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말라기 3:7 / 하나님의 탈장 본문
하나님의 탈장
이근호
2024년 8월 28일
본문 말씀: 말라기 3:7
(3: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인간들이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오늘날의 자기 삶을 영위해 온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조성된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은혜를 내리시는 그 자리에 설 수가 없기에 하나님께 돌아갈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유대 민족에게 주신 이유는 그들이 도통 하나님께 돌아갈 마음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다른 데 쏠려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육신을 계속 살려내는데 온 정성을 다 기울입니다. 이 세상은 각자 살아남는 일에 치열합니다. 경쟁합니다. 밀리면 자신은 못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점에 있어 인간은 하나님과의 견해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자신들이 가치가 있기 때문에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견해는 율법 자체에 가치가 있습니다. 만약에 율법대로 살 수 없다면 인간을 무가치하게 여겨 저주를 내리시겠답니다.
즉 저주가 떨어질 수 있는 대상이 곧 인간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이 생각하기를 자신의 가치는 자신이 챙긴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가치가 율법 여부로 파악하시겠다는 겁니다. 시편 3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이 성취가 되려면, 일단 인간이 내세우고 싶은 일체의 가치나 자랑거리는 없어야 하고 온통 허물과 죄 뿐이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복의 시작은 허물뿐인 존재, 죄 뿐인 죄에 대해서 하나님쪽에서 가리움과 사함을 제공하는 방식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미 인간이 어떤 존재인줄을 아십니다.
그렇다면 이 시편 32:1의 취지가 하나님 내부에 계속 살아있게 됩니다. 이미 인간은 선악과 따먹은 입장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생명에 차단되어 있습니다. 이런 대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율법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따라서 인간쪽에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이미 죄로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뭔가 살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죄가 되고 저주거리가 됩니다. 마치 자신이 구원받을 가치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접선을 시도하는 것도 죄에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죽이십니다. 신약의 입장에서 참으로 자신이 구원받은 자들은 특정 공간이나 건물이나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돌아온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복음은 모든 인간을 이미 죽은 존재로 전제한 상태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신약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방식’은 하나님에 의해서 친히 마련하신 겁니다. 그것은 바로 마치 탈장하듯이 하나님과 함께 계신 예수님께서 그 하늘나라를 버리고 이 죄뿐인 세상에 들어오심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빠져 나간 그 빈 자리가 생겼습니다. 바로 그곳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자리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 본문에서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음’을 유념합시다.
즉 어떤 인간도 구원될 가치가 없는 겁니다. 구원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경로에 따릅니다. 하늘을 버리고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짊어진 경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눅 24:7)
일단 예수님은 죽으셔야 합니다. 그것도 사람들의 손에 죽으셔야 합니다. 이들의 권세는 모든 인간들의 보편적 심성을 대변한데서 집대성된 권세입니다. 따라서 죽지 않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방법이라는 예수님을 포함해서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0:22-
23에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시인하는 것이 인간들 입장에서 만만하게 보이겠지만 문제는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가치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시기에 인간들 입장에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본심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지만 예수님은 단호히 베드로의 의견을 거절했습니다.(요 13:36-38) 이때 베드로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은 계속 거절, 거절입니다. 그것은 인간쪽에서 보내는 신호들이 실은 인간들이 자신의 시도를 통해서 자신을 살리고자 하는 의욕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자신을 따라서 죽으라는 말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결국 인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방식은 자신을 죽이시는 그 복음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사도 바울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노골적으로 묻습니다.
“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6-17) 인간은 자기 죽음을 애석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마땅하고 당연한 겁니다.
바로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이미 ‘복음 안’에 들어온 자들이요 이들만이 이미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안목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무가치를 도리어 감사하고 기뻐하게 하옵소서. 그게 하나님의 뜻임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 > 말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라기 3:10-12 / 십일조와 맏물 (0) | 2024.09.11 |
---|---|
말라기 3:8-9 / 나에게서 우리로 (0) | 2024.09.05 |
말라기 3:4-6 / 성소 청소 / 240821 (0) | 2024.08.21 |
말라기 2:15-17 / 그리스도의 옷 (0) | 2024.08.07 |
말라기 2:13-14 / 하나님의 가족 (0) | 2024.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