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스바냐 3:9-13 / 방향성 본문
방향성
이근호
2023년 4월 26일
본문: 스바냐 3:9-13
(3:9) 그 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하여 그들로 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리니
(3:10)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하수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드릴지라
(3:11)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너의 중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 너로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니라
(3:12)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3: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으로 모든 인류를 둘로 나누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 달성에 두 주님이 관여하기로 하늘에서 결정났기 때문입니다. 언약이 이 지상에 나타나면, 이 세상은 복받는 쪽과 저주받는 쪽으로 나뉘어집니다. 그 시작이 노아 언약입니다. 노아의 자식들 중에서 복받는 계열과 저주받는 계열로 나뉘어집니다.
이는 저주가 없는 곳에는 복도 없고, 복도 없는 곳에는 저주도 없다는 말이 됩니다. 복과 저주는 짝을 맞추어 함께 등장합니다. 그것은 언약 달성에 있어 일체 인간들의 기여가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간 세계를 경유하면서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언약이라는 천상의 요소를 인간 세계에 굳이 나타내야 할까요?
그것은 인간 전체가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되지 못하는 저주의 요소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9:24-25에서, 가나안 민족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기로 확정됩니다. 저주받기로 확정되었으면 짝을 맞추어서 복받기로 확정된 민족이 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복받기로 확정된 민족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나타났지 실제로 역사 속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야곱 때에 이런 일이 있어납니다.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창 28:11-
12)
즉 천사라는 천상의 존재들이 야곱에게 집중해서 찾아듭니다. 창세기 32:1-2에서는 “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상의 군대들이 지상을 방문해서 야곱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 천사는 기능은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이들 천사들이 야곱을 만나기 이전부터 야곱은 자신이 복받은 자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가나안 민족을 가나안이라는 땅에서 실질적으로 지배할 민족인 이스라엘은 아직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예 인간 세상쪽에서는 자체적으로 ‘복받은 민족’을 형성할 수가 없습니다.
밤에 천사가 나타났고 야곱은 자신의 본능을 감추지 않고 주저없이 그 천사에게 대들고 상대해서 씨름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복받은 자’라고 알고 있었지만 진정한 복이신 천상의 복 앞에서 그는 싸움의 대상이 된 입장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축복하십니다.
이 축복은 천상의 요소에 의해서 새로 생긴 이름입니다. 그렇게 해서 야곱의 12지파는 ‘이스라엘’ 나라가 되고 이 나라에 의해서 가나안 민족이 살던 땅은 지배하게 됩니다. 이처럼 구약에서 복과 저주는 땅의 점유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그 약속의 땅의 점유로 영구한 복과 저주가 확정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자신을 몰랐습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결정된 언약 완성은 모든 피조물을 빼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서 완결되는 내용이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율법을 주므로서 인간은 그 율법 준수에 있어 터무니없이 지켜낼 수 없음을 더욱 분명히 하십니다.
더구나 율법에는 저주라는 벌칙이 따라붙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에 준해서 이스라엘이나 이방민족이나 모두 하나님의 언약 달성에 불가능한 존재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공간적으로 가나안 땅을 접수했다고 해서 그게 복이 아니라 도리어 저주받는 빌미가 된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공간적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복과 저주가 다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립니다마는, 복과 저주는 함께 짝을 형성해서 그 개념이 드러납니다. 구약 때의 장소 차원에서 복과 저주를 구분하는 것은 끝내야 했습니다. 마태복음 16:24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도무지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신단 말입니까? 어디로 가시는지 일단 제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3:36에서 이런 취지의 질문을 베드로가 하게 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요한복음 14장과 연결지어서 답변하자면 이러합니다. “베드로야, 네가 갈 수 없는 곳으로 가자!”
주님께서 가시는 곳은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곳입니다. 제자들이나 인간들은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복을 원하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인간은 애초부터 구원받을 수 없는 자이었습니다.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만 복이 있습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곳에는 복이 없고 오로지 저주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스스로 인간과 분리되시려고 한 겁니다. 그만큼 복음에 무지한 겁니다. 이 복음에 무지한 자를 예수님께서 개와 돼지라고 부르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구약에서 개와 돼지와 저주받은 대상은 ‘이방민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도 모르고 여호와 하나님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마저 구약을 통해서 교만하다는 이유는 멸망하시고 제거하고 말았습니다. 즉 온전하게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고 이방민족과 다를 바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모두가 저주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신약에 와서 그 이방민족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 65:1)
이들 이방민족들은 비로소, 왜 율법이 자신들을 개라고 부르는지를 압니다. 이제 그 구원받게 된 이방민족 안에 ‘개와 돼지’에 대한 인식이 살아 있게 하십니다. 마치 야곱이 하나님께서 복받은 후에, 하나님의 천사와 치열하게 싸웠다는 증거로 절뚝거리는 신체 장애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취지와 같습니다.
그래놓고 죽음 너머 있는 새로운 미래의 자아성, 곧 복받은 자아를 함께 성도 안에 내면화시켜 같이 발생시킵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육에서 영으로 이끄시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성령이 작용할 때마다, “나는 복음을 모르는 개와 돼지였음”을 계속 되새겨주십니다. 이 말씀 전개 작용이 완료된 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구원 불가능성을 들추어내면 낼수록 더욱 십자가 은혜에 감사하게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오용익
12강-스바냐 3장 9-13절(방향성)2304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바냐 3장 9-13절까지입니다.
스바냐 3:9-13
하나님 말씀은 스바냐 3장 9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그 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하여 그들로 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리니.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하수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드릴지라.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너의 중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 너로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니라.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인류를 두 종류로 나누었다는 것과, 나눈 취지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 종류의 사람들은 여기에 열방이라고 돼있는 겁니다. 이 열방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자, 모든 것, 열방입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흩어진 딸, 내 백성, 곧 내가 흩은 자의 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흩어졌던 그들, 이스라엘 민족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둘로 나누어서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원래 하나님을 모르게 돼 있는데 유일하게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낸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 자신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만듦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하나님을 아는 민족과 하나님을 모르는 민족, 두 민족으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나눠지게 됐는데, 오늘 본문 내용에 의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여기 9절에 보면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한 마음으로 섬긴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 전에는 여호와 이름을 모르는, 그래서 부르지 않고, 여호와 말고 어떤 신을 섬겼을 것이지요. 여기 9절에 보면 ‘열방의 입술을 깨끗이 한다,’ 했으니까 우상을 섬길 때는 입술이 더러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더러운 입술을 깨끗이 해서 여호와 이름을 부르고, 그다음에 이방민족은 여호와를 몰랐는데 이제 여호와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이방민족은 그렇게 다루고 또 한 가지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다루는가?
11절에 보니까 그때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이방 중에 흩어버렸는데 그 이유가 교만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 날 네가 내게 범죄 한 모든 행위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너의 중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 버린다. 이 교만한 이스라엘을 제거한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도 여호와 이름을 부르죠. 교만하지 않게 하니까.
그 둘 합쳐서 이방인이든 이스라엘 상관없이 전체가 여호와 이름이라는 그 하나의 직결되게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를, 왜 처음부터 여호와 이름을 아는 그 민족만 구원하지 분명히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다 해놓고는, 이방 민족 같은 건 아예 만들지를 말든지, 만약에 만들었으면 이방 민족을 아예 없애버리든지 이렇게 해야 될 텐데 이스라엘만 하나님 안다 해 놓고, 이방민족은 모른다고 해 놓고, 나중에 와서 이방 민족 가운데서도 여호와 이름을 알게 한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그 반대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는 교만한 자는 제하여 버리고 교만하지 않는 자, 그를 이스라엘로 만들어서 양쪽 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겠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번거롭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일을 번거롭게 하시는 이유는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약속으로, 언약으로 일을 하시는데 그 언약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협의된, 이미 내용이 확정된, 정해놓은, 결정 난 내용이, 아버지와 아들 둘 사이에 맺어진 것이 언약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이 완성된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 아버지 계시고 아들 계셔서 둘 사이에 ‘주께서 내 주에게’ 또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이렇게 해서 두 파트로 나뉘어서 그 안에 두 파트의 뜻이 연결되는, 관계되는 그것이 하나의 관계 안에 두 주님께서 다 거기에 합의한 내용이 될 때 그게 바로 천국이고 영생이고 구원이거든요.
그렇다면 그 하늘의 뜻이 이 지상에 그냥 내려오려면 우리 인간 파트도 두 파트로 나뉘어져야 돼요. 지상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에 하늘에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사이에 의논된 내용 자체가 언약이거든요. 그 언약을 위해서 지상에서도 두 파트로 나뉘어져야 되는 겁니다.
나눠지는데, 여기서부터 첫 번째 중요한 것이 등장하는데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이루는데 불가능이 없어요. 성취가 됩니다. 완수가 돼요.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일이 지상에 나와서 인간을 경유하게 되면 인간에게는 이게 뭐냐, 가능한 것이 아니고 불가능한 것이 돼요.
하나님한테는 가능하지만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언약궤 이루는데 있어 피조물 되는 악마나 또는 피조물 되는 인간은 이 하나님 일에 일체 거든 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천국에서 모든 피조물들은, 천사들은 하나님께만 온전히, 오롯이 영원토록 영광 돌리게 돼 있습니다.
피조물 되는 마귀나 천사나 피조물 되는 인간이 하나님의 일에 거들어버리면 그 영광이 피조물에게로 돌아가는 게 되기 때문에 피조물의 공로로 돌아가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이게 하나님 뜻이에요.
따라서 이 지상에서 하나님 일을 벌일 때는 왜 인간들은 하나님의 일을 거들 수 없는가, 협조할 수 없는가를 확인 차, 확정 차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이방 민족과 이스라엘 둘을 구분시켜 놨습니다. 구분할 때 이방 민족을 뭐라고 하냐면 저주받은 민족이라고 이렇게 확정지어 버렸어요. 그리고 이스라엘은 반대로 복 받은 민족이다, 라고 이렇게 정의해버렸습니다.
축복과 저주, 언약에서 나타날 때 등장하는 결과, 축복과 저주 중에서 저주를 할당받은 민족, 이거 이방 민족입니다. 복을 할당받은 민족, 이거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가 만들어지고부터는 이스라엘 내부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냐 하면, 이스라엘 내부가 복 받은 이스라엘과 저주받은 이스라엘로 또 구분됩니다.
그래서 저주받은 이스라엘이 제거되지 아니하면 이스라엘은 온전한 이스라엘이 될 수 없습니다. 교만하다든지 이런 것은 제거 대상이죠. 그게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십계명이고, 율법입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내가 저주하겠다. 나는 자비의 하나님이다.’ 이렇게 그런 내용들로 꽉 채워진 게 이 율법이에요.
율법을 보시면서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일은 아예 없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이 말은 철저하게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거들 수 없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저주의 대상자로 보는 겁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뭐부터 생각해야 하는가? 우선 이스라엘은 복 받았고 이방 민족은 저주받았으니까 ‘이 저주받은 이방 민족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이걸 아셔야 돼요.
저주받은 이방 민족의 시작은 노아 홍수 이후에 노아의 아들들 가운데서 벌써 축복과 저주가 주어집니다. 창세기 9장 25절에 보면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가나안 민족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26절에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렇게 축복과 저주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 저주에 의하면 가나안이라는 민족이 등장하고, 가나안 민족은 누구누구의 종이 되는 저주를 받아야 돼요. 그러면 가나안 민족이 저주받아 마땅함을 알려주는, 여기에 비교가 되는 그 짝을 이루는 축복의 민족이 등장해야 하는데 그 민족은 셈의 후손으로 오는 민족입니다. 그게 아브라함 민족이고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이게 지금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이 생각해야 할 것은, 복과 저주는 복이 없으면 저주 없고요, 저주가 없는 쪽에는 복이 나타나지 않아요. 반드시 복과 저주는 짝을 이루어서 나타나야 합니다. 가나안은 저주받는다는 말은 ‘누구야? 이 가나안을 종으로 부린 쪽이 누구야?’ 그러면 가나안 민족이 살고 있던, 그 지역을 정복한 민족이 복 받은 민족이 돼요. 그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복 받은 민족이라고 증명이 되는 그 형식에, 그러한 방식에 촉발된 복과 저주는 어느 때냐면 구약 때에요. 구약 때는 복과 저주를 뭐로 구분하느냐? 영토, 장소, 땅으로 구분합니다.
그 내용이 창세기 32장 1절, 2절에 보면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지금 야곱입니다. 이 야곱에게는 지금 열 한 명의 아들이 있어요. 이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 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이렇게 돼 있어요.
야곱이 전에 잠을 자는데 꿈에 사다리가 등장하고 사다리 위 아래로 천사가 왕래했어요. 그 왔던, 왕래했던 천사, 그 천사들이 집단을 이루었고요, 집단을 이루는데 천사가 해야 할 역할이 있어요. 군대입니다. 전쟁하는 거예요. 전쟁하는데 전쟁했던 그 장소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이건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군대라는 이름은 인간의 이름이 아니고 천사들 집단의 이름이에요. 그리고 그 천사들은 해야 될 기능이 곧 그 이름이 돼요. 마하나임이니까 이 천사들은 이 세상에 대해서 뭔가 적이 있었고 그 적을 향하여 싸움을 해야 될 그 집단이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인 겁니다.
그 군대가 누구를 만나느냐? 야곱을 만나요. 그러면 지금 이 창세기 32장에서 가나안이라는, 이미 저주 받기로 확정된 그 가나안 집단, 가나안 민족을 저주케 하는 그 축복된 민족은 어디 있느냐? 없어요.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지금 창세기 32장 1절에는 이스라엘이 없어요. 야곱이 있지 이스라엘은 없어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려면 누가 와야 되냐 하면, 창세기 32장에서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와야 해요, 하나님의 천사. 이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에 있는 한 천사,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계속해서 누구를 만나는가? 집단적으로도 야곱을 만나고, 밤중에 개인적으로도 야곱을 만나고.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지상에서 하나님의 저주 받는 민족은 이미 확정돼 있는데 저주받는 민족을 영토로, 공간적으로 지배를 함으로서 언약을 이루는, 지배를 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없습니다. 인간 쪽에는 없어요. 없다면 여기서 없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서 만들어 내요.
그런데 여기 무슨 요소가 첨가되었냐 하면, 하늘의 천상의 요소가 첨가돼요. 사다리 타고 천사가 내려와서 야곱을 만나고 그리고 천사가 와서 밤에 얍복 강에서 야곱을 만날 때 그 때 야곱의 이름이 뭐로 바뀌었냐 하면,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역시 전쟁하는 민족으로 바뀌어요. 싸우는 민족, 이스라엘 이름이 싸운다는 뜻이에요, 싸우는 민족으로 바뀌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복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몸에 애초부터 내장돼 있지 않다는 뜻이에요. 인간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거 무척 중요합니다. 왜 중요하냐 하면, 인간이 아무리 구원받고자 하여도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저주받는 쪽이기 때문에 어떤 노력을 해도 구원이 안 됩니다.
‘복 받는 이스라엘 민족이 있잖아’라고 우리가 생각하는데 그것은 천상의 요소가 주입돼서 발생된, 하늘의 요소가 주입돼서 지상에 발생된 거예요, 우리가 아니고.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이방민족에서 이스라엘 쪽으로 되는 것은 이게 불가능해요. 하늘의 요소기 때문에 인간 쪽에서 어떤 가능함을 총동원해도 이 인간 쪽에서 복된 민족이 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설교 이걸로 끝내야 돼요. 집에 가야 돼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야곱은 구원받았잖아.”라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야곱은 구원받았잖아. 야곱은 이스라엘 됐잖아.”라고 이야기해요. 야곱은 구원받으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대들었지요. 싸웠지요. 싸움을 걸었지요. 어느 쪽에서? 인간 쪽에서.
야곱의 육적인 본성이 어떤 본성을 가지고 있었냐 하면, 신에 대해서, 하나님 쪽에 대해서, 천상에 대해서 공격하고 대들고 반항하고 공포를 느끼고 달려드는 그런 본성이 있다는 사실은 밤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왔기 때문에 비로소 밝혀진 사실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 줄 몰랐어요. 착각했지요. 꿈에 천사가 오니까 좋~다고 십일조 드리고 ‘하나님의 복 받은 것을 감사합니다. 복 주셨으니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혼자, 자기 설계, 자기 구상 다 했어요.
야곱은 아버지한테 축복받고 사다리타고 천사 내려올 때 내가 구원 받는 데 무능하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인간 쪽에서 구원받는 어떤 능력이 없는 무능한 존재, 불가능한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야곱 본인도 몰랐고, 야곱만 몰랐겠어요? 다른 사람 다 모르죠.
이스라엘 민족이 야곱을 통해서, 열 두 지파를 통해서 태어났을 때 그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서, 영토적이죠, 장소적입니다, 구약이니까, 땅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을 이스라엘 민족이 정복함으로서 이스라엘은 복 받은 민족이라고, 저주 받은 민족이 저주받는 상황을 통해서 짝을 이루어서 복 받은 상황이 나왔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교만하고 우상을 섬겼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멸망시켜 버렸어요. 그러니까 복 받았다고 좋~다고 까불다가 멸망되는 것과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복 받았다고 좋~다고 하다가 밤중에 천사가 나타났는데 천사인 줄 모르고 뒤에서 들이박고 선방 날리고 때리고 싸우고 그거 한 야곱이나, 인간 쪽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뭐냐면 구원에 대한 불가능성만 보여줄 뿐이에요.
지금 오늘 우리들도, 우리들이 보여주는 것도 그것만 보여줘야 돼요. ‘구원되는데 가능하지 않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내가 구원받을 능력은 일체 없습니다.’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걸 보여주는 입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제거한 이스라엘을 마지막에 준비해주신 겁니다.
이스라엘을 제거한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 등장은 신약 성경에 와서 등장해요. 구약 때는 뭐냐? 구약 때는 저주받은 민족과 복 받은 민족이 땅 구역을 통해서 구분 됐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 가운데서 가나안 민족은 저주받았어요.
가나안 민족은 저주 받았는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영토적으로 가나안 민족이 과연 저주받은 것, 저주 내리신 분이 여호와 맞다는 것은 여호와와 함께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등장해서 가나안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하나님의 천상적인, 초월적인, 신적인 능력으로 그걸 지배할 때 비로소 저주와 복의 민족이 처음으로 이 지상에 등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바로 이스라엘이 교만했거든요. 이스라엘이 교만해서 이스라엘 제거되지요. 이스라엘 제거되면, 복이 제거되면……, 머리 좋은 사람들은 감 잡을 거예요. 저주 없으면 복이 안 나타나고 복이 안 나타나면 저주도 안 나타나요. 복 받은 이스라엘이 제거되게 되면, 복 받은 이스라엘이 제거되게 되면 복도 없고 저주도 없고 언약도 없이 돼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저주 받은 이방 민족에서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현상을 유발시킵니다. 그러면 그것이 뭐냐? 복이 되지요. 그 복 받은 민족 앞에서 비로소 ‘왜 복 받았다고 자부했던 이스라엘은 제거 대상인가’가 등장하는 거예요. 이게 구약 적 차원에서는 영토를 누가 점령하느냐, 접수하느냐에 대해 복과 저주가 구분된다면, 신약에 오게 되면 복과 저주가 인간 속에 내면화 됩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내면화 돼요.
그 증거가 마태복음 16장과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데 그걸 한 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라.’ 이렇게 돼 있다 이 말이죠.
주님 어디로 갑니까? 지금 어디로 가는데요? “나를 따라오려거든” 지금 주님이 어디로 갑니까? 아무도 몰라요.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오라 하는데 문제는 공간적인 안목을, 인식을 가지고 이 땅위에서 살아가는 그러한 방식으로 사는 제자들에 있어 예수님이 어디로 가는지를 미리 알려주면 좋겠는데 안 알려줍니다.
그게 요한복음 13장 36절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구약에서는 공간이에요. 땅의 장소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이 지점에서 저 지점으로 어떤 좌표를 정해놓고 이동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제자들이 만약에 따라가려면……, 요한복음 6장에도 그렇잖아요. 예수님 홀로 앞장서시고 뒤에 제자들이 뒤따라가는 형식이다 이 말이죠. 산 넘고, 물 건너서, 바다 건너서, 서, 서, 서, 그렇게 건너가는데.
지금 베드로가 정말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대신 하는 거예요. “자기 십자가 지고 날 따라오라.”라고 한다면 우리 세상 사람들이 “예!” 하면 안 돼요. 뭐라고 해야 되느냐 하면,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일단 가는 길을 압시다.” ‘어디로 가는지를 일단 알아야 뭘 자기 십자가를 지든, 뭘 지든 하니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느 쪽으로 가십니까?” 묻는 거예요.
그 묻는다는 것이 뭐냐? 장소적이에요. 공간적이에요, 공간적. 땅 위, 지면을 두고 이야기 한다 이 말이죠. 베드로도 마찬가지에요. 요한복음에서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정말 궁금했던 거 아니에요? 주님이 가시는 곳은 뭐냐 하면, 우리를 죽여 없애는 곳으로 가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곧 우리를 죽여 없애는 곳으로 간다고요. 예수님이 복이에요. 그 복은 그냥 나타나면 안 돼요. ‘이거 복이다.’ 하면 안 돼요. ‘뭐가 저주였는데, 이게 복이다.’ 이렇게 돼야 돼요.
구약에서는 ‘약속의 땅은 복이고 쫓겨난 것은 저주다.’ 이렇게 됩니다. ‘약속의 땅에서 살고 있는 민족은 복 된 민족이고 그 외 모든 민족은 여호와와 함께 있지 않기 때문에 저주받은 민족이다’ 그렇게 장소적으로 구분이 돼요. 이 장소적인 구분을 예수님의 제자들도 똑같은 인식을 갖고 있었어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자기 십자가를 져라.” “십자가를 지는데요. 내가 십자가 지고 다 할 텐데 당최, 도대체 가는데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네가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가자.” 네가 따라 올 수 없는 곳으로 가자.
합쳐버리면 “너는 따라올 수 없느니라. 네가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 있게 하리라.” 이 긴 문장을 압축,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면, “네가 갈 수 없는 곳으로 가자.” 이렇게 돼요. 갈 수 없다면서요, 갈수 없다며? 갈 수 없다는 것이 뭐냐? 구원 불가능성이에요. 우리 능력의 불가능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준비된 언약 때문에 우리 안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복을 집어넣는 게 아니고 복과 저주를 다 집어넣어요. 왜냐 하면 저주 없으면 복이 없고 복이 없으면 저주가 없고, 복은 반드시 저주와 만나게 되어 있어요, 복과 저주는. 우리 안에서 우리 육의 요소와 그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주님이 준비하신 미래의 나, 쉽게 말해서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우리 안에 만들어 놔버려요.
그리고 미래의 나를 이스라엘로 보고 과거의 나를 야곱으로 본다면 그렇게 집어넣는 이유는, 그 가운데서 불가능성을 분명히 함으로서 불가능성을 드러내게 하시는 그 불가능성과, 그 불가능을 드러내는 그 자체가 ‘이미 완료했다, 이미 구원 받았다’는 점을 그런 식으로 표출해내는 겁니다.
네가 이미 구원받았다는 말은 “너 불가능했었어.”라고 이야기 해 주시는 거예요, “구원이 불가능했었어.” 야곱 같은 경우에는 그 불가능했었음을 자기의 신체에다가 지녔습니다. 그게 뭐냐? 절뚝거리는 거예요. 주께서 야곱을 이스라엘 만들고 구원해놓고 “너 나하고 한바탕 붙느라고 많이 다쳤지?” “예. 다쳤습니다.” “내가 너를 건강케 하노라. 뾰로롱~!” 건강케 하는 게 아니고 네가 하나님의 복 받은 줄로 착각하고 복 주신 하나님과 한바탕 싸웠다는 그 증거를 죽을 때까지 내내 자기 몸에 지니고 있는 거예요.
그 지니고 있음으로서 ‘오직 주님만 가능했습니다.’라는 것을 계속 증거 하는 이것이 ‘나는 저주 받아야 마땅한데 주께서 그런 나를 복 주셨다’는 것, 저주와 복의 내용을 성도 안에 다 같이, 같이 집어넣는 거예요, 다 같이.
그래서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하나면요, 우리는 개부터 시작해야 돼요, 개부터. 멍! 멍! 멍! 개 있잖아요. 마태복음 7장 6절에 보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사람들 생각에는 ‘진짜 이거 복음도 모르고 개 같은 인간이네. 그 진주의 귀한 것도 모르고 이거 돼지 같은 인간이네.’ 이렇게 생각할 거 아닙니까? 바로 이 개와 돼지가 우리들이에요. 출발점을 그렇게 해야 된다고요.
하나님께서 구약 때 이방민족 두고 이스라엘 민족 두었지요.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께 복 받았다고 자부할 때 그들은 자기 마지막에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저주한다는 사실을 본인들은 몰랐어요. 이스라엘을 저주한다는 이유는 신명기 32장에 보면 이미 모세가 예언을 했어요. ‘너희들? 결국엔 여호와 버린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너를 저주하신다.’ 신명기 32장에 보면 그 내용이 이미 예언되어 있어요.
실컷 이스라엘 만들어 놓고 마지막은 멸망한다. 이 신명기 32장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레위기 26장도 마찬가지 입니다. ‘결국은 너희들이 나를 버려서 내가 너희를 절단 내서 망하도록, 너희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민족이 된다.’ 레위기 26장에서 분명히 그렇게 예언했고요, 신명기 32장 같은 경우는 너무 길어요. 이거 뭐, 어느 한 구절 할 것도 없어요.
32장 보면 “결국 너희들은 마귀를 섬기게 될 것이고 너희들이 후회하기를 ‘하, 우리가 종말을 생각했다면……” 32장 29절 같은 경우에, 그러니까 이미 모세가 예언을 그렇게 한 겁니다.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으면”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인간치고 어떤 인간도 구원 받을 수 있는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이스라엘은 이방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기 복 받았다고 좋~다고 까불다가 이방인하고 똑같이 됐어요, 이방인하고 똑같이.
그런데 하나님은 약속이 있거든요. 이스라엘을 내 백성을 만들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어디부터 되느냐 하면, 바로 이방인들부터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스멀스멀 나오게 만들어 버렸어요. 이것은 로마서 11장에 보면 시기 나게 만들어서 참감람나무, 돌감람나무 이야기 하면서 거기 나와요. 온 이스라엘 구원 받으리라, 그 이야기 나옵니다.
그러면 이방민족에게서 그런 식으로 나왔을 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뭐냐? ‘저거 저주 받았는데? 저주 받은 자가 왜 여호와 이름을 부르지?’ 이것은 이사야 65장의 예언대로에요. ‘나를 모르는 백성들이 나에게 달려올 것이다.’ 나를 모르는. 이사야 65장 1절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말고 이방 민족에게 여호와를 알려버려요. 그러면 이방민족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가 여호와와 상관없는데 하나님의 영이 와서 알게 해줘버리니까 사도행전 나오듯이 그 이방민족 특징이 뭐냐? ‘여호와를 아는 것? 여호와의 나라, 천국? 우리는 불가능한데?’ 계속해서 여호와 이름을 아는 순간 그 불가능함이 계속 유지되는 거예요.
그 여호와 이름이 누구냐? 우리 주님입니다. 여호와 이름이 주님이거든요. 예수님이 하신 일만 쳐다보고 살아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일,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애당초 무능하고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방민족은 알아차리죠, 예수님을 알게 한. 그래서 그들은 압니다. 내 속에는 애초부터 구원이라는 것은 들어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구원은 하나님부터 하나님까지 가는 것이지 인간은 거기서 끼어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돼죠. 불가능성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비로소 여기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이 개, 돼지 이야기 있잖아요. 이 이야기가 바로 내가 몰랐던 진짜 내 모습을 개와 돼지 앞에서 발견하는 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아이고 저도 교회 50년 다니고 복음 들을 만큼 들었는데 제가 복음을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이렇게 주장할 거예요. 그러면 복음 간단한 시험 해보면 알아요.
주일 날 돈 십만 원 줄 테니까 교회 가지 마라, 하면 교회 안 가겠습니까? “하~ 씨, 그 돈, 하나님은 돈, 재물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는데 그 돈 까짓것, 주님을 섬겨야죠.” 자, 올립니다. 500만원, 500만원 갑니다. “500만원 보다 주님이 더 소중한데! 십자가 피가 500만원보다 더 귀한데요?” 자, 50억 갑니다, 50억!” “50억?” “500억 갑니다. 자, 500억 손 들어요. 500억 갑니다.” 경매 붙이는 거예요.
‘집 안에 어떤 우환이 있더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자, 딸내미 죽었습니다. 주님 감사할 사람? 아들 죽었습니다. 감사할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복음을 사랑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 돼지에요. 그리고 여호와에 대해서 몰라요. 무식한 인간은 이 땅에 살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했는가? 주님께서는 우리를 돼지로부터 출발하게 만들어요. 만들고, 그 다음에 뭘 하느냐 하면, 주님만이 아는 내용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인간을 우리 속에 심어놔요. 그러면 우리 속에 과거의 나와, 과거의 나는 육이죠, 그리고 미래의 나, 영적 인간입니다.
그래서 개, 돼지 같은 과거의 인간이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말을 하게 하는 것은, 이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해요, 성령께서. 이 개, 돼지 같은 인간들이 하는 게 뭐냐? 어떤 불신자, 이방인이거든요, 이방인들은 여호와 몰라도 당당해요. 왜? 여호와 모르니까. 이거 말 되는 이야기거든요. 여호와를 모르기 때문에,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서 말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당당하게 여기고 자부심을 갖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나와서 많은 사람 만나잖아요. “너 십자가 복음 알아?” “그거 왜 알아야 되는데?” 아주 당당하고, 씩씩하고, 정당하고, 자기에게 충실하고, 자기 합리화에 항상 무장 되어 있어요. 이게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우리의 본모습이에요, 이게.
그러니까 십자가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놓쳐버렸고 잃어버렸던, 내가 종교라는 연출된 위선과 연기력에 스스로 있던 그 환상을 벗겨내면, 정말 십자가 복음이 그 종교 행위 다 벗겨내면 내가 복음 모르고 내가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는 합리성과 정당함에 굉장히 당당해야 하고 의젓해야 하고 자부심을 갖는 진짜 개, 돼지 같은 내 모습을 발견하게 하시는 그게 바로 성령의 역사에요. ‘내가 뭐가 못 났는데? 내가 못난 게 뭐가 있는데?’
그래서 매일같이 성령께서는 우리의 피막을 벗겨내요. 피막을 벗겨내면 성도에게 남는 것은 뭐냐? 성도에게 남는 것은 개, 돼지에서 하나님의 천사 같은 성도가 되는 그 방향성만 남아요. 그게 성도입니다. 방향성, 화살표만 남아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네가 죽어도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가자.”
그 가자, 하는 게 방향성이에요. 내가 할 수 없는 곳으로 이끄시는 주님이 친히 살아있어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그 역사, 그것은 뭐냐? 말씀 자체가 “너는 개고,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십자가 진 복음이다.” 이 두 요소를, 복과 저주를 한꺼번에 집어넣고 방향성을, 개돼지에서 주님만 쳐다보는 방향성만 보여주는 그 현상이 계속 발생될 때 그것을 성도, 그것을 ‘이스라엘 중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이 땅에 실적이 얼마고 얼마나 대단한 존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야될 곳을 주께서 친히 이끄신다는 것, 주님만이 할 수 있는 능력만, 십자가의 복음만 증거케 해주시고, 증거 하면 증거 할수록 우리의 원체, 우리 모습이 개돼지에 불과한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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