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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스바냐 3:14-17 / 무효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바냐

스바냐 3:14-17 / 무효

정인순 2023. 5. 3. 22:43

음성          동영상

 

무효

이근호

2023년 5월 3일                  

 

본문: 스바냐 3:14-17

(3:14)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3:15)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3:16)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곤궁에 빠트리십니다. 그 이유는 다른 민족과 차별되는 점이 어디에 있는 지를 분명히 해두시기 위함입니다. 다른 민족들의 사는 의미와 목적과 기쁨은 그들이 고대하는 바가 달성될 때일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기쁨은 본래 자신들의 의미와 목적은 당연히 상실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에 있게 하십니다.

즉 자신의 기쁨에서 하나님의 기쁨으로 전환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스스로 버텨내려는 모든 시도가 좌절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형벌이요 다른 민족들의 침공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형벌을 제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원수를 내쫓는다고 하십니다.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앞으로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두고 있는 딸로서 구원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한 식구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위력에 무한한 충분히 안심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어떤 적이 온다할지라도 그리고 그 어떤 죄를 행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가족의 직위는 변함이 없게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쁨의 날은 어떻게 오는걸까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매개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께 명받으신 분으로 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매개자가 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최종 목적에 유일하게 부합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왜 사람들은 자신과 하나님을 연결시키는 매개자가 되지를 못하는 걸까요?

요한복음 3:5-7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에 주목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언급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조건부터 먼저 제시한다는 것은 인간은 애초부터 천국은 그 어떤 식으로도 기대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육이기 때문입니다. 육은 시간에 갇혀 있는 꼴입니다. 시간이 주는 저주의 무게에 인간은 짓눌릴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생명나무 과실을 못 따먹은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는 인간의 불멸의 존재가 되지 못하는 조건으로 지상으로 내어쫓겼다는 뜻입니다. 이 지상에서 인간은 살기 위해서 죽도록 일하다가 결국 죽는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시간이 덮쳐진 저주에서 그 누구도 빠져 나가지 못합니다.

육이 된 인간은 스스로 영으로 거듭날 수 없음을 분명합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매개로 하면서 하나님을 끌어당길 수가 없습니다. 매개자는 인간 외에 따로 오셔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내부에 육과 영의 매개구조를 충족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롬 8:3)

그리고 성령으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롬 1:4) 예수님의 육적인 요소와 영적 요소를 연결하는 활동은 이 땅의 사정을 반대로 뒤집어서 천국과 대조되는 양상으로 활동하십니다. 이것을 ‘교환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수학의 덧셈이나 곱셈에서는 항의 순서를 바꾸어서 결과는 동일하게 나옵니다.

3+5=8이 되듯이 5+3=8입니다. 곱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50의 38%의 값은? 38의 50%의 값과 같습니다. 19입니다. 25의 16%의 값은? 16의 25%의 값과 같습니다. 4입니다. 인간들은 천국의 기쁨은 현 이 세상에서 누리는 기쁨의 양을 더 크게 확대해서 상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매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느낌과 이성과 의지를 매개로 하여 천국과 연이 닿고자 상상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육입니다. 육에서 육밖에 안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을 무효로 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 작업자는 오직 예수님만이 매개로 할 수 있습니다.

매가란 이런 겁니다. A=B이고, B=C,이 이면 A=C이다에서 바로 B가 매개가 되는 겁니다. A와 C를 연결하는 고리인 겁니다. 이 땅에서 매개로 오신 예수님은 기쁨은커녕 극한 절망에 돌입하게 됩니다.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즉 예수님은 가차없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습니다.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아들로 오셔서,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3:17) 본인은 큰 슬픔을 겪습니다. 이러한 슬픔은 예수님 자체적으로 부활로 인해 하나님에게 큰 기쁨의 사람이 됩니다.

바로 이 순서를 그대로 자기 가족이 될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적용시키십니다. 누가복음 23:27-29에 보면,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이 자신의 극한 적인 슬픔을 모르는채 자신들보더 신체가 처량하게 된 예수님보다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여전히 육이요 자신의 매개로 하여 하나님에게 접근을 시도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예언되는 되려면 이러한 인간들의 자기 매개성과 자기 영광으로 형편으로 시들어야 합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 40:6-8)

육에서 영이 된 성도는 오직 예수님만 쳐다보며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그 기쁨에 같이 참여하게 된 가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도는 자기 이름은 무효가 되어 새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신부로서 말입니다.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나의 기쁨이 그대에게 있다)라 하며 네 땅을 쁄라(결혼한 여인)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상못한 큰 기쁨은 유일한 매개자 되시는 예수님의 행하심에 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정대은

하나님의 말씀은 스바냐 3장 14-17절까지입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찌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찌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손을 늘어뜨릴 수밖에 없고, 우리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원수들로 인하여 우리가 화를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없는 것과 하나님이 계시는 것의 차이를 누가 증거해야 되느냐하면, 환란 가운데에 있고 두려움 가운데에 있고 적들 가운데에 있고 세상에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그런 가운데에 있는 이스라엘이, 바로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있다라는 것을 유일하게 증거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5절에 보면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범죄케 하셨고 거기에 따라서 결과로 원수들이 이스라엘에게 구박과 어려움과 역경과 고난을 제공하는 상황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조성해 주신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만큼은 더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믿어서는 안된다, 자기자신에 대해서 기대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목적이 내가 사는게 목적이 아니고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는게 우리의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을 이스라엘만큼은 그것을 해내야 되는 겁니다. 그것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해주시겠다는거에요.

하나님께서 특별히 대우해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직접만든 하나의 자식처럼 그렇게 대우합니다. 그게 14절에 나옵니다. “시온의 딸아”, 그 다음에 14절에 “예루살렘 딸아” 자기의 딸로 이렇게 불러주죠. 하나의 가족입니다.

가족은 가장이 지키게 되어있죠. 딸이 자기 가정을 지키고 딸이 그 집안을 책임 지는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있잖아요.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그 딸은 시온이고. 하나님이 책임자고 그 책임자에 의해서 가족으로 생성된 것이 바로 예루살렘이고. 그러니까 이거는 하나의 시온과 하나님, 예루살렘과 하나님이 한 가족입니다.

그 한 가족이 형벌에 처해졌고 원수에게서 포위되고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이것은 곧 뭐냐하면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곧 형벌에 처해졌고 자진해서 고난 속으로 들어왔다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되게되면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만드시는 그 방식이 점점 더 가면갈수록 뚜렷해지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족. 하나님이 진정으로 영원히 함께 있고 싶어하는 그 피조물은 예루살렘, 이스라엘이죠. 시온은 어떻게 만드는가,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비워서 빈 자리를 만들고 그 빈자리가 하나님의 새 창조의 기쁨으로 가득 차는이러한 아이디어를 하나님 쪽에서 먼저 실시가 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은 세상에서 만들어졌지만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창조는, 하나님 안에 하나님 스스로 자기의 빈자리를 만들고 그 빈자리에 하나님의 자기의 딸 자리가 되게 해요. 자기의 식구의 자리가 되게 한다고요.

자기안에 자리하나 더 마련해 주시는 겁니다. 그 작업을 위해서, 이 작업이 본격적으로 완료가 되는, 그 뜻이 다 드러나는 시점이 신약성경인데,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의하면 자기 성도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해 줍니다.

“너 태어난 것 무효로 해줄게”, “네가 이땅에 태어난 것 없던 것으로 해줄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땅에 남자로 태어났든 여자로 태어났든 부잣집에 태어났든 가난한 집에 태어났든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어떤 역경이 있든 순탄했든 상관없이 다 무효입니다. 군에 가서 전방에서 고생하든지, 후방에 집 근처 근무하든지 전부 다 무효입니다. 처음부터 새로 다시. 처음부터 다시 하는거에요.

자 이것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계획을 그렇게 하도록, 모든 것을 무효시키고 새로운 탄생을 제시해 주시는가. 새로운 탄생을 하게 되면 새로 이름을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그 이름에 부여받는 그 이름. 이름조차 이미 정해져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그 아들이 되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요한복음 3장 5-6절에서는 무효가 되고 모든것을 무효시키고 새로만들게 하는 하나님의 그 뜻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예수님께서 기이히 여기게 말을 하셔놓고 “기이히 여기지 말라” 그렇게 하면 우리 인간으로서는 정말 머리 아프죠. “못믿겠습니다.” 당연히 못믿죠. 믿을수가 있어야죠. 주께서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에게 기이히 여길 수밖에 없는 말씀을 하셔놓고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신 것은 너희들은 기이히 여길 수밖에 없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불가능한 일이다. 근데 기이히 여기지 말라는 것은 내가 해줄게. 너희들에게 불가능 한 것을 내가 해 내게 되면은 “아 오직 주님만 쳐다보고 살면 되는구나.” 그렇게 되는거에요.

주님만 쳐다보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주님의 자연스러운 일이 되고 주님의 자신이 맡을 당연한 일이 되지요. 근데 자기 자신을 믿고 있는 사람한테는, 이것은 정말 못 믿겠다. 이것은 있을 수 없다 하고 그런 말을 내뱉은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 밖에 없어요.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고 여기에 방금 요한복음 3장 5절에 다시 보게 되면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어떠한 경우에는 들어갈 수 없다라고 되어있어요. 없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 말을 ‘어떠하면 들어간다’ 라고 하면 인간에게 “난 하늘나라 들어가야지”라는 기대를 할 수 있는데 하늘나라에 ‘어떠한 자는 들어갈 수 없다’라는 말은 원래 인간은 하늘나라를 넘보지 말라는 뜻이에요.

하늘나라는 교회가 만들어 주는게 아닙니다. 그냥 하늘나라는 못 들어가요 사람입니까? 그러면 못 들어가요. 들어가겠다고 마음먹은 자체가 그건 잘못된 겁니다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는 그 자체를 우리는 그 자체가 천국에 방해꾼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방해꾼이에요. 뭔가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요.” 이러면 이것은 불가능성을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주는게 아니고 ,설마 가능하겠지, 온전한 불가능성부터 받아주는게 아니라 넌지시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자기의 구원받을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보는거에요.

이것은 주님을 쳐다보는 자세가 아니고 자기를 쳐다보는 자세입니다. 세상을 보는데 3가지 중심이 있어요 하나는 하나님 중심, 그다음 인 간중심, 그다음에 예수님 중심이 있어요. 하나님 중심 그건 우상입니다. 인간 중심 그것도 우상이에요 왜냐하면 인간 중심은 자기가 태어난 것을 무효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이미 태어난 것을 무를 순 없잖아요. 갈때까지 가보고 할때까지 해 봐야죠. 이건 인간중심이에요 하나님 중심 인간 중심. 그 하나님 중심이란 것이 뭐냐면 인간 중심부터 출발해서 ‘하나님께 잘 보이면 천국 넣어 주겠지’라고 생각하는게 이게 하나님 중심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게 어디 속하냐 하면은 인간 중심에 속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 중심 인간 중심 같은 말인데, 인간 중심이 될 경우에는 어떤 가능성을 내다보기 때문에 자기가 열심히 하게되면 목적은 나중에 온다는 거에요. 그러나 예수님 중심이 되면 목적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이미 이루어졌어요. 잘해보면 뭔가 좋은 결과가 오는 것이 아니고 결과는 이미 십자가 사건 때 이미 완료됐습니다.

막차 지나갔는데 막차 기다리는 그러한 것이 얼마나 헛수고입니까. 막차 끊겼어요. 막차가 방금 오자마자 떠났어요. 그럼 더 이상 버스는 오지 않는 거에요.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백날 기다려봐야 옵니까. 안 와요. 신은 오지 않습니다. 이미 신이 왔다 갔기 때문에요. 그럼 재림은 있지 않느냐. 재림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 밖에서 재림 사건이 터지는 거에요.

인간이 시간 속에서 못 빠져 나옵니다. 마치 얼음장 밑에 있는 그 호숫가에서 아무리호숫가에 빠진 사람이 나가려고 해도 얼음장이 굳게 얼어버리면 못 빠져나오듯이 인간은 시간 속에 갇혀있는 존재에요.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역사에서 영원, 묵시의 세계로 빠져나가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시간에 갇혀있습니다.

인간은 왜 시간에 갇혀있는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왜 영원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과일을 차단시켜놔서 그래요.생명나무 과일을 차단시켰습니다. 그래서 생명나무 과일을 차단시킨 그 결과가 뭐냐. 창세기 3장에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이 땅에서 죽도록 살아남으려고 죽도록 일하다가 허리나가고, 어깨나가고, 죽도록 고생하다가 결국 소멸합니다. 흙이 되죠. 시간에서 못 빠져나갑니다.

여러분 가끔 연세가 많이 되더라도, 가끔은 이렇게 재래시장 같은 곳을 보게 되면 그 풍경이 어릴 때 10살 때 아버지 손잡고 봤던 그 풍경이 그대로 보여요. 게다가 가판대에 있는 테이프파는, 요새는 안 팔지만, 음악에서 옛날에 7080 노래 쓱 나오면 자기가 휙 지나갔던 그 아줌마가 자기 10살 때 봤던 기억나는 아줌마의 옷차림으로 쓱 가버리면 마치 그 순간 자기는 10살 때 기억이 확 돌아와요.

그 후에 오후 2시쯤 돼가지고 시장통에서 아줌마가 채소 팔면서 꾸벅꾸벅 조는거 있잖아요. 조는 모습 보면 이게 어릴 때도 그랬어요. 어릴 때 시장 가도 조는 아줌마가 있었어요. 그렇다면 뭐냐하면 세상은 달라졌다 달라졌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없어요. 그리고 그것은 내가 늙어 죽은 이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에요.

모두 다 시간 속에 갇혀있습니다. 빠져나갈수가 없어요. 그래서 여기 오늘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6절에서 오늘 스바냐 본문과 관련해서 우리가 알아야 될것은 뭐냐하면 인간으로서는 못합니다. 육에서 영이 될 수가 없어요. 육에서 영으로 거듭나게 인간은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요. 모르는데, 주께서는 그걸 육에서 영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을 해 내십니다.

그걸 스바냐 본문을 통해서 연관을 지어서 어떤 식으로 주께서 이 불가능한 육인데, 시간 속에 갇혀있고, 영원히 파멸되어야 될 육인데 어떻게 육이 영으로 거듭날 수 있는가? 방법은 무엇인가? 그 방법이 스바냐에 나옵니다. 그게 뭐냐하면 “시온의 딸아 노래할찌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찌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말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한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육에서 영이된 사람이다 라는 뜻이에요.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찌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그다음에 그 17절 끝에보면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게 뭐냐하면 하나님께서 새로 만들어낸 자기 식구 딸, 새로운 백성을 만들 때 어떤 요소를 집어넣냐 하면은 그 백성들이, 성도죠, 영에서 육이 된 성도, 성도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기쁨에 주체를 못하는 모습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는 거에요.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게 하시고” 이 말이 뭐냐 17절에 나오는데, 그러한 성도는 자기에게 구원을 베푸신 그 구원의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큰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과 같이 기뻐할 때 그 사람이 바로 성도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고 육에서 영이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근데 문제는 이것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해야 될탠데, 인간들은 아무리 기뻐하려 해도 인간들은 이런 기쁨이 생길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자신의 육신이 시간에 갇힌 육신이 시간 속에서 후패하고 썩어가고 노쇠해가고 아프기 때문에 그래요. 기뻐하고 싶어도 이 아프면 못 기뻐하잖아요. 팔 아프면 못 기뻐하죠.

그래서 인간은 이 기쁨을 예상도 못하고 상상도 못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안돼는 것을 어떻게 하는가? 두 가지 법칙을 말씀드릴게요. 하나는 예수님이 하나의 매개가 된다는 것, 두 번째는 하나님이 그 매개를 교환법칙으로 사용해버린다는겁니다. 첫 번째. 매개라는 것은 이런거에요. ‘A=B, B=C가 되면 A=C다’ 라고 할 때 그 중간에 들어갔던 B를 매개라고 하는겁니다. 연결고리. 매개라 하는겁니다.

친구 만나서 카페에 갔는데 “너 뭐 좋아하지?” “카푸치노” “오 나도 카푸치노. 야 우리가 이제 기쁘게 이야기하자” 자, 여기서 두 친구가 마음을 더 단단히 연결된 그 매개가 뭐냐? 카푸치노에요. 매개가 될 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매개로 보내었습니다. 매개를 볼 때 그 보낸 매개자가 육도 갖고 있고, 영도 갖고 있고 두 가지 요소가 다 들어있어요. 그래서 예수님 자체 내에서 예수님 자체가 매개가 되어서 자체 내에서 육과 영을 연결시키는 분으로 이 땅에 오신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 중심도 아니고 인간중심도 아닙니다. 이것은 뭐냐 인간은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도 그 매개자가 아닌 하나님은 하나님도 아니고,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매개가 되어서 하나님께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제가 열심히 성경 공부 했잖아요”, “열심히 기도 했잖아요” 이건 안 됩니다. 예수님만이 매개자가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서 육도있고 영도있고 둘 다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거든요. 오늘 본문에 보면 “네가 형벌을 제하여” 하는데 형벌을 제한다는 말은 형벌이 있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은 죄 있는, 형벌이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어요. 그래서 육의 형벌도 있어요. 나중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면 하나님의 부활의 영도 있어요. 그게 매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매개가 될 경우에 이 매개가 우리한테 그러면 어떤 식으로 적용이 되느냐. 우리는 그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왜 인간은 자기를 매개로 사용하기 때문에 자기 행함 외에는 믿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복음을 해도 나는 그것이 안 믿어집니다” 라는 말을 할 때 이것은 그분은 지금 무엇을 모르고 있느냐 하면, 자기 믿음을 거부하고 믿는게 되는데, 그게 아니고 이미 자기는 자기를 이미 믿음의 대상으로 꽉 차 있어요. 자기가 자기믿는 것 밖에 들어있지 않아요. 그것 가지고 예수를 믿으려 하니까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자기 자신을 자기가 받아들인 것이 돼요.

말이 어렵습니다만은 생각해보면 간단하잖아요. 이미 믿는 구석이 있잖아요. “아 예수 믿으려고 하니 잘 안되네” 이 뭐냐하면 지금 본인이 본인을 믿고있는 거에요. ‘잘 된다, 안 된다.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를 본인이 행한 것 가지고 쳐다보고 있는거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예수님께서 중보자로 십자가를 져도 인간은 그걸 마중 나올 때 인간은 자기 믿음을 가지고 마중 나오기 때문에 이거는 아무리 예수님이 중보자라고 해도 중보자가 누구냐, 본인이 중보자에요. 본인이 본인 구원받는 매개자 역할을 하는거에요. 내가 이렇게 예수 믿었잖아요. 이게 매개가 되는거에요. 자기자신한테.

불가능해요. 그러면 여기서 이 불가능한 것에 준비된 것이 뭐냐, 교환법칙이에요. 수학에서 더하기나 곱하기는 교환법칙이 통해요. 3+5=8, 5+3=8 바꿔도 똑같은 8이 되는겁니다. 이건 곱하기도 마찬가지인데요. 제가 문제 낼태니까 빨리 맞춰보세요. 50의 38%가 얼마죠? 이거는 어떻게 하느냐하면 이걸 바꿔보는거에요. 38의 50%는 얼마? 19

바꾸는거에요. 응용문제 하나 더 들어갑니다. 25의 16%는? 4입니다. 16의 25%. 이게 바로 교환법칙이에요. 인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나가려고 하는거에요. 이게 시간에 갇혀서 그래요. 근데 주님은 매개로 오셔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미래에서 과거로 가시는 매개로 우리에게 찾아 오시는겁니다. 미래에서 과거로. 그러니깐 인간은 내가 지금 자기 몸에 기쁨이 있잖아요. 기쁨이 있어서 이걸 뭐라고 설명하느냐 하면 “지금 아무리 기뻐도 천국에 있는 기쁨 보다 못할 것이야. 지금 내가 이렇게 기쁘지만, 천국 가면 더 기뻐할 것이다.”

이것은 뭐냐하면 과거, 현재 나의 기쁨에서 시작해서, 미래의 기쁨으로 그 정도를 더 키우면 미래에 큰 기쁨이 오리라고 생각하는거에요. 그거는 틀렸습니다. 그거는 주님의 매개되심을 완전히 거부하는거에요. 오늘 본문에 스바냐 3장에보면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아 전심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지라. 이건 미래의 기쁨이에요. 이 미래의 기쁨은 인간이 미래의 기쁨에 다가설 수가 없습니다 왜. 인간은 본인이 알고 있는 본인이 느끼고 있는 감정 그게 내 구원의 매개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이 될 수 없는 미래의 기쁨을 위해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어떻게 몰아 세우느냐 하면 극한 슬픔으로 몰아넣어요. 슬픔으로. 자기를 믿던 자기 자신을 기대했던 모든 기쁨은 그것을 완전히 날아가게 만들어 버려요. 자기에게 은근히 기대하고 자기 어떤 행복을 기대한 것을 완전히 바닥나고 좌절시켜버리는 극한 슬픔으로 몰아넣습니다. 그건 왜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예수님은 극한 절망에 빠졌어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극한 절망에서 사흘 뒤에 극한 기쁨으로 바뀌었잖아요. 이걸 매개자. 이렇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 매개자에요. 그 매개자가 우리의 시간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덮쳐버립니다. 그러면 50의 38%는 38의 50%로 바꾸면 되거든요. 극한 슬픔에서 극한 기쁨으로 바뀌는 것이 예수님이 준비한 기쁨이라면, 거꾸로 예수님께선 극한 기쁨으로 오셔서 극한 슬픔으로 들어가시는 선재적 조치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 23장 27절에서 30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셨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절망에 이르는 것이고,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일생을 죽이시는 일생으로 만들어버렸어요. 그냥 죽는게 아니고 아버지께 버림받는 것이에요. 갈 때 옆에 27절에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누가복음 23장 28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내가 너희들을 극심한 슬픔 속에, 절망 속에 내가 빠트려줄게.

지금 이 아줌마들이 예루살렘 아줌마들이 주님을 동정해서 슬프다고 우시는데 그거는 뭐냐하면 그 배경에는 자기 자신의 형편보다 못해서, 예수님이 못해서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거에요. 우리는 이렇게 멀쩡한데 저 착하신 예수님은 저렇게 완전히 망가지는구나 저럴 분이아닌데. 이렇게 우는 거에요. 근데 주님께서는 이걸 어떻게 하느냐. 매개로 와서 교환법칙을 적용시켜가지고 이걸 바꿔버리는겁니다. 너희들이 지금 동정할 처지가 아니다. 나를 위해 울어? 너희들 지금 그런 사고방식 같으면 나를 위해 우는 것 보다도 너희 딸들을 위해 울어라.

지금 그들이 예수님에게 눈물 흘릴 때는, 자기 딸을 잃어서 흘린게 아니잖아요. 자기 딸을 잃어서 흘린게 아니잖아요. 지금 자기 딸들은 멀쩡하다고요. 집에 있는 자기 딸들은. 동정의 눈물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들이 그 예루살렘 여인들이 아직도 본인이 경험해야 될 극한 절망과 극한 슬픔에 지금 도착하지 않았다는, 도달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극한 슬픔에 도달 안 하니까, 그들은 뭐냐? 약간이라도 지금 이 슬픔이 극복되고 천국의 구원의 기쁨이 은근이 고대하고 기대하는 그런 희망을 가능성을 품고 있는 거에요. 이것은, 이것은 육입니다. 이것은 영이 아니에요.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갈수가 없습니다. 제가 한 말이 아니에요. 주님이 하신 말이잖아요.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는 말은 왜, 이유가 뭐냐하면 육이기 때문이에요. 육이 천국에 못갑니다. 육이 백날 몸부림치고 애쓰고 나대고 교회 다니고 해봐도 이게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그럼 어디가야되느냐, 육이 품고 있는 하나님 보시기에 육이라는게 어느정도로 절망적이고 얼마나 큰 슬픔을 당해도 싸다 그 느낌까지 가야죠. 자기에 대해서 어떤 기대도 없이 완전히 좌절 되어버려야 돼요. 근데 인간이 노력해서 스스로 좌절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좌절된 순간에는 약간의 희망을 갖거든요. 그래서 주께선 도와주시겠지. 일곱 번 자빠져도 여덟 번 일으켜 주시겠지. 이거는 육이에요. 어디까지나 육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응답하시겠지, 중보기도 했으니까. 이건 육이라고요.

예수님이 말합니다. 너희들이 지금 너희들이 내가 십자가 지니까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데 너희들이 십자가를 알아? 너희들이 사랑하는 너희 딸을 한번 잃어봐라. 너희 딸을 잃는 그 절망감과 그 탄식. 그것도 내가 십자가 지는 아픔보다는 그거는 비교도 안된다는 거에요. 이 말은 뭐냐하면 육으로된 인간이 십자가를 어떤 노력을 해도 십자가를 믿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29절에 누가복음 23장 29절에 보면,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얼마나 소위 자식 있다는 단지 그이유 때문에 아픔이 더욱더 가중되는 사태를 내가 의도적으로 일으킬 거다, 이 말입니다. 차라리 자식 없이 어린애 없는 가정이 훨씬 행복하고 부러울 지경으로 내가 만들어 줄게. 절대적인 절망이죠. 완전히 깜깜한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거에요.

이게 바로, 매개되시는 연결고리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 육이라는 이유 때문에 해내지 못하는 것을 육과 영의 매개로 오신 분이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 ‘저’라는 단어에다가 우리 자신의 이름을 다 집어넣어란 말이죠. 다 통틀어 다 집어넣어야 돼요.

하나님이여. 이렇게 저를 버리시는군요. 근데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가 여러분 낯설게 여겨선 안돼요. 왜냐면 이미 말씀을 통해서 이게 다 주어졌거든요. 이사야 40장 6절 8절에보면 이런말씀이 나옵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이 말은 육체에서 아름다움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육체에서 아름다움이 마음껏 활짝 필 수가 있다는 거에요.

육체에서 역도 선수가 매달 딸 수 있고, 육체에서 손흥민이가 공차고 돈 벌고 할 수 있어요. 주식 투자해가지고 수십억씩 사기 쳐서 돈 벌 수 있습니다. 육체지만 얼마든지 호사스럽게 살고 맘 부러운 듯이 영광스럽게 살고, 남에게 부러움 사고 출세, 영광 누릴 수 있어요. 육체가 그렇게, 육체에서 꽃이 피고 풀에서 꽃 피듯이 우린 육체지만 아름다운 꽃이 필 수 있습니다.

그 우리는 그걸 기쁨이라 하고, 세상 사는 보람이라고 하고, 내가 이 맛에 산다고 우리는 마음껏 외칠 수 있어요. 애가 학교갔다오면, “엄마 또 100점 맞았어”하고 그렇게 자기의 아름다움을 묘사할수 있습니다. 한데, “모든 육체는 풀이요 아름다운 들의 꽃 같으니.” 꽃이 있다 이 말이죠.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예언을 예언답게 하기 위해서 어떤 절차가 경유 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인간은 육체적으로 피어있던 모든 것들은 모두, 모두 저주 받아져야되는 절차가 꼭 필요했던거에요. 말씀이 말씀답게 피어나기 위해서는.

“목사님 왜 그렇게 인간에대해 절망적으로 얘기하십니까?” 하신다면 오늘 설교 초반을 안 들어서 그래요. 초반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은 이 육신의 오는 아름다운 기쁨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매개자라 하신 주님의 하신 일에 그 기쁨을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그 기쁨으로 살게 해야 이것이 하나님의 가족이다’라는, 시온의 딸이고, 예루살렘의 딸이다 이 말입니다.

그게 영적인 딸이에요. 그래서 주께서는 우리의 이 땅에 태어난 삶을 무효화 시켜준다는거에요. 무효. 이 얼마나 여러분 이게 우리 일평생 한평생 살아온 것 기쁘지 않습니까? 참 군에 가서 고생 많이들 했지요. 많이 했잖아요. 고생하면 뭐합니까, 무효인데. 어디 방위 출신이냐 현역이냐. 방위입니다. 그것도 해병대 나왔습니다. 무효. 절반도 아니에요. 무효. 한판도 아니야. 그냥 무효. 유도(운동)하는 것 아니지만.

우리가 평생 거기 사진첩에 있던 모든 것은 다 무효. 오늘 설교 제목은 무효. 열심히 노력하고 성금하고 봉사 충성 전도하는 것 무효. 그것은 은근히 내 육이 잘될 어떤 아름다움과 영광을 꼼수로 뭔가를 노리는 꼼수와 요령에 불과한 겁니다. 우리 가족 잘되는 것. 그것 다 무효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들어가는 것은 말씀이 서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예언대로 스바냐 예언이 예언대로 될 때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예언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그 예언이 이사야 62장에 나옵니다. 새로운 이름을 줘요. 이사야 62장 2절에서 4절 보기 전에 오늘 본문 스바냐 다시 한번 보게되면 여기서 15절에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이렇게 되어있죠. 왕이 나와요. 새로운 왕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왕이라 하는 하나의 개인을 말합니다. 개인, 개인적으로 아는 인생의 기쁨 같은 건 무효로 돌리고 나라는 개인 말고 내가 매개자가 아니니까, 매개자 되신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이루시는 일이 우리가 상상도 못할 큰 천국의 기쁨을 주는거에요. 그것이 이사야 62장 2절에 나옵니다.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새 이름을 부여받습니다.

강원도 정선군에서 관광객을 모으기 위해서 이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냈답니다. 우리나라에서 정선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는 정선 군민 대접을 해서 관광지에 30% 할인해준다 이랬어요. 이름을 정선이란 이름을 가진 김정선 최정선 박정선 이름가진 사람을 정선 군민 대우해준다는거에요. 여기 주님께서 이름을 뭐로 바꾸냐 하면은 새 이름을 줘요. 예수님의 이름을 줍니다. 주의 이름이 매개자이니까요.

우리 이름은 무효에요. 경주 김씨고 뭐 안동 권씨고 다 무효입니다. 무효가 되고 새 이름을 부여받게 되면 그다음에 새 이름이 되면 너는 4절에 보면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였다 하는 말은 제발 좀 네가 너를 버려야 된다는 뜻이에요. 나는 너를 버리고 싶어라 이런 뜻이에요. 버리고 다시 새 이름으로 되찾는 겁니다. 물론 매개자이신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죠. 그러니깐 성도는 주님만 쳐다보는거에요.

“오직 너를 헵시바”, 헵시바가 뭐냐하면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라는 뜻이에요. “하며 내 땅을 뿔라”, 뿔라가 뭐냐하면 결혼한 여자라는 거에요. 하나의 가족이 되는거에요. 그래서 4절에 “내 땅에 결혼한 바 될 것이라 마치 청년이 여자와 결혼함같이 내 아들들도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이 모든 예언은 우리 육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육과 영의 매개자로 오신 주님께서 이 땅에서 전혀 영광스럽지 않은 비참한 이 땅의 모습으로 오신 그분이에요. 그래야 교환법칙이 되니까요

매개를 중심으로 비참하게 오셔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시는거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쁨과 영광을 취하는 것은 절대적 절망으로 빠져야 되고요. 그러면 우리는 절대적 절망으로 빠지는 방법이 뭐냐. 나를 생각 안 하면 돼요. 주님만 생각하면 되는거에요. 내가 어디 몸이 아프다 내가 뭐 어떻다 내가 가난하다, 내가 참 희망이 하나도 없다. 절망적이다. 절망적이다를 생각 안하면 되죠.

왜냐하면 목적은 주님의 손에 넘어가 있으니까, 나의 법적 근거가 이미 주님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졌기 때문에, 나의 존재의 근거가 육이 근거가 아니고 주님이 나의 근거가 되니까 그때부터 뭐냐하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큰 기쁨이고 내가 인생 망가지면서 무효가 되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큰 기쁨이 되는거에요.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주님이 다 이루었다는데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주께서 우리를 신부로 맞이해주는 일을 예수님 홀로 다 이루어 이미 이루어 내셨고 그 이루어 내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내가 나를 의지하는 것을 계속 매일같이 그것을 삭제하고 무효화 시키는 작업을 매일같이 해주는 거에요. 자꾸 이땅에 희망을 걸면 희망을 좌절시켜요. 어차피 희망해 봐야 들에 꽃 같아서 그거는 사그라질꺼니까 기대하지말라고 무효화시키는거에요. 그러면 차떼고 포떼면 다 빼면 주님하신 일만 쳐다보면 되는겁니다.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내가 너 하나 육에서 네가 안 되는 영을 건졌던 이 기쁨에 너도 같이 참여하면 그것이 바로 성도인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매개자로 오셨고 교환법칙에 의해서 영광스러운 분이 비참하게 사람에게 인기없는 분으로 밉상받는 분으로 오신 것도 하나의 하나님이 일구어내신 교환법칙인 것을 이제는 저희들이 알고 너무나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