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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25:12-14 / 언약의 방충망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25:12-14 / 언약의 방충망

정인순 2024. 7. 30. 21:40

 음성 동영상 Youtube

 

언약의 방충망   

 

이근호
2024년 7월 2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5:12-14

(25: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 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25:13) 내가 그 땅에 대하여 선고한 바 곧 예레미야가 열방에 대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니

(25:14) 여러 나라와 큰 왕들이 그들로 자기 역군을 삼으리라 내가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손의 행한 대로 보응하리라 하시니라

‘70년을 마치면’. 그렇다면 70년 이후의 역사는 과연 역사일까요? 70년은 이스라엘이 필히 멸망하기로 작정지은 기간입니다. 따라서 70년 이후에는 역사가 아닙니다. 묵시 혹은 언약이 완성입니다. 그리고 그 상황의 펼침입니다. 멸망하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자신의 조국의 멸망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진정 언약의 나라의 완성을 축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그 안에 역사와 묵시 양면을 다 품고 그동안 작용해 왔던 겁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얍복강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 야곱에게 있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나 인물은 얍복강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야곱이며 이 세상 야곱 외에는 다른 야곱이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밤에 야곱에게 찾아와 야곱의 자존성을 무너뜨립니다. 이때부터 야곱은 스스로 설려는 자생력이 소용없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움직여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장애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사라지고 이스라엘로 바뀐 채 살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실은 야곱도 살아있고 이스라엘도 살아있는 겁니다. 몸은 하나인데 이름은 둘입니다. 즉 두 세계가 육체 안에 공존하는 겁니다. 그리고 야곱과 이스라엘은 동일 인물입니다. 야곱의 세계와 이스라엘 세계는 따로입니다.

이 따로된 세계가 한 육체 안에 같이 중첩되어 있는 겁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이 신기함이 역사 속한 인물을 역사 밖으로 구원해냅니다. 언약의 위력과 능력이 이러합니다. 신약에 와서 보면 더 신기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쉽게 말씀드려서, 분명 십자가 지신 분도 예수님 홀로이며 사흘만에 부활하신 분도 예수님 혼자이십니다. 그런데 사도는 외칩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었을 때 우리 성도도 같이 죽었고 예수님 부활 될 때, 우리 성도도 같이 부활되었다고 말입니다. 에베소서 2:5-에 나오는 말씀이 그 내용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오늘 본문에 나오는 ‘70년 마치고’라는 내용은 그 뒤에 또 다른 역사가 진행된다는 것이 아님을 성도인 자들만 안다는 겁니다.

70년 만이 이스라엘이 망했으면 이스라엘은 그냥 정한 날에 망한 겁니다. 또 다시 이스라엘에 대해서 미련두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언약에 의해서 망했기에 이 망함에 개입된 언약 내부 구조에 눈 여겨봐야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자신이 다시 회생한 약속에 눈독 들이지 말고 말입니다.

망한 민족이 망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야곱은 야곱으로 끝난 겁니다. 또다시 야곱의 회이나 회복을 고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에 바꿨다고 해서 야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라는 역사와 이스라엘이라는 묵시가 중첩, 혹은 공존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나옵니다. “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계 20:5-7)

왜 이 본문에서 첫 번 사망과 두 번째 사망, 첫 째 부활과 둘 째 부활이 나올까요? 그것은 역사에 속한 세계와 역사 밖의 세계가 언약이 완성되면서 적용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겁니다. 그 예가 바로 ‘천년이 차매’라는 표현입니다. 천년 다음에 또 역사가 진척이 될까요? 성도 입장에서는 그것을 남은 역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벌레가 많이 끓는 야외에서 얼굴에 방충망이 달린 모자를 쓰고 일하게 됩니다. 이때 방충망 너머로 바깥 세계가 그대로 다 보입니다. 역사가 계속 진척되는 것으로 보일겁니다. 하지만 그 역사의 세계는 실은 언약의 의미가 완료되었음을 드러내는 세계입니다. 즉 사망과 생명이 중첩된 세계로 확립된 겁니다.

빌립보서 3:10-20에 보면,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의미는 땅 자체에서 이미 철수되었습니다.

모든 땅의 의미는 하늘에 의해서 제공되어집니다. 오늘날 성도가 이런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천상회의를 참여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중의 세계를 품고 있습니다. 그는 미리 세상의 끝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이점에 있어 성도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앞두고 그것을 역사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방충망, 즉 ‘예수 안’에서 마음껏 세상 역사에게 일어나는 느긋하게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되어진 모든 일은 이미 인간 손을 떠나고 하나님에게 넘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상이 언약대로만 진행될 뿐입니다. 골로서새 3:3에서는 성도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3-4) 검찰청이 압수 수색 영장을 법원으로 받아내면서 본격적으로 그 어느 단체라고 수색할 수 있습니다.

이때 검찰직원들이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모두들 가만 있으세요!” 맞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가 새삼 의미를 가마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예수 안에서 살면서 우리에게 달려드는 모든 악한 것들의 최후 발악을 경험하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도 예수님처럼 두 세상의 경험을 파악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