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스바냐 1:14-18 / 예수님의 옷 본문
예수님의 옷
2023년 3월 8일
본문 말씀: 스바냐 1:14-18
(1: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1:15)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1: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1: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누군가에 일어나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든 인류에게 다 주어지게 될 일입니다. 그 일은 바로 여호와의 날에 전면적인 파멸되는 경우입니다.오늘 본문에 보면 인간들이 저주받고 멸절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게 범죄했기 때문이랍니다.
이 여호와의 날이 임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연에 깔려있는 창조물을 감고 나타나십니다. 시편 104:2-4에 보면,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고 되어 있습니다.
이로서 왜 인간 세계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 마땅한지가 드러납니다. 세상의 모든 창조물 속에서는 본디 창조성을 지니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 창조성이란 곧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주와 구원자가 되셔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축복과 저주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데 저주해도 저주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구원해도 구원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합니다. 인간들이 여호와의 날에 심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야 될 이유는 자신들 속에 창조성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조성이란 창조의 전체 취지를 다 알고 있는 것을 두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의 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까지 다 알 때에, 전체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이런 전체성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창조받은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소경 같이 행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모르기에 우왕좌왕하면서 헤매고 있습니다.
즉 소경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깜깜하게 어두운 것처럼, 인간들은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의 날을 고대했습니다. 옛날 다윗처럼 대단하게 위세를 떨었던 그 시절이 그리운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다윗왕처럼 다스린다면 이스라엘은 참으로 축복된 나라가 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B.C 586년에 남쪽 유대나라마저 깡그리 망했을 때도 유대인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찾아오는 여호와의 날을 고대했습니다. B.C. 164년 12월 25일날 마카비 혁명을 일으켜서 그동안 잔인하게 자신들을 학대하고 우상 섬기기를 강요했는 헬라나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성전을 새롭게 봉헌한다해서 이 날을 ‘하누카’ 절기로 지킵니다. 성전을 수리했다는 뜻에서 ’수전절‘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B.C, 64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접수했습니다. 유대나라는 100년 정도 독립국가를 유지했지만 다시금 멸망하고 만겁니다. 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그들은, ’인간에게 구원이 없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자들이라서 하나님의 저주가 합당한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경험하고자 하면서도 인간들은 축복만 경험하고 저주는 경험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하나님의 전체성을 모르게 되는 겁니다. 이사야 66:15-16에 보면, “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살륙 당할 자가 많으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하심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입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로부터 버주받지 아니하는 메시야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저주의 경험과 축복의 경험을 다 알아야 하나님 세계에 들어가 있는 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두 가지 경험을 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주님’입니다.
곧 전체성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이처럼 구원은 예수님에게 해당되는데 이 땅은 인간들은 재물 자랑하고 재물 모으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생명은 너무 많은 값이 나가서 그 어떤 재물로서 그 생명을 구매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시 49:6-8)
그렇다면 성도라는 나타나고 그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된 걸까요? 열왕기하 2:11에 보면, “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엘리야에게 특별수레를 보내신 겁니다. 이런 방식은 예수님께서 심판주되시기 위해 자연의 모든 창조를 수레로 변모시키는 식으로 나타나심을 미리 보여주는 바가 됩니다.
신약에 중요한 것은 ‘주님의 옷’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세례받은 자는 예수님의 옷 속으로 들어간 사람으로 봅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6-27)
아무 것도 아닌 자가 유력한 자의 가족이 되기 위해서 ‘자기에게 옷을 덮어달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룻입니다.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룻 3:9) 이미 예수님에 있어 모든 창조성은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 옷과 그 수레는 인간의 그 어떤 솜씨보다 월등합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8-29) 성령이 온 자만이 예수 안에 모든 창조가 완성이 되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보다 더 귀한 분은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예수님의 옷자락이 덮혀 있는 그곳에서 예수님만 쳐다보는 예수님의 신부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5강-스바냐 1장 14-18절(예수님의 옷)2303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바냐 1장 14-18절까지입니다.
스바냐 1:14-18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찌라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이 본문에 ‘놀랍게 멸절 한다.’ 했으니까 그 놀라운 이유, 무엇 때문에 이 선지자조차 놀랍다고 하느냐? 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구원이 없다는 것,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자가 없다는 점이 놀랍다는 겁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할 때 그 의식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 잘 보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착한 사람들, 의인들은 하늘나라 갈 것이라는 그런 기대감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할 때 어떤 이익을 내다보면서 행동을 하지 아무 이익이 없는데 행동할 리는 만무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예상 밖을 완전히 벗어나서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한 사실이 언제부터인가 여호와께서 직접 나타나는 그때가 되면 ‘인간의 모든 예상한 것이 이게 잘못이었구나. 인간은 잘못된 예상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사실이 다 드러나는 그때가 바로 여호와의 날입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자신의 모습을 등장시킬 때 거기서 주님께서 구원하실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17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간들은 나에게 범죄했다. 따라서 범죄한 자를 내가 구원할 리가 있느냐.” 18절에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이 분노의 날이 여호와께서 임하는 날이에요. “분노하려고 나타난 그분 앞에서 도리어 그들을 건지겠느냐.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없다.”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먼저 경험케 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일은 누구에게도 다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에게 일어나는 일은 이스라엘 외 다른 사람에게도 다 똑같이 벌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고 그들은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은 곧 이스라엘뿐만이 아니고 모든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 왜? 그들은 나 여호와께 범죄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지금 예언하시고 계시하고 있는 겁니다.
18절 끝에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거민들, 주민들, 인간들 다 멸절시킨다. 이것은 바로 노아홍수 때 땅 위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갔던 모든 사람들을 다 죽이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노아 한 가족을 하나님께서 따로 떼 내서 그들을 방주에 실어서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마땅히 다 저주하고 심판하고 멸절한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 식구들을 살려준 거예요. ‘너는 저 사람보다 착하다’가 아니라 누구 하나라도 목격자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대표로 누군가가 있어야 돼요.
그 누군가가 모든 자에게 일어날 일을 증언하고 그리고 그것을 후대에 전하고,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고 이런 분’이라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는 거예요. 노아 홍수에서 노아 집에는 물이 넘치되 발목까지만 차고 다음에 사라졌다, 그런 것은 없어요. 노아가 살던 집이든 노아 옆집이든 상관없이 이 지구상의 모든 것이 물에 덮였다는 것은, 노아라도 예외가 없다는 겁니다.
똑같은 원리로서 유월절 날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장자는 그들 죽는 것 구경하라고 밤중에 깨워놓고 그러지를 않았어요. 애굽나라 장자가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인의 장자도 똑같이 다 죽어 마땅합니다. 단지 히브리인들은 ‘우리 장자는 죽어 마땅합니다.’라는 것을 어린양의 피를 칠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증언했지요.
“우리 애는 하나님이 살려둘 수가 없습니다.” 우리 가문을 이을 맏이를 살려둘 수 없다는 것은 곧 그 아들이 어느 출신이냐 하면, 바로 우리 부모 출신이잖아요. 부모가 썩었고 그 썩은 데서 나오는 맏이, 하나님께서는 그 맏이를 죽임으로써 소급해서 부모까지 썩었다는 사실을 유월절에 말해준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 구원될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화를 돋우었고 그래서 18절에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라는 겁니다. 특히 18절에 “그들의 은과 금” 은과 금, 재물이지요, 재산, 재물, 재물과 재산이 그들을 건지지 못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보다 자세하게 되어 있는 것은 시편 49편 6-8에 나옵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기가 끌어모은 어떤 막대한 재산과 돈보다 더 귀한 것이라서 아무리 재산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이 재물을 받으시고 그 대신 내 목숨 살려주옵소서.’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 대가를 치를만한 돈 가진 자는 아무도 없어요. 그만큼 생명이 더 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자기 생명을 구하지도 못할 그 재물을 끌어 모으는데 그렇게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거기에 매진하는 이유가 뭐냐? 시편 49편 10절에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그 다음 12절에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짐승이 죽는 것과 인간이 죽는 것이 차이가 없다. 존귀하다 우기지만 실은 짐승과 같은 레벨이다. 내가 그런 짐승을 내가 건질 상 싶으냐?’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진멸하십니다. 그것은 여러 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 범죄한 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범죄 한 자에게는 오직 저주와 분노와 심판이 주어지는 것이 합당합니다.
오늘 본문 스바냐 1장 15절에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라고 되어 있어요. 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될 것은, 그 여호와의 날이 깜깜하다고 했어요.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하나님이 직접 이 세상에 나타나실 때 세상은 온통 깜깜하게 되어버리고 어느 정도로 깜깜하냐?
17절에 “소경 같이 행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소경같이 세상을 어둡게 본다는 이것은 이 세상을 인간들이 살면서 우왕좌왕 한다는 겁니다. 뚜렷한 세상관, 확고한 인생관, 일관된 전체성, 전체를 한꺼번에 다 볼 수 있는 일관되게 통하는 그런 세상관과 인생관이 없을 때 인간은 우왕좌왕 하는 겁니다.
마치 세상 속에서 소경이 헤매는 것처럼 모든 인간이 그렇게 헤매면서 살아왔고 지금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뭘 해야 되는지,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우왕좌왕 할 뿐이지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어둡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둡기 때문에 방향감각도 없어요. 자, 이러한 예언이 그냥 예언으로, 엄포로만 끝나는 게 아니고 실제로 이스라엘에게 역사 속에 그대로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잠시 생각해 보면, 그들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여호와의 날을 기다렸어요.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이냐 하면,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이곳에 와서 옛날 다윗 때처럼 모든 이방민족을 다스리고 이스라엘은 왕 같은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모든 화려함과 풍부함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세대, 그것을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을 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이 왕으로 오시는 그 메시아, 메시아가 이 세상에 뜨는 그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 여호와가 왕으로 오시는 그날, 오셔서 왕으로 통치하는 그날, 그날을 그들은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상 역사를 죽 살아가면서 그날을 분명히 기다리기는 기다리는데 주변의 정치적 상황을 보게 되면 힘들지 않을 수가 없어요.
북이스라엘 망하고 남쪽 유다도 망합니다. 남쪽유다가 BC586년에 망했어요, 완전히 망했어요. 북쪽은 BC 722년에, 그 뒤 140년쯤 후에 남쪽 유다도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들이 이제 기대할 것은 뭐냐? 오직 하나님의 약속뿐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약속대로 메시아 온다고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 얼마나 많이 약속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메시아로 온다. 이 땅에 왕으로 온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기 때문에 옛날 다윗 같은 그런 왕국을 내가 오면 재건한다. 걱정하지 마라.’ 그런 식으로 그들은 선지자를 해석했습니다.
오늘날 구약을 보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해석을 하는 거지요. 자, 그들이 뭐가 잘못되었느냐 하면, 이 스바냐 오늘 본문을 그들은 이해를 못하는 거지요. 여호와께서 오시는 날에 너희들부터 죽인다는 사실을 그들은 도저히 수용을 할 수가 없어요. 그들은 여호와의 날을 학수고대 기다렸거든요.
이스라엘 망하고 난 뒤에 바벨론, 그다음에 바사나라, 그다음에 헬라, 무려 400년간 악독한 이방민족, 우상을 섬기는 민족에게 온갖 수모와 역경을 다 받아야 되었어요. 400년간 이스라엘은 더 이상 독립국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헬라시대 때 그야말로 독종 왕들이 나타나서 그 거룩한 제단에서 돼지고기 구워 먹고 잔치 벌였어요. 일부러 모독한다고. 이슬람교 사람들은 돼지고기 안 먹는 것 아니까 경북대학교 근처 주민들이 일부러 돼지고기 굽는 냄새피우는 것처럼. 여기에 이슬람기도처 짓지 말라고.
그런 식으로 모독을 했고 메시아 기다리는 유대인을 학대를 하니까 BC 164년에, 유대력으로 12월 25일에 드디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헬라 군대를 쫓아내고 독립국가로 만들었어요. 너무 기쁘니까 메노라(Menorah)라고 하는 것이 있거든요. 성전에 황금으로 만든 등대가 있는데 그 기름등대를 일주일동안 켜서 성전의 제사를 연속 시키고 회복시킨 날입니다. 그날을 봉헌한다고 해서 하누카(Hanukkah)라고 하고 성전을 보수했다 해서 수전절(修殿節)이라고 합니다.
이게 그들이 생각해놓은 여호와의 날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줬다는 겁니다. 그게 과연 여호와의 날일까요? BC 164년에 그렇게 했는데 100년간 버티다가 BC 64년, 100년 후에 폼페이우스의 로마가 예루살렘을 점령해서 유대왕국의 여호와의 날은 백년 만에 끝났습니다. 그게 여호와의 날이 아니었어요.
인간들이, 이스라엘이 기대하는 ‘하나님과 더불어 그 옛날 다윗의 영광스러웠던 그 때 그날처럼 힘 있게 힘차게 살아보자.’ 그게 여호와의 날이 아닙니다. 힘차게 작살나고 힘차게 저주받는 날, 어느 인간도, 아무도 구원받을 자 없다는 것이 최종적으로 확정된 그날이 여호와의 날이에요. 아무도 될 수가 없습니다. 다 범죄 했기 때문에.
그러면 그들이 왜 메시아를 찾았느냐? 소경이기 때문에 그래요. 깜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체를 볼 줄 몰라요. 미래까지 전체를 다 볼 수 있는 안목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의 종교적인 야심이나 야망을 하나님이 편들어주기를 바랬던 겁니다. 마카비전쟁을 해서 잠시 승리했지만, 그래서 하나님이 도와줬다고 했지만 일단 독립하고 난 뒤에 자기들끼리 싸우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인간이 하는 짓이 온전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만 생각했지 저주를 주심으로써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지요. 축복만 줘도 하나님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축복도 주시지만 저주도 동반해서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주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복의 경험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십자가에 죽지 않은 메시아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지 않은 메시아는 가짜 예수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받았던 저주에 합류하지 않은 성도도 성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결정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저주, 이 두 하나님의 속성에 전부 같이 참여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왜 저주받아야 되느냐?’ 그걸 알아야 ‘왜 우리가 복을 받아서 구원되느냐?’ 그 때 비로소 그 내막을 알게 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치고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 범죄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다 진멸해야 되고 저주 받아야 돼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 축복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그것은 먼저 하나님 자신에게 복을 내리고 하나님 자신에게 구원을 내리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시편 110편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주가 두 번 나와요. 실제로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하지 않고 “주께서 내 주에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4절에 보면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시편 110편에서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그러니까 누가 구원 받는가? 주님만 구원받아요. 그러면 주님이 구원받는다는 뜻은 무슨 뜻이냐?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주님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 자연세계에 있는 모든 창조된 것을 주님이 자신의 옷으로 둘둘 감고요, 자기가 이 땅에 내려오는 수레, 마차 있지요, 그 수레로 자연을 다 끌어 모아서 자기의 수레로 삼으면서 이 땅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하면 모습으로 오는 이유는 처음 창조된 것을 그런 식으로 완성을 하신다는 겁니다. 사무엘하 22장 8-11절에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 발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구름, 바람, 전부 다 주님이 이 땅에 나타나실 때 둘둘 감을 그러한 수레가 되지요. 시편 104편 2-4절에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여기 보면 옷 나오고 수레 나와요. 옷은 입으시는 것이고, 수레는 타고 이 땅에 오시는 겁니다. 이사야 66장 15, 16절에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 즉……” 모든 자에게 심판을 베풀어요. “심판을 베푸신 즉 여호와께 살륙당할 자가 많으리니.” 오늘 우리가 봤던 이 스바냐 1장 18절에도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모든 거민을 멸절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누가복음 21장 34,35절에도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덫에 걸린 짐승 잡듯이 인간에게 심판과 저주 파멸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의미는 하나님께서 창조했던 그 창조성, 창세기 1장에 창조했던 그 창조성을, 주님께서는 퍼져 있는 창조성을 그걸 둘둘 감아서 자신의 옷을 해 입은 거예요. 그리고 수레 타는 재료로 삼은 거예요.
창조했던 그 취지와 의미가 주의 옷이 되고 주의 수레가 될 때 비로소 완성이 되는 겁니다. 창조했을 때 하나님이 창조한 그 뜻이 예수님 중심으로 해서 거기에 한 덩어리고 다 모아지는 형태로 주께서 이 땅에 강림하시는 거예요. 주께 온전히 다 모아졌기 때문에 창조했던 그 창조성은 예수님 빼놓고 다른 곳에는 일절 없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말씀 보겠습니다. 열왕기하 2장 11절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하늘에서 불 수레가 내려왔어요. 불 수레, 하늘, 이것은 뭡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을 때 정말 하나님께서 지키고 싶었던 그 창조성을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하늘로 당겨 올라가는 데 거기에 수레로 동원시킨 거예요.
자연이 모아져 수레가 되고 자연이 모아져 예수님의 옷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자연은 본래 자기완성을 보는 겁니다. 마태복음 6장 26절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29절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솔로몬의 입은 모든 영광, 인위적이지요. 자연적이 아니고 인위적입니다. 인간의 행함이 거기 들어가 있지요. 그러나 솔로몬이 해 입은 그 옷도 온전히 창조성으로만 피어 있는 이 꽃 하나만도 못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친히 만든 이 자연의 창조성이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다 훼손된 것에 대해서 인간세계에 책임을 물으시는 겁니다. “이 창조성을 너희들은 망쳤다. 따라서 이 창조성, 처음 창조했던 그 취지를 망쳤기 때문에 너희들, 창조성이 없는 것을 진멸과 저주로 심판해 버리겠다.” 그리고 그 제대로 된 창조성을 온몸에 둘둘 감고 있는 내 아들을 통해서, 내 주를 통해서 충분히 창조성이 누락된 너희들을 심판할 수 있는 권리, 권한이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사이가 좋지 않은 언니하고 여동생이 있다 칩시다. 어느 날 여동생이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언니가 방에 옷 서너 벌을 죽 깔아놓은 거예요. “이 옷 입을까, 이 옷 입을까? 오늘 선보러 가는데 어느 옷 입으면 어울릴까?” 뭐가 딱 맞을까 물어보는 거예요. 그러면 동생이 “언니, 좋은 옷 많네. 이거 언니한테 잘 어울린다.”
동생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골라준 그 옷 말고 나머지는 자기가 입고 친구 만나러 가려고 하는 건데 “그래?” 하더니 언니가 내놓았던 그 옷을 혼자 다 걸쳐버린 거예요. 창조성이 있는 그 창조를 예수님이 홀딱 자기 몸에 다 걸쳐버려요. 그러면 예수님 빼놓고 어떤 인간도 온전히 하나님의 창조성을 입을만한 자격자가 없다는 것이 티가 나버린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책은 뭐냐? 심판이지요, 진멸이지요. 네가 이 창조성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누릴 권한이 없다는 거예요. 진멸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통해서 은혜를 주시지만, 복을 주시지만 그 복 말고, 복만 알아서는 하나님을 몰라요, 저주도 알아야 돼요. 복과 저주 둘 다를 경험해야 이것이 온전한 창조성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된 그 복도 누리는 것도 창조지만 만약에 하나님의 창조성이 누락되었을 때 저주가 주어지는 경험도 또한 하나님의 창조성에 숨어 있는 거예요. 그 창조성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냐? 구원자이시면서도 심판주가 되는 거예요.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분명히 오늘 예언에 보면 모든 사람들을 다 저주해서 죽여 버립니다. 구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분노의 날에, 그 저주의 날에 모든 인간이 다 분노의 대상이 되어서 하나님께 범죄 했다는 이유 때문에 다 멸절되는 게 이게 마땅한 하나님의 합당한 조치인데 어떻게, 그 가운데서 구원이 일어나는 그 계획은 어떻게 마련되는가, 하는 겁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한 이야기가 있어요.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의 옷에 빨려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주님의 완성으로 칠칠감은 그 옷, 창조성의 옷, 그 옷에 말려 들어가고 빨려들어갈 때 그게 바로 구원이라는 겁니다.
갈라디아서2장 26, 27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제가 여기서 옷을 강조하는 것은 아까 본 시편 104편도 그렇고, 이사야 66장 15절에도 나왔듯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창조된 모든 것을 두 가지죠, 하나는 옷, 다른 하나는 수레로 만들어서 갖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본래 창조했던 창조성의 원리가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창조성을 완성하고 오시는 겁니다. 따라서 이 완성된 창조성이 없는 자에게는 사정없이 저주를 퍼붓는 것이 마땅하지요.
시편 104편 2-4절 아까 했음에도 다시 읽어보면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나님의 자기 옷이에요, 빛이라는 이 창조물이 예수님의 옷이 되어버린 거예요. 3절에 보면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우리는 그냥 가뭄들 때 비오는 용도로만 생각하는 그 구름이 창조, 피조물 구름이 예수님 나타나실 때 자기의 수레처럼 작용하는 거예요. 이것은 그 전체성을 모르면 알 수가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그저 자연을 보면서 우리 인간들에게 어떤 게 유리하냐, 그것만 생각해서는 주어지는 것은 저주밖에 없습니다. 왜? 전체성을 모르니까 그것은 하나님에게 범죄 한 게 되고 하나님께 범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라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면 구원이란 뭐냐? 구원은 전체라는, 그 전체성의 전체를 다 알게 되는 상황인데 그 알게 되는 상황은 예수님이 둘둘 감은 그 옷 속에 들어가면 돼요. ‘아, 세상 만물이 다 주를 위하여 만들어졌구나.’라는 그 사실에 접하게 되면 그게 바로 구원이 되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5, 16절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창조된 그 속에 진짜 창조의 목적이 있었는데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시고, 심판 주 되시고 구원자 되시기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그 본래 취지에 대해서 인간은 악마하고 결탁이 되어서 그걸 훼손한 거지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저주를 퍼부을 수밖에 없습니다.
룻기에 보면 상당히 낭만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룻기 2장 8절에 “그들의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이삭을 줍는 룻에게 밭의 주인인 보아스가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13절에 “룻이 가로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시킵니다. 보아스라는 유력한, 요새말로 재벌집이지요, 재벌을 꾀는 멘트를 알려준 그 대목입니다. 룻기 3장 8, 9절에 “밤중에 그 사람이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보아스가 화들짝 놀랐지요. 이게 뭐 쥐새끼인가, 갑자기 뭐가 꿈틀대는 게…….
“밤중에 그 사람이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웠는지라 가로되 네가 누구뇨” 누구야 너. “누구냐, 너!” 이런 것 있잖아요. “누구야, 너?” 하니까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그러니까 1인용 침대에 저도 끼게 해 달라, 이불은 하나인데 저도 좀 들어가면 안 됩니까,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 보아스가 상당히 냉정하고 신사적인 사람이에요. “오늘은 그만 됐고 정식 절차를 밟자. 정식 절차를 밟아서 내 옷 속에 너를 집어넣을게.”
갈라디아서 3장에서 예수님이 걸친 그 옷에, 세례 받은 자는 그 옷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왜? 그 옷 안에, 뭐냐 하면 세상 모든 피조물, 뭐 코스모스나 백합 모든 피조물이 오직 그분의 창조성으로 완성이 되는 바로 그 창조로 둘둘 감은 그 몸에 끼어들어간 사람, 그야말로 예수님의 옷자락으로 저를 덮어 달라, 덮어줄 때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룻기 2장의 말씀도 했지만 “저는 당신을 감당치 못할 여인인 것 제가 압니다. 저를 내쳐도 저는 할 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랑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일을 했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알게 하셨어요. 예수님이 어떤 것을 준비해 놨는지, 너를 어떤 식으로 자기 옷 속으로 집어넣는지.
모든 창조의 완성은 예수님뿐이에요.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 하지만 그 창조된 분을 우리의 남편으로 여겨서 슬그머니 수작 떨면서 주님의 1인용 침대 발 치로 기어들어가서 그 주님의 완성된 그 은혜, 축복을 공유할 수 있도록 성령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겁니다.
이렇게 되려면 철저하게 우리는 두 가지 경험을 다 해야 되지요. ‘아, 원래 예수님만이 완성할 수 있는 이 창조성을 우리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훼손했고 그것을 창조하신 주님께서 그것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여호와의 날에, 깜깜한 날에 완전히 그걸 멸절하시는구나.’ 이렇게 그 코스를 잡으면 되는 겁니다.
이 코스가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거기 보면 이 세상을 어두운 세상, 아까 했지요, 소경들이 헤매는 것처럼 어떤 목적도 모르고, 그냥 왜 사는지도 모르고. 그건 전체성을 모르니까. 19-21절에 보면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하였느니라.”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매일같이 훼손하고 매일같이 모독하고 있다는 것, 이게 마귀가 결탁되어서 그래요. 나의 이익과 나의 가치만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것, 세상을 소경처럼 코앞에 있는 것 밖에 몰라요. 더듬거리면서, 더듬거리면서 코앞에 있는 것 밖에 모른다고요.
부모는 애보다 더 많이 알잖아요. “유치원에 가자.” 애는 엄마하고 떨어지기 싫어서 “안가!” 이게 전체성에서 차이가 나서 그래요. 성령을 받게 되면 주님이 하신 것을 옴팍 다 알게 됩니다. ‘아, 세상 어떤 것도 하나 누락 없이 전부 다 주님을 위해서 겨냥되어 있구나.’
진짜 엘리야처럼 하늘나라에서 모범택시 보낼 수가 있어요. 주님의 요소를 하늘에서 보내서 그거 타고 엘리야는 하늘로 가서 예수님과 합류했잖아요.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같이 이야기하는 대목 나오잖아요. 주께서 보내줘야 돼요. 뭘? “다 이루었다. 이 창조에 대해서 다 이루었다. 다시는 너희에게 죄를 묻지 않으마.” 그 일을 해주신 분이 누구냐? 그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 이십니다.
이 세상 예수님보다 우리에게 더 귀한 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그걸 알게 되었다는 것, 여러분의 능력 아니고, 저와 여러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이 여러분에게 찾아왔기 때문에 소경이 아니고 눈 활짝 뜨고 예수님 중심으로 볼 수 있는 계시의 안목을 여러분이 얻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멸망해도 사람들은 우왕좌왕, 깜깜한 어두움 속에서 마치 소경처럼 헤매는 이 세상, 터져 나오는 모든 정치적 사건이나 경제적 문제가 소경들의 활동인 것을 저희들은 깨닫게 해주시고,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여호와의 날에 진노밖에 없음을 또한 우리를 통해서 증언케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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