몰라요그대 나를 알아도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사랑이 지나가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고 의지하고 좋아합니다. 따라서 인간 상태에서 뭘 해도 ‘우리 관계’를 훼손하는 도적질이 됩니다. 요한복음 16:4에 보면,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령이 오시면 벌써 다 이루어진 ‘우리’관계가 사랑으로 주입되어 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 육신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지적이 주어지는 그 자체가 이제는 영원한 사랑임을 아는 것이 성령의 도우심의 확정된 결과임을 라고 기뻐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위의 죄인으로 자각하는 것이 십일조의 완성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