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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25:31-33 / 업무 방해죄 / 240811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25:31-33 / 업무 방해죄 / 240811

정인순 2024. 8. 11. 15:53

 음성 동영상

 

업무 방해죄

 

이근호
2024년 8월 1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5:31-33

(25:31) 요란한 소리가 땅 끝까지 이름은 여호와께서 열국과 다투시며 모든 육체를 심판하시며 악인을 칼에 붙이심을 인함이라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5:32)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재앙이 나서 나라에서 나라에 미칠 것이며 대풍이 땅 끝에서 일어날 것이라

(25:33) 그 날에 나 여호와에게 살륙을 당한 자가 땅 이 끝에서 땅 저 끝에 미칠 것이나 그들이 슬퍼함을 받지 못하며 염습함을 입지 못하며 매장함을 얻지 못하고 지면에서 분토가 되리로다

선지자가 날리는 예언은 듣는 이가 뭘 하겠다고 미리 대비할 수 없습니다. 그냥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때 선지자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그 누구라도 부화가 치밀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언이 우리의 장래를 처참하게 망가뜨리는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전에 우리들의 장래를 조정할 수가 없습니다.

장래를 변경하려고 하면 할수록 예언된 본 내용의 밀도가 더욱 짙어집니다. 오늘 주신 예언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내린 그 예언을 더욱 심화하는 내용입니다. 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즉 “너는 원래 흙이나 화낼 필요없어. 잠시 인간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현상에 불과하고 본질은 여전히 흙이야”라는 겁니다. 이 창세기의 선언이 한결같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염하는 것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시기 위해 급하게 하나님께서 유대나라를 망하게 하십니다. 인간의 마지막 누리는 품위마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겠다는 겁니다.

흙이 흙으로 돌아가는 절차 가운데 인위적인 요소의 가미로 가치가 향상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잠시 인간으로 살게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됨의 요소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식으로 작용하게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흙이 흙으로 돌아가는 데는 인간에게 그만한 이유와 원인이 붙어있다는 겁니다. 이 가미된 원인성을 하나님은 밝혀내시려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이 유한한다고 자부하지만 그 유한성을 기초로해서 무한성에 접촉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무한은 그런 방식으로 무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흙이니 흙이다에 충실해야 한다는 겁니다. 흙이 온전한 흙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면 새로움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만이 유한한 현실을 위하여 자꾸만 과거의 체험을 수집합니다. 하지만 결코 온전한 ‘흙’ 자체는 될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8:20-2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다녀 가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관람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무한 안에 유한한 자를 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 즉 예수님이 하실 기능이 ‘임마누엘’이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시는 ‘유한과 무한의 공존’은 철저하게 인간이 ‘흙’이라는 인식를 견지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이 죽은 흙이 아니라 산 인간이라고 버티면 인간 내부에 담겨 있는 각종 추억과 기억이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움을 훼방하고 증거하지 못하게 합니다. 인간들이 평소에 나는 것은 ‘일관성’ 있는 자기만의 삶입니다.

여기서 ‘일관성’과 ‘비-일관성’과 구분해야 합니다. 일관성이란 인간이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들을 긁어모아 자체적으로 질서를 갖추어 ‘자기만의 현실’, ‘자기만은 인생사’로 구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일관성 안에 담겨 있는 것들은 본인이 모두 설명이 가능한 것들입니다. “저 일은 내가 한없이 감사하고 기뻐했던 일”이라면 계속 되새겨 가면서 추억을 즐기려 할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즉 인간의 질서체계에 담기지 않는 무한 것들이 제공되는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이래 가지고서는 무한에 예속되는 유한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비-일관성’이란 아직 개인의 판단 대상이 되지 못하고, 그런 경우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여전히 질서 밖에 있는 숱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만약 인간이 자신이 ‘흙’으로서 죽어 있고, 그리고 자신이 무한이신 예수님의 손에 놓여 있다고 한다면 수시로 날라다 주시는 예수님의 새로움을 만끽하고 그들을 대외적으로 고백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그것은 내가 안다’로 가로막히지 않게 되는 겁니다. 보통 인간 사회에서 커닝을 하는 것은 바로 ‘업무방해죄’가 성립합니다.

국가에서 공평하게 지적 실력을 겨누는 수능시험장에서 홀로 몰라 남의 답지를 염탐하고 베끼는 것은 ‘국가 시험’의 공정성을 방해하는 바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임마누엘’을 달성하기 위해 말씀과 결부된 사건들을 일으키시는데 그 사건에 대해서 잘못된 해석을 내리게 되면 이는 그 인간은 여전히 ‘자기 일관성’ 밖으로 못 벗어나는 바가 됩니다.

예수님의 일에 대해사 업무방해죄가 성립됩니다. 따라서 선지자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냥 들어라고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말씀 그 자체가 직업 위력을 발휘합니다. 쉽게 말해서 성도를 전적인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그렇게 되면 ‘죄인이기에 뭐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즉 “나는 이런 일을 할 정도로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야”하고 버틴다면 이는 여전히 자기 질서 안에 갇혀 있는 바가 됩니다. 무한하신 예수님이 준비해 놓으신 무한함이 들어서지 못하면 ‘새로움’이 성립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마스 수장을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죽일 때, 분명 그의 방은 포탄으로 폭발했지만 그 현장에 폭탄 말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저 먼 이스라엘에서 원격조정했기 때문입니다. 말씀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깨달랐다고 누구에게 광고할 필요없을 정도로 자신만이 아는 체험입니다. 즉 “과연 나는 흙 맞구나. 흙이 아닌 적도 없고 흙에서 벗어난 적이 없구나”를 하면서 그때마다 예수님의 세계를 경험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따로 나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시도하게 되면 이는 지금도 분주하신 임마누엘의 작업을 방해하는 업무방해죄에 해당됩니다. 매일 말씀에 폭탄에 의해서 흙이 되는 즐거운 파괴의 체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다른 일관성을 지니고 살 때, 저희들은 늘 비-일관성에 노출됨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