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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말라기 2:15-17 / 그리스도의 옷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말라기

말라기 2:15-17 / 그리스도의 옷

정인순 2024. 8. 7. 23:38

음성 동영상

그리스도의 옷 

 

이근호
2024년 8월 7일              

 

본문 말씀: 말라기 2:15-17

(2:15)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2: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2:17)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피조물 주제에 감히 토 달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일상 태도들을 보면, 모조리 ‘자기를 위하여’ 움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지만 자신의 생활 태도에 그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은 딴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가 ‘하나님을 위해서’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런 자를 ‘경건한 자’라고 말합니다. 이 ‘경건한 자’에 관한 규정마저 결코 인간들이 ‘자기를 위해서’ 설정되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곧 ‘자기를 위하지 않는 삶’이 경건인 것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래 뜻입니다. 창세기 2장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창조했을 때는 인간들은 ‘자기를 위해서’가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아담 한 사람만 만들고 ‘한 몸’이라고 규정하지 않는 걸까요? 말라기 2: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 ‘한 아버지’의 뜻은 경건한 두 몸이 아니라 경건한 ‘한 몸’입니다. ‘경건’이라는 요건과 ‘한 몸’이라는 요건을 다 달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요건을 달성하는데 있어 하나님깨서 아담 한 육체가 아니라 ‘여자’라는 육체를 만드셔서 그 둘을 합쳐서 한 몸이라고 규정하십니다. 그 몸이 바로 한 아버지의 취지에 합당한 경건한 한 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경건한 한 몸을 통해서 경건한 자녀가 계속 나오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 경건한 몸이 고질병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눈이 밝아져서 ‘자기를 위해’ 사는 병입니다. 이 병을 못 고칩니다. 이는 창세기 3장에 들어서 다시 창세기 2장의 시절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눈이 밝아진 처지에 어떻게 도로 눈이 어두워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인간은 출생부터가 경건치 못하는 자로 태어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 아버지에 합당한 한 몸은 포기될 수 없는 사항입니다. 벌써 부부에게는 하나님께서 내린 저주의 징벌이 함께 합니다. 이는 부부관계 속에 두 번 다시 원래 부부로 돌아갈 수 없는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학대로 아내를 대하는 남편의 등장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남편의 학대가 인류 역사상 처음은 아닐 겁니다.

애초부터 줄 곧 있어 왔습니다. 이러한 학대 성향조차 범죄한 첫 부부에게 내린 징벌의 연속입니다. 창세기 3:16에 보면,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자 개인적 신체에 내리는 징벌은 아기 낳을 때 고생이 극심한 겁니다. 가정적으로 징벌로서저주가 주어졌는데 그것은 남편을 사모하되 그 사모한 남편으로부터 평생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부조화로 이어집니다. 즉 남편이라는 자가 아내를 다스리는 방식이 폭력적이라면 그 폭력이 전적으로 남편의 잘못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학대로 옷 입힌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학대를 옷처럼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너는 옷이나 입으라”는 것을 “너는 나의 학대를 옷처럼 여기고 입고 다녀라”는 말입니다. 이럴 때 아내는 여자가 먼저 선악과 따 먹은 현장이 가정 내의 징벌의 상황으로 연속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그 상황을 잊지 않습니다. 인간의 방식으로 도로 창세기 2장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결국 가정 폭력을 통해 그 여파가 나타나고 하나님께서는 가차없이 징벌이 주어짐을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출생을 통한 경건은 타락이라는 고질병으로 원천적으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인간들은 경건을 획득하기 위해서 하는 방법이 누구를 추종하는 겁니다. 경건해 보이는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따라하며 그 스승의 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실천에 얾겨보는 겁니다. 바로 그렇게 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12제자들입니다. 하지만 역시 실패로 끝났습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눈이 이미 밝은 상태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를 폐기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위기 때, 제자들은 누구도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본능적으로 육신은 자기 지키는 것이 우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경건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겁니까? 출생으로도 안 되고 추종으로도 안 된다면 말입니다.

비밀은 옷에 있습니다. 창세기 3:21에 나오는 가죽옷은 창세기 3:7에 나오는 인간들의 옷 만들기를 전제로 해서 나온 하나님의 조치였습니다. 눈이 밝아진 인간들은 그 밝아진 눈으로 지신의 시치성을 발견한 겁니다. 옷을 만들어 하체를 가리는 임시방편조치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끄러움을 몰랐던’ 창세기 2장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해 입혀셨는데 그 최종 결과가 갈라디아서 3:27에 나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성령의 세례는 곧 부활의 능력을 뜻합니다. 부활의 능력은 십자가의 온전한 성과에 대한 효력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란 의인되시는 주님께서 죄인과 함께 죽으신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경건이란 예수님의 몸, 그것으로 한 몸이 아니라 예수님+ 성도로서 한 몸을 달성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아내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한 몸인 경건한 자가 성령에 의해서 탄생한 겁니다. 이 몸은 이미 죽은 몸이기에 더는 ‘자기를 위해서’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평소에 눈이 밝다고 인간들이 자부하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다고 자부하기에 정작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됩니다. 마치 열왕기하 6장에서 엘리사 사환이 자기 성을 포위한 아람군대는 보면서 엘리사 선지자와 함께 있는 천군천사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눈을 뜬 사람이라면 천군천사보고 안심할 것이 아니라 엘리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야 합니다. 그냥 홀로 있는 것같지만 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있었던 겁니다. 오늘날 성도도 이와 같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의 피의 고귀함을 안다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피만으로 충분함을 간직하며 살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해서 사는 바로 그 태도가 고질병인 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