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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스바냐 3:6-8 / 질투에 의한 심판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바냐

스바냐 3:6-8 / 질투에 의한 심판

정인순 2023. 4. 20. 11:10

http://media.woorich.net/%EC%84%B1%EA%B2%BD%EA%B0%95%ED%95%B4/%EC%8A%A4%EB%B0%94%EB%83%9023/%EC%A7%88%ED%88%AC%EC%97%90%EC%9D%98%ED%95%9C%EC%8B%AC%ED%8C%90230419.mp3

 

질투에 의한 심판 

이근호
2023년 4월 19일                   

 

본문: 스바냐 3:6-8

(3:6) 내가 열국을 끊어 버렸으므로 그 망대가 황무하였고 내가 그 거리를 비게 하여 지나는 자가 없게 하였으므로 그 모든 성읍이 황폐되며 사람이 없으며 거할 자가 없게 되었느니라

(3:7)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거니와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3: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한과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나라들을 소집하며 열국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질투란 필히 ‘배제’를 동반하게 됩니다. 사랑에서 나온 질투는 내 사람이 아니라면 단호하게 밀어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런 질투심에서 비롯된 겁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람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다는 뜻입니다. 극진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이사야 43:10-13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과연 태초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그런데 연이어 나오는 이사야 43:14에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등장합니다. 그 나라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일방적 사랑으로 인하여 단호하게 배척받는 대상이 됩니다.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으로 자기들의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즉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절 내내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을 나란히 대비시켜오고 계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의한 구원은 인간의 행함에 있지 않고 일방적인 하나님의 질투어린 사랑에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오늘 스바냐 예언 속에서도 분명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다른 나라와 달리 특혜를 언급하십니다. “너의 거처는 끊어지지 아니하리라”(7절)

하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은 몽땅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의 일방적 배려를 알지 못하고 더럽게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을 모르는 자는 버린다’는 하나님의 일관된 심판 원칙에 준해서 마땅히 이스라엘도 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질투어린 사랑의 대상을 여전히 나타나야 합니다.

이방나라도 망하고 이스라엘도 망한 그 마지막 심판 지점에서 시간을 거꾸로 돌렸다고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의 질투성이 처음 시작한 시점을 찾아보는 겁니다. 그곳은 처음 창조되기 이전부터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무로부터 아무 것도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모순은 이렇게 해결됩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되어야 하기에 모든 창조된 것들은 다 사라지고 무너져야 한다는 겁니다. 즉 창조된 것들은 ‘창조 안’에서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는 겁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4)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오직 예수님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빼놓고 다 배격당해야 합니다. 배격하는 하나님의 행위 자체가 예수님에 대한 질투어린 사랑의 행위입니다. 오직 단일적인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빼놓고 모든 것을 단일화시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모든 세상 나라들입니다. 열국이요 열왕들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43:14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거론하면서 하나님께서 바벨론 나라를 배격되어야 상대자로 정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벨론의 위상은 이러합니다. “왕이여 왕은 열왕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인생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무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붙이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금머리니이다

왕의 후에 왕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셋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철 같으리니 철은 모든 물건을 부숴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철이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숴뜨리고 빻을 것이며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철의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그 발가락이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숴질 만할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인종과 서로 섞일 것이나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철과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단 2:37-43)

그런데 이 단일화된 인간 국가는 하늘에서 날아온 돌 하나에 다 무너집니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단 2:35) 국가란 최고, 즉 ‘아버지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권력의 자리를 정점으로 하여 통합되어 있는 공동체입니다.

이 최고 권력이 작용하는 자는 나름대로 심판하는 자리요 재판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 단일화된 국가 권력에 의해서 심판하는 그 자리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들의 모든 행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적용시키는지를 마지막 때에 폭로시키기 위함입니다.

즉 모든 인간들의 행함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동기로 움직인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사람을 재판했고 심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재판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원으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재판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인간들의 행함이 하나님께서 인정한 행함이라면, 그런 인간에게 재판받은 예수님은 결코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지를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내린 판결이 옳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케 하심으로서 인간들의 모든 행함은 참된 하나님에 대해서 적대적 태도를 지니고 하나님마저 심판하는 의도를 품고 있음이 발각당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 때에, 인간의 행함, 곧 적대적 태도에서 못 벗어나는 그 행위를 문제삼아 마귀가 들어가는 영원한 지옥불에 집어넣습니다.(계 20:13)

반면에 일체 행함을 문제삼지 않고 단지 예수님의 생명책에 명단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영생을 주시는 심판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5) 이 생명책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거룩의 일관성에 즐겁게 참여한 자들입니다.

즉 날마다 자신이 자신을 구원하는 아이디어가 제거되고 지워지는 것에 감사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생명책에 들어있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십자가 사건 앞에서 더는 자신의 행함에 의미두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강-스바냐 3장 6-8절(질투에 의한 심판)2304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바냐 3장 6-8절까지입니다.

스바냐 3:6-8

“내가 열국을 끊어 버렸으므로 그 망대가 황무하였고 내가 그 거리를 비게 하여 지나는 자가 없게 하였으므로 그 모든 성읍이 황폐되며 사람이 없으며 거할 자가 없게 되었느니라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거니와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한과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나라들을 소집하며 열국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두 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모든 열방을, 열국을 끊어버린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다 심판해 버린다.’ 그 사실 하나하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벌할 때까지 너를 지켜주려는 의도가 있다.’

문제는 그런 의도를 알지 못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너희에 대한 그 사랑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하니까 내가 너희도 역시 멸망해 버리겠다, 라는 겁니다. 멸망할 때 다른 나라들을 다 소집해서 집중적으로 내 나라 내 백성을 멸망시키겠다, 그 내용으로 두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그렇게 멸망시킬 때 멸망시키는 그 이유가 뭐냐? 8절 끝에 보면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온 땅이. 열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나라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의 질투심에 의해서 하나님의 분노에 의해서 소멸된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모든 심판이 다 되어버린 지금 이 마지막 시점에서, 심판이 시작되는 그 시점부터 해서 시간을 거꾸로 돌려보는 거예요. 시간을 거꾸로 돌리면 우리가 지금 심판받고 있는데 심판받는 이유, ‘도대체 어디서 잘못되어서 심판받지?’ 하고 필름을 거꾸로 돌려보면서 심판받는 이유를 거기서 찾아보는 거예요.

찾아보게 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아, 하나님의 질투심이라는 것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구나.’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질투심이라 하는 것은 일방적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그 사랑에 의해서 배제되는 자들과 구분시키는 그것, 구분시킬 때 질투심이라는 것이 거기에 적용될 수가 있어요.

한쪽을 일방적으로 편애한다 할 때, 한쪽을 일방적으로 편애한다는 말은 다른 쪽을 배제할 때 그냥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 질투심을 가지고 강력하게 밀어내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사이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질투했다, 질투하고 계시다, 분노의 질투심,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질투심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했기 때문에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 인간 쪽에서 심판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심판이기 때문에 우리의 잘잘못과 우리에 대한 심판은 연계성이 없다, 연관성이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님의 질투심, 주님의 일방적 사랑을 빼버리면, 빼고 만약에 심판을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가정이 어렵고 내 몸이 아프고 일이 잘 안 되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의롭고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네가 깨끗지 못하구나, 네가 내 앞에서 더럽게 행동하는구나, 맴매 해야겠어, 맞아야 되겠어, 한다.’

이렇게 해서 매를 때리면 우리 쪽에서는 준비된 것이 있어요. ‘앞으로 잘할게요. 나쁜 일보다 착한 일 더 많이 하겠습니다. 착한 일 한 것, 나쁜 일 한 것, 더하기 빼기 회계처리 해서 착한일이 좀 많이 남아 있거든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여분의 것으로 착한 것이 많이 남는 그 순간에 그 타이밍 맞춰서 죽게 된다면 우리는 착한 것이 많다는 그 이유 때문에 지옥가지 않고 천국갈 수 있는 멋진 기회가 되리라.’ 이렇게 생각하지요.

어떤 경우에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질투심이 빠져 있을 때는 그렇게 선악구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질투심이 개입되어버리면 우리 쪽에서 생각했던 그 심판의 기준 같은 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소용이 없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질투를 하실 때 한쪽을 일방적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받지 않은 것은 일방적으로 배제하겠다는 뜻에서 질투라는 말을 사용했잖아요. 그러면 배제당하는 자는 누구고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그 자는 누구냐? 이것만 우리가 캐치하면 오늘 이 문제는 깔끔하게 해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깔끔하게 결과가 된 그것을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무로부터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창조 때 하나님은 무, 없음으로부터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창조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통해서 무엇을 드러내려고 창조했는가? 하여튼 아무것도 창조된 것은 없어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 모든 것이 창조된 겁니다. 말장난 같지만 한번 이어보세요.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창조 때 무로부터, 아무것도, 없음으로부터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무엇도 없어진다 할지라도 창조된 것들이 ‘왜 하나님이 우리를 지워버립니까? 우리를 왜 심판합니까?’ 이렇게 대들 근거는 없어요. 하나님은 창조 때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데 창조한 것은 분명히 있지 않느냐? 창조된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만들어진 모든 것은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심 많은 사랑으로 인하여 이 모든 것이 무너져야 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무너지기 위해서, 없어지기 위해서.

그게 히브리서 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10절에 보면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분명히 하나님께서 창조해서 지은 게 있지요. 11절에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자, 그것들은 멸망해야 되는데 멸망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말은, ‘그들이 창조되어서 있어야 될 목적으로 창조된 적 없다.’ 그 말이에요. 네가 있어야 된다는 목적으로 창조하지를 않았기 때문에 주께서는 창조할 때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창조한 이유가 뭐냐? 11절 계속 보면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창조된 것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그렇게 되어 있어요. 낡아진다, 없어져야 된다. 왜 그러냐?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예수님만 질투심으로, 강력한 질투심으로 사랑을 하셨습니다. 사랑하기로 창세전에 이미 결정해 놨어요. 그러면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랑 외에는 주님의 질투심으로 배제되어야 되는 거예요. 제거되어야 되는 겁니다.

자료에 의하면 현재 이 세상에 만들어진 국가의 개수가 228개에요. 그런데 우리는 228개라고 알고 있지만 성경에서는 어떻게 보느냐 하면, 한 나라로 봐요. 단일적인 오직 하나의 국가로 보는 겁니다. 왜 이 국가들을, 228개의 나라를 단 하나로 보느냐? 그리고 아무리 그 숫자가 늘어난다 하더라도 이미 하나님께서는 확정지었어요.

자, 설교를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심판하셨다 하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뭘 알아야 되는가? 심판하는 이유를 알아야 되지요. ‘심판하시려면 하세요.’ 하면 안 되고 심판하는 이유를! 심판하는 이유를 알려면, 그전까지 뭔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심판은 모든 것을 없애거든요.

오늘 본문 6절에 “그 모든 성읍이 황폐되며 사람이 없으며” 사람이 없다고 되어 있어요. “거할 자가 없게 되었느니라.” 없다, 없다, 고 되어 있어요. 없다는 것은, 없어졌다, 사라졌다, 이 말이거든요. 하나님의 심판은 있는 것도 없애버립니다.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이 심판이라면 그 있게 되어야 할 그 무엇, 있다면 있어야 될 이유 또는 없어야 될 이유, 그 이유를 알아야 돼요. 그 이유를 알려면 도대체 어디서 잘못되었는지를 심판 때부터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거예요. ‘어디서 잘못 됐나? 어디서 잘못되었지?’ 보니까 오늘 본문 8절에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나의 질투.

‘아,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소멸될 것이 소멸되어야 하는구나.’라고 나아가는 겁니다. 이 말씀을 제가 드리면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교회? ‘이 교회 다녀서 하나님 잘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잘 살면 하나님이 죽고 나면 천국 보내주는 것은 그것은 기본이고, 보너스로 우리 집안 잘되고 자식 잘되고 교회 부흥 잘되고 그 잘된 것들이 모아져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게 뭐 신앙이지.’ 그래서 성경말씀이 이야기하면 듣는 대로 따박따박, 꼬박꼬박 잘 지키고 지키면 하나님께 영광되고 우리는 복 받아서 좋게 이게 신앙이라는 겁니다. 이게 신앙 아니라, 하는 사람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스바냐 예언에 의하면 이 본문을 제대로 아는 사람에게 제가 묻습니다. 신앙이 뭐지요? “신앙은 내가 사라져야 될 이유를 아는 게 신앙입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나오거든요. 우리가 사라져야 될 이유가 뭐지요? 한번 더 물으면 “하나님은 주님만 사랑하기로 했기 때문에 우리는 배제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우리 집사님의 가족은요? “가족도 사라져야 됩니다. 그냥 사라지지 말고 아파서 사라져야 됩니다.” 그러면 집안은요? “우리 집이 2층집인데 풍지박산이 되어서 거할 곳이 없어야 됩니다.” 그게 신앙이잖아요, 그게! 그게 신앙이잖아요. 참……, 심판하기로 이미 작정이 되었으면 심판하는 이유를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자꾸 버티지 말고, 억지 부리지 말고. ‘남들은 심판해도 저는 구원해주세요.’ 이렇게 나오지 말고.

심판하는 이유는 예수님에게만 모든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에 다 꽂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꽂혀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단일성이지요. 예수님 한분에게 모든 사랑이 가기 위해서는, 주님의 단일성을 부각하기 위해서는 배제되어야 될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하나의 단일성으로 만들었는데 그게 뭐냐? 단일국가에요.

그 단일국가가 어디에 나오느냐? 다니엘 2장 36-43절에 나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시지요. 계시를 주는데 다니엘이 옆에서 해석을 했어요. 해석을 할 때 “왕이시여, 당신은 모든 단일국가의 단일적인 왕이십니다.” 이것부터 나오는 거예요.

“그 꿈이 이러한즉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진술하리이다 왕이여 왕은 열왕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인생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무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붙이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

그리고서 하는 말이 “왕은 곧 그 금머리니이다 왕의 후에 왕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세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왕 다음에 당신보다 못한 왕이 등장하는데 그게 은이고, 셋째로 놋 같은 나라가 등장하고, 그 다음에 40절에 “네째 나라는 강하기가 철 같으리니 철은 모든 물건을 부숴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철이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숴뜨리고 빻을 것이며” 철 다음에는 뭐냐 41절에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을 보셨은즉” 라고 했는데 여기서 발가락이 뭐냐 하면, 철과 진흙의 혼합체가 발가락으로 되어 있어요, 발가락.

발가락으로 되어 있고 여기서 왕을 가지고 그냥 금이라 하지 않고 ‘금 머리’라고 되어 있어요. 머리부터 발가락까지, 마지막 심판 때부터 필름을 반대로 돌려버리니까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인간들의 역사가 복잡다단하고 굉장히 혼란스럽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주 단출해요. 그 모든 나라가 오직 단일국가안의 단일성으로 통합되어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머리 나타나고 발가락 나타나면 다 나타난 거예요. 하나의 우상이었던 겁니다. 한 나라였던 거예요. 그런데 그 나라가 멀쩡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 발가락에 돌멩이가 날아온다는 그 대목이 나와요. 그 돌멩이가 날아와서 발가락을 쳐버리면 그 우상의 무게중심이 발쪽에 있으니까, 발을 쳐버리니까 그게 종말이거든요, 종말 때 그 머리에서 삐져나온 발을 쳐버리니까 어디도 완전히 뭉개지고 사라져 버리느냐 하면, 머리 쪽도 완전히 박살나 버리는 거예요.

마지막 때 인간나라 칠 때 이 나라 치고 저 나라치고, 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직 한 나라만 치는 거예요. 뭘 로? 질투심으로. 그 질투심이라 하는 것은 뭐냐? 예수님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만 사랑의 나라로 부각시키는 방식이 예수님의 나라를 하나로 만들고 그 맞은편에, 이쪽에 저주받아야 될 나라, 심판받아야 될 나라도 한 나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하나님에 의해서 통합되도록 조치를 한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랑받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 사랑받는 나라가 이 스바냐 본문에 의하면 바로 멸망당할 유다나라에요.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께서는 최후에 예수님의 나라만 남고 나머지는 다 저주받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미리 구약 때에 이방민족과 유다민족, 혹은 이스라엘 민족을 같이 나란히 대조하면서 역사를 전개해 갔던 겁니다, 나란히.

그런데 이 이방민족은 그냥 무너져요. 그걸로 끝입니다. 단일화 된 그 짐승체, 느부갓네살 그 나라는 그냥 무너져요. 무너지는데 그 무너진 나라에 잠복되어 있는 비밀스러운 나라가 하나 그 안에, 바벨론 나라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게 뭐냐? 바로 인자라고 불리는 다니엘, 그 인자에 속해 있는 인자의 나라가 다니엘을 통해서 또는 다니엘 세 친구를 통해서 “이 바벨론은 필히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입을 그들에게 준 거예요. 누구에게? 다니엘에게,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특히 다니엘에게.

그러면 다니엘이 이 눈에 보이는 나라, 아무리 인류의 나라가 228개가 되더라도 그것은 그 발가락에 지나지 않으니까 다니엘이 보기에는 숫자가 많아도 그냥 덩치가 하나에요. 골리앗 같은 하나의 덩치에요. 그 덩치가 망한다고 하는 것은, 그 다니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영은 모든 세상이 끝장나고 난 뒤에 종말 때 알 수 있는 그 지식을 가지고 자기 시대를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선지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이 끝장나고 난 뒤에 다시 보는 거예요. ‘이 세상 망한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사랑하기 위해서.’ 해답은 이거예요. 이방나라 가운데서 착한 사람 많고, 인품 좋은 사람 많고, 성실한 사람 많고, 훌륭한 사람 많아요. 소용없어요. 이스라엘 가운데서 나쁜 사람 많고, 악질적인 사람 많고, 사기꾼, 특히 전세사기꾼 같은 사람도 많아요. 소용없어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일방적인 사랑을 입었느냐, 아니면 그 사랑이 없느냐? 종말에는 그걸로 결정 나 버립니다. 그 결정을 내기 위해서 인류의 역사에 국가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자, 이제 국가라는 게 뭐냐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국가라는 것은 단일체제를 국가라고 이야기합니다. 국가라는 것은 단일체제고 그 정점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권력이 작용하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통령이 나이 많아서 아버지가 아니고 왕이 나이 많아서 아버지가 아니라, 인간이 어릴 때 나보다 먼저 선점해서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가정의 그 자가 누구냐? 아버지에요.

그런데 국가가 아버지의 이름, 모든 인간들의 잠복되어 있는 그 아버지, 나를 초월적으로 명령하고 지시하고 잔소리하고 나의 모든 인생을 책임질 대표적인 아버지의 여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군대라면 최고 통수권자로 그리고 국가는 모든 행정의 총수로서 인간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그 최정점에 권력의 장소가 있습니다.

그게 창세기 4장에 나오는데요. 라멕이 나옵니다. 라멕이 무슨 줄기를 따르는가를 여러분이 보세요. 23절, 24절에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자, 24절에서 핵심은 뭐냐? 가인라인을 라멕이 그대로 뽑아온다는 거예요. 계속해서 그걸 이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라멕은 동서기 아닙니다. 라멕이 목표하는 것은 가인이 차지했던 그 권력의 자리가 지금 그대로 나에게 이어졌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국가입니다. 국가의 탄생이에요. 권력인데 그 권력을 어디에 사용하느냐? 나의 창상, 내가 다쳤기 때문에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다고 나와요.

이것은 뭐냐 하면, 재판하는 자리에요. 권력이 작용하는 그 장소가 최종, 최심급 재판이 이뤄지는 곳입니다. 옛날에는 최종재판장이 대법원장이 아니었어요. 왕이었습니다. 왕이 재판했어요. 왕이 자기 기분 따라 재판하는 거지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열국을 단일화 시키고 마지막 때 그걸 다 거할 곳이 없도록 심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예언은 어디를 겨냥하느냐?

모든 나라들이 재판하는 그 위치를 예언이 지정해 주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는 자리에요.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는 자리에 신약에서 드디어 인류의 종말을 맞이하는 최종적 사건이 하나 터집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는 그 자리에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예수님을 그 자리에 위치해서 보내버리지요.

예수님이 그 자리에 가는 거예요. 인간이 단일화 되어서 재판함으로써 ‘우리 인간의 국가는 계속해서 정당성을 보장하고 모든 인간의 여망대로 우리는 이 나라 안에서 사는 것이 합당하다.’ 그걸 주장하는 재판정, 거기에 예수님을 넣어버려요. 예수님을 거기에 끼워 넣어버리면 이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것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심판하는 자리로 만들어버렸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하나님을 심판하는 자리로 만들어버려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심판해서 사형을 언도했던 하나님이 그 인간들, 최종적인 모든 권한, 심판하는 권한을 부여받아서 그것을 인수인계 받아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대리로 해서 예수님을 심판했던 그 사람들, 국가권력이죠, 국가권력을 하나님께서 정당하게 보느냐 라는 문제, 최종심판의 기준이 뭐냐가 등장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사람이 예수님을 심판해서 사형을 시켰잖아요. 사형을 시켰는데 피고가 되는 예수님은 자꾸 뭔가 우긴 거예요. 뭐라고 우겼느냐 하면, ‘내가 죽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흘 만에 살려낸다.’ 이렇게 우기지만 어디까지나 우기는 거니까 허세고 허풍이니까 그것은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중요한 것은 ‘이 재판, 인간들의 재판이 정당하냐? 율법으로 정당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정당하냐?’ 이 게 중요한 거예요. 예수님을 재판할 때.

만약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이 안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누구 손을 들어준 것이냐 하면, 바로 예수님을 재판했던 인간 손을 들어준 거예요. “너희들이 바로 천국 백성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인간재판에다 집어넣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인간들에 대해서 갈 때까지 끝장을 내 보겠다, 끝장 보겠다는 거예요.

‘인간을 멸망시킬 것인가, 인간을 저주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살릴 것인가?’를 끝장을 보는 재판을 하나님께서 이용하신 거예요. 인간은 그 재판에서, 예수님 재판에서 인간이 행한 대로 심판했습니다. 인간이 행한 대로 심판했어요. 인간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리고 하나님의 질투의 심판에 걸려들었습니다.

왜 걸려들었는가? 그게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 보면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책이 두 권이지요.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했어요.

다시 말씀드리면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아요. 그런데 인간의 행위는 이미 어디서 그 본질이 다 드러나느냐 하면, 예수님을 심판할 때 그 본질이 다 드러났어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기 행한 대로 심판했기 때문에. 자기 의사대로 심판했거든요. 자기 의사, 나는 이런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을 심판하면서 이제는 노골적으로 더 남길 것도 없어요. 탈탈 긁어서 다 보여준 것이 예수님에 대한 심판 그 장소였습니다. 행한 대로 하나님을 심판했고 그 심판의 결과가 하나님을 죽인 거예요.

그런데 그러면 다른 책은 뭐냐? 다른 책은 인간이 행함으로 들어올 수 없는 책이에요. 인간의 행함으로는. 그 다른 책을 두고 요한계시록 17장 8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여기 “생명책에”라고 생명책이 나와요. “생명책에 녹명”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특징이 뭐냐? 자기 행함과 관계없이 생명책에 이름이 있기 때문에 생명책의 생명을 드러내는 그 생명의 취지를 위해서 일방적인 사랑을 받는 사람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 천국 백성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심판은 두 가지 인데요. 인간이 행한 것을 묻지 않고 하는 심판, 그 사람이 행한 것을 일체 묻지 않는 심판, 그게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에게 해당되고, 인간이 행한 것으로 심판하는 것은 행위 책에 기록된 사람들, 이 사람들은 다 불 못, 지옥에 들어갑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은근히 또 욕심나지 않습니까? “나 생명책에 들어갈래! 나 생명책에 들어갈래!” 그러고 싶지요. 생명책에 들어가고 싶지요. 생명책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심판받는 내용이 들어 있어요. 왜냐하면 그 생명책의 주인공 되는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약에서 이방인과 이스라엘 가운데서 둘 다 망하는데 이스라엘 안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 주의 이름이 있어요. 주의 이름이 있어서 주의 이름이 이스라엘 망할 때 거기에 주의 이름 되시는 분이 참여를 해요. 유다나라 망할 때 누구도 같이 망하느냐 하면, 그 안에 예수님도 주의 이름도 같이 망해버려요.

그래서 하나님은 심판에 대해서 충분하게 심판을 정당하게 행했지요. 오늘 본문에 스바냐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7절에 보면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거니와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내가 형벌은 주겠지만 끊어지지 아니한다, 해놓고는 “하였거니와”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내가 너를 아예 끊어버리지는 아니하겠다는 그 한 가지 일과 그리고 더럽게 했기에 끊어버려야 될 그 두 가지, 그 두 가지를 주님께서는 어디다 집어넣느냐 하면, 이스라엘과 함께 하고 있는 예수님, 주의 이름에다 그걸 집어넣어서 주의 이름이 멸망하는 가운데서 아버지로부터 질투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부활이 되어버려요.

부활이 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그 부활된 예수님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분이라는 그것을 증거 해야 될 자들이 예수님에 의해서 소집당합니다. 부름을 받아요.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은 예수님이 내가 유일하게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았다, 라는 점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생명책에 창세전에 기록된 자를 주께서 자기 쪽으로 당겨서 소집을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4-16절에 보면, 여러분이 다 아시는 이야기지만 특히 14절에 보면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아들 안’에서 가 돼요. ‘아들 안’에서, ‘생명책 안’에서. ‘아들 안’에서 구원을 받는 거예요. 아버지는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그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렇게 소집을 한다면 오늘 본문 스바냐 3장 7절에 나온 대로 두 가지요, 두 가지라 하면 다 잊어버렸지요. 첫 번째는 뭐냐? 너 이스라엘을 아주 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 한 가지, 두 번째 할 때 첫 번째 것 잊어버리지 마세요. 두 번째는 뭐냐? 그런데 너는 모든 것을 나에게 더럽게 했기에 내가 너를 필히 끊어내야 돼요. 끊어내지 않는다. 끊어낸다.

이 두 가지가 우리의 행함을 묻지 않아요. 같이 그들과 동행하고 있는 주의 이름에게 그 행함을 물었던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유다나라든 이스라엘이든 이방나라든 예수님 빼놓고 다 쳐내요. 그 사건이 무슨 심판이냐? 그 사건이 바로 예수님이 재판받는 사건이고 그 재판받는 사건이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최종적으로 마지막 때 권력이 단일화 되어 있는 집중된 그 재판자리,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 최종적으로 심판을 내리는 그 자리, 인간이 하나님을 심판하게 유도한 그 자리에서 모든 게 결판나게 만들어 버렸어요. 구원받는 다른 방식은 이제 없어요.

자, 그러면 이제 중요한 것 남았어요. 이제 진짜 중요한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으로 잡아당겨서 일체 그 사람의 행위를 묻지 않고 내 사랑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생명책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을 소집할 때 그 소집하는 현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 현상을 알게 되면 여러분이 생명책 안에 있어 구원되는 사람인지 안 되는 사람인지가 구분돼요.

주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그대로 이동시키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블레셋, 아람, 암몬, 왜 통과시키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이스라엘을 가지고 온 나라를 헤집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신 거예요.

똑같은 방식으로 오늘날 십자가를 가지고 헤집게 되면, 성령께서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모든 인간 맘속을 헤집게 되면 인간들에서 그 때부터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내가 나를 구원하는 방식, 아이디어가 노출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성령이 역사하는 것은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구약의 주변 나라를 헤집고 다니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께서 헤집고 다니면 ‘나는 이렇게 해서 나를 구원할 그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냈습니다.’ 하는 것을 다 노출시키게 만들어요.

예를 들어서 나는 예수 믿고 십일조 하는 것으로 구원받기로 굳혔습니다, 나는 예수 믿고 선교까지는 아니어도 선교헌금 내는 것으로 구원받는 것으로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예수 믿고 믿는 것으로 나는 모자란다 생각하고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서 주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나는 구원받고 우리 가정이 복 받는다고 나는 장담합니다, 라는 식으로 각자 본인들이 구원받기로, 은밀하게 구원받기로 하는 아이디어 있거든요 그 아이디어를 다 노출시키는 거예요.

저주받습니다! 전부 다 노출시키고 다 배제시켜요. 그러면 구원받는 사람은 어떠냐? 구원받는 사람은……, 주님께서 끊어내기로 했잖아요, 유다고 이방이고 다, 이방은 물론이고 유다나라조차도 끊어내요. 그렇게 끊어내듯이 지금도 소위 내 것을 매일같이 지우고 끊어내는 그 심판행위에 기꺼이 동참하는 사람, 생명책에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행한 것, 십일조 낸 것, 뭐 십일조는 한 적도 없지만 하여튼 십일조, 선교한 것, 성경공부 참석한 것, 예배 참석한 것, 성경공부 한 것, 기도한 것, 찬양 한 것, 맘 착하게 먹기로 결심한 것, 나쁜 일 했다고 회개한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 그게 주님의 예수님 사랑과 견줄 수 없는 내가 나를 구원하려는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주께서 따박따박 지워주시는, 오늘 제목을 ‘따박따박’이라고 해버릴까, 따박따박 지워주시는 그 작업이 매일같이 나의 모든 행위를 지워주시는 그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얻을 수 없는 그 영생을 주셨기에 그 다음부터는 내가 은근히 노리고 얻고자 하는 것을 버려주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생명책에 들어오게 해주신 주님의 공로만 자랑하는 오늘날의 이스라엘 백성 마지막 때 살아남은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때부터 다시 필름을 돌려보면 왜 모든 인간은 예수님 빼놓고 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가 드러나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오직 아버지의 사랑을 사랑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모든 인간을 내치셨던 것처럼 주여, 오늘도 우리 자신이 내세우는 것을 다 쳐내주시는 그런 사랑이 주님의 영생의 능력인 것을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