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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스바냐 3:1-5 / 예루살렘의 완성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바냐

스바냐 3:1-5 / 예루살렘의 완성

정인순 2023. 4. 13. 10:13

http://media.woorich.net/%EC%84%B1%EA%B2%BD%EA%B0%95%ED%95%B4/%EC%8A%A4%EB%B0%94%EB%83%9023/2023-04-12%2019-31-00.mp4

예루살렘의 완성

 

이근호
2023년 4월 12일                 

 

본문: 스바냐 3:1-5


(3:1)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3:2)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3:3)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3:4) 그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요 그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3:5)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 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으로부터 욕을 얻어먹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그냥 인간들이 사는 동네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세상의 여타의 마을처럼 그냥 열심히 부지런히 살기만 하는 동네가 아닌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평가를 받는다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그런데 이 특이성을 결국에는 온 세상 모든 자들에게 적용되는 특이성으로서 먼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다루십니다. 어떤 식으로 다루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루살렘만’을 통해서 자신을 알리시고 다른 방식으로는 일절 알리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점이 인간들 입장에서 특이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 입장에서는 이 세상에 눈에 띄는 것들이 여러 가지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도 보이고, 자신이 열심히 농사짓는 농토도 보이고 자신이 평생 일구어낸 자신의 가정도 보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하늘에는 하나님도 계심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만 계신게 아니라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예루살렘도 귀하고 하나님의 율법도 귀하지만 세상에 몸담고 있는 자기 인생도 귀한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내세우시는 것처럼 ‘예루살렘만!’이라는 점은 받아들이기 곤란한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만 내세우시고 나머지는 가리시는 방식으로 특화해서 계시하십니다.

이런 기준을 내세우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고 질책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면 현실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과연 이런 사람이 있을까요?

이런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후속 말씀을 거론하십니다. 즉 방백들(고위 공무원)이나 재판장이나 선지자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겁니다. 이들을 소위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훈계하고 가르치고 관리하고 실생활에 하나님의 법을 도입시키는 자들입니다.

문제는 이들로 인해 유대나라는 억울한 자들이 발생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다루면서 자신들이 따로 살 궁리를 챙겼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법이 모든 것을 커버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법과 법 사이에 인간들이 융통성을 부릴 여지가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에게 충성과 봉사를 위한 법이 율법이기에 하나님에게 할 도리는 다하되, 법으로 다 규정하지 않는, 인간들의 자기 욕구를 충족시킬 여지를 발굴해내어서 그것을 통해서 그들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살찌울 수 있는 방안을 탐구하는 겁니다. 즉 자신들이 이 땅에 살게 되는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있어 율법의 지적을 피할 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과연 법을 아는 자들에게 그런 융통성을 허용했다면 결코 발생되지 말아야 될 현상이 유대나라에게 범람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을 예루살렘으로 획일화시키는 방식에 따르면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될 일이 일어나버린 겁니다. 하나님의 확고하신 뜻은, “나의 뜻은 오직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일로 국한한다”입니다.

과연 예루살렘이 율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최종적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누가복음 13:33-35에 나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즉 예루살렘은 놀랍게도 선지자들이 죽게 하는 공간이라는 뜻에서 하나님께서 오직 예루살렘을 통해서만 계시한다는 것이 확인된 겁니다. 즉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현실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게만 온전히 돌리는 자들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요셉의 경우처럼, 사적인 꿈을 꾼 요셉이 점차 그 꿈으로 인하여 애굽의 지도자급과 접촉이 되고 결국에는 애굽 전체를 덮어버리는 꿈으로 완성이 됩니다.

이처럼 소위 유대나라의 방백들이나 재판장이나 제사장 참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의뢰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했다면 결코 예루살렘에서 선지자가 죽는 일을 없을 겁니다. 곧 이 세상은 인간들이 살기 위한 세상이 아니었던 겁니다. 이 세상이 천국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국정 지지율은 몇 %이었겠습니까? 0%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죽기를 바랍니다. 이런 요구에 누가 부응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구약 선지자에게 이런 요구가 덮쳐진 자가 있습니다. 이사야입니다. 이사야 6:4-5에 보면,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선지자는 지금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자신이 죽을 필요도 없고 살 필요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진정 유대나라의 왕은 조금도 차질없이 참된 예루살렘, 곧 천국을 이루어 나가시는데 지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이사야 심정이 된 성도는 이렇게 매일을 살아갑니다. 자기 행위를 수시로 버립니다. 삭제해가며 삽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재판받을 때, 예수님은 자신을 유대왕임을 인정했습니다.(요 18:33-37)

그렇다면 이제 예루살렘은 새로운 예루살렘이 유대인의 왕 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립되는 겁니다. 그대로 천국은 새 예루살렘이 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참된 천국 백성은 더는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믿지 않는 그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온전함이란 우리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게 주어짐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0강-스바냐 3장 1-5절(예루살렘의 완성)2304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바냐 3장 1-5절까지입니다.

스바냐 3:1-5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찐저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그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요 그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예루살렘에 대해서, 유다나라의 성전이 있는 그 도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패역하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패역하다는 평가를 내릴 때는 그만한 합당한 속사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있어야 될 것이 없고 다른 게 예루살렘에 가득 채워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서 예루살렘이 있지 말아야 되고 예루살렘에 나타나지 말아야 될 것들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통해서만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대상화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빼고 나머지를 가려버린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예루살렘도 보이고, 다른 이방나라도 보이고, 하늘도 보이고, 땅도 보이고, 자기 가족들도 보이고, 그 당시 사람이나 요즘 사람이나 우리가 만약에 그 시대에 살았으면 예루살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인간들은, 우리는 갖기 마련입니다. 자기가 일하는 직장도 보이고, 자기가 노동하는, 밭가는 밭도 보이고, 과수도 보이고, 자신이 치는 양들도 보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쪽에서 보면 여러 가지가 많이 보이지만 그중 하나가 예루살렘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만 보이게 하시는 겁니다. 인간들 입장에서는 이래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만 나타내는 거예요.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의 본뜻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선지자들을 보낼 때 그 당시 사람들은 예레미야, 에스겔, 오늘 본문에 스바냐 나오지요, 스바냐 나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스바냐라는 그 인물, 그 인물의 입, 코, 눈, 덩치, 그것만 쳐다보고 있어요.

바로 당시 사람들이 스바냐를 쳐다보고, 에스겔 당시의 사람은 에스겔만 쳐다보고, 예레미야 당시 사람들은 예레미야만 쳐다봤기 때문에 인간들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에만 나타난다는 것, 그것을 인간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지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볼 때는 예루살렘만 나타나는데 인간들은 ‘예루살렘이 있지. 하지만 딴것도 있잖아. 하늘도 있고 별도 있고 달도 있고 다 있잖아. 그리고 하늘에는 하나님 계시잖아.’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뭐가 안 되느냐?

2절입니다.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가 성립이 되어버려요. 늘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 생각해도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한 게 되어버립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전면에 내세워서 예루살렘의 뜻으로 전 세계, 전 지구를 다 덮어버립니다. 그것도 빈틈이 없도록. 그런데 인간은 ‘예루살렘 저기에 있네. 그리고 내가 농사짓는 농토도 저기에 있네.’ 우리는 자기가 구성한 세계 속에 예루살렘을 일부로 집어넣고 그 외 다른 것도 있다는 거예요. 전적으로 예루살렘이 자신의 전부를 덮치고 가린다는 생각을 못하지요. 못하니까 그들은 여호와께 의지하지 않는 방식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걸 그 당시나 오늘날에 적용해 봅시다. 오늘 본문 그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가까이 하지 않는다, 가 어떤 상태냐? 2절에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하는데 하나님 의뢰하지 않고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 상태를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킬 수도 있거든요. 그게 어떤 마음상태를 이야기하느냐?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버리고 현실로 돌아서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그러하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비밀인데 서로가 서로의 약점이기 때문에 쉬쉬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어떻게 하든 하나님 버리고, 하나님 모르고, 그냥 내가 속한 현실만 붙들고 살고 싶어해요. 항상 몸이 그쪽으로, 세상 쪽으로 가 있다는 말이지요.

마음은 하나님 버리고 현실로 돌아서고 싶은데 그동안 그저 하나님 믿는 것이 하나의 습관 같은 것, 관행 같은 것이기 때문에 너무 하나님 버리면 나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주어질까봐 약간 염려되어서 하나님 걸치고 사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는 것.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덮치는 그것이 내가 싫은 거예요, 내가. 내가 그걸 용납 못 하겠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버릴 수는 있어도 현실을 버릴 마음은 없어요.

그런데 그걸 하나님이 모를 리가 없거든요. 예루살렘이 세상을 향하여 전체를 덮치고 있는 입장에서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전폭적으로 덮쳐지는 그 갑갑함, 답답함을 외면해서 내 나름대로 나를 위한 공간 하나, 즉 숨쉴만한 틈, 숨쉴만한 공간 하나는 따로 하나 마련하고 싶은 겁니다.

그걸 알기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율법, 법과 법 사이에서……, 하나님의 율법이니까 지켜야 된다는 것은 알아요. 지켜야 된다는 것은 알지만 법과 법 사이에서 어떻게 틈을 발견하고 싶은 거예요. 법대로 지키는데 내 행동 하나하나 전부 다 법대로 최선을 다해 지키되 법에서 규정하고 있지 않은 것은 내 나름대로의 유도리가 있지 않겠는가, 내가 유도리를 행할 수 있는, 법은 법대로 지키되 법이 모든 행동과 모든 생각에 대해서 일일이 규칙과 조항을 다 제시하지 않았다고 그렇게 믿고 싶은 거예요.

예를 들면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몇도 각도로 드느냐, ‘설마 이것까지 하나님의 율법에 있지는 않겠지요?’ 하면서 쾌재를 부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현상이 있느냐? 내 인생과 내 모든 삶에서 옴팍 전적으로 하나님의 법이 다 덮이는 것은 우리 쪽에서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사람들, 3절에 방백들, 그리고 재판장들, 그리고 4절에 선지자,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좀 설명이 필요한데요. 하나님이 계시고 그 다음에 백성이 있잖아요. 그리고 거기에 지도자가 있잖아요. 그래서 그들은 ‘지도자 + 백성’이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고, 그 이스라엘 전체는 늘 여호와 하나님 밑에 감시받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지도자들은 어떤 책임감, 어떤 역할을 본인들이 생각하고 있는데 그건 뭐냐 하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 중간지점에 본인들이 거기에 끼어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을 지도자급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지도자라면 우선 하나님의 법부터 알아야 되겠지요. 하나님의 법은 제가 언급해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통해서만 전달하고 그 다음에 그 예루살렘 말고 외부의 것으로는 절대로 자기를 전달하지 않는, 예루살렘으로 모든 뜻을 통합시켜서 그 예루살렘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이스라엘을 옴팍 덮는 식으로, 다 자기 백성을 덮는 식으로 일하신다, 이것을 하나님 뜻으로 지도자급이 알았으면 백성들에게 그걸 가르치기 이전에 본인들부터 하나님 뜻을 자기에게 옴팍 덮치는 식으로 삶을 살아야 되는 겁니다.

이런 점이 여러분에게 좀 난해하다고 느껴져서 제가 좀 쉽게 해보겠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이 나오는데 요셉이 꿈을 꿨다는 것을 여러분이 다 아시지요. 요셉을 꿈을 꿨는데 그 꿈이 요셉 개인적인 꿈처럼 느껴져요. 처음에 시작할 때는. 그런데 요셉의 꿈이 실현단계에 있어서 어디로 다가서느냐 하면, 애굽나라의 지도자급과 연결되는 쪽으로 다가서기 시작해요.

개인의 꿈이 애굽나라 지도자급의 꿈으로서 이게 전달되고 연결되고 확산되고, 더 나아가서 그 지도자급에게 적용되는 그 꿈, 다 아시지요 포도주로 섬기는 신하와 떡으로 섬기는 신하가 꿈을 꾸잖아요. 요셉도 꿈을 꾸고 신하 둘 고위급도 꿈을 꿨는데 그 요셉의 꿈이 저쪽 꿈을 지배하고 점령하는 식으로 전달돼요.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아요. 이 요셉의 꿈이 애굽의 최고 지도자 왕의 영역까지 연결이 됩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우리가 잘못 생각한 게 있어요. 뭐냐? ‘요셉의 꿈은 개인적인 꿈이다.’ 이게 잘못된 거예요. 요셉의 꿈은 분명히 개인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애굽나라 전체를 덮어버리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이었지요. 전체를 덮는. 물론 거기에 야곱의 식구까지 포함된 겁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을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 지도자급은 제외하고 백성들에게만 지키라고 주어진 그러한 지시냐? 그것은 아니거든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이제 뜻이 보다 분명해 집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 비유라고 칭하는 유명한 비유가 나와요. 주인이 종에게 한 사람은 열 달란트, 한 사람은 다섯 달란트, 한 사람은 한 달란트, 그렇게 줬는데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충성된 종이라는 평을 들었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평을 받았어요.

마태복음 25장에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왜 악하고 게으른 종인가? 그것은 자기 일에 충실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거예요. 그 사람은 한 달란트 받아가지고 그 달란트가 자기 것이니까 자기 인생에 대해서 굉장히 부지런했어요. 자기 챙기는데 있어서, 자기만 챙기는데 있어서. 그러니까 지혜로운 자고 똑똑한 자지요. 자기 챙기는데 있어서는.

굉장히 부지런했어요. 부지런했는데 주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게으르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악하다고 했어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했어요. 24절에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그리고 26절에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덮어버리는 하나님의 일 속에 어떤 나의 역할 같은 것을 생각해야 될 텐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그 법과 규칙이 나한테 얼마나 유용하고 효용 있고 이익을 줄 것이냐’고 생각해서 나름대로 부지런떨고 열심히 살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법은 개인에게 주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어디까지 요구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어떤 개인까지도 빠짐없이 다 덮쳐버린다는 그 내용까지 하나님께서는 통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요셉에게 준 꿈, 요셉 본인도 그렇게 알았어요, 개인적인 나의 일생에 대해 준 꿈인 줄로 알았어요. 그게 아니고 요셉의 꿈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이 애굽 전체를, 모든 일어나는 일을 통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개인적인 방식으로 와서 지도자급으로 통해서 왕에서 도달되는 거예요.

오늘 스바냐에서 스바냐 선지자가 백성들을 지적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뭘 하느냐 하면, 지도자급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방백, 그 다음에 재판장, 선지자, 이런 사람들을 지적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 이미 사달 났다는 거예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다 지배한다는 것을 이 사람들이 거부한 거예요.

그러면 어떤 식으로 거부했는가? 여기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스바냐 3장 3, 4절에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그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요 그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자기는 법을 지키되 자기 하나 생존하기 위해서 잘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을 이용한 겁니다. 내가 풍족하게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을 부정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법을 인정하는데 이 법을 이용해서 내가 이 나라에서 풍족하게 살 어떤 방안이 있을까를 생각한 거예요.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에 의하면, 율법과 율법 사이에 율법적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법에 대해서는 자기가 항상 융통성을 부릴 수 있는 여유가 있는데 그 융통성 자리에 누가 있는가? 바로 방백들이 있고, 제사장이 있고, 선지자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했느냐? 방백, 제사장, 선지자 자기들은 율법을 아는 사람이니까 지도자급인 거예요. 율법도 알고 가르치면서 “하나님이여, 우리는 율법도 가르쳤고 하나님 믿으라고 이야기 했습니다.”라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큰 소리 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야말로 “너희들은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할 증거를 어디서 끄집어내느냐 하면, 그러한 가진 자들, 권력 있는 자들에 의해서 이스라엘 나라의 가난하고 학대받는 자 그리고 억울하게 핍박을 받고 고난 받는 자를 하나님께서 등장시켜 버린 거예요. 피해보는 자를 등장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율법과 율법 사이에 틈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틈을 하나님께서 “틈은 없는 거야!” 하면서 그 틈을 노리고 거기에 율법을 적용시켜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아, 너희들은 패역하다.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예루살렘에 나타난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은 틈이 없어요. 인간이 융통성을 부릴 여지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실은 하나님 없이 현실에서 자기 유도리, 자기 마음껏 융통성을 부려서 챙길 것 자기에게 충실한 거예요. 하나님도 믿고 나에게 충실해서 내가 남보다 더 잘 먹고 편하게 사는 것, 이런 것을 은근히 노리고 있는 입장에서 그렇게 되면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율법에 대해서 비일관성이라고 보는 거예요. 일관성이 없다고 보는 거예요. 일관성이 없는 겁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게 되는 겁니다.

그걸 2절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호와를 의뢰하지 않고 자기 하나님께 가까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어중간하게 하나님 믿고 마음은 세상 현실에서 남보다 더 풍요하게 사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던 자들이 누구다? 바로 제사장이고 방백들이고 선지자에요. 백성들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행정적으로 지도하고 백성들을 관리하면서 ‘남들보다, 백성들보다 더 많은 소득이 있어야 내가 이 일을 하는 어떤 보람같은 게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유도리,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것, 율법 속에서 율법도 지키고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도 정당하다는 그 지점을 그 당시 지도자들은 그걸 찾아내는 거예요. 그걸 연구하고 발굴해 내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어쩌란 말인가? 우리 보고, 우리보고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앞장세워서 어떤 탱크같이 밀어붙이는데 예루살렘에만 나타내고 다른 곳에는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그 증거가 예루살렘의 지도자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가난한 자, 학대받는 자, 억울한 자가 발생된다는 것, 요것, 요것이 바로 예루살렘으로 옴팍 이스라엘을 덮치고 있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루살렘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살기 위해 준 말씀이 아니다, 그런 뜻이에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이 세상이 천국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자기 신들에게 살 궁리를 챙기기 때문에 천국이 되지 못하는 겁니다. 예루살렘에 비춰볼 때 인간은 마땅히 죽어야 되지 살아야 될 도성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윤 석열 대통령의 지지율, 퍼센트가 나오잖아요. 40퍼센트도 되었다가 30퍼센트 되었다가 그렇게 하는데 만약에 예수님이 대통령이라면 지지율이 몇 퍼센트이겠습니까? 0퍼센트가 예수님의 목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것은 ‘내가 사는데 당신의 국정운영이 얼마나 도움 줄까?’를 생각하면서 지지를 표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예수님이 대통령이 되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 옴팍 이 대한민국에 덮쳐 버립니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대한민국 사람들아! 나랑 같이 죽자.’ 이게 주의 뜻입니다. 왜? 이 세상은 천국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결코 천국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심판받는 것이 예루살렘만 내세우는 주의 뜻입니다.

그러면 그게 성경 어디에 나오는가?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나옵니다. 33-35절, 제가 읽어드리면 이렇습니다. 33절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자, 예루살렘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함축해서, 예루살렘 바깥에는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 없어요.

이 예루살렘만, 이 예루살렘 외에는 하나님께서 다 가려버렸습니다, 예루살렘만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님의 뜻이고 나머지에는 뜻이 없어요. 예루살렘을 앞장세워서 나타나는 뜻이 뭐냐?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죽는다. 선지자가 죽는 지점이 예루살렘이다. 선지자가 죽는 지점이 예루살렘이다.

그리고 난 뒤에 34, 35절에 보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나를 보지 못한다.’ 이게 스바냐 3장에서는 ‘너희들이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했다.’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원인중 하나가 뭐냐? 3절, 4절, 바로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면서 다 자기 살 궁리만 연구한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법대로 재판하고 하나님의 법대로 너희들을 통치하는 수고를 했기 때문에 우리만큼은 이 예루살렘에서 떵떵거리면서 너희 백성들보다 더 잘사는 것이, 이것이 합리적인 결과가 아니냐?’ 이걸 지도자급들이 주장한 거예요. 마치 국회의원들은 월급을 더 많이 받아야 된다고 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오늘 본문을 보면서 ‘예루살렘이 왜 그리 나빠?’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오늘날 세상의 모든 나라가 예루살렘이에요. 그것도 하나님의 예루살렘에 일어났던 사건, 십자가 사건, 십자가 사건 앞에서 여지없이 저주받아 마땅한 예루살렘, 타락한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예루살렘, 진짜로 있었던 예루살렘 가지고 전 세계를 예루살렘화 시켜버린 거예요.

그래서 아까 제가 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대상화 시킨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예루살렘을 앞장세워서 하나님께서는 전 세상을 자기가 다루시는 대상으로 삼으시는 거예요. 그것 외에 내가 너희들에게 말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여러분은 또 이렇게 할 거예요. ‘우리가 그러면 이 땅에서 어쩌란 말인가?’ 마찬가지에요. 어쩌란 말인가!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맞아죽든 굶어죽든, 하나님 버리고 현실 쪽으로 돌아서서 열심히 살아서 굶어죽든, 또 돌아서봐야 하나님 앞에 벌 받아 죽든, 이래죽든 저래죽든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그러면 선지자가 요구하는 게 뭐냐 하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이러한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하는 바는, 인간은 자기 행위를 수시로 버려야 돼요, 자기행위를. 이러면 되는 겁니다. 내가 행동한 것에 대해서 결과물을 자꾸 고대하거든요.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이 어떤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유지할 의도를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제가 아까 기도할 때 제목이 뭐였느냐? 매일같이 죄인인 우리에게 너무 과분한 은혜를 주신다는 말을 했지요. 그게 예루살렘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과분하다는 것. 뭐냐 하면, 내가 평상시에 하나님 앞에서도 버티겠다, 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강릉 산불 난 것은 무서워할 줄 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거예요. 왜 그러냐? 이미 마음이 현실 쪽으로 돌아섰어요.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거예요, 우습게.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성도의 태도는 뭐냐?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성도도 돌아섰어요. 하나님께 안 돌아섰습니다.

그러면 성도가 하나님께 돌아서는 방법은 매일같이 내가 하는 행동을 내가 잊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기도를 했고, 내가 착한 일을 했고, 내가 자식을 위해서 이렇게 애썼고, 그것을 그냥 계속해서 제거하고 delete, 제거하고 삭제해버리는 거예요. 삭제해버리면 남는 것이 뭐냐? ‘왜 저 같은 죄인에게 과분한 은혜를 주십니까?’ 이것만 남지요.

자, 그렇다면 성도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구체적인 예는 이사야가 보여줍니다. 이사야 6장, 거기에 한 성도가 나옵니다. 이름은 이사야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어떤 태도로 살아왔는가? 이사야 6장 1-6절까지 제가 후딱 읽어보겠습니다. 1절,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벌써 환경이 다르지요.

2, 3절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지금 선지자가 자기의 마음과 뜻을 현실적으로 돌아볼 여유가 전혀 없지요.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생존하고 어떻게 목숨 부지하고 사느냐, 라는 생각조차가 완전히 날아가 버려요.

왜? 성전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뵈었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하면 ‘왜 하나님은 선지자가 봤던 거룩한 형상을 우리한테는 안 보여주느냐?’ 하는데 신약의 십자가가 이거예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나를 돌볼 내 생존에 대한 그 어떤 권한과 그 어떤 권리도 나한테는 삭제되어야 마땅함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 다음 계속 읽어보면 5절에,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어떻습니까? 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자기 자신을 챙길 수 있는 그런 여지가 없지요. 이게 웃을 일이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지금 애 둘 키우는데 고생 많이 했다.’ 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하고 고백하면서 ‘아, 내가 그때 실수를 안 하는 건데, 내가 그 때 좀 착실히 살았으면 지금보다 더 잘 살 건데, 내가 그렇게만 했어도 남한테 칭찬 받았을 건데, 출세 좀 했을 건데, IMF만 안 터졌어도 지금 얼마나 잘됐을까……’ 이런 게, 이게이게 자기 행동을 못 잊어서 그래요. 자기 행동을 삭제 안 해서 그래요.

주께서는 우리 행동에 대해서 의미두지 않습니다. 삭제대상이니까. 달란트 비유에서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가 칭찬받은 이유가 자기 생각을 안 했어요. 왜? 달란트라는 것이 내 것이 아니고 주인님이 주신 거니까.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본 것은, 이 환경이라는 것은 자기 것이 아니고 그냥 들이닥친 환경이에요.

그 들이닥친 환경이 뭐냐? 예루살렘이고 그 예루살렘이 누가복음 13장에서는 바로 예수님이 죽어버린 그 상황, 그 환경이 지금 계속 지속되고 있습니다. ‘암탉이 자기 새끼를 모음같이 얼마나 모으려고 말씀을 전했던가?’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인간들은 “하나님, 믿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충실하게 믿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놓고는 몸은 어디로 돌아가 있느냐? 현실로 돌아가 있어요. 누구처럼? 제사장처럼, 선지자처럼, 방백처럼, 그 당시 왕처럼.

내가 살고자 하는 것, 내가 살고자 하는 세계는요, 그것은 지옥이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님이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너무 과분한 은혜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영원토록 계속 되새기는 곳이 천국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쪽에서 할 것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것뿐이지요 뭐.

예레미야 23장에서 예레미야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21절에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 다음이 중요해요 22절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하나님의 회의가 있는데 하나님의 회의에서 보내지 않는 사람은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한 예레미야, 하나님의 신을 받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뭐냐? “예루살렘아! 너희들이 나를 칠 것이다.” 그거였어요. 예루살렘은 바로 선지자들의 무덤이에요. 선지자를 죽이는 곳이에요. 이방인들은 예루살렘이 없어요. 그러니 아예 저주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거기 살면서 예루살렘을 잊어버렸어요. 잊어버렸으니까 예루살렘을 잊어버렸다는 말은 예루살렘만 앞장세우는 하나님 앞에 구원될 자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요한복음 18장 33절에 보면,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재판받는 대목인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빌라도가 물었어요.

그럴 때 바로 ‘내 나라, 내 나라의 왕’이라고 했어요. ‘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잃어버렸어요. 잃어버렸고 지도자들은 다 썩었어요. 하지만 진짜 하나님이 택하신 유대인의 왕은 썩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대로 온전하게 살았어요. 그분이 유대인의 왕입니다. 빌라도에 대하여서.

그러면 왕이 있으면 뭐가 만들어지느냐? 예루살렘, 그것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이 만들어집니다. 새 예루살렘이. 천국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이 만들어진다.’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누구냐를 사람들이 몰라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예루살렘을 예수님이 자기 손으로 다시 되찾아서 온전한 예루살렘, 새 하늘의 예루살렘 천국을 만드시는데 문제는 뭐냐? 그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누구냐?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예루살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분입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우리의 이 대한민국에서 죽임을 당한 분이 유대인의 왕이에요. 예루살렘의 왕이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죽었지만 오늘날 예수님은 대한민국에서 죽은 메시아가 되는 거지요. 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도 돌아오지도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아요.

우리는 법을 지킨다고 성경 보면서 틈새시장이죠, 법과 법 사이에서 내가 살 수 있는 나름대로의, 법은 법대로 지키고 말씀대로 살면서, 주께 순종하면서 그렇게 하면서 나름대로 또 달리 나의 세계를 구성하면서 살 수 있는 그러한 통박을 굴리는 사람, 그런 여지, 하나님께 충실한 것처럼 하면서 사실은 가장 충실한 것은 내가 사는데 충실한데 급급한 사람, 악하고 게으른 종, 바로 이 악하고 게으른 종에 의해서 무시당한 그분이 바로 유대인의 왕입니다.

그래서 인간치고 하나님의 뜻대로 알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의지한 사람,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없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왜 감사인가? 그래야 내가 하루하루 노동하는 것, 애 키우고 무슨 일 하고 하는 이 모든 것을 delete, 내가 삭제할 수 있어요. 기꺼이, 기꺼이 삭제할 수 있어요. 뭘 보면서? 십자가 바라보면서 ‘주여,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의미 없음입니다.’ 그런데 왜 의미 없는 일을 죽을 때까지 하느냐? 예수님의 십자가만 의미 있기 위해서 의미 없는 게 뭐냐고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 앞에서 의미 없음을 드러나게 했습니다.

이것이 뭐냐? 요셉의 꿈이에요. 애굽의 국가보다 더 위에서 옴팍 다 뒤집어씌운 것처럼 지금은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빈틈없이 덮고 있습니다. 십자가외에 하나님의 뜻을 알려준 경우는 없습니다. 십자가 말고는 나머지는 가려버렸어요. 오직 우리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겁니다.

예루살렘의 완성, 죽었다가 사신분이 예루살렘을 완성시켜서 그분이 왕이시기에 그 왕 앞에서 우리는 왕을 진짜 제대로 이해하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하지요, 성령 없으면 안 됩니다, 성령 받고 난 뒤에 십자가 지신분이 진짜 왕인 것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새 예루살렘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율법 밖에 벗어날 수 없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얍삽한 수를 쓰면서 하나님을 어설프게 믿는 척 하고 있는지를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 번 깨닫는 기쁨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